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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가 스스로 죽는 이유 – 융의 영혼의 지도

 
18년 전,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항공기 테러 사건을 텔레비전 뉴스로 보았었다. 화면은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중 하나의 고층 부분이 비행기 추돌로 인해 부셔져, 연기를 내며 타고 있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윽고 방송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각도로부터 또 다른 비행기가 아주 빠르게 날아왔다. 그 물체는 거대한 빨간 섬광을 만들면서 다른 쪽 빌딩과 부딪혀 터졌다. 항공기 납치와 자살 비행을 감행했던 테러리스트들은 비행기 승객과 함께 모두 죽었다.

사건 당시 나는 대학생 후반기였고, 졸업 후 진로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국가고시도 준비해야 하고, 군 대체 복무도, 직장 생활을 위해 뭘 배우고 익힐지도 정해야 했다. 그런데 다른 쪽 세계에서는 비행기 납치를 위해 무슨 흉기를 준비해야 하고, 승무원들은 어떻게 제압하고, 비행기는 어떻게 몰고, 목표 건물과 부딪힐 때는 항공기 각도를 어떻게 해야 충격파가 큰지를 연구하는 일군이 있었다.

나중에 깨달은 바는, 개인이 혼자 한다면 시작하지도 않고, 진행되지도 않을 엄청나게 황당한 일들이 어떤 엄청난 집단(주로 이상한 쪽으로) 속에 들어가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는 점이었다.

대학생이 미래를 위해 자격증을 따고 열심히 공부하는 건 좋은 기업에 들어가 이름을 높이고(돈과 명성), 좋은 이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기(사랑) 위해서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테러리스트들은 돈, 명성, 사랑은 커녕 자기 몸이 산채로 불에 타 숯이 되었다가 폭발과 함께 가루가 되는 미래를 위해 면밀히 준비를 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지만, 이들은 끝나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1875년~1961년)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의 창시자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쓰이는 ‘콤플렉스’ 라는 개념을 도입한 걸로 유명하고, 인간 성격 유형을 체계화한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검사의 이론을 제공한 걸로도 유명하다.

융은 종교와 신화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 기독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결국 종교적인 순교자 혹은 테러리스트들이 왜 자발적으로 죽는 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집단 무의식’ 개념이 그것이다.

그는 인간의 ‘자아’가 생명을 가진 한 개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더 넓은 정신 세계와 소통한다고 보았다. 무당 접신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령 빙의 같은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 소통 부위 중에 이상한 세계도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 더는 정신이 아닌 곳에 도달하며 비정신적 영역, 즉 정신을 넘어 존재하는 ‘세계’로 확산된다고 보았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 비정신적 세계가 무의식 안에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미스터리의 경계선들인 정신 밖의 지각, 동시성, 몸의 기적적 치유 등에 접근하게 된다. – <융의 영혼의 지도> p42​

융의 이론에 따르면 집단 무의식은 ‘원형’ 과 ‘본능’ 의 결합이다. 본능이야 개인이 매일 느끼고 소비하는 익숙한 힘이지만, 원형이라는 개념은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원형(archetype)은 개인이 아닌, 어떤 엄청난 집단(주로 나쁜 쪽으로)의 무의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자아는 원형적 이미지와 직면할 때, 그 이미지에 깊이 빠져들고 압도되어 저항하고 싶은 마음조차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경험은 매우 풍부하고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원형적 이미지와 에너지의 동일화를 통해 융은 자아 팽창, 심지어는 정신이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강력한 말로 사람들을 확신시키고 선동하여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갑자기 감화된 사람들이나 참 신자들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삶 자체는 깃발과 십자가 같은 이미지, 그리고 민족주의, 애국심, 종교나 나라에 대한 충절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사회 개혁 운동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합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들에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참여자들은 “이 일은 내 삶에 깊은 의미를 준다! 이것은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관념은 자아에 강력한 동기부여를 해주며 가치와 의미를 생성한다. 인식은 빈번히 본능을 압도하고 주도한다. – <융의 영혼의 지도> p149

신을 위해 죽는다는 원형은 무슬림 테러리스트에게 삶의 본능 보다 강한 만족감을 주는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분명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오늘 날에도 비슷한 집단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자살 테러 공격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런 강렬한 정신적 힘이 ‘돈’ ‘명성’ ‘사랑’ 같은 가치도 우습게 보일 정도로 한 인간의 정신을 주조했다. 그리고 자살과 살인의 미학으로의 통로가 되었다.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I – 아기와 엄마를 피했던 악

2000년 3월 11일 운동을 마치고 부산 서구 서대신동의 고급 주택가 집으로 돌아온 김인숙(가명,39세)씨는 안방에서 무언가가 탕탕하고 부딪히고 있는 소리를 듣는다. 이상한 마음에 같이 사는 언니와 가정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탕탕 소리는 곧 멈추었다. 이윽고 안방에서 칼을 든 낯선 남자가 걸어 나오는 걸 본다.

세 번째 범행에서 자기보다 덩치가 큰 남자에게 제압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정두영은 5개월 동안 범행을 저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10억이라는 목표를 위해 다시 범행을 결심한다. 넘기 쉬워 보이는 집의 담장을 넘은 후 열려 있는 현관문을 열고 조용히 침입했다. 거실에는 두 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가 두영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서 혼자 놀고 있었다. 정두영은 현관 옆방에서 물건을 훔치고 나오는 중 50대 가정부와 마주친다. 그는 얼른 부엌으로 뛰어가서 칼부터 챙겨 들었다. 정두영은 가정부를 위협해 안방으로 끌고 간 다음 두 손을 묶고 방바닥에 엎드리게 한 후 그 위에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사이 거실에서 혼자 있던 아기가 울자 안아다가 작은방에 놓고 문을 닫았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2층에 있던 김인숙씨의 언니가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칼을 든 정두영과 마주친다. 그는 이 40대 여인 역시 칼로 위협해 안방으로 데려와서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엎드려 있던 이불 안으로 같이 밀어 넣었다.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죽여버린다는 위협과 함께.

그는 묵직한 아령을 들고서 집에 있는 금고를 부수기 시작했다. 한참 금고를 부수는데 이불 속에 엎드려 있던 40대 여성이 몰래 침대 머리맡에 있던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고 정두영을 뒤에서 내리쳤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방망이는 강도의 등을 스쳤을 뿐이었다. 정두영은 곧 방망이를 뺏어 들고 아주머니들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곧 목숨을 잃었고, 핏자국이 사방으로 튀어있는 방에서 그는 아령으로 금고 부수기를 계속했다. 2시간 동안이나 아령을 사용했는데 그때 집주인인 김인숙씨가 들어왔다.

정두영은 그녀를 칼로 위협해서 안방으로 들어가게 한 후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려 죽이려 했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채 맞으며 비명을 지르던 여인은 자신의 아기를 생각하고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녀는 “살려주세요. 아기가 있어요.” 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야구방망이는 멈췄다. 짧은 침묵 끝에 정두영은 “아기 잘 키워. 신고하면 죽인다” 라는 말을 뱉더니 그녀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두영이 두 살 아기 일 때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두 번이나 그를 고아원에 버렸었다. 훗날 체포된 후 밝힌 바에 따르면 여인을 죽이면 아기가 자기처럼 불행한 고아가 될 거라는 생각에 살려두었다고 한다.

여인은 언니와 가정부의 피투성이 시체 옆에서 이불에 덮힌채 통증을 참으며 있었다. 정두영은 그 후로도 한참을 아령을 휘둘러서 결국 금고를 부수고는 안에 있던 금품을 챙겨 들고 사라졌다. 김인숙씨는 간신히 기어 나와 아기가 무사하다는 것부터 확인했다. 그리고는 112에 신고전화를 걸었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 – 살인자가 되다

정두영은 방범대원을 칼로 살해한 죄로 12년간 복역한다. 1999년 교도소를 출소했을때 나이는 32세였다. 찾아 갈 곳도 없고 고용해줄 일자리는 더더욱 없었으므로 예전 절도 활동의 근거지였던 대전 충남 지역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그를 부산에 있던 친형이 부른다. 두영의 형은 고물상 간판을 걸고 가게를 하고 있었지만 실은 장물아비였다. 두영은 훔치고 형은 물건을 파는 동업 계약을 하고 수익은 7대 3 으로 나누기로 했다. 형은 서른 한 살이던 두영에게 스무 살 밖에 안된 여성 한 명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곧 동거 관계로 발전한다. 동거녀와의 사랑을 계기로 범죄 생활을 접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하지만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두영이 범죄자 사회에서 주워 듣기로는 ‘성인 오락실’ 이나 ‘실내 야구장’ 같은 가게를 마련하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창업 비용 10억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행각에 뛰어든다. 그는 경험상 빈집털이를 해봐야 얼마 돈을 못 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중품 보관 금고가 있을 법한 부자집에 일부러 사람이 있는 시간대에 침입하기로 했다. 흉기로 협박해서 금고 위치를 알아내 강탈하고 사람은 죽이는 방식이었다.

정두영의 연쇄 살인 중 첫 번째는 1999년 부산 서구 부민동의 고급 주택가에서 일어났다. 그는 청소년 시절 흉기를 가지고 다니다 불심검문에 걸려서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로는 절대 칼을 지참하지 않았다. 대신 범행 현장에 가서 식칼 같은 흉기를 먼저 챙겨 두곤 했다. 이 집에서도 먼저 부엌에서 칼을 챙겼고 안방과 거실을 뒤지던 중 50대 후반의 가정부와 마주친다. 그는 아주머니를 협박해서 화장실로 데려가 미리 준비한 끈으로 양 손을 뒤로 묶고, 머리를 바닥에 마구 내리 찧어 살해한다. 그리곤 현금 33만원을 털어서 달아난다. 경찰은 피해자의 머리와 얼굴 부위가 으스러질 정도로 가격당한 것을 발견하고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두영은 불안한 마음에 몸을 숨기고 언론 보도를 주시한다. 자신이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두 번째 범행을 시작했다. 동거녀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기 위해 10억을 모으는 게 목표인데 처음 강도 짓으로 33만원 밖에 못 벌었다. 자신과 연인의 행복을 타인의 죽음과 편리하게 가르는 이 무감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두 번째 범행은 첫 번째 살인 이후 세 달이 지난 9월 15일 오후, 부산 서대신동의 고급 빌라촌에서 일어났다. 옥상 지붕을 타고 꼭대기 층인 6층 베란다로 내려갔고 빈 집이었던 그곳에서 현금 수백만 원과 귀금속 등을 챙긴다. 한 탕 더 하기 위해 이웃집 베란다로 넘어 들어갔는데 애완견이 짖어대는 바람에 부엌에 있던 50대 가정부에게 들킨다. 정두영은 강아지를 발로 멀리 차버리고 아주머니를 마구 때려 살해한다. 이 집에서도 현금 수 백 만원과 귀금속을 챙기고 베란다로 나온 뒤 옥상으로 올라가 도주한다.

세 번째 범행에서 정두영은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주택에 침입해서 마주친 50대 아주머니를 때려 살해하던 중 2층에 있던 아들이 내려온 것이다. 건장한 체격의 피해자 아들은 왜소한 두영을 주먹으로 몇 대 쳐서 바닥에 뉘였다. 하지만 아들은 방심했고 그 사이 정두영은 집에 침입할 때 미리 봐두었던 현관 신발장 위의 망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두영은 망치를 들고 돌아와 남자의 얼굴을 내리쳤다. 겁에 질렸던 정두영은 쓰러진 남자에게 미친듯이 망치를 휘둘러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와 뇌수가 밖으로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글 –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I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 – 어머니에게 두 번 버림받음

정두영은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강도행각을 벌이면서 17명을 다치게 하고 그 중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 살인자이다. 체포 된 후 단순 강도 목적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피해자들을 잔혹하게 죽인 이유가 뭐냐는 경찰의 질문에 “제 안에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가 한 짓이에요” 라고 대답했다.

그의 강도 살인 행각을 전혀 모르고 있던 정두영의 동거녀의 부모는 “정씨는 술담배도 안하고 말 수가 적으며 점잖고 매너 있어 성실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고 진술했다. 정두영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어떤 악마적인 분노를 마음에 숨기고 있던 것 같다. 그 안의 악마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정두영은 1968년 부산시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하고 있었고, 두영이 2세가 되던 해 끝내 사망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생계가 곤란해진 정두영의 어머니는 아기에게 충분한 관심을 주거나 영양을 공급해주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이들을 삼촌 집에 맡기고 재혼한다. 그리고 정두영이 다섯 살 되던 해, 삼촌마저 요란스런 조카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버린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한 번은 어머니에게, 또 한 번은 삼촌에게 버림받은 정두영은 큰 정서적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려는 듯, 일곱 살 때 어머니가 고아원으로 찾아와 두영을 새아버지 집으로 데려간다. 그대로 양친과 성장했으면 좋았겠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경제적 부담과 부부간 갈등이 커져서 두영은 도로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계속 고아원에 두었더라면 상처를 덜 입었을 것이다.

두영은 어머니에게 두 번이나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운 가운데 공격적 행동을 일삼아서 문제아가 된다. 고아원 안 남자 아이들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 같아서, 세면 때리고 약하면 맞는 게 보통이었다. 선천적으로 작은 체구 때문에 놀림과 괴롭힘을 많이 당한 두영은 결국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폭력’ 뿐 이라는 것을 체득하고 만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두영은 고아원의 통제를 물리치고 거리로 나가 범죄를 생계수단으로 삼아 살기 시작했다. 직업을 얻을만한 기술도 없고, 자길 보살펴줄 사람도 없었으므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다 자란 정두영은 키가 168cm에 체중 54kg인 작은 체구였다. 그래서 보호 장비로 항상 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열 여덟 살이던 1986년 5월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 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마주친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달아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자기를 불심검문하는 방범대원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12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어지는 글 –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

리플리 증후군과 살인자 철학자 – 루이 알튀세르

리플리 증후군(Ripley’s Syndrome)은 가상적인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맞추어 사는 인격 장애의 유형이다. 주로 자존심에 미달하는 학벌이나 경제∙사회적 위치에 대한 거짓말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결국 완전히 다른 사람의 삶을 인생 연기하듯 살게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 대표적 사례로 나온 적이 있는데 있는데 제목은 ‘신입생 엑스맨’ 이었다. 시작이 미스테리 영화처럼 섬뜩했다. 한 대학교 신입생 OT에서 왁자지껄 어울려 놀고 있는 남자 신입생이 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작년 다른 대학교 신입생 행사에도 참석해서 놀았었고, 사진에도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전년도 다른 학교에서도, 그 전전년도 어딘가에서도… 확인 결과 그는 6년 동안 48개의 다른 대학에 신입생으로 들어와 과 행사에 참석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며 살았던 걸로 드러났다.

취재진은 엑스맨을 찾아내 만났고 가짜 신입생 역할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듣는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존재 가치가 없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 받은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교수로 엘리트 의식이 강했고 누나 넷은 모두 일류대학에 진학해서 자랑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외동 아들인 자기만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진학하자 현실과 조합할 수 없었고 결국 진짜 자신이 아닌 가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특이 하지만 슬프기도 한 사연이었다. 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거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인격의 가면을 심리학적 용어로 ‘페르소나'(persona) 라고 한다. 페르소나는 본래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게 심리학적으로 보편적인 단어가 된 건 어느 사람이나 조금씩은 사회적인 필요로 가면을 쓰고 살고 있어서이다.

루이 알튀세르는 알제리 태생, 프랑스 국적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라는 자서전을 썼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학술 작업으로 이름을 떨친 것도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목 졸라 죽이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도 있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아내를 죽였다는 이유로 기소 면제 처분을 받았고 감옥 대신 정신 병원에 갇혀서 이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다.

저자 루이 알튀세르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 없이 다른 사람으로 존재한다고 느꼈다. 그가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는지, 그런 운명을 강요한 가족의 영향과 성장 과정을 되돌아 보는 것이 책의 중심 내용이다. 신입생 엑스맨처럼 그도 진정한 자기로 살 수 없는 굴레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하는 존재이다. 만일 부모의 양육이 병적인 것이라면 아이는 그 운명은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다. 루이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어려서 한 남자와 약혼했는데 그는 1차 세계 대전에 징집되어 나가 전쟁터에 전사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향과 같던 옛 약혼자를 평생 잊지 못했다. 그래서 죽은 사람 약혼자의 대체물로 그의 형인 샤를르 알튀세르와 결혼 한다. 결혼 후 얻은 첫 아이에게는 옛 약혼자의 이름을 따서 ‘루이’ 라는 이름을 준다.

소년 루이 알튀세르는 어머니가 자기를 자신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공군 조종사로서 프랑스의 베르덩 하늘에서 죽었던 옛 약혼자의 그림자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아래는 이에 대한 알튀세르의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마가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일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삶은 “죽음의 영역 안이나 죽음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 곧 진정한 주체성 없이 이미 죽은 인물의 대체물로서 살아가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심리의 덫에 걸린 알튀세르는 아무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고 또 어떤 사람의 사랑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고, 남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면 결국 자신도 사랑받지 못한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면서도, 그와 반대되는 전능에 대한 열망도 키운다. 이는 우울증의 결과인데, 자기 혐오 콤플렉스는 더 파괴적인 에너지를 모아서 발산할 수 밖에 때문이다. 그 파괴의 결말은 자기 부정의 강박 때문에 온전히 사랑해주지 못했던 아내 엘렌느를 목 졸라 죽이는 걸로 나타나고 말았다.

존재한다는 기억, 존재를 잊게 만드는 기억상실

기억은 감정과 연결되고, 감정은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추운 겨울날 새벽 거리를 걸으면 무표정한 사람들을 수없이 지나치지만 모두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같이 손을 잡고 걸었던 한 사람은 마주 잡은 손의 감각과 비스듬하게 보이던 얼굴, 외투, 나누던 말까지 모두 기억난다. 마음이 기억이 되고, 관계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걸 끊어버리는 병도 있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사람은 기억을 잃어버린다. 사람의 뇌는 컴퓨터 메모리처럼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가 따로 존재한다. 이 부위가 알츠하이머로 인한 위축(atrophy)으로, 아니면 혈관 장애나 감염, 염증 등으로 파괴되면 사람은 기억을 잃는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던 간절한 기억도 깨끗이 날아가 버린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매일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게 반복된다. 아래는 신경 질환에 관한 대중 저서로 유명했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전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라는 책의 내용이다.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 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 루이스 부뉴엘 1

그는 순간 속의 존재이다. 말하자면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신경과 의사였던 저자는 뇌신경의 일부가 손상되어 기억을 자꾸 잃어버리는 환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억이 없다면 과거가 없어질 뿐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도 없어진다. 결국 끝없이 변하는 순간순간만 남는다. 기억상실은 나이든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아예 기억이 시작도 안된 사람은 어떨까? 나는 집 마루에서 열심히 기어 다니는 아기 조카를 보며 기억 없이 사는 게 어떤 건지 느끼곤 한다. 작고 따뜻한 이 생명체는 자극에 반응하며 목적도 없이 순진무구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일정 이상 기억이 쌓여버린 어른은 그 집적에 반응해야만 한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수히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차례차례 계승되고, 움직이고, 변하며, 흘러간다.

아기는 아니지만, 어른의 기억상실은 병원 치료의 대상이다. 올리버 색스 교수는 자꾸 기억을 잃는 환자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매일 일기를 쓰라고 권유했다. … 그러나 나의 권유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엇보다도 그가 항상 일기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그가 일기장을 몸에 지니고 다니게 해야 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별 효과를 얻지 못했다. 그는 날마다 짧은 메모를 일기장에 착실하게 적어놓기는 했지만 바로 그 전날 자신이 쓴 것을 보고도 그것을 이해하질 못했다. 자신의 필적이나 문체는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 전날 자신이 무엇인가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곤 했다.

기억상실의 종착역은 존재의 망각이다. 기억이 없어지면 자신에 대한 자각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는 대다수에게 옳지만 이 환자의 경우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한다는 걸 자주 망각한다. 그래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가 되었다. 살고 있다는 것, 생각하고 있다는 것, 모두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어떤 병은 이 모든 걸 리셋시킨다. 고상한 의미로 포장되어 있는 사람의 존재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밀어 넣는 것이다.

Notes:

  1. Luis Buñuel (1900년 2월 22일 ~ 1983년 7월 29일) 스페인, 멕시코의 영화 감독, 각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