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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 고양이 마을

이 책의 주제는 서문의 노래 가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It’s a Barnum and Bailey world.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Just as phony as it can be,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But If you believed in me.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It wouldn’t be make-believe

《E. Y. Harburg & Harold Arlen, It’s Only a Paper Moon》

즉 관계와 꿈에 대한 것인데, 어떤 두 사람의 관계에 믿음이 생기면(make-believe가 believe로) 모두 환영인 꿈의 세계에서도 현실보다 생생한 의미가 체화된다는 것이다. 1Q84 책을 해석할 때 이 설정에서 멀어지면 작가가 배치한 장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재미가 없어진다.

작품에서 꿈의 세계 아니면 평행세계라고 할 수 있는 곳의 이름은 1Q84인데, 이런 가상 세계 상징들이 어렵게 느껴진다. 두 개의 달, 리틀 피플, 공기번데기, 마더, 도터, 퍼시버, 리시버 등이다. 하지만 최대한 몽환적으로 ⎻ 마치 좋은 음악이 흐르고 거기 마음을 맡긴 듯 ⎻ 읽어 보면 좋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비드 린치 감독.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역시 초현실주의 경향으로 유명한 영화인데, 중심 줄거리와 상관이 없는 인물들이 쭉 나오며 혼란스럽게 진행된다.

꿈과 현실의 교차로 실렌시오 극장(Club Silencio)이 등장한다. 주인공 두 명은 새벽 시간에 택시를 타고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거리의 극장으로 간다. 이 시간에도 극이 상영 중이고 거기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꿈을 상징한다.

무대 위 사회자는 “밴드도, 오케스트라도 없다. 모든 것은 녹음된 테이프이자 환상”이라고 말한다(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얘기함).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서두에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환영과 꿈 속에서는 원초적 정신 에너지는 꿈틀대지만, 정작 논리와 기억의 연결이 다 흩어져 있다. 결국 초현실주의적 장치가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를 정리해보면 첫째는 꿈에서 나오는 상징이 가장 강한 심적 에너지의 발산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상징이 논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예술적인 면에서, 그리고 심리 치유 면에서 의미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 작가의 이 책에서 실렌시오 극장의 역할을 하는 건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이다. 여주인공 아오마메가 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을 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세계로 가야만 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었다.

The Wounded Deer, 1946 by Frida Kahlo

아오마메의 부모와 오빠는 모두 ‘증인회’라고 하는 종교 집단의 일원이었는데 오직 아오마메만 믿음이 없었다. 가족에게는 신앙이 전부였고, 그걸 배신한 사람은 가족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실질적 고아가 된 아오마메는 한가지 희망을 품고 살았는데, 그건 따돌림 받던 자신을 유일하게 보듬어 주었던 동급생 가와나 덴고와 다시 이어지는 것이었다. 문학에서 구원의 장치로 제시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심적인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즉 문학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상처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치유되는데, 아오마메는 그런 재생을 위한 장소를 1Q84라고 스스로 명명한다. 여기서 Q는 Question 질문을 뜻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를 살짝 비틀었다. 하지만 《1984》처럼 외부 전체주의 세계에 저항하며 자유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생겨난 독재자라고 할 수 있는 힘든 이념과 콤플렉스를 질문해 이겨내고 자유를 쟁취하고 있다. 즉 마음 안의 싸움이다.

아오마메와 덴고

작품에서 하늘의 달이 두 개인 평행 세계에 들어간 것은 덴고, 아오마메 그리고 우시카와이다. 덴고에게는 세계의 이름이 다른데, 1Q84가 아닌 고양이 마을이다.

★ 고양이 마을, 상실

어린 아오마메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은 부모의 종교였고, 자신이 믿을 수 없는 걸 계속 머리에 집어 넣는 집에서 가출한다. 덴고도 아오마메와 비슷하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는데, 덴고의 아버지는 NHK(일본의 공영방송사) 수금원이었고 자신의 존재를 오직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로 정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걸 아들에게도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주말에도 수금 업무를 했는데, 일부러 아들을 동행시켰다. 아이가 같이 있으면 완고한 사람도 수금 거부를 못 한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집집마다 노크하며 수금하는 아버지를 따르는 덴고를, 급우들은 ‘NHK’라고 별명 붙였다. 부유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아이들로부터 치욕을 느낀 덴고는 어떤 종류의 탈출을 꾀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학원 강사이자 아마추어 문학 작가가 된 그는 어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어른 아오마메는 수도고속도록 계단을 내려감으로써 다른 세계로 갔는데, 덴고는《공기 번데기》라고 하는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 이동을 했다. 아오마메와 마찬가지로 마음 안의 장치로 외부 세계를 전환시킨 건데, 알쏭달쏭한 부분이다.

하지만 덴고의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 세계로 갔는지와 비교해보면 의미가 드러난다. NHK를 퇴직한 덴고의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으로 간다. 요양원의 의사가 덴고에게 설명하는 부분인데, 아버지의 육체에는 이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정신적 힘이 작용해서 몸 전체 생명의 불을 끄고 있었다. 단순한 치매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도 덴고와 마찬가지로 큰 상처가 있었다. 그건 아내, 즉 덴고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는 덴고가 아직 아기이던 때에 남편을 버리고, 아이는 데리고 외간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 그리고는 그 남자에게서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에게 목이 졸려서 죽게 된다(물론 이 사실을 아버지는 성장한 덴고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 아기 덴고를 데려갔고 여기서 큰 분열이 시작되었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 그런데 죽어 버렸고, 아들 덴고는 자기 상처를 상기시켜주는 존재였다. 결국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눠서 오로지 자신을 대우해 주는 회사를 위해서만 산다. 열과 성을 다해 수금 업무를 한다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들도 그 연장선 상에서 대한다. 나중에는 치매에 걸리고, 그런 다음에도 생령이 되어서 아오마메의 집이나 후카에리가 머무는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수금을 하러 왔다고 하면서 떠도는 영혼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생령(生霊; いきりょう)은《겐지 이야기 源氏物語》같은 일본 고전 문학에서부터 등장한 것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이나 원념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타인에게 붙는 현상 또는 그 영혼을 뜻한다.

작품은 이렇게 현실과 접점이 없고, 자기 아들이나 다른 사람과도 감정적인 교류나 공감을 하지 않는 상태를 고양이 마을에 갔다고 표현한다. 고양이 마을 명칭은 액자식 구성으로 작중의 주인공 덴고가 읽었던 가상의 독일 소설 안에 있는 마을에서 나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젊은 여행자가 어느 비어 있는 마을의 기차 정류장에 내린다. 그런데 낮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밤이 되니까 큰 고양이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든다. 청년은 기겁을 해서 마을의 시계탑으로 숨는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인간 냄새를 맡고서 시계탑까지 올라오지만 청년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낮이 되어 젊은이는 다시 자기가 맨 처음 내렸던 기차 정류장으로 간다. 기차는 들어오지만,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청년은 이미 ‘상실’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상징은 해가 지면 고양이들이 마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가 종루 즉 시계탑에 숨는다는 사실이다. 밤에만 나타난다는 건 역시 환영, 꿈이라는 걸 의미한다. 종루에 숨는다는 건 흐르는 시간이 표시되는 세계가 필요한 건 인간 밖에 없고 ⎻ 환영이나 생령은 시간을 초월해 있음 ⎻ 그래서 이 고양이 마을에 생명을 가진 인간은 이 청년 밖에 없다는 걸 뜻한다.

덴고의 아버지는 상처와 생으로 인해서 정신이 분열되고 고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상실되어 버렸고, 고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죽는다. 치매에 걸린 그가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들 덴고와 대화를 하고, 죽은 뒤에 유품을 덴고가 정리하는 장면이 있는데, 작품에서 가장 슬프고 서정적인 부분이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스스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회고하며 쓰지 않았을까 한다(하루키 작가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는《고양이를 버리다》책에 묘사되어 있음).

주인공 덴고는 하지만, 아버지처럼 갇히지 않고 탈출을 할 수 있었는데, 《공기 번데기》라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마음이 고착되지 않았고, 아오마메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사랑을 찾았기 때문이다.

★ 열 살의 사랑, 시작되기 전에 시작되어 있던

애정 결핍의 말 없는 아이였던 열 살 아오마메는 학교 과학실험 시간 때 이지메를 당한다. 옆 실험조에 있던 덴고는 아오마메를 자기 조로 오게해서 괴롭히는 아이들에게서 떼어내 보호하고, 실험을 어떻게 하는지 차근차근 가르쳐 준다. 아오마메는 어린 자기를 지켜주었던 덴고를 평생 잊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둘이 아직 열 살의 나이, 사춘기가 시작하기 전이라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전작《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언급했듯 인간이 남녀의 성으로 나뉜 것을 근원적 고독의 시작으로 보는 듯하다(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학설).

(좌) 누에고치 (우) 성충 누에나방

그런데 작중의 ‘공기 번데기’는 누에고치가 탈피를 거듭해서 성충으로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와 2차 성징 때 몸의 변화이다. 존재의 고독을 탈출하기 위한 첫 번째 묵시록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과학실험 사건 후에 서로 손을 잡게 되는데, 이때 이후 둘 다 그런 신체의 변화를 겪는다.

몹시 맑은 12월 초순의 오후였다. 창밖에는 높은 하늘과 곧게 이어진 구름이 보였다. 방과후 청소가 끝난 교실에 덴고와 그녀는 어쩌다가 둘만 남게 되었다. 둘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가로질러 덴고에게 다가와 옆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덴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지그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덴고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덴고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투명한 깊이를 보았다. 소녀는 한동안 말없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몹시 세게, 한순간도 힘을 늦추는 일 없이.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손을 놓고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잰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덴고는 영문을 모른 채 말을 잃고 한참 동안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1Q84 1권 328~329 페이지

이 둘이 손을 잡고 있던 학교 교실의 창 바깥에는 낮이었지만 달이 보였다. 두 개의 달이 있는 이계로 같이 가게 된 건, 이런 상징과 연결되어 있다. 덴고는 나중에 아버지가 있던 요양원에서 빈 침대 위에 공기 번데기가 있고 그 안에 소녀인 아오마메가 있는 것을 목격한다. 아버지의 생령이 머물던 곳에서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 즉 다른 세계로 이동한 아오마메와 맺어지게 될 거라는 표식이다.

표식대로 덴고는 아오마메와 20년 만에 재회를 하고 둘이 손 잡고 수도고속도로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서 1Q84를 탈출한다. 달은 어두운 무의식을 상징하는데, 그게 두 개인 세계는 무의식이 분열되어 있는 곳이고, 그런 정신의 분열이 치유되고 덴고와 아오마메가 영육으로 합쳐져서 관계의 희망인 아기를 잉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표현하는 사랑은 초현실적이고 실제 세계의 사랑에 참고가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자본주의는 교환 가치로 물건이든 사람이든 평가하게 한다. 외모 재산 사회적지위 등으로 종합 점수를 매길 수 있다.

Carl Gustav Jung

그걸 초월한 것이 칼 구스타프 융이 말했던 원형(Archetype) 아니마 아니무스(Anima Animus)이다. 자신 존재의 본질에 가장 부합하는 이성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집합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으로 잠재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이성에게로 끌리게 하는 진정한 힘은 자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아닌, 피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거고, 아니마 아니무스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닌 둘을 종합한 것이다.

하루키 작가가 보여주는 사랑은 정신의 원형을 상징으로 잘 드러내고 있고, 대중문화 작품의 테마인 구속과 해방과 맺어짐이라는 메타포를 아름답게 구현하고 있다.

해변의 카프카 II – 꿈 속의 꿈에서의 사랑

 
 
사람 그림자가 반이고, 시간과 공간의 연결이 끊어지고, 주인공의 아빠라는 사람이 조니워커 위스키 병 모델 같이 차려 입고 나오는 소설의 상황은 왜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자.
 

(좌) 실제 조니워커 병 모델 (우) 소설 속 조니워커 상상도


 
장난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건 작가의 영혼 탐구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치유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사람 정신의 작동방식은 이성적인 것만이 아니고, 깊은 곳의 혼돈스런 무의식과 연결 되어 있다. 프로이트나 융이 말했던 그런 의식이다. 그래서 어지럽고 뜬근없는 마음의 파편을 이해하면 상처를 낫게 하는 길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파편은 꿈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예시로서 프란츠 카프카의 <성>이라는 작품을 들 수 있다. 측량사 K라는 주인공이 추운 겨울에 한 낮선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 언덕 꼭대기로 보이는 성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마치 악몽 속을 헤메는 것처럼, 가려할 수록 더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성에 가는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줄거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가 죽 늘어난다.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은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작품 <성>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면 꿈 속에서 헤매는 아이러니가 실제 삶에서 헤매는 아이러니와 중첩되기 때문이다.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 The Castle by Franz Kafka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프란츠 카프카 평론>

 

토마스 만 평론 내용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온 이야기인데, 사람이 호랑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나비인게 너무 즐거웠다, 근데 깨보니 사람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지금 사람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장폴 사르트트,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 문학가들이 이 컨셉을 좋아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려는 사람은 아주 열심히 사는 것 같다. 온 시간과 피와 땀을 들여 노력을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셀럽이 되어서 부와 명예와 세상의 부러움을 다 얻어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것도 인간이 나비의 꿈을 꾸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주체와 관점에 따라 허무한 것이 된다.
 
그래서 카프카 작가도 하루키 작가도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생에서 가장 절박하고 영속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는 테마이다. 그게 바로 기억과 사랑이다.
 
 

★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메멘토(Memento)의 장면이다. 주인공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앞으로 진행되는 사건을 기억 못함. 기억상실증 이전 사건들은 잘 기억함)을 앓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자기 아내를 죽인 범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런데 스포일러이지만 실제 아내 살해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오시마 청년이 몇 번 했던 중요한 대사가 ‘만물은 메타포’ 이다. 독일의 괴테가 책 <파우스트>에서 한 말을 인용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건 상징으로 나타나는 데, 뇌에서 한 번 해석된 후 저장되는 것이어서 그렇다. 메멘토 주인공은 그 상징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의 순서를 끝에서 처음으로 거꾸로 돌려 보여주면서 기억와 거기에 메타포로 붙은 감정인 애정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사에키 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저는 이 도시로 돌아온 이래 줄곧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써왔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근처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살던 한 소년을 깊이 사랑했어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했지요. … 우리는 완전한 원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원 안에서 완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시대는 변하고 있었어요. 원은 여기저기 터져서 밖의 것이 낙원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쪽의 것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그런 침입이나 유출을 막으려고 입구의 돌을 열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저는 그 벌을 받았습니다.
 
<사에키 씨가 나카타 노인에게 한 말>

 
그녀는 오래 전 소녀였을 때의 연인을 잊지 못하는데, 그때 이룬 완전한 세계를 지키려고 다른 세계의 입구를 열어 버렸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건데, 실제 세상에서도 실연으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의 미스 하비샴. 결혼식 직전 약혼자에게 버림 받은 후 집안의 시계를 멈춰놓고 웨딩드레스를 그대로 입은채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런 분열된 정신이 회복하는데는 사랑과 합일이 필요한데, 다무라 카프카 소년과 나카타 노인이 그 역할을 해주고, 사에키 씨도 두 주인공에게 비슷한 도움을 준다. 고무라 기념 도서관으로 찾아온 나카타 노인에게 사에키 씨는 말한다.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정의 감정이 클수록 모순도 늘어나는데, 사랑이 기억과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상징이고 가변적이기도 해서 부조리가 될 수 있다. 사에키 씨는 자신이 쓰던 원고를 나카타 노인에게 넘겨 주고 태워달라고 한다. 이 원고는 추억의 집약체인데, 사에키 씨의 소녀 시절 연인이 죽으면서 완성되지 못했던 것이 다무라 카프카 소년이 도착함으로서 완성이 되었고, 기억은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사람 안에서 완결성을 띄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소멸시킨 것이다. 자기 작품을 모두 태워 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하고 죽은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최후와도 같다.
 
 

(좌) 막스 브로트 (우) 프란츠 카프카


 

사에키 씨는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본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거기에는 없지.”
“그럼, 사에키 씨는 내가 거기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거죠?”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가지뿐이야” 하고 사에키씨가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사에키 씨가 마지막 만남에서 다무라 카프카에게 한 말>

 
사에키 씨는 이 말처럼, 자신의 메타포를 소년에게 남기고 편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제 더 이룰 게 없었던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I – 상처 받아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책 서문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는 작가 자신이면서 독자 자신이기도 하다” 라고. 감정을 이입해서 소년이 자라나는 걸 지켜봐 달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성장을 위한 사이코드라마의 성격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에게서 결핍된 것은 무엇이고 성장을 위해서 어떤 경험이 필요한 걸까? 그건 작가의 유년시절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젊은 시절 스웨터를 입은 모습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일본 전후 세대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당시 보기드문 무녀독남 가정이었고 부모님 두분이 모두 국어교사였다. 베이비 붐 시대, 가족마다 아이들이 북적였지만 그는 조용한 외아들로 책 많이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의 주인공은 다른 작품들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인생이 애착 대상을 찾는 여행 비슷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고, 그게 녹여든 작품이 많은 외로운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사에키 씨는 잘 모르고 있어요. 내가 돌아갈 세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 기억이 없습니다. 나 자신 말고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좋을지도 모르고요. 사에키 씨가 말하는 ‘원래의 생활’ 같은 건,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해변의 카프카 2권 371페이지>

 
15세 소년 다무라 카프카는 위의 단락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 없이 살아왔다.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의 상실과 아버지로부터의 격리라고 할 수 있다. 다무라 카프카가 4살 아이 였던 시절 어머니는 카프카 군의 누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자식 둘 중에 아들은 놓고 딸 만 데리고 떠난 건데, 그게 어린아이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화가인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지만 대화가 없었고, 가족 외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이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것,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게 유일하게 의미있는 활동이었다. 다무라 소년은 집을 떠나야 했는데, 이유는 아버지의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였다.
 
소년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누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될거라는 저주인데, 그리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오마주(hommage) 한 것 같다.
 
다무라 카프카는 도쿄의 집에서 가출해서 시코쿠 지역으로 가는데, 거기서 운명이 이어진 인물인 사에키 씨, 즉 소년의 어머니에 대응되는 사람을 만난다. 사에키 씨는 가출소년 다무라의 임시직장이라 할 수 있는 <고무라 기념 도서관>의 관장이자 안내자로 일하고 있다.
 
 

★ 그림자가 반 밖에 없는 인간

그림자는 실물을 반사한 건데, 그게 반 밖에 없다는 건 실물도 반이라는 뜻이다. 작품에는 이렇게 그림자가 흐린 사람이 두 명 나오는데, 한 명은 사에키 씨고 다른 한 명은 나카타라는 고양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노인이다.
 
사에키씨는 다무라 카프카 소년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는 소년의 연인이기도 하다. 남자의 가장 강한 애착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둘, 어머니와 연인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 데, 다른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은하철도 999 메텔. 주인공 테츠로(星野鉄郎)의 연인이자 어머니 상(像)


 

나카타 노인은 다무라 소년의 다른 분신인데, 2번째 주인공이다. 사에키씨와 나카타씨 이 둘이 실체를 잃고 세상에 반 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이유는 유년 시절의 정신적 외상 때문이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랑(애착대상)을 찾는게 성장소설(Bildungsroman)이자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인 <해변의 카프카>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특이하게도 상처 받은 사람을 표현하는데 그냥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하는 게 아니라 그림자가 반 밖에 없고, 본체는 둘로 나뉘어서 한쪽은 이계(異界), 즉 다른 세상에 가있고 현실 세상에는 껍데기 같은 사람이 있는 걸로 해놓았다. 그게 사에키 씨와 나카타 씨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로는 ‘입구의 돌’을 열면 갈 수 있다. 왜 이런 초현실주의적 장치를 사용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얘기하도록 하겠다.
 
해변의 카프카 II – 꿈 속의 꿈에서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