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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作 – 착하게 살다가 망하기

 
우연으로 운명이 우습게 돌변하기도 하지만, 세상 일들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오래도록 쌓였던 원인들이 점점 뭉쳐지고, 우연한 사건은 단지 커진 덩이를 살짝 밀어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잣집 아이를 보고서, 훗날 이 아이가 자살 시도를 5번이나하고(3번의 동반자살 시도 포함), 마약중독자가 되고, 공산주의 조직원도 되보고, 정신병원에 격리도 될 거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간 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일생에는 그런 일들이 펼쳐졌고, 이 비극은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요조’를 통해 거의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다.
 

좌측에서 두 번째 웃고 있는 아이가 오사무 (출처 M Train.Japanese. Young boy Osamu)

 
이 작품의 매력은 타락하고 더 타락하는 주인공의 몰락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우습게 펼쳐진다는 데 있다. 주인공 소년 오오바 요조(大庭葉蔵)는 소설 속 회고록의 평가대로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려, 다른 사람 눈에 거슬리거나 주목 받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따라서 주변인의 기색과 기분을 언제나 살펴야 했으므로 인간 관계는 피곤하고 피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다만 요조 못지 않게 순수하면서 이미 망해서 부담이 안 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가까운 사이가 되곤 했다. 아래는 고등학생 요조가 술집에서 절망적 처지에 있는 기생 쓰네코을 만났을 때의 일화이다.

함께 자면서 그 사람은 나보다 두 살 연상이라는 것, 고향은 히로시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여자는 “나한테는 남편이 있어. 히로시마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었어. 작년 봄 함께 가출해서 도쿄로 도망쳐 왔지만, 남편은 도쿄에서 제대로 일을 잡기도 전에 사기죄로 잡혀서 형무소에 들어갔어. 나는 매일 이런 것 저런 것 차입하러 형무소에 다니고 있지만 내일부터는 그만둘래.”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된 셈인지 여자의 신세타령 같은 것에는 전혀 흥미를 못 느끼는 성격인데, 여자들이 얘기를 잘 못하는 것인지 얘기의 중점을 잘못 잡는 것인지, 어쨌든 저는 늘 마이동풍이었던 것입니다.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탄보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 라고 하지만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지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 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무엇보다도 그 창녀들은 명랑했습니다)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낸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이런 엄청난 말을 아무 주저 없이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이 수기 전체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요조는 아주 드물게 자신과 비슷한, 궁상맞아 보이는 이 여자에게 깊이 빠졌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진게 아니어서 동침 후 그녀를 다시 찾지 못한다. 학생이라 돈이 없다는 핑계를 남기고는.
 
하지만 또 어느 날 친구와 같이 술 먹어서 용감해진 주인공은 다시 그녀가 있는 기생집을 찾는다.

“돈 떨어지는 날이 인연 끊어지는 날이라고 하셔서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담이었나 봐. 정말로 와주지 않았어. 참 복잡한 인연의 끝이네. 내가 돈을 벌어서 대주어도 안 될까?
 
“안 돼.”
 
그러고 나서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 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게이샤 여자와의 동반 투신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실제로 했던 두 번째 자살 시도를 그린 것이다. 그가 21세의 나이 때, 긴자의 술집여자이자 유부녀(18세 어린나이의 유부녀였다)인 타나베 시메코란 여자와 같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신기하지만, 여자는 죽고 남자만 살아서 바다에서 나왔다.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이 허리띠는 가게 친구한테 빌린 거니까 하면서 허리띠를 풀어서는 개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고, 저도 망토를 벗어서 같은 곳에 놓아두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기도 했고 또 아버지 이름도 얼마간은 소위 가치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문에서도 꽤 크게 다루었나 봅니다.
 
저는 해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고향에서 친척 중 한 사람이 와서 이런저런 뒤처리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온 집안 식구가 격노하고 있으니 이젠 생가로부터 의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저한테 말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보다도 죽은 쓰네코가 그리워서 훌쩍훌쩍 울고만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때까지 만났던 숱한 사람들 중에 그 궁상맞은 쓰네코만을 좋아했던 것이니까요.

이런 막장스런 자살극도 주인공 요조의 인생 굴곡 전체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순수했던 한 인간이 망가져가는지가 작품을 통해 쭉 나오는데, 다음 글에서 이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作 – 죽음도 생과 같다면

자기비하는 괴로운 생각 같지만 실은 중독성이 있다. 막장에 몰리면 유머 같은게 생겨서 그렇다.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1909년~1948년)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인간실격>이라는 작품으로 그렸었다. 소설 제목이 어울리게 가출, 불륜, 알콜중독, 마약중독, 정신병원 폐쇄병동 감금, 중간중간 총 네 차례 자살시도로 이어진 생활을 하다가, 기생과의 동반자살 성공으로 죽었다. 하지만 자기비하의 끝이 우울만은 아니어서, 대표 장편소설 <사양斜陽>에서 주인공 여성의 입을 빌어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반면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삶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탐구한 끝에 아래와 같은 문장을 남겼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그는 자살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철학적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안 하기로 했다. 이런 긴 사색의 결과를 <시지프 신화>, <이방인> 등의 저작으로 표현했다. 카뮈는 젊은 나이(만44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영광된 삶을 살다가 교통사로로 사망했다. 이것도 참 부조리 했다. “자살은 아니다” 라는 결론을 위해 그렇게 노력한 사람이 사고로 죽다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의 성격이 투영된 존재로, 내성적이면서 무감각한 태도를 지녔다. 작품 속 대사처럼 세상에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생각해서다. 뫼르소는 양로원에 나가 살던 어머니가 죽은 걸 알고도 슬퍼하지 않는다. 대신 장례식장에 가서 담배를 피고 사탕을 먹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는 이런 행동을 눈길 끌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감정이 그에겐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사회의 이방인으로 되었다.

실은 사람은 모두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기일 때 부터 엄마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명 자체를 잃기 때문이다. 바닷가 모래 사장의 아기 거북이는 알에서 나오자마자 바닷물 쪽으로 마구 기어간다. 다른 어른 거북이가 “바닷물에 빨리 안들어가면 너는 죽어” 라고 소리쳐 준적도 없지만 아기 거북이는 본능적으로 기어간다. 인간도 비슷하게 아기는 엄마를 찾고 칭얼대도록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러니 뫼르소가 사회성도, 가족과의 유대도 잊고 이방인이 된 것은 분명 길고 긴 세월 좌절과 배신과 분노와 허무를 견디며 조용히 그렇게 된 걸로 보인다. 비정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장기간의 스트레스가 흔한 일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공장에서 찍혀나오듯 사회에 나오고 있다. 그 중 이방인 기질이 특출난 사람은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신문과 언론에 싸이코패스 범죄자로 낙인찍혀 등장한다. 뫼르소도 살인을 저지르고 사회에서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범죄자와는 뛰어나게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건 그가 진지한 사색을 통해(작가 카뮈처럼) 삶의 방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확립한 사람이고, 그걸 지키느라 자기 목이 잘리는 길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 뫼르소에게 있어 생의 이념은 사랑이나 혁명, 잘 먹고 잘 살기 혹은 사회적 성공 같은게 아니었다. 순수한 에너지, 순수한 리비도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게 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아래 단락들을 읽어보자. 뫼르소를 사랑했던 동네 여자 마리와의 일화이다.

어제는 토요일이라 약속했던 대로 마리가 찾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몹시 정욕을 느꼈다. 마리가 붉고 흰 줄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력 있어 보이는 젖가슴이 완연히 드러나 보였고, 햇볕에 그을어 갈색이 된 얼굴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 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건 중대한 일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기와 같은 관계로 맺어진 다른 여자로부터 같은 청혼이 있었어도 승낙을 했을 것인가. 다만 그것만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 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길이 없었다. 잠시 또 묵묵히 있다가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이상스러운 사람이라고, 아마 그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내가 싫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노라니까, 마리는 웃으면서 내 팔을 붙들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든지 그녀가 원한다면 곧 결혼을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장의 제안을 이야기해 주니까, 마리는 파리를 알고 싶다고 했다.

예쁜 여자에게 성욕은 느끼지만 사랑은 느끼지 않는다. 여자가 그에 대해 질문하면 솔직하게는 대답한다. 이상한 것은 마리가 그런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된 것 같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연인을 대할 때 성욕을 추구하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순수하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강할수록, 길어질 수록 위선스러워진다. 뫼르소가 순수하다고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는 누구나 느끼는(어린이 제외) 가장 강렬한 열망에 편견이 없으며, 사회적 고정 관념에는 무감각하다. 작가 카뮈의 설명에 따르면 뫼르소는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이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사람이다.

뫼르소는 우연한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고, 재판부 검사 및 대중들로부터 한껏 비난 받게 된다. 살인 자체는 사소한 시비 끝에 난 우발로 해석될 수 있었지만, 모친상 때 슬퍼하지 않은 것, 모친상 다음 날 여자랑 잤다는 사실이 같이 어울리면서 완전히 싸이코패스로 찍힌다. 하지만 뫼르소는 항상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느끼고 내면 에너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은 것도, 그 다음 날 여자랑 동침한 것도 스스럼 없이 느꼈었다. 그는 사회를 통해 만들어진 이방인이었고, 정직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싸이코 취급한다.

다시금 종이 울리고 피고석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 밀려온 것은 장내의 침묵, 그리고 그 젊은 신문기자가 눈을 옆으로 돌린 채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야릇한 감각이었다. 나는 마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시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나에게 이상스러운 말로, 나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히는 감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배려의 표시 같은 것 이었다고 생각된다. 간수들은 나에게 아주 부드럽게 대했다. 변호사는 나의 손목 위에 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재판장이 나에게 무엇이든지 덧붙여 말할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끌려 나온 것은 그때 였다.

사람을 법으로 심판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공적 힘의 공통적인 목소리는 왜 그렇게 사느냐, 너는 옳지 않다 똑바로 살아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결국 같은 차원의 세계에 산다. 자기에게 옳고 진리인 것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는 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신을 믿던 시대에는 그런게 통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 사상이,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 도리가 그 절대적 믿음이었고, 그걸 어기는 개인이나 집단을 모조리 죽이기도 했다. 뫼르소는 하지만 믿지도 않는 사회 이념에 맞게 자기를 꾸미지 않았고(어머니가 죽은 게 실은 너무 슬펐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님! 이라고 하지 않음), 순간의 자연과 현상에 충실했다(그래서 장례식 다음날 마리랑 자고, 살인 재판이 진행되는 중간에도 밖의 거리의 뜨거운 바람과 아이스크림 장수의 나팔소리에 시적 감상을 느낌). 하지만 그게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결국 사형수가 되고 만다.

그는 단두대가 설치된 광장에 주인공으로 끌려갈 날만 기다리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진지한 사색을 계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서 생과 죽음이 어색함도 공포도 없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현상을 체험한다. 세상이 자신과 닮아서 형제처럼 이어져 있는 느낌, 다르게 말하면 자기 마음의 소리와 외부 세계의 소리가 박자가 완전히 맞은 채 합주되는 것 같은 상황이다. 사형수를 위로하러 방문했던 카톨릭 사제와의 대화에서 시작해 그는 이런 생사生死의 초월을 극적으로 외쳤다. 읽으니 눈물이 났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한동안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그는 마침내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