세키가하라 전투 II – 이에야스의 책략

메이지유신 성공 후 일본의 신정부는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인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육군의 편제와 전술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래서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을 군사고문으로 초빙했는데 일본인들은 메켈에게 결과를 알리지 않은 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양군의 병력 포진도를 보여주었다. 메켈은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실제 전투의 결과는 한 나절도 버티지 못한 서군의 참패였다. 서군의 주요 다이묘였던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3만 3천여명 군대는 전투에서 괴멸, 와해되었다.

전투 시작 당시 서군 측의 미쓰나리는 사사오 산(笹尾山)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덴만 산(天満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마쓰오 산(松尾山)에 각각 포진했다. 게다가 총대장을 맡은 모리 가문을 대표해서 참전한 모리 히데모토는 전선 후방의 난구 산(南宮山)에 주둔해서 동군의 퇴로를 끊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동군의 총 대장 이에야스는 산 아래 좁은 분지에 학익진(鶴翼の陣) 형태로 포위된 진세를 상관치 않고 전투를 시작한다. 외교 책략으로 이미 모리와 고바야카와의 배신을 확정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리 데루모토는 석고 120만석으로 서부 일본의 최대 다이묘이자 히데요시 정권하 다섯 유력 다이묘의 모임인 고다이로(五大老,오대로)의 일원이었다. 데루모토는 서군의 총 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전쟁에 대한 모리 가문내의 의견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도 않고 오사카 성에서 후계자 히데요리를 보호하며 자중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의 조카였던 인연으로 추코쿠의 다이묘였던 고바야카와가의 양자로 들어간 인물이다. 서군 내에서 주력군을 이루는 약 1만2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그는 전투 전 이미 이에야스측과 내통한 상태였다. 결전 초기 서군에 우세한 전세가 펼쳐지자 사태를 방관하며 그대로 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초조해진 이에야스 측의 위협 사격을 당했고, 결국 아군의 허리를 찌르는 결정적인 배신을 감행한다.

서군의 실질적인 총수 이시다 미쓰나리는 동군과 대등한 병력을 집결시켜서 유리한 위치에 포진시켰지만 전군을 일사 분란하게 지휘할 수가 없었다. 서군을 대표할 직위도 없었고 이에야스처럼 자기 영지에서 대군의 중추가 될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히데요리가 장성한 성인이어서 전쟁터에 참전할 수 있었다면 그 상징성 때문에 싸움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 밖을 나가본적도 없던 8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크기 전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동분서주했다.

이에야스는 영지에서 약 7만명의 하타모토(旗本;はたもと;다이묘직계군사)를 동원했고 이중 반을 세키가하라에 투입했다. 그리고 전쟁 전 외교 책략으로 서군을 분열시켜 놓았다. 결국 전투를 방관한 모리 군과 전투 중에 창 끝을 돌린 고바야카와 군으로 인해 세키가하라의 승부는 결정되었다. 클레멘스 메켈 같은 전문 군인이 금방 예측했던 포진 상의 우위를 정치적 책략으로 무력화시킨 이에야스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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