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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 논란 II – 강한 적 혹은 사기꾼

 
프랑스 국적의 에르크 쉬르데주(Eric Surdej)씨는 LG 전자에서 최초의 외국인 출신 임원이 되었던 사람이다. 모멸적 방식으로 회사에서 축출된 후 <한국인은 미쳤다>라는 책을 저술했고, 우리나라에도 2015년 출간되었다. 여기서 미쳤다는 것의 의미는 일을 미치도록 많이 시킨다는 뜻이었다. 그는 책 곳곳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미친 방식으로 미친듯이 일을 하고 있는지 비판을 한다.
 
쉬르데주씨는 특이한 경력을 지닌 편이었다. 익숙한 프랑스 기업이 아닌 소니와 도시바 같은 일본 기업에서 10년 넘게 일을 했고, 그 다음 직장으로 한국 LG를 선택했다. 그가 한국 기업으로 간다고 하자 오래 같이 일했던 일본인 동료들이 뜯어 말렸다고 한다.

그들(일본인 동료)에게 한국인은 무식한 농부, 경직된 군인의 이미지였다. 도시바를 비롯한 일본의 대기업 게이레츠들은 계속해서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한국인은 미쳤다> 책 페이지 31

일본 게이레츠(系列; 기업들 간의 상호출자나 순환출자 등에 의해 형성된 콘체른Konzern, 한국 재벌과 같은 족벌세습은 없음) 사람들이 우리나라 재벌 사람들을 무식한 농부나 군인 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무튼 그는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LG 전자에 취직했다. 선택의 이유는 급여 수준도 명예도 아닌 기업의 성장 가능성이었다고 한다.

일본 소니와 도시바의 외국 국적 직원으로 13년 간 일했던 인물이 2003년 했던 대세 판단은 옳았다. 1997년의 IMF 사태 이후 우리나라 재벌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끝났다고 생각한 분석가도 많았을 것이다. 일본 기업인들은 우리나라 기업의 단점을 크게 보고, 자기네 기업의 장점은 부풀려서 보았다. 결국 한국 재벌인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들이 일본 게이레츠의 소니, 파나소닉, 혼다자동차 들에 비해 더 큰 회사로 성장해 버렸다.

이 과거를 들여다보면 웬지 비슷한 결과가 우리나라-중국 기업 사이에도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샤오미나 화웨이 같은 기업이 짝퉁, 중국 내수 전용이라는 이미지로 인터넷에서 밟히고 있는 걸 보면.

화웨이의 설립자 ‘런정페이’를 조명한 책인 <위기를 경영하라>나 <화웨이의 위대한 늑대문화>를 읽으면 중국 기업이 지닌 무서운 힘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이 중국인이어서 화웨이에 대해 호의적인 분석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한계는 있다. 하지만 중국이 아닌 서방 세계, 우리나라의 무수한 미디어는 화웨이에 대해 적의에 찬 분석을 쏟아내고 있으므로, 균형을 위해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책 저자들이 분석한 화웨이 기업의 강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사기높은 군대를 방불케 하는 일사불란한 조직력이다. 이는 설립자 런정페이 자신이 중국인민해방군 퇴직 군인이었고, 애국심 깊은 군대가 얼마나 용감하고 무모하게 싸울 수 있는지를 알아서 도입해낸 기업 경영 기법이 아닐까(6.25전쟁 당시 중공군이 썼던 인해전술을 생각해보자).

게다가 그들은 애국심이나 애사심이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업원지주제’ 라는 걸 전 회사적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화웨이의 규모가 커지면서 오래 일한 직원과 새로 입사한 직원의 주식 보유량이 크게 차이나는 등의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문제와 자금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직원들에게 주식을 팔자!’ 2003년 9월 15일, 런정페이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총 10억 위안의 주식에 대해 MBO(Management Buyout, 경영자매수)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또 여기에 참여하고자 하나 자금이 부족한 신입사원을 위해 본인이 15%만 부담하면 나머지는 화웨이가 직원 명의로 은행에서 융자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단, 이번 MBO로 보유하게 된 주식은 3년 동안 양도 및 현금화하거나 저당 잡힐 수 없었다.그의 예상대로, 이 조치가 발표되자마자 많은 직원이 신청서에 서명했다. 이때의 MBO는 오래 일한 직원과 신입사원의 지분 차이를 줄여서 특히 신입사원의 애사심과 적극성, 책임감을 크게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또 3년의 거래제한 기간을 두어서 이직률을 낮추고 화웨이 전체에 안정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화웨이인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실질적인 회사의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위기를 경영하라> 책 페이지 197

화웨이의 두번째 강점으로 보이는 건 서구의 일류 경영기법의 도입과 연구개발 분야(R&D) 중시이다. 런정페이 회장은 회사 이름을 중화유위(中華有爲; 중화민족에 미래가 있다는 의미)를 줄인 화웨이(華爲)로 했지만 중국 국내 방식(예컨대 중국 특유 관시關係나 공산 게릴라 방식의 기업경영)만 써서는 기업이 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하다. 그는 실리콘밸리와 IBM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경영 기법과 연구중심주의을 전면 도입한다.

(런정페이의 회상) 실리콘밸리를 둘러보는 내내 맥박이 요동쳤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연구방식은 낙후하고 경영관리 수준도 보잘것없고 효율 역시 선진국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불행 중 천만다행인 것은 우리 직원 개개인의 역량이 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연구방식과 경영관리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직원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겪은 일, 그때마다 느꼈던 감정 등을 상세히 전했다. 이때의 각성을 바탕으로 화웨이가 완전 출자하는 기업을 세운다는 복안이었다. <위기를 경영하라> 책 페이지 32

IBM은 화웨이에서 14년 동안 경영 혁신을 추진했다. 여기에 투입된 전문가만 무려 70명으로, 이들의 시간당 임금은 300~600달러나 된다. 아마도 역대 중국 업체 중에서 가장 비싸게 지급한 수업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성과는 어떠했을까? 1997년 IBM이 당시 화웨이의 경영 현황을 진단한 ‘보고서’ 를 살펴보자. 정확하고 미래 지향적인 고객 니즈에 대한 관심 부족, 비효율적인 반복 업무, 자원 낭비, 고비용, 폐쇄적인 구조화 프로세스, 부서 간 심각한 파벌 싸움, 사람 혹은 관계에 의존하는 부서 간 업무 프로세스, 일관성을 잃은 기업 운영, 편 가르기, 심각한 배척 현상, 개인주의, 내부 에너지 소모, 전문 기술력 부족, 무질서한 업무 진행, 영웅주의, 복제 불가능한 영웅의 성공담, 비효율적인 업무 플랜, 과거 제도 답습, 불법 복제물……
 
이러한 상황이 계속 유지되는 상황에서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런정페이의 머릿속에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거대한 눈사태가 떠올랐다. 위기감에 휩싸인 런정페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화웨이는 무너져내리기는 커녕 동종업체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경쟁자로 우뚝 섰다. IPD 혁신이 그 과정에서 얼마나 크게 이바지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현대적인 경영 제도 덕분에 화웨이는 한결 과학적으로 기업의 ‘GO’와 ‘STOP’, ‘밀고 당기는 강약 흐름’을 규범화할 수 있었다. 또한 고객 니즈를 중심으로 프로세스라는 울타리를 세워 효과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최종 소비자에게 최상의 품질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작은 갈등도 있었지만 서양의 ‘IPD 혁명’ 을 제대로 배우기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지금도 혁신은 진행되고 있다. <화웨이의 위대한 늑대문화> 책 페이지 316


 

★ 결론

1987년 런정페이는 42세 명예 퇴직 군인 신세였고, 화웨이 설립 자본금은 2만1천 위안(우리돈 360만원) 밖에 안 됐다. 하지만 화웨이와 런정페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비밀스러운 지원에 의한 성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태자당(太子黨; 중국 공산당 혁명 원로 자제로 구성된 계파)도 아닌 런정페이가 그런 엄청난 특혜를 받았을까는 의문이다. 게다가 특혜를 받는다 해도 성장하는 기업이 있고 아닌 기업도 있다.

화웨이는 중국 내수 뿐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의 소비자 시장에서도 삼성을 추격하는, LG를 압도해버리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8년 유럽 스마트폰 시장에서 화웨이는 16.85% 라는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동 기간 삼성의 유럽 시장 점유율은 33.32%, LG는 3.53%).
(http://gs.statcounter.com/vendor-market-share/mobile/europe/#monthly-201801-201812, Mobile Vendor 기준 집계)

이런 수치는 화웨이가 국제적으로 통할 제품을 만드는 서방 기업의 노하우를 충실히 전수 받은 결과라 보여진다. 평범한 유럽의 소비자가 낯선 이름의 중국 스마트폰을 품질이 좋지 않다면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정원이나 북한 정찰총국이 비밀스럽게 스마트폰 회사를 차려서 국제적 기업으로 만들고 세계 온갖 곳에 백도어를 심으려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소통이 없고 명령만 있는 경직된 조직에서는 좋은 소비자 제품이 나오기 어렵다. 중국 공산당에서도 그런 기업을 만드는 건 마찬가지로 요원할 것이다.

미국 정부는 국방 수권의 방편으로 화웨이 제품의 정부 내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백도어의 기술적 가능성만 확인한 것이지, 화웨이의 공식적인 스파이 행위를 확증한 적은 없다. 요점은 그들을 경계하는 건 좋지만 능력을 과소평가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2000년대 초 일본 게이레츠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를 무시한 것과 같은 자가당착이 될 수 있다. 화웨이의 스파이 기업 여부 판정은 미국의 정보기관이 분명 먼저 할 것이다.
 

화웨이 논란 I – 다국적 스파이 기업 혹은 선량한 피해자

 
화웨이처럼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 기업은 없는 것 같다. 설립자이자 카리스마적 리더인 런정페이(任正非)는 중국 인민해방군 퇴직 군인 출신이며, 군부와의 유착을 통해 성장했다는 의심이 있다. 게다가 통신장비 판매를 통해 전세계에서 중국 공산 정부의 스파이 노릇을 한다는 혐의도 받는다. 실제로 2018년 2월 있었던 미의회 상원 정보위원회(Senate Intelligence Committee)에서 CIA, NSA, FBI 등 주요 정보기관의 고위급 관리들은 화웨이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정보 유출이나 국가간 스파이 행위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경고를 한 바 있다.
 

The FBI, CIA and NSA say American citizens shouldn’t use Huawei phones CNN Business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8월, 화웨이 통신 장비를 미 정부 유관기관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방수권법안(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에 서명했다. 이렇게 미국은 가장 강대한 적대국의 한 통신회사의 손발을 묶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웨이는 중국의 내수와 유럽, 아프리카 시장을 포함한 전세계 판매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화웨이는 현재 전세계 최대의 통신장비 제조업체이다(IHS Market 2017년 데이터 기준, 22% 점유율).
https://www.caixinglobal.com/2018-03-19/huawei-now-worlds-largest-telecom-equipment-maker-101223256.html
 
일반 소비자 시장인 스마트폰 판매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삼성에 이어서 세계 2위 업체로 올라섰다(2018년 2분기 IDC 데이터, 출하량 기준). 애플은 2위 자리를 물려주고 3위로 내려갔고, 삼성은 1위 자리를 지키기는 했지만, 연간 성장률(Year-Over-Year Change)이 마이너스 10.4% 였다. 반면 화웨이는 전년 대비 40.9%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https://www.idc.com/getdoc.jsp?containerId=prUS44188018
 
설립자 런정페이의 공식 이력을 살펴보면 좀 놀랍다. 그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엘리트공산당원 지위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부친과 모친 모두 학교 선생님이었고, 부친은 국공내전 이전 시기에 국민당 측의 군수공장에서 회계 사무원으로 일했다는 경력이 있었다. 때문에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수많은 소란 현장 중의 하나에 불려가 홍위병에게 폭행 당하기도 했다.
 
이런 출신의 한계 때문인지 런정페이는 정식 공산당원이 되지 못한다. 중국인민해방군(PLA) 내에서도 통신 관련 공병(military technologist)으로 임관했고, 정식 군대 계급을 부여 받지 못했다. 1982년, 경제 개발 정책 심화의 일환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은 대규모 군축을 단행한다. 50만명에 달하는 현역 복무병이 전역을 당했는데 런정페이도 그 중 한명이었다. 그는 1987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의 최전선 도시였던 중국 동남부 광동성의 도시 선전(深圳)으로 이주해 작은 회사를 하나 차린다. 30년 후 세계 최대 통신장비 업체로 올라서게 되는 화웨이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와 그의 회사 화웨이의 성공 행보를 살펴보면 이들이 공산당의 스파이로 있는지, 아니면 단지 애국심 강한 기업인과 기업으로 있는지가 밝혀질 것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화웨이 논란 II – 강한 적 혹은 사기꾼

 

화웨이, 새로운 삼성 II

화웨이의 설립자 런정페이는 1944년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학교 교장, 모친도 교사였던 교육자 집안이었다. 부모의 교육열 덕분인지 명문 충칭건축공정학원(현 충칭 대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이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중국 전국을 휩쓴 이 난리로 학교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사상 투쟁 시위를 하러 몰려나갔다. 런정페이의 부친은 국민당을 위해 부역했던 경력으로 인해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기억해라. 지식은 힘이다.” 라고 당부했던 아버지의 염원대로 독학에 열중했다. 대학시절 그는 전자 기술 이외에도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의 사상을 연구한다. 아래는 그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런정페이는 암울했던 대학시절에 마오쩌둥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이는 엔지니어로서 상대적으로 경영전략에 취약했던 런정페이가 화웨이를 키우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화웨이의 연구와 기술 개발에는 마오쩌둥 사상의 ‘우수한 병력을 집중시켜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다’ 는 전략이 적용되었다. 또 자기반성과 사내 캠페인 등, 그동안 화웨이의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중대한 정책에도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마오쩌둥 사상이라고 하면 소수의 운동권 사람만 읽는 공산주의 정치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런정페이가 경영 지침으로 사용했던 건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이었던 것 같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국공내전(1946~1949년)은 2천여 년 전의 초한전(楚漢戰)과 비슷했다. 항우는 유방을 훨씬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마음대로 그를 죽일 수 있던 때도 있었다(홍문지연 鴻門之宴). 하지만 유방은 항우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무너뜨렸다. 항우가 정공을 걸 때는 지연전과 유격전을 벌였고, 상대 진영을 이간시키는 책략도 필사적으로 사용했다.

마오쩌둥도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전쟁을 이겼다. 전쟁 발발 당시 병력은 국민당군 430만 명 대 공산당군 120만 명으로 4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국민당 측은 베이징, 난징,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 장비에 있어서도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군의 잉여 무기를 넘겨받은 장제스 측이 유리했다. 공산당군은 해군과 공군이 없었고, 소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보병이 주력이었다.

미국은 물론,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도 마오쩌둥의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스탈린은 1945년 7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장제스 정부의 외무장관 송자문(宋子文)과 회담하고 중소 우호 동맹 조약(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을 체결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 권력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뒤집고 공산군은 불과 4년 만에 장제스의 군대를 붕괴시키고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특유의 게릴라(빨치산) 전술을 썼는데, ’16字 전법’이라고 불리는 전술이다.

敵進我退 적이 공격하면 후퇴
敵駐我擾 적이 멈추면 교란
敵疲我打 적이 피로하면 공격
敵退我追 적이 후퇴하면 추격
 
병력에서 앞설 때만 공격하고 필요 없이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준비 없이 싸워서는 안 되며, 승산 없이 싸워서도 안 된다.
농촌을 장악한 후 도시를 포위 공격, 섬멸한다.

화웨이가 경쟁 기업과 싸워온 과정도 빨치산 전쟁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던 것이다. 화웨이는 기술력과 브랜드 명성이 있는 다국적 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 먼저 기반을 쌓았다. 본토 기업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후 지원 서비스에 정성을 다했다. 경쟁입찰, 계약에 이르기까지 화웨이는 반드시 경쟁기업보다 많은 인력과 자금을 집중 투입해서 돌파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단지 우수한 전술의 성과만은 아니었다. 아래는 <위기를 경영하라> 책에 실린 예화이다.

…영업사원들이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각종 제품이 소개된 자료와 샘플을 둘러메고 밤낮으로 뛰어다녔지만, 1년 동안 전국 500여 현(縣)을 훑고 다녔음에도 주문량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 번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인 이춘 전신국과 계약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절박했던 런정페이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영업사원뿐 아니라 수석연구원들까지 총출동시켰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기술교류, 프로세스 점검, 설비 테스트 등을 수십 차례나 거듭했다. 마침내 최종 입찰을 하던 날, 그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그들은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체면도 잊은 채 고개를 떨구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화에서 보이듯 화웨이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헌신은 눈부실 정도이다. 장군(경영자)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실행하는 병사(직원)들의 사기가 없다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이렇게 계약을 못 따면 통곡까지 하는 특별한 기업 문화는 특별한 소유구조로부터 왔다.

‘여러분은 회사의 주인’ 이라는 팻말만 있고 실제 번 돈과 주식은 회장 가족들이 독점하는 회사가 많다. 반면 화웨이는 경영자와 종업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종업원 지주제(Employee Shareholding Plan) 회사이다. 그래서 직원의 꿈이 회사의 꿈이 되고, 회사의 목표가 직원의 목표가 되는 응집력 강한 조직을 일구어 냈다. 직장에 야전침대를 깔아 놓고 야근을 하고, ‘화웨이 늑대’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분투하는 정신은 제도에 기반한 충성심에서 왔다. 중국 기업에 대한 흔한 편견을 깰 만한 우수한 기업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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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 새로운 삼성 I

1970년대 빌 게이츠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고, 그 예측은 부를 안겨주었다. 퍼스널 컴퓨터(PC)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전 세계 집과 회사 마다 컴퓨터가 쓰이게 될 모습을 상상했고, 독점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들려고 했다. 회사 이름은 작음(Micro)과 소프트웨어(Soft)를 결합한 Microsoft 로 지었다. 비슷한 시기의 스티브 잡스도 미래 IT 시대를 잘 예견했고, 회사의 로고로 생각의 혁신을 뜻하는 뉴튼의 사과 그림을 택했다.

1987년 런정페이(任正非)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퇴직 장교로 43세 였다. 애국 군인 답게 어려운 상황에도 중화유위(中華有爲), 즉 “중화민족에 미래가 있다” 고 외치며 분투했다. 그리고 그 말을 줄인 ‘화웨이’ 를 사명(社命)으로 한 회사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2만1천 위안(우리돈 360만원), 작은 작업실에 6명의 직원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미국 특유의 개인 창의성을 강조했다면, 화웨이는 국가주의적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설립자의 개인 이력도 차이가 많이 난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 명문가 출신에 변호사 아버지를 두었고, 중퇴하긴 했지만 하버드 대학 입학생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입양아 출신이지만, 리버럴 아트 분야에서 유명한 리드 대학교 중퇴에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천재 엔지니어를 동업자로 두는 행운을 누렸다. 한 명은 고급 인텔리로서 혁신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히피 예술가 기질을 가지고 혁신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런정페이는 40대 중반 퇴직 군인 신분으로 화웨이를 설립했다. 군대에서 통신장교를 지냈던 것이 IT와 연결되는 유일한 경력. 게다가 당시 중국은 IT 변방국이어서 정보통신의 혁명을 체감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런정페이와 화웨이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다. 화웨이는 현재 연매출 50조원 규모의 거대 IT 기업이다. 2010년에는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2014년에는 톰슨로이터 선정 세계 100대 혁신 기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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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로컬기업에서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한 샤오미나 화웨이 같은 기업들은 쉽게 과소평가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 내수 시장의 엄청난 크기 덕분에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화웨이가 그 내수 시장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미 일류 통신 기술을 보유하고 중국에 진출해 있던 에릭스, 지멘스, 알카텔 같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야 했고, 중흥통신(ZTE) 같은 중국 내 라이벌과도 싸워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쉽게 보이지 않으며 정당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먼저 화웨이와 런정페이는 그들만이 쓸 수 있는 기업 전략을 사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은 최첨단 기술력에 디자인 요소와 유저인터페이스를 가미해 독점 시장을 만들어 냈다. 제 3세계 기업으로 통신회사 후발주자였던 화웨이는 최첨단 기술력도 없고, 디자인을 신경쓰는건 사치였다. 결국 경쟁자인 다국적 기업에 앞설 수 있는 로컬 서비스에 중점을 두었다. 아래는 양사오룽이라는 저자가 런정페이와 화웨이의 발전을 분석한 <위기를 경영하라>라는 책에서 옮긴 내용이다.

그들(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핵심기술만 믿고 고객관리를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각 지역 전신국과 거래할 때에도 최고 책임자 외에는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웨이는 그렇지 않았다. 런정페이는 직원들에게 거래처에서 만나는 사람의 직무나 직책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화웨이 사람들은 제품 생산과 판매, 경쟁입찰 그리고 계약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에서 만나는 모든 담당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최고 책임자, 사무직원, 수석 엔지니어, 테스트 엔지니어 등 접촉하는 모든 고객들이 존중받는다고 느끼도록 했다. 이런 자세는 나중에 해외시장에서도 계속되었다.
 
창업 초기, 화웨이는 중국기업을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중국 우전부의 간부 및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큰 도움을 받은 런정페이는 이들이 퇴직한 후에도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케팅 부서에 화웨이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분들이니 수시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우라고 당부하고 매년 기념일을 챙겨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퇴직자들은 인연을 소중히 하고 감사할 줄 아는 런정페이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런정페이는 상대 회사의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했고, 화웨이의 장단점 역시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 평가에 따라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만 철저하게 싸웠다.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를 연상시킨다. 손자병법 말고도 기업가 런정페이를 감화시켰던 다른 사상도 있었는데 다음 글에서 연결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어지는 글 – 화웨이, 새로운 삼성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