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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II – 허영심

Conquest of Happiness Tom-French_Transient_web 2어려서 읽은 동화가 실은 병적인 어른 심리를 바닥에 깔고 있다는 걸 알고 놀라울 때가 있다. 그림 형제 동화 중 하나인 ‘백설공주’ 에서 왕비는 매일마다 마법 거울 앞에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라고 말하곤 했다(억양까지 잊혀지지 않는 대사).

왕비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듣는 동안은 평온했지만 어느 날 솔직한 거울이 백설공주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하자 온갖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왕비는 허영이 지나쳐 자기보다 예쁜 여자는 살려둘 수 없다는 정신병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뛰어난 심리 해설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 책 초반부 부터 허영의 심리에 대해서 예리하게 파헤친다. 허영은 행복을 망치는 심리이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인 ‘사랑하는 능력’ 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허영심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모든 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말살해 버리기 때문에, 허영심이 지나친 사람은 결국 무기력과 권태에 빠지게 된다. 허영심은 자신감이 부족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존감을 키워야 허영심을 치료할 수 있다. 자존감을 기르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적인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활동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 뿐이다.

​지나친 허영은 자신감의 부족으로부터 온다고 말하고 있다. 놀라운 해석이다. 자존심이 너무 세서 허영심이 강한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불안해지고 공허해지고, 결국 그걸 메우기 위해 허영에 빠지는 게 맞다. 결국 허영심은 과거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으로부터 오는 반동 심리, 병적 심리가 된다.

그래서 허영심 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상처의 기억으로 크게 어그러져 버린 자아의 감옥을 허물고, 즐겁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의 본능은 완전한 자기중심성과는 거리가 멀고, 자기도취적인 경향이 있는 사람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과 마찬가지로 늘 자신을 인위적으로 제약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난 사람이 가진 특징 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받는 사랑은 마땅히 베풀어야 할 사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이 비슷한 수준으로 존재할 때 사랑은 그 최대의 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은 남을 잘 사랑해주는 능력도 갖춘다. 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외모가 아니더라도 매력있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오프라 윈프리 같은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오만하지 않다. 이해심이 있으며 말을 재치있게 한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들이다. 허영심을 버리고 대신 가져 볼 만한 미덕이다.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I –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 이라는 영화의 이름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 ‘Eloisa to Abelard’ 에서 따왔다.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는 실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기계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는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기억을 지웠는데, 그걸 모르던 남자는 간만에 만난 여인이 자신을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잊혀지지 않는 장면).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여자와 똑같은 방법을 써서 자기 기억도 지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감이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는 탓인지 모르지만, 다시 만난다. 처음 우연히 마주쳤던 기차가 닿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우해서 다시 똑같이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의 상징과 결말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잘 통하는 면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태양은 신神, 절대자, 하나님을 상징하고, 영원한 햇살은 영원한 사랑, 즉 아가페가 된다.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구절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영원한 사랑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 은 영원회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 옮겨온 구절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사랑에 제대로 빠져있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 둥둥 떠다니는 것 같고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다. 그런 순간에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이 끝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티끌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본질 안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고, 자신의 공부와 일과 이상(理想)을 포함하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랑이 영원히 돌아온다면 영원회귀가 된다. 니체는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 라는 말을 했는데, 모든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아무런 주저(티끌) 없이 자기 삶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애를 이룬 사람이다. 이 운명애가 극진해지면 영원회귀로 들어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절들을 읽어보자.

그러나 내가 엮어져 있는 인과의 매듭은 영원히 회귀한다. – 그것이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 회귀의 그런 원인들의 일부인 것이다. 이 태양과 더불어, 이 대지와 더불어, 이 독수리와 더불어, 이 뱀과 더불어, 나는 다시 돌아오리라. 새로운 삶, 혹은 보다 나은 삶이나 유사한 삶으로가 아니라, 최대의 것에 있어서나 최소의 것에 있어서나 지금과 동일한 이 삶으로 나는 영원히 돌아오리라. – 다시 한 번 만물의 영원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 또다시 대지와 인간의 위대한 정오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금 인간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

나와 내 운명은 오늘을 향해 말하지 않으며, 결코 오지 않을 날을 향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미 말을 하기 위한 인내와 시간,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와야 하며 결코 지나쳐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와야 하며 그냥 지나쳐 가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위대한 하자르, 우리들의 거대하고 먼 인간제국, 차라투스트라의 천년왕국이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다시 살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고스란히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 성립하고 이것이 영원회귀의 근거가 된다. 극진한 시간에서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영원이 된다. 설령 기억이 지워진다해도 의지는 같은 운명을 다시 만들어 낸다. 마치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들 처럼. 그래서 영원한 회귀 안에서는 생성이 그 자체로 시간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어지는 글 –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