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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出師表), 극진히 위하는 마음 – 삼국지연의 제갈량(諸葛亮) 분석 I

의대 학생 시절 병원 실습을 돌던 중 겪은 사건이다. 한 중년 남자가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고,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동행했다. 혈액검사를 해 보니 전해질의 불균형이 발견되었다. 칼륨(K = Potassium) 수치가 낮았는데, 이는 가장 먼저 교정해 주어야 하는 혈액 전해질(Serum electrolyte) 이다. 칼륨은 근육 세포의 움직임에 큰 역할을 하므로 수치가 너무 낮거나 높으면 심장 부정맥이 발생해서 급사할 수 있다.

의사는 칼륨을 보충하기 위해 염화칼륨(KCl, K 보충을 위해 흔히 쓰는 약제) 주사를 처방했고 신규 간호사가 KCl 앰플을 딴 후 생리 식염수에 혼합해서 환자에게 정맥주사 했다. 그런데 이 간호사는 그만 혼합 농도를 혼동해서 과량의 KCl을 단숨에 주사해 버렸다. 중년 남자는 온몸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

남자를 동행한 여자는 사실 아내가 아니었고 애인이었다. 본처와는 별거 중인 듯 했다. 여자는 죽은 남자를 울며불며 부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끔찍히 잘 해줬는데…”

이 외침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누군가를 끔직하게 아껴 준다는 것, 극진한 마음으로 섬긴다는 건 인생을 걸어볼 미학이 되는 것 같다. 필자는 이성 관계가 아니어도 이렇게 극진한 마음을 평생 보여주었던 사람이 자주 떠오른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재상 제갈공명이다. 그는 당대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적 충성에 투철한 사람이었다. 제갈량이 자기 주군을 위해 했던 언행(言行)들을 살펴보면 이보다 더 헌신하는 마음이 세상에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제갈량이 촉(蜀)의 후주(後主)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 내용의 일부이다(이문열 역 삼국지연의 참고).

선제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시기 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익주는 싸움으로 피폐해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걸린 위급한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罷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그러하되 곁에서 폐하를 모시는 신하는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된 무사는 밖에서 스스로의 몸을 잊음은, 모두가 선제의 남다른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께 이를 보답하려 함인 줄 압니다.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제갈량의 문장은 간명하면서도 무겁고, 진정이 느껴진다.

신은 본래 아무 벼슬 못한 평민으로 몸소 남양에서 밭 갈고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목숨이나 지켜 살 뿐 조금이라도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쓰이게 되기 바라지 않았습니다.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선제께서는 신의 보잘것없음을 꺼리지 않으시고, 귀한 몸을 굽혀 신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으시고 지금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이에 감격한 신은 선제를 위해 구치로 닫고 헤맴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라는 구절이 나온다. 제갈량의 일생은 자신을 알아준 군주에게 완전히 바쳐진 것이었고 그의 아들을 위한 대를 이은 충성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 합니다. 원정을 청하는 표문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올라 말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泣, 不知所云.

출사표의 결미 부분이다.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그런지 잘 말해주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