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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실존주의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사상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이전의 근대적 합리주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상을 처음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가 어떻게 다른 사상인지 위키 백과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 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조금 추상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은 참 맘에 들었었다. 일단 내게 어떤 운명이 있다는 것이 새롭고, 내가 그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건 꿈꾸며 살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정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가 한 말을 또 참고해보자. 그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본질(本質)이라는 건 본래가 되는 성질 혹은 가치이다. 그런데 이 가치는 사회에 의해서 정의된다. 본질이라고 통용되려면 다수의 동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연장선으로 삶의 본질이라는 것도 사회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나라는 유교 전통이 강한 곳이니 출세와 지위가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어려서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고, 선생님이 좋은 대학가라고 해서 대학가고, 다 크니 주위 사람들이 선망하는 위치를 찾으려 노력했던 삶이었다. 즉 삶 대부분이 운명이라는 말을 쓸 가치가 없게 타성적이었다. 이런 타성이 지속되면 편견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반면 실존(實存)은 실제가 되는 존재이다. 실존을 찾기 위해선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남들이 뭐라든 신경 안 쓸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의 의견도 어차피 사회의 통념이고 강요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경건하지만 사색적이고 우울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에 뛰어난 사고 능력을 키운 것 같다. 고독과 소외감에 고생하다보면 신선한 꿈을 찾게 마련이다. 1835년의 여름방학, 젊은 22세의 대학생인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을 떠나 셸란(Saeland)의 북부를 두루 여행한다. 그는 북 셸란의 최북단에 있는 길레라이레(Gilleleije)란 마을에 이르렀고, 장엄한 해협의 물결이 보이는 절벽 위에 서서 사색에 잠겼다. 압도적인 자연 경관의 도움인지 그는 예지의 절정을 경험한다. 키르케고르는 마침내 자기의 사고와 생존의 결정적 근거를 찾아내었다고 하는데 아래가 그의 말이다. 실존주의 사상이 담긴 서사시 같다.

나에게 참으로 없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었다. 내게 없었던 것은 결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 어떤 행위에도 일정한 인식이 앞서야 하므로 인식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참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계신가를 아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내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념(Idee)을 찾아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낸들 그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인식의 명령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며, 또 그 명령을 통해서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명령이 내 안에 생생하게 집어넣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것이 내게 없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이미 집도 얻고 가구도 장만했지만 거기서 인생의 희비를 같이 나눌 연인을 아직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내게 없었던 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사상 전개를 결코 내자신의 것이 아닌 것 위에, 즉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 위에 세우지 않고 내 생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맺어져 있는 것 위에, 즉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신적(神的)인 것에 뿌리박고 있으며 비록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굳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것 위에 세우게 될 것이다(진리란 Idee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내가 찾아온 자기를, 나의 혼을 얻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자신을 알도록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gnothi seauton). 사람이 평안함과 의의를 얻는 것은 그가 자기자신을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았을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길은 절망이라고 하는 저 따분한 저주 받은 동행자 곧 삶의 이로니를 면할 길이 없다. 내면적 근거가 없는 사람은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몸을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나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The thing is to find a truth which is true for me, to find the idea for which I can live and die.

앳된 청년이었던 키에르케고르의 이 깨달음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의미했다. 나와 상관 없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원하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타성적 삶을 사는 것은 안락한 가구가 있는 집에 사랑하는 연인 없이 사는 것처럼 맥 빠진 일이다. 하지만 실존을 찾아 사는 것은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연인 – 키르케고르의 경우 레기네 올젠의 이미지가 투영됨 – 과 같이 사는 것이다. 이것이 키르케고르 스스로 불안과 우울이 엇갈리는 생 한가운데서 찾아낸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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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 – 첫 사랑, 레기네 올젠

옛날 재미있게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 문고판 책의 표지에는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첫 사랑의 기억’ 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말은 메아리처럼 마음을 울렸었다. 첫 사랑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실제적이지만(그리움을 간절히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루 같다(소유해서 내 옆에 둘 수 없으므로). 실존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 1813~1855)에게서 처음 연상되어 떠오르는 단어는 ‘첫 사랑’ 이다. 그가 첫 사랑을 만난 후 어떻게 그걸 지켜 갔는지를 본다면, 이 남자를 개츠비 못지않은 순정파로 여길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25세가 되던 해 14세 소녀 레기네 올젠(Regine Olsen)을 만난다. 이 둘은 즉각 서로에게 끌렸던 것 같으며 키르케고르는 계속 그녀 곁에 맴돌다가 3년 후 드디어 청혼한다. 그렇게 쇠렌과 레기네는 1년 간 약혼 상태로 있었다. 이 시기 그가 약혼녀에서 쓴 편지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정말 감동적인 연애편지였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남자의 마음 속에는 어떤 천사적이면서 악마적인 절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너무 귀엽고 어린 여자(레기네 사진 링크)를 사랑하고 있고, 약혼녀 역시 그를 깊이 사랑하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던걸까? 이걸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가정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북유럽의 작은 나라인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모직상인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키르케고르는 세 번째 부인의 막내아들이었는데, 그래서 부모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Michael Pedersen Kierkegaard)은 우울하고, 걱정이 많으며, 종교심이 깊으면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왠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주인공 성격 같다). 아버지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자기의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고 싶었는지, 아직 성인이 안 된 키르케고르에게 비밀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 번째는 자신이 젊은 시절 황야에서 목동 일을 했는데, 추위와 배고픔에 몸서리친 끝에 하나님을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키르케고르의 어머니는 집안의 하녀였고, 그녀와 혼전 간통으로 태어난 아이가 키르케고르라는 사실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의 이 대담한 고백을 듣고서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훗날 ‘대지진의 체험’ 이라고 했는데, 사람의 정신이 지진 난 땅 처럼 마구 흔들리는 광경을 상상해보면 그가 받은 충격의 정도가 잘 느껴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집안 사람들이 33세(예수 그리스도가 살다간 나이) 이상 살 수 없는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어머니는 아들이 22세 되던해 일찍 죽었고, 나머지 7남매 중 대부분이 어린 나이로 죽었다. 33세 이상 생존한 것은 키르케고르 자신과 형 페테르 뿐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자기는 어짜피 서른 세 살 때 죽을테고, 천성적으로 어두운 성격 때문에 약혼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근데 처음부터 그녀에게 접근은 왜 한걸까…). 레기네 올젠은 심적 절망에 빠진채 약혼남의 마음 돌려보려 노력한다. 이들의 약혼 소동은 코펜하겐 사람들이 모여 나누는 뒷말의 주요 소재가 될 정도여서 당시 레기네의 말과 행동은 기록으로 잘 남겨진 부분이다. 그녀는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충격’ 에 빠졌으며, 자신을 다시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자살해 버릴 거라고 키르케고르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녀는 자신을 잊어야만 행복해 진다는 확신으로 일부러 차갑게 반응한다. 어차피 결혼해보야 몇 해 못 가서 당신보다 더 젊은 여자에게 빠지게 될 거라는 둥 정 떨어지는 말을 하면서.

결국 이 약혼은 서로에게 절망을 안긴채, 일 년만에 파혼으로 끝났다. 레기네는 나중에 요한 프레데릭 슐레겔(Johan Frederik Schlegel)이란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여전히 그녀를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사랑했다. 첫 사랑은 그 강도의 변함 없이 평생 이어졌지만, 형태는 그 모양을 바꾸었다. 여자에 대한 사랑이 어떤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간구로 바뀌었던 것이다. 죽은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하며 <신곡>을 썼던 단테가 연상된다. 실연의 기억이 결정적인 화학 반응을 일으켜 실존주의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다음 글에서 이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어지는 글 – 키르케고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V – 삶을 사랑하는 방법

앞서 글에서 살펴본 대로, 니체는 프로이트와 융에 앞서 뛰어난 정신분석적 사유를 내놓았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힘의 원천을 ‘리비도’라고 하는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에너지라고 파악했다. 그는 이성적이지 않은 어두운 정신의 힘을 느끼고 그걸 통제하려 했다. 니체도 그 힘의 원천을 알아차렸지만 프로이트처럼 체계화하고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커다란 힘 전체를 사람의 운명을 펼치는 데 사용하려 했다. 아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책 구절을 읽어보자.

형제들! 전쟁과 전투는 악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미덕과 미덕 사이의 시기, 불신, 비방은 필요하지!
자네의 미덕 하나하나는 제각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원하거든.

미덕은 제각기 자네의 정신 전체를 원하지.
자네의 정신이 그 미덕을 알리는 전령이 되기를 원하지.
자네의 분노, 증오, 사랑이 들어 있는 에너지 전체를 원하는 거야.

짜라두짜는 미덕이 서로 다투는 전쟁을 얘기하고 있다. 사람 머리 속의 정신적인 싸움이다. 각각의 미덕은 전체 정신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데 이는 ‘분노, 증오, 사랑이 들어 있는 에너지 전체’ 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합쳐진 정신의 힘으로 최고의 운명을 쫓으려 했다. 운명은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로부터 시작하는데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운명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말은 쉽게 들리지만 실행이 쉬운 건 아닌 것 같다. 시시각각 맞이하는 상황과 그게 합쳐진 운명이 꼭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짜라두짜는 다시 도움되는 말을 해준다.

그래. 우리는 삶을 사랑하지.
하지만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거지.
나도 삶을 사랑해.

내 경우엔 나비나 비누거품 같은 것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사람들 중에 나비나 비누 거품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삶이 저주스러워 질 때도 있고 사랑스러워 질 때도 있다. 이건 얼굴 표정과 분위기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밝혀 주는 존재로 느껴진다.

이제 햇빛 아래서 날아다니는 나비와 거품을 생각해보자. 햇살은 세상을 고루 비추는 사랑과 같고 나비는 그걸 날개에 쪼이며 날아다닌다. 나비는 궤도를 따르지 않고 바람과 꽃망울을 따라 팔랑팔랑 움직인다. 비누거품 역시 자유롭게 떠다니는 존재이다. 투명한 무지개 빛을 띠며 잠시 예쁘게 빛나다 사라진다. 나비와 비누거품 둘 다 이곳 저곳에서 티없이 피고지는 사랑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삶에서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떤 모습을 나타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 에는 사랑 없이 허무에 빠진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숙사 선배인 도쿄대 법학부의 나가사와와 함께 카페나 술집을 돌아다니며 하룻밤 동침할 여자를 찾는다. 나가사와는 명문 집안 출신에 일본 최고 학부를 다니는 엘리트이다. 하지만 삶에 고차원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삶의 모든 것은 게임처럼 느껴졌다.

공부에 집중해서 어려운 고시에 합격하는 것도 안면도 없던 여자를 유혹해서 하룻밤 같이 자는 것도 자기 능력을 시험하는 게임이고, 좋은 결과에 한 번 웃으며 만족하면 되었다. 나가사와 보다는 인간미가 있던 와타나베는 그의 여자 헌팅에 동참하면서도 무언가 심각하고 의미 있는 것을 찾는다. 아래는 이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니체가 나가사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난다.

아, 숭고한 희망을 잃어버린 고귀한 사람들을 알지 …
한 번 그렇게 되고 나니까 숭고한 희망 전체에 대해 비웃고 다니더군.
찰나의 쾌락을 쫓아 뻔뻔하게 살더군.
그날 하루를 넘어서는 목표라곤 전혀 없이.
“정신 역시 감각적 쾌락일 뿐이다.”라고 말하더군.

정신의 날개가 부러진 거지.
부러진 날개가 정신에 들러붙어
날개에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정신을 온통 지저분하게 만든 거야.

한때 그들은 영웅이 되는 것을 추구했었지.
지금 그들은 쾌락에 빠져 사는 방탕아들에 불과해.
지금 그들에게 영웅이란 고통이고 공포일 뿐이지.

하지만 나의 사랑과 희망으로 자네에게 간절하게 부탁할게.
제발 자네 영혼 속의 영웅을 내치지 마!!
자네의 숭고한 희망을 간직해!

이어지는 글 –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 니체와 프로이트와 융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극단적인 사람들이 대조를 이루며 많이 등장한다. 창녀로 일하지만 아주 순수하고 따뜻하면서 의지도 강한 사람(‘죄와 벌’의 소냐), 열등감과 폭력성이 뒤섞여 음산해 보이는 사람(‘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스메르쟈꼬프), 겉으로는 깔끔한 신사지만 성욕이 충만하고 태연히 살인을 하는 사람(‘죄와 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등. 도스예프스키는 사람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인격(기독교적으로 보면 천사와 악마)를 몇 개 극단적인 분신으로 분리해 작품 주인공으로 만든 것 같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니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안 어울려 보이지만 둘 다 뛰어난 심리 탐구자인 건 같았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심리학자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니체는 소용돌이치는 공포, 불안, 열등감, 애정 같은 마음의 물결을 물리학자가 역학을 분석하듯 분석해냈다. 프로이트와의 융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도 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세상에 나왔는데, 읽어 보면 니체가 이미 자아와 에고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자아는 항상 듣고 항상 살펴봐.
자아는 비교하고 억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하지.
자아는 지배해. 에고 역시 자아의 지배를 받지.

형제들! 자네의 생각과 느낌 뒤편에는
뛰어난 사령관, 숨겨진 현자가 버티고 있어.
이 사령관, 이 현자가 바로 자아라고 불려.
자아는 자네 몸 안에 살아.
자아가 바로 자네 몸이야.

자네 몸에는 자네 머리로 짜내는 어떤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존재하지.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서 이드-에고-슈퍼에고 로 이어지는 상하 구조를 고안해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 – 중재자 – 고차원적 도덕으로 높이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위행위를 죄로 보는 것 같은 보수적이고 계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반면 융은 좀더 낭만주의적이었는데, 정신을 같은 층위에 있는 다른 개성을 지닌 원형(元型, Archetype)들로 파악했다. 상기 인용구에 나오는 ‘자아’ 는 초월적 지혜를 가진 존재로 융의 늙은 현자 원형과 같은 말이다.

니체는 마음의 구조과 운동을 분석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정신의 내적 본질은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 이고 또한 어둡고 다이나믹한 욕망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지성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그것(번개, 폭풍우, 우박)들, 즉 순수한 의지는 얼마나 행복하고 힘찬 것인가!” 라고 썼다.

번개나 비바람 같은 사물은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단순에, 화살처럼 날아가는 정신을 표현한다. 이렇듯 욕망이나 사랑, 집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운명을 이루는 데 쓴 것이 차라투스트라이다. 이런 집중은 인간에게 자아가 전 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초월감을 준다. 초인(超人,Ubermensch)은 겉모양이 펑하고 바뀌어서 되는게 아니라, 정신이 탈피하는 것이고 의식 과정이 변해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대로 새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나는 것과 같다. 헤세나 융, 카잔차키스 같은 이들은 저서에서 니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했는데, 그의 사상이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는 재생과 부활을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이어지는 글 –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V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춤추는 신

차라투스트라는 십 년 동안이나 세상을 떠나 산 위에서 생활했다. 아무리 애완동물(?)인 독수리와 뱀이 있다 해도 너무 쓸쓸한 생활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썩은 도사는 아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엄청난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불교 기준으로 보면 ‘열반’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갔다. 역자의 설명으로 보면 개인의 자유를 막는 무지와 편견을 넘어서 무한한 자유를 느꼈으며, ‘나다운 존재’ 즉 초인이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정신의 분신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뭘 깨달았는지 알아보려면 먼저 니체 인생의 궤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친할어버지 모두 목사였고, 어머니 또한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의 아버지는 니체가 4살이 되던 해에 뇌질환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20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자식들을 위해 재혼하지 않고 가정을 꾸려나가기로 결정한다. 니체의 가정에는 아들 니체를 빼면 모두 여자만 남게 되었는데, 할머니, 어머니, 미혼의 고모 두 명 그리고 여동생이었다. 이렇게 니체는 기억이 시작되는 나이 때 부터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한다. 어머니 프란치스카(Franziska)의 아들에 대한 기대와 염원은 대단했다. 게다가 여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도 니체에게 단순한 친 오라버니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모양이다. 이 두 여성은 모두 니체가 기독교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랬다. 니체는 이런 염원에 적응하는듯 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넌더리나는 혐오로 반응한다. 아래는 그의 작품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온 구절인데 한 번 읽어보자.

나와 가장 반대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즉 예측할 수 없는 본능적인 저속한 인간을 생각하면, 나의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기꾼들과 내가 친척이라는 것은 나의 신성에 부담이 된다.

작품 속에서 친 어머니와 동생을 이렇게 극딜한 작가는 아무도 못 본것 같다. 아무튼 니체는 솔직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의 어머니 혐오에는 고루한 기독교 교육에 대한 반발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깨달음도 신으로부터의 탈출, 독립으로 시작한다. 짜라두짜는 한 때 자신이 생각했던 신의 이미지에 대해서 회상한다. 아주 시적인 음율을 따라서…

그 당시엔 세상은
하나님이 꾸는 꿈, 하나님이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마음이 불편한 하나님이 스스로 위안 받기 위해
자기 눈앞에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선과 악>, 기쁨과 슬픔, 나와 너…
이런 것들은 창조주가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하나님은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지.
그래서 세상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지.

고통 받는 존재에게는 잠시 자기 고통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찔한 즐거움이지.
하나님이 아찔한 즐거움에 취해 자신을 잊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고 생각했어.

이 세상은 영원한 모순이라고,
아니, 그 모순조차 영원토록 불완전하게 보여 주는 이미지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 자신 불완전한 창조주에게는 아찔한 즐거움이라고
나는 한때 생각했지.

짜라두짜가 생각한 창조주는 ‘권태’의 면이 두드러지는 존재이다.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서 세상을 만들고, 고통에서 눈을 돌리며 아찔한 즐거움을 느낀다. 창조주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모순의 세상을 창조할 수 밖에 없었다. 짜라두짜는 신의 모습을 비판하고는 자신이 어떻게 신을 뛰어넘었는지를 말한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었냐고?
고통 받는 존재 짜라두짜는 자신을 넘어섰지.
마음이 타 버려 생긴 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지.
그리고 더 밝은 불꽃을 만든 거야. 무슨 일이 벌어졌겠어?
그 망령은 내게서 도망 가더군!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들은 감히 별과 같은 존재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거야.

Nietzsche III _ hbjjvww9-1389666615.jpg여기서 ‘타 버려 생긴 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참회(懺悔)를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인간은 원죄를 지었으니 뉘우침이 있어야 하고, 그건 절대자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원죄라는 생각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생생하게 체험될 수 있을까? 적어도 짜라두짜에게는 아니었다.

짜라두짜는 참회의 방법을 쓰지 않고 자신의 불꽃을 만들어서 헛된 망령(망상)을 쫓아냈다. 불꽃이란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열정이나 갈망을 비유한 것이다. 니체는 작품 속에서 줄곧 ‘춤추는 신’ 이나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한다. 춤춘다는 건 무아(無我)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의 주신(酒神)으로 역시 도취, 무아, 광기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술에 만취했을 때나, 장중한 음악에 압도되었을 때 빠질 수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자아의 경계가 모두 없어지고 한 없이 자유로워지는 그런 차원에 니체는 관심을 가졌다.

니체는 사람들이 기독교 설교자가 정해놓은 신앙에서 벗어나 ‘춤추는 신’ 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차원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고민에 치여 목적도 운명도 잃어버린채 지내고 있다. 실존이 없기 때문에 생이 허무해지고, 쉽고 자극적인 것에만 빠진다.

이런 상황을 탈출하는 것으로 니체가 제시한 방법은 먼저 정신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의 역동을 이해해서, 그걸 운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의식과 전의식을 분석해냈었다. 니체가 말하는 정신의 여정이 어떤 것인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어지는 글 –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 – 짜라두짜

Nietzsche I.gif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는지 저렇게 말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오랫동안 괴로웠다. 그렇다고 그냥 읽으면 느껴지듯 헛소리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앙드레 지드, 토마스 만, 카를 융 – 모두 한결 같이 니체를 좋아했고 그를 찬양했다.

니체는 24세의 나이에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바젤 대학교’ 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그 정도 천재성이 녹여져 있는데다 낯선 서양 인문고전 지식(그리스 신화, 헤겔과 쇼펜하우어 철학 등등)이 더해져 집필된 Also sprach Zarathustra를 이해하는건 힘들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상이기도 하다. 그가 하는 말에는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건 새장에 갇힌 새를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 같이 큰 힘이다.

오르지 못할 산 같던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는데 큰 짐을 덜어 주었던 책이 ‘박성현’ 님 번역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였다.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보다 경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짜라두짜’ 는 독일어 원문의 발음 음절과 운율에 맞춘 가장 자연스러운 이름이라고 한다. 계속 읽다보면 더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들린다. 먼저 이 책 서문에 나오는 니체의 철학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자.

니체의 철학은 단순 명쾌하다. 그의 화두는 다음 세가지 질문과 답으로 정리된다.

첫째, 개인 실존의 자유는 무엇을 위함인가?
“나다움에 이르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둘째, 진실은 어떤 쓰임새를 가진 것인가?
“진실인가 아닌가에 비추어 현재의 입장, 이해관계, 편견을 넘어설 때 ‘나다운 존재’ 가 될 수 있다. 진실은 ‘나’ 가 ‘나다운 존재’ 가 되기 위해 사용된다.”

셋째, 우리는 왜 ‘나다운 존재’ 가 되기 원하나?
“생명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 원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가 바로 ‘나다운 나’ 이다.”

그의 철학은 위 세가지 화두 때문에 어렵다. 위 세가지 화두를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니체는 야만인, 광인, 깡패로 느껴진다. 또한 니체는 어질어질한 정도의 속도로 건너뛰며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렵다. 빛의 속도로 생각을 전개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니체는 절벽, 심연, 불길로 느껴진다.

생명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를 원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존재가 ‘나다운 나’ 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않고 머물러 있는 사람은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짜라두짜 역시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른 살 때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적 삶을 시작한 의미심장한 나이이다. 짜라두짜는 산에서 십 년 동안이나 고요한 정신의 기쁨을 즐긴다. 이렇게 오래 사람 없이 지내도 미치거나 외로움에 빠져 하산하지 않았으니 무언가 굉장한 진리를 얻은 것 같다. 짜라두짜는 새벽잠에서 깨어나 떠오르는 태양 앞으로 나가 이렇게 말을 했다.

아! 위대한 태양이시여!
만약에 당신의 빛을 누리는 존재들이 없다면
당신의 기쁨도 사그라지겠지요.

지난 십 년 동안 저의 누추한 동굴에 오셨습니다.
만약 저나, 제가 돌보는 독수리나 뱀이 없었다면
당신께서는 이곳에 빛을 쪼여 주시는 것도 지겨우셨을 겁니다.

저와 독수리와 뱀은 매일 아침 당신을 기다렸지요.
당신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누렸고 당신을 찬양했지요.

제 모습을 보십시요!
저는 지금 저의 지혜가 지겹습니다.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지혜를 너무 많이 모았습니다.
저로부터 지혜를 가져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저의 지혜를 나누어 받으면
가끔 바보 같은 짓을 범하더라도 여전히 기쁠 것이며
가난한 사람이 저희 지혜를 나누어 받으면
지금의 가난 속에서도 새로운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지혜를 너무 많이 모은 짜라두짜는 그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위대한 태양이라 할지라도 빛을 쪼여 주는 존재가 없다면 권태에 빠진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태양(짜라두짜) 혼자 빛을 지니는 것(지혜를 가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중요한 관점이다. 빛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상대적인 개념이고 태양과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짜라두짜는 산을 내려가다 노인네 성자를 만나는데, 그는 하산을 만류한다. 하지만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광인에 가깝게 지혜로웠던 니체가 인식한 자신의 숙명이다. 스스로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몰락(하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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