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in Category: 역사

태평천국의 난 I – 중국 역사상 가장 기이한 사건

신의 아들 II Farvahar001예전에 이단 종교 단체라고 불리는 곳에 잠시 몸을 담근 적이 있다. 그 곳은 간판은 정통 교회였지만 실상은 교단 설립자 목사님을 새로운 그리스도로 추종하고 있었다. 교회에 입회하자마자 “우리 목사님은 그리스도시다!” 라고 말해주지는 않는다. 성경공부를 같이 많이 하고 교회 사람들과도 충분히 친해진 다음 그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준다. 필자는 교회에 들어온지 3개월 만에 들었다.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머리가 하예지는 기분을 잊지 못하겠다.

어떻게 멀쩡히 눈 앞에 보이는 중년 남성을 신(神)으로 믿는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해본 결과 이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일원들은 서로 형제 자매처럼 살고 있었다. 급하고 칙칙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절대 경험 못하는 동지애를 누린다는 점이 아주 특별하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믿음 아래 엄청난 열정을 뿜고 있었다. 즉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얻음으로써(너무 비현실적인 것이긴 하지만) 행복해했고, 그래서 밤낮없이 새 그리스도를 위해 일했다.

믿을 만한 친구가 없어 외롭고, 인생의 의미를 못 찾아 허무한 사람은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단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이단 단체에서 이상한 경험을 한 이후로 종교성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었다. 그 중 19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 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대청제국(大淸帝國)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벌인 1850년부터 1864년까지의 15년 내전으로 2천 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1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내전(內戰)이다. 이것만으로도 특별하지만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기독교적 신정혁명을 표방한 반란이라는 점이 더욱 특이하다.

유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기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儒家)로 등장하였고,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정식으로 국가의 학문이 되었다. 이후로 마오쩌둥의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2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태평천국은 이 정도의 역사와 기반을 가진 사상을 단번에 뒤집어 엎으려고 했다. 그들은 기독교 여호와 신을 천부상제(天父上帝)로, 총수인 홍수전(洪秀全)을 천왕(天王)으로 내세웠고 놀랍게도 15년 동안 중국 양자강 남부를 석권했다. 이 기이한 천하대란(天下大亂)은 홍수전이라는 과거 낙방생이 열병에 걸려 꾸었던 환몽(幻夢)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래는 조너선 D. 스펜스 저작의 <신의 아들>에서 옮긴 단락이다. 중국사를 전공한 미국 예일(Yale) 대학 교수였던 저자는 홍수전의 꿈을 묵시록 성격을 띈 고대 종교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홍수전과 그의 신도들을 엄청난 파국으로 이끈 계시적인 환몽의 근원은 기원전 2천년 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에 계시적인 환몽이 나타나기 전에도 또 다른 형식의 신앙이 많은 문명에서 성행했다. 이런 현상은 대체로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이란어파 문명에서 매우 두드러졌다. 이런 신앙이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에 의하면, 만물은 한쪽에는 질서와 번영의 힘을 가지고 있고, 다른 쪽에는 암흑, 혼돈, 파괴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만물은 또 이 두 힘 사이에서 미묘하면서도 지속적인 균형을 보여 왔다.

기원전 1500년경에는 우리가 천년왕국이라고 부르는 신앙의 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신앙 유형은 조로아스터 또는 차라투스트라로 잘 알려진 페르시아의 예언자가 처음 만들어 낸 것으로, 그는 자신이 창시한 신앙에서 최후의 세계가 나타날 가능성을 약속했다. 최후의 세계란 ‘혼돈이 없는 질서의 세계’이자,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히 평화로운 무결점의 ‘경이로운’ 세계이며,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신이 통치하는 변치 않는 제국이었다.

이제 다가오게 될 파괴의 시대는 가까운 미래의 어떤 특정한 시기로 정해졌다. 이 조짐은 질병, 기근, 폭군의 학정으로 나타났고, 종종 거대하고 파괴적인 대홍수를 동반했다. 거룩한 구세주와 그의 명령을 받은 현세의 영도자의 안내에 따라 소수의 인류만이 이 혹독한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공동체 안에 함께 모여,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갈 것이었다.

Notes:

  1. 질병과 기근으로 인한 사망 포함. 출처 Taiping Rebellion, Britannica Concise, “Necrometrics.” Nineteenth Century Death Tolls. Wikipedia에서 인용.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

일본의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사를 움직이는(움직였던) 다섯 가지 힘으로서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 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힘은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부류로 엮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중 욕망의 흐름으로 인해 인류사에 펼쳐진 종교와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논했다는 게 자연스런 설명이다.

욕망을 부르는 대상으로 먼저 제시된 것이 커피와 홍차였다. 계속해서 금과 철 같은 물질도 얘기한다. 저자는 흔한 기호 식품에 대한 끌림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끌림을 주는 사상(제국주의나 공산주의나 종교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언뜻 보기에 아주 다른 현상인 커피에 대한 기호와 종교에 대한 기호를 같은 심리 상에서 설명한 게 재미있었다. 특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논한 부분과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교한 설명은 아주 명철했다.

미셸 푸코는 “언어의 독점이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라고 말했었다. 권력을 독점하는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정의나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도 독점한다. 공산주의로 치자면 ‘혁명’, ‘투쟁’, ‘인민’ 등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독점한 특정 언어의 틀 안에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정의도 정해진다. 당신의 이런 행위는 혁명이 아니다, 당신의 지금 태도는 인민을 위한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단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짜여진 집단 사고는 가끔씩 정말 비합리적이 된다.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는 북한과 우리나라가 서로에게 하는 선동 발언을 읽어보면 아래 설명된 사고가 흘러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며 폐쇄적이다. …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미움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이 그렇다는 일은 없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둘다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동인을 훌륭하게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사람을 움직이는 숨은 동인으로 ‘무의식’에 주목했다.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의 이면에는 무의식의 힘이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인간의 경제 정체성에 주목했다. 그는 “사람은 경제적인 위치와 수입에 의해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따라서 문화 또한 경제적인 기반에 의해 달라진다” 라는 명제를 남겼다. 저자도 극찬하는 분석이다.

필자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한 대형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으로 뭉쳐진 공동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사랑과 상관없는게 많이 뭉쳐있었다. 미혼남녀들이 많이 있는 만큼 서로 만나서 교제하는게 흔했다. 그런데 이 교제와 결혼의 절대 필요충분 조건은 신앙의 깊이가 아니었다. 경제 수준과 외모가 조건 일 순위를 다투었고 신앙심은 엑스트라였다. 결국 사람의 경제적 위치가 사고방식을 결정했고 그게 신앙심도 누른 것이다.

저자는 마르크스 사상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대해서도 명료한 설명을 해준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싸움은 시대의 발전과 시스템의 차이로 인한 다툼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과의 투쟁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공공을 위한 노동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면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데 까지 이른다. 소유욕을 없애는 것은 불교의 승려나 카톨릭의 신부 수행을 오래해도 없애기 어려운 욕망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집단을 전체로 만들어 한꺼번에 의식 개혁을 하려했다. 사회의 이념이 대중의 공통적인 욕망을 타고 가는게 아니라 인공적인 도덕을 강요함으로써 자멸했다는 말이 된다.

​저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종교의 성질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대중을 열광케 하는 종교 심리를 분석해내는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은 위대한 힘에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안정감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융이 말하는 집합적 무의식이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보통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인간은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안과 밖에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가진 무엇인가를 품고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과학이 주지 못하는 정신적 안정을 주는 종교에 대한 욕구는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종교 열정은 종종 다른 종교와의 충돌로 나타난다. 문명의 충돌으로 표현된 서구 기독교 국가와 중동 이슬람 국가들간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있었던 분당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간 피랍 사건으로 한창 논쟁이 있었다. 저자는 서구 사회가 쉽게 간과하고, 일부러 무시하는 듯한 이슬람의 힘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다르다. 무슬림에게 있어 이슬람교는 정신을 구원하는 의미에서의 종교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그 자체’이다. 무슬림들에게는 종교활동, 경제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모든 것이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스러운 세계와 속세를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슬림에게 이슬람교는 생활과 신념에 수반된 모든 것이다. 이런 단단한 공동체가 먼 나라에서 잠시 찾아온 기독교 선교단의 활동으로 깨질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기독교가 무슬림을 교화하기 원한다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이슬람 사회 한 가운데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더 훌륭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영원한 총리

주은래 II.jpg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중국의 초대 총리로서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총리의 자리에 있었다. 유교식 전통교육과 서양식 교육을 같이 받았던 그는 명목상 공산주의 혁명가지만 실제적으로는 황제나 다름 없던 마오쩌둥의 충성스러운 재상 역할을 했다.

중국 국가 주석이던 마오쩌둥은 대중을 동원하는 급진적이고 정치 우선적인 정책을 선호하여 ‘대약진운동’ 이나 ‘문화대혁명’ 등을 일으켰다. 운동에 동원된 대중들은 종교와 같은 사상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그걸 실행하는 수단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실용적이고 완급을 조절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그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대중운동의 잠재력을 믿지 않는 인물로 경계를 받았다. 그래도 저우언라이는 자기 능력 하에서 폭력으로 숙청되는 옛 공산당 동지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덩샤오핑이었다.

마오쩌둥은 총리가 비록 자신의 정책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결국 온건 노선을 버리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다. 마오가 말년에 공식 후계자로 삼았던 인물은 중공 개국 십대 원수중 한 명인 린뱌오(林彪;임표)였다. 린뱌오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야전사전관으로서 나이는 십대 원수중 가장 어렸지만 서열은 홍군의 창건자 주더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의 뒤를 이은 세 번째였다.

​장제스과 마오쩌둥의 초한지(楚漢志)였던 국공내전의 승부를 결정지었던 3대 전역(戰役)이 있었다. 린뱌오는 이 중 두 개인 랴오선(遼瀋) 전역과 핑진(平津) 전역을 승리로 이끌었다. 랴오선 전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남긴 공업 시설이 밀집된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 전체를 손에 넣었고 핑진 전역에서는 텐진에 이어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나머지 하나인 화이하이(淮海) 전역을 지휘했던 건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린뱌오는 인민해방군내 기반도 있고 주석의 신임도 있어 후계자로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대약진운동에서도 문화대혁명에서도 마오쩌둥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고, 개인 숭배 운동에도 열을 올리던 그는 하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린뱌오 파벌은 국가주석직의 승계를 두고 조바심을 드러내면서 마오쩌둥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숙청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이들은 반란 계획을 세워보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군용기를 타고 급히 소련 방면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비행기가 몽골의 초원에 추락하는 바람에 린뱌오와 그의 처, 아들을 포함한 일당 전원이 폭사했다. 숙청 위험에 처하자 마오쩌둥을 제거하려는 모험을 한 린뱌오와 저우언라이는 잘 대비가 된다. 최후의 만다린(Mandarin;궁정관료)이라고 불렸던 저우는 늘 마오쩌둥에게 순종적이었고 유교시대 군주를 대하듯 그를 극진히 보좌했다.

마오쩌둥의 허무한 후계자였던 린뱌오가 사라지고 나서 중공의 정치국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문화혁명을 적극 지지하는 마오의 아내 장칭(江靑;강청)을 중심으로한 사인방(四人帮) 세력과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및 혁명원로들로 이루어진 실무파 세력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두 세력을 번갈아 지지하면서 양측이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저우언라이는 사인방으로부터 줄곧 정치적 공격을 받았고 말년엔 방광암 선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좌우명으로 삼은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1대로 일했다.

총리의 근무 시간은 기록으로 남겨져있다. 1973년 72일간을 병상에서 보냈지만 병상에서도 비서들을 불러 매일 집무를 한다. 다시 병원에 입원하기 전 기간인 1974년 1월에서 5월까지 총 139일 동안 12~14시간 일한 날이 9일, 14∼18시간이 74일, 19~23시간이 38일, 24시간 꼬박 세운 날은 5일, 근무시간이 12시간 이내인 날은 단 13일 이었다. 정신력과 사명감 없이는 결코 견디지 못할 일정들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몸은 1975년 가을부터 대소 10회의 수술을 받으며 급속하게 쇠약해졌다. 그해 12월 저우언라이는 문병 온 당부주석겸 국방상이었던 예젠잉(葉劍英;엽검영)에게 암성 통증을 참으며 “권력이 그들(사인방)의 손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마오쩌둥 사후에 벌어질 권력 투쟁을 걱정하고 하고 있었다. 이듬해 1월 8일 저우언라이는 사망한다. 마오쩌둥의 사망보다 8개월 앞선 시점이었다. 아래는 그의 사망을 기록한 바르바라 바르누앙(Barbara Barnouin)의 책 <저우언라이 평전>의 구절이다.

​1976년 새해 아침 신문들은 마오가 1965년 쓴 시 두 수를 개재했다. 저우는 마오에 대한 그의 마지막 충성을 보이듯 그의 보좌관들에게 그 시를 읽어달라고 했다. 그 후 저우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1월 5일 저우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틀 뒤인 밤 11시 마지막으로 깨어났다. 저우는 눈을 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의사들에게 희미하게 말하기를,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으니 그들을 필요로 하는 다른 환자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이것이 저우의 마지막 말이었다. 저우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에 사망했다. 향년 78세.

다음은 저우언라이의 사망에 대한 당의 보고를 듣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일본 산케이 신문 발행의 <모택동 비록> 책에서 옮겼다.

​저우언라이 사망에 관한 당 정치국의 정식 보고서는 오후 3시가 지날 무렵, 폐와 심장을 앓아 누워 있던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다. 당직 간호원은 그것을 천천히 읽었다. “위대한 프롤레탈리아 혁명가이며 걸출한 공산주의 전사인 저우언라이 동지는 암을 앓아 치료한 보람도 없이 1976년—” 마오쩌둥의 감겨진 눈으로부터 눈물이 흘러나와 빰을 적셨다.

사인방이 장악한 인민일보등의 언론매체들은 죽은 정적 저우언라이를 찬양하는 보도를 억제했다. 하지만 대중은 자발적으로 추모를 위해 나왔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한지 3개월이 지난 1976년 4월 4일의 청명절(淸明節,죽은 사람을 기리는 명절)날 추모는 절정에 달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중심의 38m 높이의 인민영웅기념탑에는 주은래의 거대한 초상화가 설치되었고 무수한 꽃 장식으로 주위 대좌가 파묻혔다. 초상화 밑에는 검정색 바탕에 흰 글자로 “우리들은 밤낮 경애하는 저우 총리를 생각합니다” 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있었다. 이날 천안문 광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2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하지만 사인방 세력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그 반대파인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 집회를 강제 해산해 버린다. 집회의 배후로 몰렸던 덩샤오핑은 일생에서 세 번째 실각을 당해 쫓겨난다. 이로부터 몇 개월 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대혁명의 지속을 외치는 사인방 파벌과 예젠잉을 중심으로 한 혁명 원로 파벌간의 피할 수 없는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던 예젠잉은 마오가 생전에 지명한 마지막 후계자 화궈펑(華國鋒;화국봉)과 연합했다. 이들은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고 민병 밖에 동원할 수 없던 사인방 – 장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 을 하루 사이에 모두 체포해버린다. 사인방의 몰락은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당내 세력의 종말이 되었고, 덩샤오핑이 복귀할 길도 열리게 된다.

인민해방군에 기반이 없고 파워 게임에 서툴었던 화궈펑은 복귀한 덩샤오핑에 의해 쉽게 제거되었다. 결국 저우언라이가 죽기 전 예젠잉에게 당부한대로 권력은 사인방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따라 개혁정책을 펼칠 덩샤오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Notes:

  1.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중의 구절. 삼가 공경스럽게 몸(躬)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할지니, 다만 죽은 후에나 그칠 것입니다 라는 의미.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사카의 영화도 꿈 속의 꿈

아시가루(병농일치의 최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닌의 난 이래 100년 이상 지속된 일본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천하인(天下人)이 된 인물. 세계사를 두고 보아도 평민 출신으로 이 정도 출세를 한 사람은 중국 한고조 유방(劉邦)이나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혹은 로마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ānus) 정도가 떠오른다. 일본에서는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로 일컬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시대(1467~1573) 오와리의 영주였던 오다 노부나가 아래서 군사, 행정적 실무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내 일개 병사에서 주요 방면군 사령관이자 석고 50만석의 대 다이묘의 위치까지 이르렀다. 어려서 보따리 행상을 하는 등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병사와 평민들의 심리를 잘 이해했고 이를 통해 전투 지휘 뿐 아니라 대규모 공병, 병참 작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히데요시의 주군인 노부나가는 자유무역을 보장하여 영지의 부를 축적하고, 신무기 뎃포(조총) 부대를 밀집대형으로 운용하는 등 혁신적인 전략전술을 사용해 통일 전쟁을 벌였다. 하찮은 보병 출신인 히데요시나 군소 호족의 아들인 타키가와 카즈마사의 능력을 알아보고 군단장까지 진급시키는 등 용인술도 뛰어났다.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의 반 정도를 정복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포악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몇몇 부하들에게 원망을 산다. 열 받은 부하 중 한 명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1582년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모반사건을 일으킨다. 미쓰히데는 주고쿠(일본 혼슈의 최남단)로 원정을 떠나기 위해 자기 영지에 동원되어 있던 대군의 방향을 돌려서 노부나가를 습격했다. 소수의 호위 인원만 거느린 채 교토 혼노지에서 머무르던 노부나가는 미쓰히데 군에 포위되어 할복 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다.

천하인이던 노부나가와 그의 후계자였던 큰 아들 노부타다가 혼노지의 변으로 나란히 죽음을 당하자 오다가는 권력의 진공 상태에 빠진다. 노부나가에게는 죽은 노부타다 말고도 장성한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결국 권좌을 다투게 된 것은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선의 군단장들이었다. 히데요시는 우선 미쓰히데의 군대를 무찔러야 했다. 미쓰히데에게는 주군을 살해한 역신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져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 입장에서 동맹군을 모으기 좋았다. 그는 미쓰히데 군의 2~3배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켜 속도전(速度戰)을 걸었다. 결국 야마자키 전투 한 번으로 자신과 대등한 오다 가문 군단장이던 미쓰히데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주군의 원수를 갚음으로서 히데요시의 명성은 드높아졌고, 그는 오다가 전체의 군권을 잡기 위해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과 연합한 동료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시즈가타케에서 벌어진 전투 한 번으로 가쓰이에를 멸망으로 몰아넣는다. 이 전투에서도 히데요시는 사전 외교의 능수능란함과 야전 지휘의 민첩성을 보여주었다.

야마자키와 시즈가타케 두 번의 싸움으로 히데요시는 오다가의 최고 실력자이자 일본 국토 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기세를 몰아 유력 다이묘(大名;봉건영주)들인 도쿠가와, 모리, 우에스기, 시마즈, 호조가를 차례차례 굴복시켰다. 오사카에 거성을 축조하고 천하인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은 주군이었던 노부나가를 넘어 천황 조정 최고직 간파쿠(関白)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에 이르렀다.

여기까지에 만족해 멈추었다면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출세의 교본이 되는 영웅이 되었겠지만… 나이 55세가 되던 해 임진왜란을 일으킴으로서 국제적 악명을 널리 알리게 된다. 히데요시는 현해탄을 건너 조선을 점령하고 이어 명나라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당시 세계관에서 중화를 지배하는 명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자 천조국(天祖國)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히데요시가 연전연승했던 데에는 병력, 병참상의 우위를 확보하고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을 상대에게 강요한 데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명나라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병력 수나 보급 상황면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무모하게 시작된 전쟁은 영토 한 뼘 얻지 못하고 조선 파견 군대 전원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57세의 나이로 후계자인 아들 히데요리를 얻었다. 히데요시 자신이 주군 노부나가의 죽음 후 그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자기가 죽고난 후 부하 누군가가 어린 히데요리를 물리치고 정권을 빼앗을거라는 걱정을 안할 수 없었다. 나름의 안전대책을 마련했으나 그의 사후 걱정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죽음에 앞서 출세와 인생의 허무함이 잘 담겨있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 향년 62세.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나니와 1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Notes:

  1. 오사카 인근의 옛 지명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이라는 대란대치 大亂大治

Cultural Revolution.png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인류사 전체를 두고 살펴봐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란(大亂)이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이어진 이 혁명에는 미증유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거대한 중국 사회 전체의 사고와 생활방식이 뒤흔들려 버렸다.

문화대혁명이 발동될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한 경제적 파국으로 국가주석 지위를 사임하고 2선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피땀흘려 이룩한 공산주의 중국의 사상이 변질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당중앙의 최고 지도자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성과제를 인정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했는데, 이건 마오에게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로 되돌리는 위험한 수정주의로 보였다.

마오쩌둥은 권좌를 되찾고 ‘순수한’ 공산주의 노선을 집행하려 했는데 그가 권력 쟁취 수단으로 삼은 건 특이하게도 군대나 총도 아니고 수뇌부 내의 파벌 싸움도 아닌(결과적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무수한 젊은 홍위병들을 동원한 권력 외곽으로부터의 시위 투쟁이었다. 마오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였을 뿐아니라 역대 8번째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영웅으로 위광(威光)을 당내에서 견줄자가 없었다. 그가 젊고 덜 여문 홍위병들을 대량으로 불러모아 사상적 열기를 주입시키니,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낡은 관습을 때려부수는 운동을 벌였다.

마르크스 사상은 무신론을 주창하지만 그 정서적 영향력은 기성 종교와 아주 흡사하다. 해방자가 되서 싸우라는 슬로건은 대중에게 어떤 열광심을 불어넣는데, 그렇게 각성된 인민들은 종교집회에 모인 신앙인처럼 행동한다.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이 딱 그랬다. 타도 대상이 되었던 것은 4개의 낡은 것(四舊)으로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이었다. 그리고 이런 낡은 습속을 가진 걸로 보이는 사람은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가 자기 노선을 거역한 당 지도자로 여겼던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이 집단 난리 통에 중앙부 권력으로부터 손쉽게 제거되었다.

당시 국가주석이던 류사오치는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조직가로 강직한 서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폭력 학생(홍위병)들로부터 ‘수정주의의 두목’,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로 성토당하며 정치 권력은 물론 일신의 자유도 잃었다. 홍위병들은 자택을 무단으로 수색 했고, 그를 강제로 비판대회에 끌어다 놓았다. 집회에 모인 대중 앞에서 ‘제트기’ 자세를 한채 얻어맞았는데, 류사오치의 어린 자식들은 부모가 맞는 것을 억지로 지켜보아야 했다. 1968년 당은 류사오치에 대한 영구추방을 승인한다. 1969년 베이징에서 하남 개봉으로 이송되었는데 벌거벗겨진채 군용담요에 말려서 들것에 실려왔다. 한 때 중국의 국가 수반이던 인물이 짐짝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후 콘크리트 창고에 감금되었는데, 결국 폐렴이 생겼고 고열과 구토가 끊이지 않았다. 담당 의료진들은 당이 숙청한 인물을 돌보는게 두려웠는지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류사오치는 1969년 11월 사망한다. 향년 71세. 다른 지방으로 추방된 상태였던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사망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Cultural Revolution 63290681_glizhensheng.jpg문혁으로 박해받은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라오서는 항일 경력이 있는 문학작가였다. 중국 하층민의 애환을 묘사한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서방 세계에도 문명이 있었던 그는 당시 67세 였다. 10대 후반이던 베이징 제2, 12, 23, 63 중학교(중고교에 해당)학생들과 중앙예술학원 학생들은 이 노작가를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구타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라오서는 홍위병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이들이 씌운 ‘흑색 우파분자’, ‘괴물’, ‘반동학자’라는 표찰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하지만 그 바람에 더욱 심하게 맞았을 뿐이다. 다음날 그는 더성먼(德勝門) 근처 타이핑 호수에 투신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식 뻘의 홍위병들에게 박해 당한 많은 혁명 원로와 지식인들과는 반대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는 도를 넘어갔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집회가 열렸다. 광장 안에는 100만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모였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노래인 ‘동방홍’을 부르면서 오래 기다린 끝에 비치는 햇살과 함께 등장한 그들의 최고사령관을 맞이하였다. 접견대에 선 마오를 바라보며 젊은 홍위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공산주의의 대중집회는 신격화된 마오쩌둥을 위한 종교집회와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큰 난리를 일으켜 큰 다스림을 얻는다는 대란대치(大亂大治)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란까지만 이루어지고 대치는 어디갔는지 모르게 되었다. 특히 공산당 중앙이 두 개로 쪼개져 버렸다. 새롭게 등장한 파벌은 마오의 아내인 장칭을 포함한 네 명의 극렬 좌파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사인방'(四人幇)이라 불렸다. 이들은 마오가 띄워놓은 열기에 편승해 정치 구호 위주의 투쟁을 벌였다. 성능이 월등한 외국 선박의 수입을 허가했던 덩샤오핑을 외국 기술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식이다.​ 하지만 사인방은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에 기반이 없었고 문혁동안 많은 군출신 원로를 숙청한데다, 인민 생활의 향상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군부와 대중의 지지 없이 마오쩌둥에게만 의지해 권력을 유지했는데, 결국 마오 사후 원로 군부파의 당부주석 예젠잉이 주도한 숙청 계획에 걸려들어 모두 체포된다. 이후 예젠잉이 지지한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공식 평가가 이때 확정된다.

문화대혁명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대다수 인민에게 신격화 되어있는 마오쩌둥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라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다. 말하자면 열렬한 이슬람교 신자들 앞에서 “선지자 마호메트도 무언가 어쩌면 아마도 잘못한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운을 띄우는 격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이를 지혜롭게 처리한다.​

여전히 마오가 일으킨 문혁을 지지하던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마오 주석의 지시라면 우리는 모두 시종일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 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덩은 마오 역시 옹호했던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라고 주장했다. 실천을 통해 옳음이 입증된 정책을 추구해야 하는데 문혁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공식적으로 채택된 당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전략가, 이론가이다. 그는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에서 중대한 과오를 범했지만, 그의 전생애를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은 과오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공적이 제1주의적이고, 과오는 제2주의적이다.

덩샤오핑은 문혁을 부정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과(過)를 넘어선 공(功)을 인정함으로, 그를 숭배하는 대중의 지지도 잃지 않는 현명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