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흘리지 않고 사는 꿈 – 채식주의자, 한강

도덕이나 규범도 힘의 균형 하에 작동한다. 힘 차이가 너무 나면 도덕은 무시되고, 힘센 쪽이 규범을 넘어 상대를 폭행한다. 재벌이 술에 취해 변호사를 때리고, 마카다미아 때문에 움직이는 비행기를 세우고 사무장을 내리게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 만약 재벌 회사가 망해서 힘의 균형이 맞춰지면 그때는 제대로된 벌이 부과된다. 만약 힘의 차이가 더 현격한 사람과 동물의 관계라면 어떨까? 이 경우 도덕이라는 것은 완전히 한 쪽이 정한다. 철창 속에 사육하다가 필요할 때 꺼내 죽이고, 피와 살을 먹기 편하게 포장한다. 맛있는 제품이라고 방송국 광고도 한다. 고기를 먹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되지만, 분명 잔인하고 이기적이면서, 천연덕스럽게 처리되고 있다.

사회에서 인간 관계는 정도가 다를 뿐 명령과 복종, 폭력과 피폭력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쪽은 이용하고, 다른 한 쪽은 이용당한다. 즉 인간 동물 관계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이런 현상들에 민감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폭력이 수반된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가기로 한다. 단순히 건강을 위한 게 아니고 ‘꿈’에 의해 살아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육식하는 동물이 아니라 평화로운 식물이 되었고, 그래서 깨어있는 일상에서도 속옷을 안 입고, 고기도 안 먹고, 광합성 하도록 햇볕을 쬐며 살아간다. 하루는 영혜 부부가 남편 회사의 사장이 주최한 부부동반 모임에 가게 되는데 아래와 같은 이상한 반응을 얻고 만다(당연하게도).

아까부터 아내의 젖가슴을 흘끔거리고 있던 전무 부인이 말했다. 마침내 그녀의 화살은 아내에게 직접 날아왔다.
“채식을 하는 이유가 어떤 건가요? 건강 때문에…… 아니면 종교적인 거예요?”
“아니요.”
아내는 이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태연하고 조용하게 입을 떼었다. 불현듯 소름이 끼쳤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꿈을 꿨어요.”

나는 재빨리 아내의 말끝을 덮었다.
“집사람은 오랫동안 위장병을 앓았어요. 그래서 숙면을 취하지 못했죠. 한의사의 충고대로 육식을 끊은 뒤 많이 좋아졌습니다.”

…정작 아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내가 나와의 잠자리를 의도적으로 계속 피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 그녀는 숫제 청바지 차림으로 잤다 – 우리는 아직 겉보기에 정상적인 부부였다. 하루가 다르게 그녀가 여위어가고 있다는 것, 새벽에 내가 알람시계를 더듬어 끄고 몸을 일으켜보면 어둠 속에서 눈을 치켜뜬 그녀가 꼿꼿한 자세로 누워 있다는 것이 예전과 다를 뿐이었다. 회사에서 주선한 외식 후 사람들은 한동안 나를 미심쩍게 대했으나, 내가 성사시킨 프로젝트가 괄목할 만한 수입을 거둬내자 모든 것이 묻혀지는 듯했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한 이래로 햇빛이나 나무나 물과 비슷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꿈’을 통해 그런 존재로 접어드는 건데, 비정한 세상에서 상처받은 순수한 영혼이 꿈으로 도피했다고 볼 수 있다. 영혜는 자기 환상을 남편 회사 높은 사람들에게도 천연덕스럽게 얘기한다. 꿈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려서 그렇다. 그녀의 피를 흘리지 않고 사는 꿈 은 <채식주의자> 첫 번째 단편 말미에서 병원 분수대(물) 옆에서 상의를 모두 벗고(햇빛 쬐려고) 앉아 있는걸로 표현된다. 정신병 아니면 노출증 환자의 행동이라고 보였지만, 스스로에게는 광합성을 하고 사는 생명체 ‘나무’가 된 것이었다.

영혜와 다르게 현실적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남편 등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경악해서 그녀를 정상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군인이었고, 어머니도 가족을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아래 어머니의 대사를 읽어보자.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영혜는 ‘약육’을 거부하고 있으니 세계에 남아있을 수가 없다. 덕분에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망가진 가전제품이 버려지는 것처럼”(작품 속 표현) 이혼 당한다. 그리고 언니인 인혜(지우 엄마)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다. 인혜의 남편, 즉 형부는 채식주의자 영혜 주위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색다른 심미안을 가졌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통 변태성향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몽상적 예술 작가로서,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하는 아내 인혜 덕에 먹고 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그는 영혜의 남편과 정확히 대비되는 성격으로 나타난다. 아래는 이 남자가 이전 동서를 회상하며 한 생각이다.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상기 회상에서도 느껴지듯, 영혜 형부는 일상의 틀을 벗어난, 속되지 않은 예술 작품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나이들어 배 나온 아저씨가 되도록 아무에게도 작품을 인정받지 못해 우울해 했다. 어느날 그런 울적을 아득히 날려버릴 흥분을 찾게 되는데, 그 대상이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 이었다. 우연히 자기 아내에게 처제가 아직도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는 걸 들은 순간부터 그는 광폭한 열망을 뿜게 된다. 자해를 하고 정신병원 치료를 받고, 이혼 당하고 나서 집에 얹혀 살게된 처제를 주인공으로 어떤 표현 예술 비디오를 찍기로 했던 것이다. 채식주의자 영혜는 이 뜻밖의 제안에 쉽게 응한다.

“옷을 벗고, 몸에 물감칠을 할 거야.”
여전히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건너다보며 그녀는 입을 떼었다.
“……그리구요?”
“그러고 있으면 돼. 촬영이 끝날 때까지.”
“물감칠을…… 몸에 한다구요?”
“꽃을 그릴 거야.”
그녀의 눈이 일순 흔들린 것 같았다. 잘못 본 것인지도 몰랐다.

영혜 형부의 꿈은 리비도와 결합된 예술 창조 욕구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영혜 혼자의 나체 예술 비디오를 찍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도 꽃무늬 페인팅을 하고 처제와 함께 성행위를 하는 동영상을 촬영하게 된다. 당연히 아내에게는 사실을 숨기고 예술 작업하느라 외박한다고 둘러대었다. 퇴폐에 패륜이 결합된 행위 예술인 셈이다. 웃기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중요한 테마를 품고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리비도 즉 성욕은 모든 인간 에너지의 근본이다. 인간이 성욕만을 뿜고 행동한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고, 이 본능적 에너지를 고차원적 창조욕이나 이타행위로 전용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리비도도 에너지이므로 에너지보존법칙(열역학 제1법칙)을 따른다.

영혜의 형부는 탈모와 복부 비만을 멋쩍어하는 중년 아저씨이다. 아내 인혜와 벌써 두 달 넘게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고 있고, 따로 성매매를 하는 것도 아니니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야만 했다. 그가 그냥 처제와 불륜관계를 가졌다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인간 본연 에너지를 창조로 푸는) 그는 몽고반점이라는 미학적 상징에 창조 에너지를 쏟고 싶어졌다.

작품 속에서 몽고반점은 식물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몸에 있지만 태고적 광합성의 흔적을 연상시키는 옅은 초록색의 반점이었다. 그는 성인이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처제 몸에 바디페인팅을 하면서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붓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듯 미세히 떨리는 그녀의 육체를 느끼며 그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 마침내 오른쪽 허벅지를 지나 가느다란 발목까지 이어지는 긴 줄기와 잎사귀를 완성했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형부는 원초적 성욕도 아닌, 그렇다고 세속적인 욕구도 아닌 근원적인 에너지에 다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나긴 세월 제대로 된 예술을 만들지 못한 좌절, 깊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내와의 매일의 생활 그리고 가정에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죄책감 등 깊은 우울을 녹여 버리는 행위였다. 그의 예술 작업 대상 영혜는 형부의 의도에 잘 따라온다. 그녀는 자꾸만 자기가 나무가 되는 ‘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꽃이 몸에 그려져 있으면 그 세계에서 벗어나 본연의 ‘동물’로 돌아온 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부와의 실제 남녀 교합을 동반한 예술 작업에 거리낌 없이 몰입한다. 이 둘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인혜에게 모든 작업 과정과 결말을 들키게 되는데 아래와 같은 상황이다. 교접을 마친 영혜는 다시 나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비워진 존재가 되었다.

“구급대를 불러놨어요.”
“뭐라구?”
아내는 희끗하게 질린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그녀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수초의 시간이 걸렸다.
“….나한테 정신병원에 들어가라는 거야?”
그때 매트리스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도, 아내도 숨을 멈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가 시트를 걷어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보았다.
“나쁜 새끼.”
아내는 낮은 소리로,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 저런 애를.”
아내의 젖은 입술이 파들거렸다.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가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