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사를 움직이는(움직였던) 다섯 가지 힘으로서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 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힘은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부류로 엮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중 욕망의 흐름으로 인해 인류사에 펼쳐진 종교와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논했다는 게 자연스런 설명이다.
욕망을 부르는 대상으로 먼저 제시된 것이 커피와 홍차였다. 계속해서 금과 철 같은 물질도 얘기한다. 저자는 흔한 기호 식품에 대한 끌림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끌림을 주는 사상(제국주의나 공산주의나 종교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언뜻 보기에 아주 다른 현상인 커피에 대한 기호와 종교에 대한 기호를 같은 심리 상에서 설명한 게 재미있었다. 특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논한 부분과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교한 설명은 아주 명철했다.
미셸 푸코는 “언어의 독점이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라고 말했었다. 권력을 독점하는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정의나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도 독점한다. 공산주의로 치자면 ‘혁명’, ‘투쟁’, ‘인민’ 등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독점한 특정 언어의 틀 안에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정의도 정해진다. 당신의 이런 행위는 혁명이 아니다, 당신의 지금 태도는 인민을 위한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단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짜여진 집단 사고는 가끔씩 정말 비합리적이 된다.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는 북한과 우리나라가 서로에게 하는 선동 발언을 읽어보면 아래 설명된 사고가 흘러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며 폐쇄적이다. …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미움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이 그렇다는 일은 없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둘다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동인을 훌륭하게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사람을 움직이는 숨은 동인으로 ‘무의식’에 주목했다.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의 이면에는 무의식의 힘이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인간의 경제 정체성에 주목했다. 그는 “사람은 경제적인 위치와 수입에 의해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따라서 문화 또한 경제적인 기반에 의해 달라진다” 라는 명제를 남겼다. 저자도 극찬하는 분석이다.
필자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한 대형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으로 뭉쳐진 공동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사랑과 상관없는게 많이 뭉쳐있었다. 미혼남녀들이 많이 있는 만큼 서로 만나서 교제하는게 흔했다. 그런데 이 교제와 결혼의 절대 필요충분 조건은 신앙의 깊이가 아니었다. 경제 수준과 외모가 조건 일 순위를 다투었고 신앙심은 엑스트라였다. 결국 사람의 경제적 위치가 사고방식을 결정했고 그게 신앙심도 누른 것이다.
저자는 마르크스 사상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대해서도 명료한 설명을 해준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싸움은 시대의 발전과 시스템의 차이로 인한 다툼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과의 투쟁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공공을 위한 노동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면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데 까지 이른다. 소유욕을 없애는 것은 불교의 승려나 카톨릭의 신부 수행을 오래해도 없애기 어려운 욕망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집단을 전체로 만들어 한꺼번에 의식 개혁을 하려했다. 사회의 이념이 대중의 공통적인 욕망을 타고 가는게 아니라 인공적인 도덕을 강요함으로써 자멸했다는 말이 된다.
저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종교의 성질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대중을 열광케 하는 종교 심리를 분석해내는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은 위대한 힘에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안정감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융이 말하는 집합적 무의식이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보통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인간은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안과 밖에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가진 무엇인가를 품고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과학이 주지 못하는 정신적 안정을 주는 종교에 대한 욕구는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종교 열정은 종종 다른 종교와의 충돌로 나타난다. 문명의 충돌으로 표현된 서구 기독교 국가와 중동 이슬람 국가들간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있었던 분당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간 피랍 사건으로 한창 논쟁이 있었다. 저자는 서구 사회가 쉽게 간과하고, 일부러 무시하는 듯한 이슬람의 힘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다르다. 무슬림에게 있어 이슬람교는 정신을 구원하는 의미에서의 종교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그 자체’이다. 무슬림들에게는 종교활동, 경제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모든 것이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스러운 세계와 속세를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슬림에게 이슬람교는 생활과 신념에 수반된 모든 것이다. 이런 단단한 공동체가 먼 나라에서 잠시 찾아온 기독교 선교단의 활동으로 깨질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기독교가 무슬림을 교화하기 원한다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이슬람 사회 한 가운데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더 훌륭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