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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영 개인사업자와 병의원에 도움되는 내용들

프레카리아트 II – 위험한 데는 니가 가라


 
중학생 시절 환상의 영화였던 <에일리언> 시리즈에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 속 세계관에는 하얀 우유 같은 피를 가진 인조인간(synthetic)이 나온다. 제조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인간보다 하위의 존재이다. 영화 2탄에서 주인공 리플리(시고니 위버)를 비롯한 일행이 다수의 에일리언에게 포위되었을 때, 누군가 위험한 배관을 통과해 드롭쉽(dropship)을 부르러 가는 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영화 전체를 통해 오도방정을 떨던 허드슨 일병(빌 팩스톤)은 인조인간 비숍(랜스 헨릭슨)을 그 임무에 보내야 한다고 흥분해서 떠든다.(Right, Bishop should go. Good idea.)

비숍은 체념한 듯 이렇게 말한다. “나도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조인간이라고 바보는 아니니까요.” (Believe me, I’d prefer not to. I may be synthetic, but I’m not stupid.)

영화에서는 에일리언이 우글거리는 통로에 인조인간을 보내면 되었지만, 지금 현실 세계에서는 위험한 작업에 비정규직 일회용 청부 인력을 보내고 있다. <프레카리아트 –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책에 나온 생생한 묘사는 아래와 같다. 일본회사 <니콘>은 고위험 작업에 자기네 직원을 쓰지 않고 대신 청부 회사 <네크스타>에게 의뢰를 한다. 네크스타는 ‘유지’ 라는 남자를 작업에 투입했고, 유지 씨는 나중에 자살한다.

1월에는 동생이 유지 씨를 찾아왔다. 유지 씨는 평소 별로 가지 않는 게임센터에 동생을 데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는 게임을 하지 않고 게임에 열중한 동생을 싱글벙글 웃으며 그저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재판에 의견서를 제출한 정신과 의사는 이 행동에 대해 “추억 만들기 행동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기술했다. 과로에 의해 이미 우울증이 발병한 것이다. 이즈음부터 유지 씨의 머리에는 ‘자살’ 이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위장 청부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유지 씨가 죽었을 때 어머니는, 네크스타 쪽 직원에게 “(유지 씨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잘 모르겠다.” 는 것이었다. “클린룸이라는 방에서 일했지만, 저희는 들어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청부 회사는 현장이 어떤지도 모르고, 노동자가 어떤 심한 취급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관리라는 것도 소용이 없다. 파견처 회사는, 자기 회사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부리는 데에 무슨 방법이든 가리지 않는다.
 
유지 씨의 경우에 업무상 지시는 니콘이 내렸고, 네크스타는 업무 지시를 전혀 하지 않았다. 또한 유지 씨의 노동 시간에 대해서도 네크스타는 니콘에서 월말에 보고를 받아봐야 한다는 식이었고, 네크스타 쪽 직원은 유지 씨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면담을 할 뿐이었다. 결국, 외부에서 온 노동자인 유지 씨는 약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사용되기만 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 우울증이 생겼고 자살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이 구조적인 ‘살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니콘 같은 대기업은 퇴직금이나 사회보험료를 안 주는 인력을 딱 필요할 때만 써서 좋다. 소중하기도 하고, 불만을 토로할 가능성 있는 정직원을 보호할 수 있어서도 좋다. 네크스타 같은 청부 기업은 대기업으로부터 이런 일 의뢰가 끊임없으므로 돈을 벌어서 좋다. 유지 씨 같은 프레카리아트 처지 사람은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이런 곳에서 일하다 우울증에 빠져 자살의 길로 간다.

이 책을 읽고 제일 느낀 점은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정규직-비정규직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유교식 자본주의 모델로 전후 경제 발전을 이끌고, 1980년대 말만 해도 향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었다(지금의 중국도 같은 예상하에 있다). 하지만 익히 알려져 있듯이 1990년대 초부터 벌어진 부동산 버블 붕괴로 경제성장률 0퍼센트대를 10년 넘게 달성하며 경제가 주저 앉았다. 이런 장기 불황의 타개책 하나로 일본 대기업 집단과 정부는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 노동 양식을 보급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 하에서 유리한 자는 계속 유리해지고, 불리한 자는 계속 이용당한다는 점이다. 에일리언의 인조인간 처럼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볼멘 목소리가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도 커지고 있는 걸로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책 안의 자조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나도 우리나라 TV에서 화장으로 무장한(치킨 먹을 때도 1mm 두께 얼굴 화장 하고 먹는다) 연예인이 현실과 동떨어진 꿈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광고를 볼 때면 비슷한 감상이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도 텔레비전에서 전자제품 광고 같은 걸 보고 있자니 현란한 화면 너머에서 ‘이 상품은 위장 청부로 일하는 프리터의 미래를 소진시켜 만든 것입니다.’ 같은 내레이션까지 들리는 듯했다.

자차 미가입 차량 폐차, 중고차 구매 II

전 애마를 폐차 시킨 후 한동안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하지만 미세먼지를 많이 흡입해 목이 아파지고, 집 – 회사로 싣고갈 짐도 많아져 어쨌든 차를 사기로 했다. 사고로 돈이 많이 깨졌기 때문에 비싼 신차 말고 중고차를 알아보았다.


1. 쓸만한 중고차 차종 검색

잔존가치 높고, 고장 안 나는 차종을 찾았는데, 아래 기사를 참고할 만 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no=76786&year=2018
 
해외의 중고차 품질 평가 기사는 도움이 더 많이 되었다. ‘컨슈머리포트(Consumer Report)’ 는 미국 소비자연맹 발간의 잡지인데, 기업으로부터 무료 샘플이나 광고비를 전혀 받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전에 노트북 컴퓨터 사는 등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기사 하나도 허투로 쓴게 없어 좋았다.
 
아래 링크의 컨슈머리포트 기사를 보면 미국 시장에 소개된 다양한 가격대의 중고 차종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기아 소울이 3번이나 중복 추천되어 있던 것, 도요타 렉서스는 거의 전 기종(CT, ES, LS, GS, RX)이 중복 추천되어 있는게 인상 깊었다.
https://www.consumerreports.org/used-cars/best-used-cars-by-price/


2. 중고차 매물 검색

고장 적은 중고 차종을 검색한 후에는 실제로 차를 판매하는 딜러나 개인을 찾아야 했다. 필자는 SK엔카 를 선택했는데, 일단 타 사이트(카즈, 보배드림)에 비해 매물 수가 더 많고, SK엔카 직영점에서 사면 세금계산서 받고, 카드 결제하는게 정식으로 처리되어서 개인사업자 세금 절세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사이트를 통해 원하는 차종을 원하는 가격대로 검색했다. 필자는 무사고 차량만 집중적으로 찾았다. SK엔카의 각 매물 소개 글에서 대부분 사고 여부를 확인 가능했고, 그 내역이 없다면 카히스토리 사이트에서 해당 차의 보험 처리 내역을 유료(한 건당 1천원 정도)로 확인할 수 있다. 100만원 미만의 처리 건으로 범퍼/휀더/문짝/본네트철판 등을 단순 교환한 것은 무사고 차량으로 분류된다.
www.carhistory.or.kr


3. 중고차 딜러, 개인 판매자 만나러 가기

개인 판매자를 만나러 가는 것과 정식 딜러를 만나러 가는 건 준비 과정이 완전히 다르다. 개인 판매자 차량의 경우 <차량등록원부>와 <카히스토리> 확인은 기본으로 미리 한다. 시승에 필요한 자동차보험도 미리 챙겨야 하고, 차량 이전등록도 두 당사자가 같이 시청/구청에 가서 해결해야 한다. 자세한 과정은 아래 사이트에 잘 정리되어 있다.
www.plip.co.kr/bbs/board.php?bo_table=u_tipntech&wr_id=104

딜러 판매차량의 경우 이보다 훨씬 수월하다. 중고차 시승시 필요한 보험도 중고차 업체 앞으로 걸려있고, 차량 이전등록도 신분증 사본만 맡기면 업체에서 대리로 해준다. 구매할 차량 가격과 이전비(이전등록세금+딜러수수료)를 지불하고, 자동차보험만 가입하면 바로 차를 몰고 나갈 수 있다.

자차 미가입 차량 폐차, 중고차 구매 I

 

폐차와 중고차
 
사회 초년병이 되어 처음 구입했던 차는 소형 하이브리드 승용차였다. 파워가 딸리긴 했지만 연비가 좋아서 7년 동안 잘 타고 다녔다. 하지만 결정적 실수를 시작한 건, 5년 동안 사고 한 번 없었다고 자차 가입을 2년 전부터 안 한 것이었다. 자동차보험료가 한 해에 몇 십만원 할인되기는 했다. 하지만 급발진 사고에 말려들어 상기 사진처럼 차가 망가지자 막심한 손해가 시작되었다.
 
자차 보험이 있으면 차가 망가져 폐차를 하게되어도, 중고차 시세 기준으로 보상을 받을 수가 있다. 하지만 자차 미가입 차량 폐차는 소정의 폐차매입비만 받고 말소를 하는 것이다. 나의 애마를 그렇게 고철 덩이로 처리한건 가슴아픈 일이었다. 그래도 돈을 조금이라도 남기려면 그러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자세한 과정은 아래와 같다.


1. 폐차 전 준비

– 자동차 할부금, 과태료, 벌금 등을 완납 상태로 만듬
– 자동차 등록증, 차주 신분증을 준비
– 자동차 보험 약관상 주행거리 특약 등이 있다면 미리 계기판 사진 찍어두기 (차 폐차 후에는 찍을 수가 없으므로)


2. 폐차 전문 업체 의뢰

– 인터넷에 “폐차 매입” 을 검색해도 되고, 아는 차량 정비소 통해서 업체를 알아볼 수도 있음. 폐차할 때는 폐차하는 비용을 차주가 내는 게 아니고, 폐차 매입 비용을 업체에서 받을 수 있다. 고철값만 치면 40만원 정도, 써먹을 부품이 많은 인기있는 차종의 경우 그보다 더 받는다.


3. 자동차 말소 처리

– <폐차 증명서>, <자동차 등록증> 챙겨서 관할 관청(시/구청/차량등록소) 방문, 자동차 말소 등록을 진행. 폐차 전문 업체에 부탁하면 대리로 해주는 경우도 많음. <자동차말소등록사실증명서> 서류를 받아 보관한다.
– 폐차 1개월 이내에 말소처리를 하지 않으면 50만원 과태료 부과됨. 말소 안 하면 자동차 관련 세금이 계속 날아오기 때문에 당연히 공식 말소를 해야함.


4. 자동차세 환급

– 말소처리 후 관할구청 세무2과에 전화(인터넷 검색하면 번호 나옴). 미리 납부했던 자동차세 환급을 요청(자동차세는 보통 연초에 1년치를 미리 납부함).
– 담당 공무원님이 차량 말소 상태를 확인한 후, 통장 번호를 불러달라고 함. 1~2주 내로 통장으로 환급금액이 들어옴.


5. 자동차 보험료 환급

– 폐차증명서, 신분증, 통장사본 등 서류를 준비한 후 가입 보험사에 전화를 해서 처리. 1년 선납 금액 중 말소처리 된 이후 기간 만큼의 금액을 환급 받을 수 있음.

여기까지 하면 차량 폐차와 말소의 복잡한 과정은 모두 끝난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얼른 중고차를 사서 일상 생활로 복귀하는 좋은 방법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자차 미가입 차량 폐차 중고차 구매 II

비트코인의 성공 이유 – 암호화폐 쉽게 설명

 
최근의 비트코인 가격 폭등 사태를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2년전 시작한 중국 주식 투자에서 경험했듯이, 타이밍을 일찍 잡지 못하면 돈을 벌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미 놓친 것 같은 대박을 생각하며 혼자 울적해졌다. 하지만…
 
비트코인
 
상기 그래프는 톰슨-로이터, 블룸버그 등 세계 유수의 금융정보 분석 기관들이, 지난 40년간 일어났던 전지구적 금융자산 버블을 수치화 해서 내놓은 것이다. 이걸 보니 비트코인이 단시간에 얼마나 올랐는지 감이 잘 온다.
 
2015년 말에 투자해서 지금 뛰어 내렸으면 집도 차도 회사도 같이 달라졌을 텐데.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암호화폐를 공부하며 투자 진입시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블록체인 화폐가 단지 한 번 떴던 투기 수단으로서 사라져 버릴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관리 주체가 없는 송금 – 화폐의 저비용 전지구적 이체

실물 화폐도, 예금이나 증권도 관리 기관이 필요하다. 국립은행, 민간은행, 민간금융투자회사 등이다. 이들이 우리나라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20%가량이나 된다.

MK 증권 : 금융업 올 시총 폭풍성장…은행株선 하나금융 증가율 1위

 
이렇게 큰 기관들이 빌딩을 임대하고, 설비를 갖추고, 직원들 월급 주고, 나라에 세금을 내고 하는데는 천문학적 돈이 들어간다.
 
암호화폐의 획기적인 점은 제삼의 관리 주체 없이, 즉 돈 많이 드는 기구 없이 낮은 비용으로 전세계 개인과 개인이 자산 거래를 하는 전대미문의 생태계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비트코인은 특정 국가에 상장된 특정 기업을 모체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 창시자는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인류 역사상 집도 사고 땅도 살 수 있는 화폐가 실체 없는 민간인으로부터 비롯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발명한 수단이 개인 스마트 기기가 지배하는 시대에 맞는 안전하면서도 획기적인 컨셉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2. 블록체인 (block chain) – 화폐의 신용성 보증

만일 자신이 찍힌 몰카 야동이 <소라넷> 같은 곳을 통해 전국에 유통되고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면, 생각만으로 모공이 송연해진다. 인터넷은 익명으로 야동을 포함한 수 많은 데이터를 무한정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집단 공유의 가능성을 전자화폐의 신용성을 위해 쓴다면 어떨지.
 
블록체인은 인터넷을 통해 기록되는 공공 거래 장부이다. 암호화폐의 전체 거래 리스트를 끊임없이 업데이트 하게 되는데, 각각의 기본 단위인 ‘분산 노드’의 기록은 독립적으로, 거의 실시간으로 개정되기 때문에 거래 내역을 조작해서 이익을 챙기려 하는 해커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해커 집단이라도 전세계 PC와 스마트 기기에 퍼져 있는 특정 야동을 모두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블록체인은 수많은 개인이 보유한 다른 종류 스마트 기기의 각기 다른 보안 암호와 방화벽에 의해 보호되고 있고, 한 곳의 노드에서 에러가 발생하거나 해커 공격이 들어와도, 다른 다수 노드의 데이터를 통해 정보 신뢰성(전체 장부의 거래 기록)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조작이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먼 미래에 대규모 조작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파워를 지닌 해커집단이 등장할 지라도, 조작자 보다는 정직한 채굴자가 되는 편이 그들의 이익에 더 부합하게 될 확률이 높다.
 

3. 채굴 (mining) – 화폐의 가치하락 방지

비트코인을 얻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국가 공인 화폐를 통해 구매하거나, 비트코인 거래 샵에서 현물과 교환하거나, 고성능 컴퓨터를 돌려 채굴(mining) 하는 것이다. 작업증명이라고도 불리는 ‘채굴’은 컴퓨터를 통해 복잡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다. 수학문제의 난이도는 채굴량이 증가할 수록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장난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 점점 발행량이 줄고 자연스레 화폐 가치하락(인플레이션)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거품론을 주장하는 측의 입장을 들어보면, 비트코인은 실체가 없는 게임머니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표적 실물 화폐인 미국 달러화도 1971년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로는 국립은행이 양적완화가 필요하면 더 찍어내는 상징적 신용 담보물로 기능하고 있다. 금본위제가 아예 없었던 우리나라 원화는 더더욱 상징적인 종이 화폐이다. 국가가 존립하면 그 가치가 인정되고, 전쟁으로 망하게 되면 가치가 다시 종이 가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관리주체 없이, 인터넷 서버만으로 돌아가는 비트코인은 어떤 가치 폭락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4. 암호화폐 경쟁자들 – 비트코인의 운명을 결정하리라

이더리움(Ethereum)은 비트코인에 자극을 받아 탄생한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똑같이 블록체인에 기반하지만 화폐(코인)의 거래에만 중점을 두지 않고, 전자 계약 혹은 거래 내역을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프로토콜로도 기능한다. 이더리움이 대중화된다면, 개인이 계약 내용을 정하고 발행한 채권을 P2P로 거래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 대형 은행이나 금융투자기관이 들으면 싫어할 미래이다. 그래서인지 JP 모건,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의 대기업들까지 이더리움 기반의 소프트웨어 네트워크에 테스트 협력사로 참여하여 실용성을 검증하고 있다. 막을 수 없는 대세로 판단된다면 그들로서도 지분참여를 해서 이익을 지키려 할 것이다.
 
블록체인이라는 신개념이 발명되었으니 이더리움 이외에도 다른 무수한 경쟁자들이 등장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된다. 이들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암호화폐의 양적 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생태계가 몰락할지, 아니면 다른 돌파구를 찾을지는 오직 시간이 지나보아야 알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일본 동경대 교수이자 대장성 관료 출신의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作 <가상통화 혁명>의 책구절을 옮겨보겠다. 2014년이라는 이른 시간(비트코인 시세 폭등 1년전)에 시대흐름에 민감한 사람은 이미 이런 선경지명을 가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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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비트코인이 중앙은행의 관리를 받지 않으므로 통화일 수 없다고 말한다. 또 금 같은 물적 자산의 보증이 업기에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비트코인은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온 통화의 상식을 거스르는 존재이며, 따라서 언젠가는 파멸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금의 보증이나 중앙은행의 관리가 통화의 필요조건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예금통화는 중세 이탈리아의 환전상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이미 통화는 금화가 아닌 상태였다. 물건에서 정보로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17세기까지는 중앙은행이 없는 통화 제도가 계속되었다.
 
…IT 혁명 자체가 회귀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 즉 소규모 독립 자영업자의 경제로 회귀하는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대의 위대한 순환이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그때까지의 가내수공업을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바꿔놓았다. 동력을 사용해 기계를 움직이게 되면서 공장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다양한 산업에서 단일 기업이 원료 조달부터 최종 제품의 제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을 직접 하는 수직통합 방식이 채용되어 대기업이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IT는 원칙적으로 이런 움직임을 역전시킬 수 있다. PC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작은 조직이나 개인도 기존의 대형 컴퓨터와 같은(혹은 그것을 능가하는) 계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인터넷이 통신 비용을 크게 줄여준 덕분에 수직통합을 분해해 수평분업 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집중에서 분산으로 이행한다는 의미에서 과거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목적은 낡은 경제로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뒷받침된 분권 경제의 구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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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통화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동방 박사의 방문’을 떠올렸다. 마태복음(2장 1~13절)을 보면 예수의 탄생을 안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으며 베들레헴에 도착해 세 가지 선물을 예수에게 바쳤다. 선물 중 두 개는 약이었고 하나는 황금이었다.
나는 왜 가상통화에서 ‘동방 박사의 방문’을 떠올렸을까? 그 이유는 가상통화가 IT 혁명의 세 번째 선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선물은 개인용 컴퓨터이고, 두 번째 선물은 인터넷이다. 이 두 가지는 이미 세계를 크게 바꿔놓았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경제활동에는 항상 송금이라는 행위가 동반되는데, 이 송금과 관련해 기존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앞에서 이야기한 ‘산업혁명 이전으로 회귀’는 완전한 형태로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 기술의 결정체인 새로운 통화가 세계를 바꾸려 하고 있다. 이 혁명이 성공한다면 현대의 동방 박사는 방문한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2014년 5월 노구치 유키오

프레카리아트 I – 편리한 사용과 폐기

니트족은 세련된(neat) 사람들 집단이 아닌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영어 ‘NEET’ 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이라는 뜻이다. 즉 학생도 아니고, 직업도 없고, 직업을 얻기 위한 훈련도 안 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니트족의 심각성은 헬조선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손 꼽히는 선진국에다 일억 총중류(一億總中流) – 인구 일 억 명이 죄다 중산층 – 라는 자부심이 있던 일본에도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의 저자 아마미야 가린은 눈에 띄는 경력의 소유자이다. 일본 홋카이도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세련된 입시 대비 전략에는 거리가 먼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대 입시에 연거푸 떨어진다. 무작정 상경한 그녀는 편의점 알바와 식당 웨이트리스 일을 수년간 했고, 박봉과 사장의 구박에 결국에는 술집 일로 진출한다. 열심히 일해도 밑바닥에 더 박힌다는 좌절을 느낀 그녀는 대안적 활동에 뛰어든다. 처음에는 극우 펑크 록 밴드인 ‘유신적 성숙’, ‘대 일본 테러'(이름부터 정말 극우적이다)를 결성해 보컬로 활동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자신에게는 좌익 청년 운동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가난뱅이의 역습>, <생지옥 천국> 등 진보 시각의 저서로 유명세를 얻으며 전문작가가 되었고, 아르바이트 인생에서도 같이 탈출한다. 스스로 피끓는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아마미야 가린은 사회로부터 노력이 부족하다는 취급을 받는 비정규직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이런 문제의 총체적 시작으로 지적한 것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 그리고 그걸 일본에서 용감하게 선도한 고이즈미 전 총리였다. 신자유주의가 청년 니트족과 무슨 상관인지, 어떻게 일본까지 전파되었는지 알려면 우선 그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한 책의 내용이다(page 287).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인플레이션과 부채 때문이에요. 어떻게 복지 국가 요소들을 약화시킬까 하는 것에 고심하는 경제학이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되어갔습니다. 그때까지의 주류는 소위 케인즈 경제학이죠. 케인즈의 사고방식은 ‘실업을 어떻게 해소할까, 실업이 사회에는 악이다.’ 라는 발상 위에 서 있습니다. 구멍 파서 메우는 데도 정부가 돈을 내면 거기에서 고용이 발생합니다. 적자가 나든 빚이 되든 어쨌든 정부는 그걸 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 케인즈 경제학을 무너뜨리는 데 전력한 학자들이 언젠가부터 미국의 정권 중심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걸 통화주의monetarism 혹은 공급supply side 경제학(수요보다 공급을 중시하는 경제학. 대규모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해 민간 투자와 기업 성장을 도움으로써 국내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균형 재정주의라고도 하고요. 회계 연도에서 가능한 한 수지를 맞춥니다. 정부는 돈을 쓰지도 말고 빌리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라는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고용을 촉진하고 실업을 억제하는 걸 선호했다. 하지만 영국병(1960,70년대 영국 경제 쇠퇴의 원인을 과다 복지와 연결되는 노동자의 비능률성으로 파악)과 스태그플레이션을 동반한 오일쇼크(1973,79년)로 인해 케인즈식 경제에 대한 의문이 나타난다. 그 대안으로 신자유주의가 급부상했는데,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표적 정책 추진자였다. 신자유주의는 서구 열강의 경제적 부활을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동구 공산권 블록과의 경제 전쟁은 서구의 승리로 끝난다(냉전 종식). 하지만 2008년 미국 발 세계 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신자유주의는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서구의 신자유주의는 복지 국가의 늘어진 노동 능률을 개선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태평하게 일해도 급여와 정년이 보장되는 공기업 일자리를 대폭 민간으로 넘기고, 노동 시장의 유연화(비정규직 고용을 늘리고, 정규직 해고는 편리하게)를 추구했다. 그러면서 금융 기관의 규제를 완화해서 실물 경제와 동떨어져 움직이고, 현금 흐름 예측이 어려운 수많은 파생 금융 상품을 탄생시켰다. 이런 실체가 불분명한 사이버적 금융 상품은 2008년 가을 미국 발 대폭발을 일으킨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 불리는 이 위기에서 신용 등급이 낮은(실물 자산이 부족한) 개인들은 주택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았고, 금융기관들은 그 대출 채권을 토대로 파생 상품을 만들었고, 다른 금융기관들이 그 파생 상품에 또 파생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런데 불황으로 실물 자산인 담보 주택 가격이 떨어지자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이어진 파생에 파생된 금융 상품들도 같이 부도가 나고 말았다. 결국 이런 상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미국 굴지의 금융 기관들이 파산했고, 그 금융 기관과 이어진 세계의 기업과 금융사 들도 같이 밑바닥에 빨려 들어갔다.

일본의 경우 2008년 세계 경제 위기의 훨씬 이전인 1990년대 초부터 불황이 시작되었었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10년’ 이었다가 나중에는 ‘잃어버린 20년’(2000년대), ‘잃어버린 30년’(현재)으로 자꾸 더 길게 잃어버리는 경제 위기 속에 일본 정부는 심각한 자구책을 마련한다.

고이즈미 정권은 2001년에 집권했는데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를 제창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일환으로 노동자 파견법을 손보는데 이것이 종신고용, 연공서열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특유의 기업 고용 형태를 변형시킨다. 고이즈미의 보수 자민당 정부는 일경련(日經連; 일본경제인연합회)과 연합해서 개혁을 추진했는데 아래는 그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page 45).

불황에 직면해서 일경련은 일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셋으로 분류할 것을 제언했다.
 
1. 장기 축적 능력 활용형
2. 고도 전문 능력 활용형
3. 고용 유연형
 
의미만으로도 알 수 있듯, 1은 기업의 중핵이 되는 사원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들은 기존의 정규직 사원같이 장기 고용에 승급, 승진도 있다. 2는 전문적인 기능을 가지는 계약 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장기 고용이 아니라, 연봉제나 성과급이 적용된다. 그리고 3은 한시적 고용, 시급제로서 승급 같은 것은 없다. 이 3이 지금 매우 급증하고 있는 일회용 노동력이다.

이 같은 개혁은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와 아주 비슷한 반향을 일본 전 사회에 불러일으켰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글에서 이어하도록 하겠다.

프레카리아트 II – 위험한 데는 니가 가라

화웨이, 새로운 삼성 II

화웨이의 설립자 런정페이는 1944년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학교 교장, 모친도 교사였던 교육자 집안이었다. 부모의 교육열 덕분인지 명문 충칭건축공정학원(현 충칭 대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이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중국 전국을 휩쓴 이 난리로 학교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사상 투쟁 시위를 하러 몰려나갔다. 런정페이의 부친은 국민당을 위해 부역했던 경력으로 인해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기억해라. 지식은 힘이다.” 라고 당부했던 아버지의 염원대로 독학에 열중했다. 대학시절 그는 전자 기술 이외에도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의 사상을 연구한다. 아래는 그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런정페이는 암울했던 대학시절에 마오쩌둥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이는 엔지니어로서 상대적으로 경영전략에 취약했던 런정페이가 화웨이를 키우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화웨이의 연구와 기술 개발에는 마오쩌둥 사상의 ‘우수한 병력을 집중시켜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다’ 는 전략이 적용되었다. 또 자기반성과 사내 캠페인 등, 그동안 화웨이의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중대한 정책에도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마오쩌둥 사상이라고 하면 소수의 운동권 사람만 읽는 공산주의 정치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런정페이가 경영 지침으로 사용했던 건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이었던 것 같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국공내전(1946~1949년)은 2천여 년 전의 초한전(楚漢戰)과 비슷했다. 항우는 유방을 훨씬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마음대로 그를 죽일 수 있던 때도 있었다(홍문지연 鴻門之宴). 하지만 유방은 항우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무너뜨렸다. 항우가 정공을 걸 때는 지연전과 유격전을 벌였고, 상대 진영을 이간시키는 책략도 필사적으로 사용했다.

마오쩌둥도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전쟁을 이겼다. 전쟁 발발 당시 병력은 국민당군 430만 명 대 공산당군 120만 명으로 4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국민당 측은 베이징, 난징,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 장비에 있어서도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군의 잉여 무기를 넘겨받은 장제스 측이 유리했다. 공산당군은 해군과 공군이 없었고, 소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보병이 주력이었다.

미국은 물론,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도 마오쩌둥의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스탈린은 1945년 7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장제스 정부의 외무장관 송자문(宋子文)과 회담하고 중소 우호 동맹 조약(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을 체결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 권력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뒤집고 공산군은 불과 4년 만에 장제스의 군대를 붕괴시키고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특유의 게릴라(빨치산) 전술을 썼는데, ’16字 전법’이라고 불리는 전술이다.

敵進我退 적이 공격하면 후퇴
敵駐我擾 적이 멈추면 교란
敵疲我打 적이 피로하면 공격
敵退我追 적이 후퇴하면 추격
 
병력에서 앞설 때만 공격하고 필요 없이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준비 없이 싸워서는 안 되며, 승산 없이 싸워서도 안 된다.
농촌을 장악한 후 도시를 포위 공격, 섬멸한다.

화웨이가 경쟁 기업과 싸워온 과정도 빨치산 전쟁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던 것이다. 화웨이는 기술력과 브랜드 명성이 있는 다국적 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 먼저 기반을 쌓았다. 본토 기업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후 지원 서비스에 정성을 다했다. 경쟁입찰, 계약에 이르기까지 화웨이는 반드시 경쟁기업보다 많은 인력과 자금을 집중 투입해서 돌파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단지 우수한 전술의 성과만은 아니었다. 아래는 <위기를 경영하라> 책에 실린 예화이다.

…영업사원들이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각종 제품이 소개된 자료와 샘플을 둘러메고 밤낮으로 뛰어다녔지만, 1년 동안 전국 500여 현(縣)을 훑고 다녔음에도 주문량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 번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인 이춘 전신국과 계약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절박했던 런정페이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영업사원뿐 아니라 수석연구원들까지 총출동시켰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기술교류, 프로세스 점검, 설비 테스트 등을 수십 차례나 거듭했다. 마침내 최종 입찰을 하던 날, 그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그들은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체면도 잊은 채 고개를 떨구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화에서 보이듯 화웨이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헌신은 눈부실 정도이다. 장군(경영자)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실행하는 병사(직원)들의 사기가 없다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이렇게 계약을 못 따면 통곡까지 하는 특별한 기업 문화는 특별한 소유구조로부터 왔다.

‘여러분은 회사의 주인’ 이라는 팻말만 있고 실제 번 돈과 주식은 회장 가족들이 독점하는 회사가 많다. 반면 화웨이는 경영자와 종업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종업원 지주제(Employee Shareholding Plan) 회사이다. 그래서 직원의 꿈이 회사의 꿈이 되고, 회사의 목표가 직원의 목표가 되는 응집력 강한 조직을 일구어 냈다. 직장에 야전침대를 깔아 놓고 야근을 하고, ‘화웨이 늑대’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분투하는 정신은 제도에 기반한 충성심에서 왔다. 중국 기업에 대한 흔한 편견을 깰 만한 우수한 기업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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