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 재앙 같은 죽음 같은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카프카가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자살과 같은 느낌,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의 죽음 같은 충격. 정신의 얼음을 깨는 도끼. 카프카가 문학에서 이끌어 내려 했던 건 이런 어마어마한 심상들이었다. 편지를 쓸 당시 그는 무명작가였는데, 비록 죽고 나서는 진가를 인정받게 되지만, 자신이 써내려가고 있는 글의 가능성을 잘 깨닫고 있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 같기만한 그의 작품이 어떻게 그토록 특별한 촉매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단편 <변신>은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의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이다. 이 평범하고 선량한 남자는 어느날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큰 갑충(甲蟲)으로 변한다. 장면 두 개가 계속 기억에 남았다. 집에서 여동생이 아름답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듣고는, 이런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자신(그레고르)이 벌레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장면이 하나.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그레고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니 가족들이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나들이 가는 장면이 두 번째였다. 이상한 유머가 넘쳐서 이토 준지 공포 만화를 읽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독의 삼 부작으로 꼽히는 최고의 작품 <소송>, <성>, <실종자> 는 상당한 마음가짐과 인내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일단 기승전결이 없고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른채, 이상하고 장황한 설명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래 옮긴 <소송>의 한 부분을 보면 전형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변호사는 그에게 뭔가를 자세히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물어봐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질문이야말로 가장 주가 되는 일이 아닌가. 자기라면 이 일에 필요한 온갖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변호사는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거나, 아니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귀가 잘 안 들리는지 책상 위로 몸을 약간 구부린 채 수염 한 가닥을 잡아당기며 양탄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아마 K가 레니와 함께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인 것 같았다. 이따금 변호사는 K에게 아이들에게나 할 법한 별 내용 없는 훈계 몇 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그것은 정말 따분하고도 쓸데없는 이야기들이라서 K는 최종 수임료를 정산할 때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변호사는 그를 충분히 주눅 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다시 약간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들었다.

그는 당연히 즉시 작업에 착수했고, 첫 청원서가 이미 거의 완성 되었다고 했다. 변호사 측의 첫 인상이 소송의 전체 진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첫 청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K가 유념해야 할 점도 있는데, 법원에서 첫 청원서를 전혀 읽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즉 법원에서는 당분간은 피고인을 심문하고 관찰하는 것이 글로 써놓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첫 청원서를 다른 서류들 속에 그냥 던져놓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K의 목숨이 걸린 것이건만 무슨 죄 때문에 걸린 재판인지는 작품 끝까지 안 나온다. 변호사는 일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것 같고 도움 안 되는 훈계만 던진다. 첫 청원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다가, 정작 법원에서는 청원서를 전혀 읽지 않는다는 설명도 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설명은 작품 전체에 걸쳐 열심히 반복된다. 처음 읽으면 뜬금없다가 나중으로 가면 점점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일관적으로 비이성적인 설명이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자폐증이 있는 아이가 물건을 가지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걸 보는 느낌이다. 카프카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독자를 이끌지만, 그가 혼란을 주기 위해 혼란스러운 글을 쓴 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왜 이런 뒤죽박죽 글이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가 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는 이성이 앞서는 명료한 정신을 그리려 했던게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야릇한 꿈과 같은 환상에 주목했다. 환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비논리적 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관해 논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글을 읽어보자. 카프카를 가장 탁월하게 분석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꿈 속에서 욕망과 공포 같은 원초적 정신 에너지는 꿈틀대지만 논리나 기억의 연결은 흩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도 꿈 속에서는 바보짓을 하고 헤맨다. <성>에 나오는 측량사 K의 행동을 생각해보자. 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욕망)는 확고하지만, 노력하는 K의 행동은 이성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다. 마치 불안한 악몽 속에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투쟁하는 남자 같다.

cave_of_forgotten_dreams

카프카 작품 속 ‘꿈의 바보짓’ 은 다른 중요한 의미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꿈이 아닌 진짜 생에서의 투쟁도 반드시 명료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토마스 만은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 라고 표현했다.

생의 그림자 놀이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플라톤이 얘기한 ‘동굴의 우상’ 개념과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동굴 속에 묶여서 평생 산다고 할 때, 동굴 밖 존재로부터 전해지는 이미지는 모두 그림자이다. 하지만 동굴 속 사람은 그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산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동굴 속 존재라고 여기지 않으며, 세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한정된 경험과 숙명적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이유 없이 재판에 걸리고, 결국 처형당하는 <소송>의 주인공 K 나 아버지에게 익사형을 언도받고 스스로 강물로 달려가 형을 집행하는 <판결>의 주인공 게오르그를 보면 ‘존재 자체가 유죄’ 라는 관념이 나타난다.

이유 없이 처벌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이유도 모른채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한계(동굴의 우상)를 가지고 이상한 그림자 놀이(삶의 투쟁)에 몰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처음으로 표현한 실존주의적 원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식과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몽환성이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특이한 분위기가 합쳐져서 독자를 그의 글에 빠지게 만드는데, 마음에 고통을 주는 재앙처럼 강렬한 문학의 힘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글 –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V

One Comment

  1. Reply

    […] 이어지는 글 –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