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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실존주의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사상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이전의 근대적 합리주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상을 처음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가 어떻게 다른 사상인지 위키 백과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 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조금 추상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은 참 맘에 들었었다. 일단 내게 어떤 운명이 있다는 것이 새롭고, 내가 그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건 꿈꾸며 살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정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가 한 말을 또 참고해보자. 그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본질(本質)이라는 건 본래가 되는 성질 혹은 가치이다. 그런데 이 가치는 사회에 의해서 정의된다. 본질이라고 통용되려면 다수의 동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연장선으로 삶의 본질이라는 것도 사회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나라는 유교 전통이 강한 곳이니 출세와 지위가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어려서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고, 선생님이 좋은 대학가라고 해서 대학가고, 다 크니 주위 사람들이 선망하는 위치를 찾으려 노력했던 삶이었다. 즉 삶 대부분이 운명이라는 말을 쓸 가치가 없게 타성적이었다. 이런 타성이 지속되면 편견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반면 실존(實存)은 실제가 되는 존재이다. 실존을 찾기 위해선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남들이 뭐라든 신경 안 쓸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의 의견도 어차피 사회의 통념이고 강요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경건하지만 사색적이고 우울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에 뛰어난 사고 능력을 키운 것 같다. 고독과 소외감에 고생하다보면 신선한 꿈을 찾게 마련이다. 1835년의 여름방학, 젊은 22세의 대학생인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을 떠나 셸란(Saeland)의 북부를 두루 여행한다. 그는 북 셸란의 최북단에 있는 길레라이레(Gilleleije)란 마을에 이르렀고, 장엄한 해협의 물결이 보이는 절벽 위에 서서 사색에 잠겼다. 압도적인 자연 경관의 도움인지 그는 예지의 절정을 경험한다. 키르케고르는 마침내 자기의 사고와 생존의 결정적 근거를 찾아내었다고 하는데 아래가 그의 말이다. 실존주의 사상이 담긴 서사시 같다.

나에게 참으로 없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었다. 내게 없었던 것은 결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 어떤 행위에도 일정한 인식이 앞서야 하므로 인식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참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계신가를 아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내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념(Idee)을 찾아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낸들 그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인식의 명령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며, 또 그 명령을 통해서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명령이 내 안에 생생하게 집어넣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것이 내게 없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이미 집도 얻고 가구도 장만했지만 거기서 인생의 희비를 같이 나눌 연인을 아직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내게 없었던 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사상 전개를 결코 내자신의 것이 아닌 것 위에, 즉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 위에 세우지 않고 내 생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맺어져 있는 것 위에, 즉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신적(神的)인 것에 뿌리박고 있으며 비록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굳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것 위에 세우게 될 것이다(진리란 Idee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내가 찾아온 자기를, 나의 혼을 얻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자신을 알도록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gnothi seauton). 사람이 평안함과 의의를 얻는 것은 그가 자기자신을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았을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길은 절망이라고 하는 저 따분한 저주 받은 동행자 곧 삶의 이로니를 면할 길이 없다. 내면적 근거가 없는 사람은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몸을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나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The thing is to find a truth which is true for me, to find the idea for which I can live and die.

앳된 청년이었던 키에르케고르의 이 깨달음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의미했다. 나와 상관 없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원하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타성적 삶을 사는 것은 안락한 가구가 있는 집에 사랑하는 연인 없이 사는 것처럼 맥 빠진 일이다. 하지만 실존을 찾아 사는 것은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연인 – 키르케고르의 경우 레기네 올젠의 이미지가 투영됨 – 과 같이 사는 것이다. 이것이 키르케고르 스스로 불안과 우울이 엇갈리는 생 한가운데서 찾아낸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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