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제는 서문의 노래 가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It’s a Barnum and Bailey world.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Just as phony as it can be,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But If you believed in me.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It wouldn’t be make-believe
《E. Y. Harburg & Harold Arlen, It’s Only a Paper Moon》
즉 관계와 꿈에 대한 것인데, 어떤 두 사람의 관계에 믿음이 생기면(make-believe가 believe로) 모두 환영인 꿈의 세계에서도 현실보다 생생한 의미가 체화된다는 것이다. 1Q84 책을 해석할 때 이 설정에서 멀어지면 작가가 배치한 장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재미가 없어진다.
작품에서 꿈의 세계 아니면 평행세계라고 할 수 있는 곳의 이름은 1Q84인데, 이런 가상 세계 상징들이 어렵게 느껴진다. 두 개의 달, 리틀 피플, 공기번데기, 마더, 도터, 퍼시버, 리시버 등이다. 하지만 최대한 몽환적으로 ⎻ 마치 좋은 음악이 흐르고 거기 마음을 맡긴 듯 ⎻ 읽어 보면 좋다.

역시 초현실주의 경향으로 유명한 영화인데, 중심 줄거리와 상관이 없는 인물들이 쭉 나오며 혼란스럽게 진행된다.

꿈과 현실의 교차로 실렌시오 극장(Club Silencio)이 등장한다. 주인공 두 명은 새벽 시간에 택시를 타고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거리의 극장으로 간다. 이 시간에도 극이 상영 중이고 거기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꿈을 상징한다.


무대 위 사회자는 “밴드도, 오케스트라도 없다. 모든 것은 녹음된 테이프이자 환상”이라고 말한다(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얘기함).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서두에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환영과 꿈 속에서는 원초적 정신 에너지는 꿈틀대지만, 정작 논리와 기억의 연결이 다 흩어져 있다. 결국 초현실주의적 장치가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를 정리해보면 첫째는 꿈에서 나오는 상징이 가장 강한 심적 에너지의 발산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상징이 논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예술적인 면에서, 그리고 심리 치유 면에서 의미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 작가의 이 책에서 실렌시오 극장의 역할을 하는 건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이다. 여주인공 아오마메가 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을 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세계로 가야만 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었다.

아오마메의 부모와 오빠는 모두 ‘증인회’라고 하는 종교 집단의 일원이었는데 오직 아오마메만 믿음이 없었다. 가족에게는 신앙이 전부였고, 그걸 배신한 사람은 가족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실질적 고아가 된 아오마메는 한가지 희망을 품고 살았는데, 그건 따돌림 받던 자신을 유일하게 보듬어 주었던 동급생 가와나 덴고와 다시 이어지는 것이었다. 문학에서 구원의 장치로 제시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심적인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즉 문학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상처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치유되는데, 아오마메는 그런 재생을 위한 장소를 1Q84라고 스스로 명명한다. 여기서 Q는 Question 질문을 뜻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를 살짝 비틀었다. 하지만 《1984》처럼 외부 전체주의 세계에 저항하며 자유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생겨난 독재자라고 할 수 있는 힘든 이념과 콤플렉스를 질문해 이겨내고 자유를 쟁취하고 있다. 즉 마음 안의 싸움이다.

작품에서 하늘의 달이 두 개인 평행 세계에 들어간 것은 덴고, 아오마메 그리고 우시카와이다. 덴고에게는 세계의 이름이 다른데, 1Q84가 아닌 고양이 마을이다.
어린 아오마메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은 부모의 종교였고, 자신이 믿을 수 없는 걸 계속 머리에 집어 넣는 집에서 가출한다. 덴고도 아오마메와 비슷하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는데, 덴고의 아버지는 NHK(일본의 공영방송사) 수금원이었고 자신의 존재를 오직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로 정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걸 아들에게도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주말에도 수금 업무를 했는데, 일부러 아들을 동행시켰다. 아이가 같이 있으면 완고한 사람도 수금 거부를 못 한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집집마다 노크하며 수금하는 아버지를 따르는 덴고를, 급우들은 ‘NHK’라고 별명 붙였다. 부유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아이들로부터 치욕을 느낀 덴고는 어떤 종류의 탈출을 꾀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학원 강사이자 아마추어 문학 작가가 된 그는 어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어른 아오마메는 수도고속도록 계단을 내려감으로써 다른 세계로 갔는데, 덴고는《공기 번데기》라고 하는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 이동을 했다. 아오마메와 마찬가지로 마음 안의 장치로 외부 세계를 전환시킨 건데, 알쏭달쏭한 부분이다.
하지만 덴고의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 세계로 갔는지와 비교해보면 의미가 드러난다. NHK를 퇴직한 덴고의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으로 간다. 요양원의 의사가 덴고에게 설명하는 부분인데, 아버지의 육체에는 이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정신적 힘이 작용해서 몸 전체 생명의 불을 끄고 있었다. 단순한 치매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도 덴고와 마찬가지로 큰 상처가 있었다. 그건 아내, 즉 덴고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는 덴고가 아직 아기이던 때에 남편을 버리고, 아이는 데리고 외간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 그리고는 그 남자에게서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에게 목이 졸려서 죽게 된다(물론 이 사실을 아버지는 성장한 덴고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 아기 덴고를 데려갔고 여기서 큰 분열이 시작되었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 그런데 죽어 버렸고, 아들 덴고는 자기 상처를 상기시켜주는 존재였다. 결국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눠서 오로지 자신을 대우해 주는 회사를 위해서만 산다. 열과 성을 다해 수금 업무를 한다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들도 그 연장선 상에서 대한다. 나중에는 치매에 걸리고, 그런 다음에도 생령이 되어서 아오마메의 집이나 후카에리가 머무는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수금을 하러 왔다고 하면서 떠도는 영혼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생령(生霊; いきりょう)은《겐지 이야기 源氏物語》같은 일본 고전 문학에서부터 등장한 것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이나 원념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타인에게 붙는 현상 또는 그 영혼을 뜻한다.
작품은 이렇게 현실과 접점이 없고, 자기 아들이나 다른 사람과도 감정적인 교류나 공감을 하지 않는 상태를 고양이 마을에 갔다고 표현한다. 고양이 마을 명칭은 액자식 구성으로 작중의 주인공 덴고가 읽었던 가상의 독일 소설 안에 있는 마을에서 나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젊은 여행자가 어느 비어 있는 마을의 기차 정류장에 내린다. 그런데 낮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밤이 되니까 큰 고양이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든다. 청년은 기겁을 해서 마을의 시계탑으로 숨는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인간 냄새를 맡고서 시계탑까지 올라오지만 청년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낮이 되어 젊은이는 다시 자기가 맨 처음 내렸던 기차 정류장으로 간다. 기차는 들어오지만,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청년은 이미 ‘상실’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상징은 해가 지면 고양이들이 마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가 종루 즉 시계탑에 숨는다는 사실이다. 밤에만 나타난다는 건 역시 환영, 꿈이라는 걸 의미한다. 종루에 숨는다는 건 흐르는 시간이 표시되는 세계가 필요한 건 인간 밖에 없고 ⎻ 환영이나 생령은 시간을 초월해 있음 ⎻ 그래서 이 고양이 마을에 생명을 가진 인간은 이 청년 밖에 없다는 걸 뜻한다.
덴고의 아버지는 상처와 생으로 인해서 정신이 분열되고 고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상실되어 버렸고, 고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죽는다. 치매에 걸린 그가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들 덴고와 대화를 하고, 죽은 뒤에 유품을 덴고가 정리하는 장면이 있는데, 작품에서 가장 슬프고 서정적인 부분이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스스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회고하며 쓰지 않았을까 한다(하루키 작가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는《고양이를 버리다》책에 묘사되어 있음).
주인공 덴고는 하지만, 아버지처럼 갇히지 않고 탈출을 할 수 있었는데, 《공기 번데기》라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마음이 고착되지 않았고, 아오마메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사랑을 찾았기 때문이다.
애정 결핍의 말 없는 아이였던 열 살 아오마메는 학교 과학실험 시간 때 이지메를 당한다. 옆 실험조에 있던 덴고는 아오마메를 자기 조로 오게해서 괴롭히는 아이들에게서 떼어내 보호하고, 실험을 어떻게 하는지 차근차근 가르쳐 준다. 아오마메는 어린 자기를 지켜주었던 덴고를 평생 잊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둘이 아직 열 살의 나이, 사춘기가 시작하기 전이라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전작《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언급했듯 인간이 남녀의 성으로 나뉜 것을 근원적 고독의 시작으로 보는 듯하다(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학설).

그런데 작중의 ‘공기 번데기’는 누에고치가 탈피를 거듭해서 성충으로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와 2차 성징 때 몸의 변화이다. 존재의 고독을 탈출하기 위한 첫 번째 묵시록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과학실험 사건 후에 서로 손을 잡게 되는데, 이때 이후 둘 다 그런 신체의 변화를 겪는다.
몹시 맑은 12월 초순의 오후였다. 창밖에는 높은 하늘과 곧게 이어진 구름이 보였다. 방과후 청소가 끝난 교실에 덴고와 그녀는 어쩌다가 둘만 남게 되었다. 둘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가로질러 덴고에게 다가와 옆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덴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지그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덴고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덴고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투명한 깊이를 보았다. 소녀는 한동안 말없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몹시 세게, 한순간도 힘을 늦추는 일 없이.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손을 놓고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잰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덴고는 영문을 모른 채 말을 잃고 한참 동안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1Q84 1권 328~329 페이지
이 둘이 손을 잡고 있던 학교 교실의 창 바깥에는 낮이었지만 달이 보였다. 두 개의 달이 있는 이계로 같이 가게 된 건, 이런 상징과 연결되어 있다. 덴고는 나중에 아버지가 있던 요양원에서 빈 침대 위에 공기 번데기가 있고 그 안에 소녀인 아오마메가 있는 것을 목격한다. 아버지의 생령이 머물던 곳에서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 즉 다른 세계로 이동한 아오마메와 맺어지게 될 거라는 표식이다.
표식대로 덴고는 아오마메와 20년 만에 재회를 하고 둘이 손 잡고 수도고속도로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서 1Q84를 탈출한다. 달은 어두운 무의식을 상징하는데, 그게 두 개인 세계는 무의식이 분열되어 있는 곳이고, 그런 정신의 분열이 치유되고 덴고와 아오마메가 영육으로 합쳐져서 관계의 희망인 아기를 잉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표현하는 사랑은 초현실적이고 실제 세계의 사랑에 참고가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자본주의는 교환 가치로 물건이든 사람이든 평가하게 한다. 외모 재산 사회적지위 등으로 종합 점수를 매길 수 있다.

그걸 초월한 것이 칼 구스타프 융이 말했던 원형(Archetype) 아니마 아니무스(Anima Animus)이다. 자신 존재의 본질에 가장 부합하는 이성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집합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으로 잠재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이성에게로 끌리게 하는 진정한 힘은 자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아닌, 피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거고, 아니마 아니무스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닌 둘을 종합한 것이다.
하루키 작가가 보여주는 사랑은 정신의 원형을 상징으로 잘 드러내고 있고, 대중문화 작품의 테마인 구속과 해방과 맺어짐이라는 메타포를 아름답게 구현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는 해석이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작가분의 감정선을 따라가야 이해가 된다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2번째 연작의 화자, 영혜의 형부가 중요하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 – 몽고반점 – 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단편에서 각기 다른 눈높이의 화자로 주인공 영혜를 묘사하고 있다. 몽상적 성격의 실패한 예술가인 형부는 영혜의 독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또 가장 감정적으로 찬탄하고 있다.
그는 영혜가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니고,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고,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라고 묘사한다. 이게 뭔 소리인지 공감할 수 있다면 작품 이해가 깊어졌다 할 수 있다.
<몽고반점> 말미에서 영혜랑 형부는 둘 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데, 그때 형부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p177
죽어도 좋다는 건데, 실제로 뛰어 내리려다 응급요원의 제지를 받고 실패한다. 그를 이렇게 미치게 한 것은 강렬한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는 처제 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몽고반점이 뭐길래 이런 거친 감정이 생기고 처제와 관계를 가지는 예술 작품을 찍게 되는건지 이해가 필요하다.
몽고반점을 성적인 페티시즘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작가분의 의도는 아닌 것 같다. 형부는 영혜의 몽고반점을 실제로 처음 보고 이렇게 생각을 한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20
어떤 쉬운 욕망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동물적이지 않은, 태고의 초록색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영감靈感이고, 그게 예술작품을 만들려는 집념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반점이 어떻게 그런 영감을 낳을 수 있는지 갸웃할 것이다.
형부가 몽고반점에 꽂혔다면 영혜는 꽃에 꽂혀 있다. 그래서 외설적이고 부적절해 보이는 비디오 촬영에도 응한 건데, 그녀 말에 따르면 꽃은 나쁜 꿈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독제 같은 것이었다.
첫 번째 행위 예술 촬영 후에 형부는 영혜에게 전화를 하고, 꽃을 지우지 않았느냐고 물어본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요. 나중에 지워지더라도 다시 그려주면 좋겠어요.”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도살과 피에 연관된 꿈을 꾸면서 부터인데, 몸에 그려진 꽃은 힘든 환상을 없애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술 주문처럼 몽고반점과 꽃은 형부와 영혜를 각각 움직였다. 이 같은 이미지가 투영된 실제 예술 작품이 있다.


일본의 작가 쿠사마 야요이くさま やよ 인데, 이 분은 물방울이나 호박을 소재로 여러 설치 예술품을 만들어 냈다.

그녀에게 호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아래는 그 마음을 토로한 글이다.
호박은 애교 있고 굉장히 야성적이고
밝게 웃는 기운이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
나, 호박 너무 좋아!
호박은 나에게 어린시절 마음의 고향으로
무한대의 심령을 가지고 … 시적인 평화를 준다
…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성한 자태이고
전 세계 인생의 환희의 근원이기도 하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간다.
하나의 형태가 마음 속에서 거의 신성한 힘을 주는 상징이 되어서, 그게 악몽 – 쿠사마 야요이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정신분열증 – 을 없애고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원천도 되었다. 영혜 형부의 예술 작품도 똑같이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상징은 특정 종교의 수행 과정에서 쓰이기도 한다. 아래는 ‘만다라मण्डल’라고 하는 문양이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힌두교와 불교의 명상 수행을 돕기 위해 고안되었다. 20세기 초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Jung)이 무의식 치료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서양에 소개되었고 대중성을 얻었다. 상징이 정신치유로 이어지는 다른 예이다.
형부는 영혜의 남편 보다도, 언니인 인혜 보다도, 영혜의 특이한 지점을 잘 이해했다. 그건 두 사람이 보통 사람과는 ‘기쁨을 느끼는 통로’가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 예술로 교감할 수 있었다. 형부가 기쁨을 느끼는 부분을 먼저 보자.
붓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듯 미세히 떨리는 그녀의 육체를 느끼며 그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마침내 오른쪽 허벅지를 지나 가느다란 발목까지 이어지는 긴 줄기와 잎사귀를 완성했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p122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감동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큰 기쁨을 저런 행위로 느낄 수 있을까 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형부도 영혜도 그동안 보통 사람이 겪지 못한 바닥 깊은 고통을 느껴왔기 때문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특별한 통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큰 고통이 큰 기쁨으로 상쇄된 것이다.
아래는 형부가 영혜 마음의 바닥을 느끼고 묘사한 부분들이다.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p110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p125
상처와 악몽의 지배로 깨진 영혜의 정신은 백치가 되는 걸 넘어 더 깊은 곳으로 간 것 같다. 인간의 언어로 된 표상도 없는 이계異界 같은 곳이다.
영혜는 자기에게 악몽을 주는 게 먹는 고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꽃에 감화 되고 나서는, 그것은 결국 자기 뱃 속에서 올라온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늘 달라요. 어떨 땐 아주 낯익은 얼굴이고, 어떨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에요.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 썩어서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해요.”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박명 속에서 술렁거리고 있었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p171
여기서 작품의 중심 주제가 드러난다. 배라는 건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다.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나는 것처럼.
영혜는 그간의 피웅덩이 꿈이 고기 같은 물질적인 것에서 온 것이 아니고, 어떤 정신적인 것, 그것도 생명이 나오는 장소(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꽃(생명의 시원) 그림이 자기 몸에 그려진 채 남녀의 교접(생명을 잉태하는 행위)을 통해서 그렇게. 형부도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가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p176
눈은 세상을 보는 창인데, 거기에 모든 것이 담겼으면서도 모든 것이 비워져있다. 조금 어려운데 불교적으로 풀이하면 이해가 된다. 한강 작가님의 어버지인 한승원님도 문학 작가였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열반에 대한 소설을 남긴 바 있다. 당연히 그 영향이 배었을 것 같다.
경전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색(色)은 물질적인 세계와 그 현상들을 나타내고, 공(空)은 그런 물질적인 존재들이 사실 실체가 없이 비어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불교에서 화두로 던져진 것이다.
결국 세상을 보는 눈이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고, 영혜도 형부도 어떤 면에서는 해탈의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거리낌 없어지는 에너지에 휩싸여진 것이다.
사람 그림자가 반이고, 시간과 공간의 연결이 끊어지고, 주인공의 아빠라는 사람이 조니워커 위스키 병 모델 같이 차려 입고 나오는 소설의 상황은 왜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자.

(좌) 실제 조니워커 병 모델 (우) 소설 속 조니워커 상상도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 The Castle by Franz Kafka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프란츠 카프카 평론>
토마스 만 평론 내용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온 이야기인데, 사람이 호랑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나비인게 너무 즐거웠다, 근데 깨보니 사람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지금 사람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장폴 사르트트,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 문학가들이 이 컨셉을 좋아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려는 사람은 아주 열심히 사는 것 같다. 온 시간과 피와 땀을 들여 노력을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셀럽이 되어서 부와 명예와 세상의 부러움을 다 얻어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것도 인간이 나비의 꿈을 꾸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주체와 관점에 따라 허무한 것이 된다.
그래서 카프카 작가도 하루키 작가도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생에서 가장 절박하고 영속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는 테마이다. 그게 바로 기억과 사랑이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메멘토(Memento)의 장면이다. 주인공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앞으로 진행되는 사건을 기억 못함. 기억상실증 이전 사건들은 잘 기억함)을 앓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자기 아내를 죽인 범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런데 스포일러이지만 실제 아내 살해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오시마 청년이 몇 번 했던 중요한 대사가 ‘만물은 메타포’ 이다. 독일의 괴테가 책 <파우스트>에서 한 말을 인용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건 상징으로 나타나는 데, 뇌에서 한 번 해석된 후 저장되는 것이어서 그렇다. 메멘토 주인공은 그 상징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의 순서를 끝에서 처음으로 거꾸로 돌려 보여주면서 기억와 거기에 메타포로 붙은 감정인 애정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사에키 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저는 이 도시로 돌아온 이래 줄곧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써왔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근처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살던 한 소년을 깊이 사랑했어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했지요. … 우리는 완전한 원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원 안에서 완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시대는 변하고 있었어요. 원은 여기저기 터져서 밖의 것이 낙원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쪽의 것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그런 침입이나 유출을 막으려고 입구의 돌을 열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저는 그 벌을 받았습니다.
<사에키 씨가 나카타 노인에게 한 말>
그녀는 오래 전 소녀였을 때의 연인을 잊지 못하는데, 그때 이룬 완전한 세계를 지키려고 다른 세계의 입구를 열어 버렸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건데, 실제 세상에서도 실연으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의 미스 하비샴. 결혼식 직전 약혼자에게 버림 받은 후 집안의 시계를 멈춰놓고 웨딩드레스를 그대로 입은채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런 분열된 정신이 회복하는데는 사랑과 합일이 필요한데, 다무라 카프카 소년과 나카타 노인이 그 역할을 해주고, 사에키 씨도 두 주인공에게 비슷한 도움을 준다. 고무라 기념 도서관으로 찾아온 나카타 노인에게 사에키 씨는 말한다.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정의 감정이 클수록 모순도 늘어나는데, 사랑이 기억과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상징이고 가변적이기도 해서 부조리가 될 수 있다. 사에키 씨는 자신이 쓰던 원고를 나카타 노인에게 넘겨 주고 태워달라고 한다. 이 원고는 추억의 집약체인데, 사에키 씨의 소녀 시절 연인이 죽으면서 완성되지 못했던 것이 다무라 카프카 소년이 도착함으로서 완성이 되었고, 기억은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사람 안에서 완결성을 띄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소멸시킨 것이다. 자기 작품을 모두 태워 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하고 죽은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최후와도 같다.

(좌) 막스 브로트 (우) 프란츠 카프카
사에키 씨는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본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거기에는 없지.”
“그럼, 사에키 씨는 내가 거기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거죠?”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가지뿐이야” 하고 사에키씨가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사에키 씨가 마지막 만남에서 다무라 카프카에게 한 말>
사에키 씨는 이 말처럼, 자신의 메타포를 소년에게 남기고 편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제 더 이룰 게 없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책 서문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는 작가 자신이면서 독자 자신이기도 하다” 라고. 감정을 이입해서 소년이 자라나는 걸 지켜봐 달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성장을 위한 사이코드라마의 성격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에게서 결핍된 것은 무엇이고 성장을 위해서 어떤 경험이 필요한 걸까? 그건 작가의 유년시절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젊은 시절 스웨터를 입은 모습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일본 전후 세대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당시 보기드문 무녀독남 가정이었고 부모님 두분이 모두 국어교사였다. 베이비 붐 시대, 가족마다 아이들이 북적였지만 그는 조용한 외아들로 책 많이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의 주인공은 다른 작품들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인생이 애착 대상을 찾는 여행 비슷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고, 그게 녹여든 작품이 많은 외로운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사에키 씨는 잘 모르고 있어요. 내가 돌아갈 세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 기억이 없습니다. 나 자신 말고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좋을지도 모르고요. 사에키 씨가 말하는 ‘원래의 생활’ 같은 건,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해변의 카프카 2권 371페이지>
15세 소년 다무라 카프카는 위의 단락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 없이 살아왔다.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의 상실과 아버지로부터의 격리라고 할 수 있다. 다무라 카프카가 4살 아이 였던 시절 어머니는 카프카 군의 누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자식 둘 중에 아들은 놓고 딸 만 데리고 떠난 건데, 그게 어린아이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화가인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지만 대화가 없었고, 가족 외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이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것,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게 유일하게 의미있는 활동이었다. 다무라 소년은 집을 떠나야 했는데, 이유는 아버지의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였다.
소년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누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될거라는 저주인데, 그리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오마주(hommage) 한 것 같다.
다무라 카프카는 도쿄의 집에서 가출해서 시코쿠 지역으로 가는데, 거기서 운명이 이어진 인물인 사에키 씨, 즉 소년의 어머니에 대응되는 사람을 만난다. 사에키 씨는 가출소년 다무라의 임시직장이라 할 수 있는 <고무라 기념 도서관>의 관장이자 안내자로 일하고 있다.
그림자는 실물을 반사한 건데, 그게 반 밖에 없다는 건 실물도 반이라는 뜻이다. 작품에는 이렇게 그림자가 흐린 사람이 두 명 나오는데, 한 명은 사에키 씨고 다른 한 명은 나카타라는 고양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노인이다.
사에키씨는 다무라 카프카 소년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는 소년의 연인이기도 하다. 남자의 가장 강한 애착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둘, 어머니와 연인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 데, 다른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은하철도 999 메텔. 주인공 테츠로(星野鉄郎)의 연인이자 어머니 상(像)
나카타 노인은 다무라 소년의 다른 분신인데, 2번째 주인공이다. 사에키씨와 나카타씨 이 둘이 실체를 잃고 세상에 반 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이유는 유년 시절의 정신적 외상 때문이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랑(애착대상)을 찾는게 성장소설(Bildungsroman)이자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인 <해변의 카프카>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특이하게도 상처 받은 사람을 표현하는데 그냥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하는 게 아니라 그림자가 반 밖에 없고, 본체는 둘로 나뉘어서 한쪽은 이계(異界), 즉 다른 세상에 가있고 현실 세상에는 껍데기 같은 사람이 있는 걸로 해놓았다. 그게 사에키 씨와 나카타 씨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로는 ‘입구의 돌’을 열면 갈 수 있다. 왜 이런 초현실주의적 장치를 사용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얘기하도록 하겠다.
해변의 카프카 II – 꿈 속의 꿈에서의 사랑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그대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그대의 형체를 알 수가 없어서,
I find you all around me.
내 주위 사방으로 찾아 헤맨다.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하지만 네 존재가 눈을 사랑으로 채우고,
It humbles my heart,
나의 마음은 숙연해진다.
For you are everywhere….
왜냐면 이 세상 가득 그대가 있으니…
신비로운 수중 생물과 농인 여자의 사랑을 그렸던 영화 Shape of Water(부제: 사랑의 모양)의 말미에 나왔던 시이다. 여자주인공(Elisa)은 목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다에 들어가며 상처는 아가미로 변해, 사랑하는 이와 자유로이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의 플롯과 맺음 시는 ‘사랑의 모양’ 부제와 잘 어울린다. 물은 정해진 모양 없이 공간을 채우고 이리저리 흐른다. 인간의 사랑 또한 그러한데, 어느 순간 찾아와 존재(공간)를 젖게 하고 마음을 숙연케 한다(사방을 채운 신비를 느꼈기 때문에 이전의 좁은 마음에서 벗어난다는 걸 의미).

이 책을 아무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연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아줌마의 독백이 왜 이렇게 길고 긴 걸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혹은 도덕적 관점에서 도무지 작품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둘 다 작품의 주안점이 되지 못한다. 이때 <셰이프 오브 워터>를 생각해보자.
아니 에르노 작가는 물에 빠져서 호흡이 가빠지는 것처럼, 사랑에 젖어가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책의 초입의 이인감(異人感)에 대한 부분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의지와 욕망, 지성으로 선택한 것은 오로지 이 남자의 존재에만 결부된다. 눈에 사랑이 드리워져(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나는 내가 아닌 것 같고, 생활은 마비될 지경이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감정을, 작가 스스로가 “평평한 글쓰기ecriture plate”라고 부르는 문체로 표현했다는게 이색적이다.
현재의 감각(혹은 이념)에 충실하지 않으면 잡념이 생기고 생활에 감동이 없어진다. 바쁜 수험생이나 직장인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그걸 읽을 수 있다. 반면 아니 에르노는 모든 존재를 기울여 사랑하는 자신의 감각(전혀 무미건조하지 않은 이데아)을 무미건조한 문체(형식)로 내보임으로써 역설적 효과를 낸다.
책의 말미에서 그녀는 연인과의 사랑을 매개로 생긴 결과물을 이야기 한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초입에 느꼈던 이인감이 재현되고 있다. 남자를 만나고 떠나보낸 일을 남이 한 경험처럼 느낀다. 스스로를 잊을 만큼 사랑해서 시간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스어 어원의 카이로스(kairos)는 개인의 체험에 따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시간을 뜻한다. 첫 사랑과 입맞춤 하는 때 같은 최고 최상의 순간(the supreme moment)에는 시간이 아득히 멈춘 것 같은데, 그런 카이로스를 내내 산것 같다.
‘그 사람의 존재로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다는, 공간을 채우는 물처럼 사랑이 마음을 채웠고, 그게 언어의 형태를 띈 작품이 되어 외부로 흘러갔다는 걸 의미한다.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순수히 드러낸 작가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고, 노벨상 수상도 기쁘다.
일하다 보면 아기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다. 아기도 빤히 이쪽을 보는데, 까맣고 하얀 눈동자 색의 대비도, 그걸 가만히 움직이는 모습도 신비하게 느껴진다. 아기는 두 팔을 벌려 양육자에게 안기려 하는데 그럼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고 배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추구가 계속 거부될 때는 괴로워지고, 표정도 순진무구함을 잃게 될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유아기의 체험이 평생토록 이어지는 인격에 영향을 준다고 하는데 아기를 보면 잘 수긍 된다.
책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색채를 뜻하는 글자가 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투명한 거고, 아기와 같이 비고 순수한 상태로 시작한다. 책 제목의 ‘순례’는 그가 정신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떠난 여행을 뜻하고, 그 과정에서 16년전 절교 당한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찾는다. 그 모든 단계가 정신의 치유를 향하는데, 정신분석학으로 풀어보면 재미가 있다.
에스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정립하며 사용한 용어이다. 본능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렬한 성적 충동(리비도; libido) 뿐 아니라 공격성(힘이 자신을 향하면 죽음의 충동; Thanatos이 되어 스스로를 죽이고, 타인을 향하면 살인이 됨)을 포함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연상의 여자친구 기모토 사라의 제안으로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내면 깊은 곳에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렸었다. 출혈의 원인이 된 사건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그걸 아물게 해야만, 사랑이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성장기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썼다. 대표적 성장소설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잘 나타난다. <데미안>은 아이가 성인이 되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이 있고, 논리적으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는 논리적 필연성이 없고 개연성도 없는 사건이 죽 이어져서 혼란스럽다.
그 이유는 소설의 플롯(plot)이 ‘논리’가 아닌 깊은 정신 에너지인 ‘에스’를 중심으로 꿈처럼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각기 적청백흑(赤靑白黑)의 색을 뜻하는 친구들 외에도 색채를 가진 인물이 두 명 더 있다. 회색(灰)의 하이다 후미아키와 녹색(綠)의 미도리카와이다. 회색은 흑색과 백색을 섞으면 나타나는 색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반복되는 꿈에서 구로노 에리(黑)와 시라네 유즈키(白)는 둘이 같이 나체로 주인공과 동침한다. 남자의 막장 판타지를 표현한건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스 즉 리비도가 발현된 모습으로 이해하면 된다. 꿈은 도덕의 억눌림 없는, 가장 큰 에너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자키 쓰쿠루는 여성의 이상형으로 외향적이고 밝은 구로(黑)와 내향적이고 신비로운 시로(白)의 상을 같이 품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에도 성격이 반대인 두 여자 ‘미도리’와 ‘나오코’가 등장하는데, 미도리는 구로에, 나오코는 시로에 대응한다.

현실의 사랑에서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같이 품을 수는 없으므로 두 상(像)을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역할로 연하의 동성(同性)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가 설정된 걸로 보인다. 그는 주인공의 꿈 마지막에서 구강성교로 사정을 받아주는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리비도가 합치와 성숙의 에너지로 쓰인 것이다. 흑과 백이 섞여 회색이 되고, 이제 새로운 여인 기모토 사라를 만날 바탕이 마련되었다.
미도리카와는 하이다 후미아키의 아버지가 과거에 만났던 사람이다. 전직 피아니스트인 그는 외딴 산장에 죽기 위해 찾아왔다. 그가 하이다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그거하곤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사실 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어. 대충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지.”
…
“그러면 미도리카와 씨는 앞으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네 생명은 앞으로 두 달로 정해졌다고. 그게 한달 전이었거든.”
“그런 소리를 도대체 누가 했습니까?”
“의사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냐. 아주 평범한 사람이야. 단, 그 시점에서 그는 죽어 가고 있었어.”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서 에스는 파괴적 에너지로 자신을 해치려 한다. 수치심과 자기혐오의 결과인 경우가 많은데, 미도리카와에게는 특이하게도 무감동증(Anhedonia)이 원인이 되었다. 그의 상징 색채인 녹색은 자연 그대로인 해탈 상태를 의미하는데, 깨달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의미 없어져버린 것이다. 불교에서 즉신불(卽身佛)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죽음의 필연적 이유를 알려주는 악마(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도인道人 같은 사람일 것이다.)를 만난 그는 그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자기는 살 수도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죽는 길을 택한다. 마지막 남아 있는 사랑으로 하이다의 아버지에게 아래와 같은 충고를 해준다. 이데아의 극한이 죽음을 부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 하는 작별인사이다.
문득 하이다는 좁은 방 안에서 미도리카와와 둘이 마주 앉은 것 자체가 갑작스럽게, 참 이상하게도,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기증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 속에 미세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이 천천히 썩어 가는 냄새. 그러나 단순한 착각일 것이다. 아직 여기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
“자네는 머지않아 도쿄의 대학 생활로 돌아갈 거야.” 미도리카와는 조용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으로 돌아갈 거야. 견실하게 그 삶을 살아야 해. 아무리 밋밋하고 평범하더라도 삶에는 살 만한 가치가 있지. 그건 내가 보장하지. 아이러니나 역설 같은 건 빼고 하는 말이야. 다만 나에게는 그 가치라는 게 좀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 놈을 제대로 짊어지고 나아갈 수가 없어. 아마 나면서부터 거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죽어 가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 그때가 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거야.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아. 그러나 자네는 달라. 자네는 그놈을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어. 논리의 실을 활용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
책에는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경탄이 자주 나온다. 도자기 같이 하얀 시라네 유즈키의 다리, 민트 그린 원피스를 입고 빛나는 기모토 사라, 끝이 살짝 올라가서 예쁜 구로노 에리의 코 등등.
작가가 외모지상주의자여서 그런 건 아니고, 리비도의 흐름을 잘 포착해서 문예로 바꾸는 능력이 출중해서 그렇다고 느낀다. 에스(리비도)는 주의(主義)와 상관없이 가장 강렬한 자극에 들러붙는다.

반대로 시들어진 외모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작가는 아름다움을 ‘외형’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나 ‘기운’으로 표현한다. 성폭행과 유산으로 완전히 바뀌었던 시로에 대한, 그리고 기모토 사라의 옛 사립여고 동창생에 대한 묘사가 다 그렇다.
“…중요한 건 시로는 그때 벌써 생명력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광채를 잃어버렸다는 거야. 그 애가 성격적으로는 내향적인 타입이었지만 중심에는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활발히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어. 그 빛과 열기가 여기저기 틈을 찾아서 마구 바깥으로 새어 나왔지.
…
그렇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런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마치 누군가가 뒤로 돌아 들어가서 플러그를 뽑아 버린 것처럼. 예전에 그 애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싱싱한 물기를 머금게 했던 특유의 겉모습이 그땐 오히려 애처롭게 보였던 거야. 나이 문제가 아니아.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시로가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정말로 안타까웠고 진심으로 불쌍했어. 어떤 사정이 있었든 그런 식으로 죽기를 바라지 않았어.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는 육체적으로 살해되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빼앗긴 상태였다고.”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그 이야기는 내 고등학교 반 친구 생각이 나게 해. 미인이고 날씬하고 집도 부자고 외국에 살다가 귀국했는데, 영어도 프랑스어도 잘하고 성적도 최상이었어. 뭘 해도 사람들 눈을 끌었어. 친구들에게 찬양받고 후배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어. 사립 여고라서 그런게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
쓰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신 여대에 들어가서 중간에 2년, 프랑스 유학을 갔어. 귀국해서 2년 정도 지나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 애 얼굴을 보고 난 할 말을 잃었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색채가 흐려졌다고 할까. 강렬한 햇살 아래 오랫동안 드러나 있다 보니 색이 전부 바래 버린 것처럼. 겉모습은 옛날이나 다름없었어. 여전히 미인이고 날씬하고…… 다만 예전보다 흐려 보였던 거야. 나도 모르게 텔레비전 리모컨이라도 들고 색깔의 농도를 몇 단계 올려 놓고 싶을 정도로. 정말 기묘한 경험이었어. 사람이 몇 년 만에 이 정도로 눈에 띄게 흐려질 수 있다니.”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 그 애랑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둘 모두와 친한 친구가 있어서 그 이후에도 가끔 어떤 자리에서 만나곤 했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애, 색깔이 점점 더 흐려진다는 걸 느꼈어.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는 누구의 눈에도 특별한 미인이 아니었고,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았어. 머리도 많이 나빠진 거 같았고 하는 이야기도 지루하고, 생각하는 것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거야. 스물일곱에 결혼했는데, 남편은 관청의 엘리트로 척 보기에도 얄팍하고 재미없는 남자였어. 그런데 본인은 더는 미인도 아니고 매력적이지도 않고 사람들 눈을 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고 옛날처럼 여왕으로 행동하는 거야.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정말 답답하고 괴로웠어.”
정신에너지(Es)의 상실이 얼굴의 광채까지 지워 버렸다. 이런 내면의 에너지에 대한 표현을 같은 성장소설 <데미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얼마나 신비한 힘을 두 작가는 표현했던가. 에스(Es)는 하이다 후미아키를 선의의 인도자가 되게 했고, 미도리카와와 시로에게는 죽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다자키 쓰쿠루와 기모토 사라에게는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한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