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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 고양이 마을

이 책의 주제는 서문의 노래 가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It’s a Barnum and Bailey world.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Just as phony as it can be,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But If you believed in me.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It wouldn’t be make-believe

《E. Y. Harburg & Harold Arlen, It’s Only a Paper Moon》

즉 관계와 꿈에 대한 것인데, 어떤 두 사람의 관계에 믿음이 생기면(make-believe가 believe로) 모두 환영인 꿈의 세계에서도 현실보다 생생한 의미가 체화된다는 것이다. 1Q84 책을 해석할 때 이 설정에서 멀어지면 작가가 배치한 장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재미가 없어진다.

작품에서 꿈의 세계 아니면 평행세계라고 할 수 있는 곳의 이름은 1Q84인데, 이런 가상 세계 상징들이 어렵게 느껴진다. 두 개의 달, 리틀 피플, 공기번데기, 마더, 도터, 퍼시버, 리시버 등이다. 하지만 최대한 몽환적으로 ⎻ 마치 좋은 음악이 흐르고 거기 마음을 맡긴 듯 ⎻ 읽어 보면 좋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비드 린치 감독.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역시 초현실주의 경향으로 유명한 영화인데, 중심 줄거리와 상관이 없는 인물들이 쭉 나오며 혼란스럽게 진행된다.

꿈과 현실의 교차로 실렌시오 극장(Club Silencio)이 등장한다. 주인공 두 명은 새벽 시간에 택시를 타고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거리의 극장으로 간다. 이 시간에도 극이 상영 중이고 거기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꿈을 상징한다.

무대 위 사회자는 “밴드도, 오케스트라도 없다. 모든 것은 녹음된 테이프이자 환상”이라고 말한다(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얘기함).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서두에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환영과 꿈 속에서는 원초적 정신 에너지는 꿈틀대지만, 정작 논리와 기억의 연결이 다 흩어져 있다. 결국 초현실주의적 장치가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를 정리해보면 첫째는 꿈에서 나오는 상징이 가장 강한 심적 에너지의 발산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상징이 논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예술적인 면에서, 그리고 심리 치유 면에서 의미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 작가의 이 책에서 실렌시오 극장의 역할을 하는 건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이다. 여주인공 아오마메가 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을 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세계로 가야만 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었다.

The Wounded Deer, 1946 by Frida Kahlo

아오마메의 부모와 오빠는 모두 ‘증인회’라고 하는 종교 집단의 일원이었는데 오직 아오마메만 믿음이 없었다. 가족에게는 신앙이 전부였고, 그걸 배신한 사람은 가족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실질적 고아가 된 아오마메는 한가지 희망을 품고 살았는데, 그건 따돌림 받던 자신을 유일하게 보듬어 주었던 동급생 가와나 덴고와 다시 이어지는 것이었다. 문학에서 구원의 장치로 제시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심적인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즉 문학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상처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치유되는데, 아오마메는 그런 재생을 위한 장소를 1Q84라고 스스로 명명한다. 여기서 Q는 Question 질문을 뜻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를 살짝 비틀었다. 하지만 《1984》처럼 외부 전체주의 세계에 저항하며 자유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생겨난 독재자라고 할 수 있는 힘든 이념과 콤플렉스를 질문해 이겨내고 자유를 쟁취하고 있다. 즉 마음 안의 싸움이다.

아오마메와 덴고

작품에서 하늘의 달이 두 개인 평행 세계에 들어간 것은 덴고, 아오마메 그리고 우시카와이다. 덴고에게는 세계의 이름이 다른데, 1Q84가 아닌 고양이 마을이다.

★ 고양이 마을, 상실

어린 아오마메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은 부모의 종교였고, 자신이 믿을 수 없는 걸 계속 머리에 집어 넣는 집에서 가출한다. 덴고도 아오마메와 비슷하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는데, 덴고의 아버지는 NHK(일본의 공영방송사) 수금원이었고 자신의 존재를 오직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로 정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걸 아들에게도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주말에도 수금 업무를 했는데, 일부러 아들을 동행시켰다. 아이가 같이 있으면 완고한 사람도 수금 거부를 못 한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집집마다 노크하며 수금하는 아버지를 따르는 덴고를, 급우들은 ‘NHK’라고 별명 붙였다. 부유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아이들로부터 치욕을 느낀 덴고는 어떤 종류의 탈출을 꾀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학원 강사이자 아마추어 문학 작가가 된 그는 어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어른 아오마메는 수도고속도록 계단을 내려감으로써 다른 세계로 갔는데, 덴고는《공기 번데기》라고 하는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 이동을 했다. 아오마메와 마찬가지로 마음 안의 장치로 외부 세계를 전환시킨 건데, 알쏭달쏭한 부분이다.

하지만 덴고의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 세계로 갔는지와 비교해보면 의미가 드러난다. NHK를 퇴직한 덴고의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으로 간다. 요양원의 의사가 덴고에게 설명하는 부분인데, 아버지의 육체에는 이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정신적 힘이 작용해서 몸 전체 생명의 불을 끄고 있었다. 단순한 치매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도 덴고와 마찬가지로 큰 상처가 있었다. 그건 아내, 즉 덴고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는 덴고가 아직 아기이던 때에 남편을 버리고, 아이는 데리고 외간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 그리고는 그 남자에게서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에게 목이 졸려서 죽게 된다(물론 이 사실을 아버지는 성장한 덴고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 아기 덴고를 데려갔고 여기서 큰 분열이 시작되었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 그런데 죽어 버렸고, 아들 덴고는 자기 상처를 상기시켜주는 존재였다. 결국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눠서 오로지 자신을 대우해 주는 회사를 위해서만 산다. 열과 성을 다해 수금 업무를 한다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들도 그 연장선 상에서 대한다. 나중에는 치매에 걸리고, 그런 다음에도 생령이 되어서 아오마메의 집이나 후카에리가 머무는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수금을 하러 왔다고 하면서 떠도는 영혼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생령(生霊; いきりょう)은《겐지 이야기 源氏物語》같은 일본 고전 문학에서부터 등장한 것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이나 원념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타인에게 붙는 현상 또는 그 영혼을 뜻한다.

작품은 이렇게 현실과 접점이 없고, 자기 아들이나 다른 사람과도 감정적인 교류나 공감을 하지 않는 상태를 고양이 마을에 갔다고 표현한다. 고양이 마을 명칭은 액자식 구성으로 작중의 주인공 덴고가 읽었던 가상의 독일 소설 안에 있는 마을에서 나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젊은 여행자가 어느 비어 있는 마을의 기차 정류장에 내린다. 그런데 낮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밤이 되니까 큰 고양이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든다. 청년은 기겁을 해서 마을의 시계탑으로 숨는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인간 냄새를 맡고서 시계탑까지 올라오지만 청년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낮이 되어 젊은이는 다시 자기가 맨 처음 내렸던 기차 정류장으로 간다. 기차는 들어오지만,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청년은 이미 ‘상실’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상징은 해가 지면 고양이들이 마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가 종루 즉 시계탑에 숨는다는 사실이다. 밤에만 나타난다는 건 역시 환영, 꿈이라는 걸 의미한다. 종루에 숨는다는 건 흐르는 시간이 표시되는 세계가 필요한 건 인간 밖에 없고 ⎻ 환영이나 생령은 시간을 초월해 있음 ⎻ 그래서 이 고양이 마을에 생명을 가진 인간은 이 청년 밖에 없다는 걸 뜻한다.

덴고의 아버지는 상처와 생으로 인해서 정신이 분열되고 고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상실되어 버렸고, 고양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죽는다. 치매에 걸린 그가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들 덴고와 대화를 하고, 죽은 뒤에 유품을 덴고가 정리하는 장면이 있는데, 작품에서 가장 슬프고 서정적인 부분이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스스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회고하며 쓰지 않았을까 한다(하루키 작가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는《고양이를 버리다》책에 묘사되어 있음).

주인공 덴고는 하지만, 아버지처럼 갇히지 않고 탈출을 할 수 있었는데, 《공기 번데기》라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마음이 고착되지 않았고, 아오마메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사랑을 찾았기 때문이다.

★ 열 살의 사랑, 시작되기 전에 시작되어 있던

애정 결핍의 말 없는 아이였던 열 살 아오마메는 학교 과학실험 시간 때 이지메를 당한다. 옆 실험조에 있던 덴고는 아오마메를 자기 조로 오게해서 괴롭히는 아이들에게서 떼어내 보호하고, 실험을 어떻게 하는지 차근차근 가르쳐 준다. 아오마메는 어린 자기를 지켜주었던 덴고를 평생 잊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둘이 아직 열 살의 나이, 사춘기가 시작하기 전이라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전작《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언급했듯 인간이 남녀의 성으로 나뉜 것을 근원적 고독의 시작으로 보는 듯하다(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학설).

(좌) 누에고치 (우) 성충 누에나방

그런데 작중의 ‘공기 번데기’는 누에고치가 탈피를 거듭해서 성충으로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와 2차 성징 때 몸의 변화이다. 존재의 고독을 탈출하기 위한 첫 번째 묵시록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과학실험 사건 후에 서로 손을 잡게 되는데, 이때 이후 둘 다 그런 신체의 변화를 겪는다.

몹시 맑은 12월 초순의 오후였다. 창밖에는 높은 하늘과 곧게 이어진 구름이 보였다. 방과후 청소가 끝난 교실에 덴고와 그녀는 어쩌다가 둘만 남게 되었다. 둘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가로질러 덴고에게 다가와 옆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덴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지그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덴고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덴고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투명한 깊이를 보았다. 소녀는 한동안 말없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몹시 세게, 한순간도 힘을 늦추는 일 없이.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손을 놓고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잰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덴고는 영문을 모른 채 말을 잃고 한참 동안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1Q84 1권 328~329 페이지

이 둘이 손을 잡고 있던 학교 교실의 창 바깥에는 낮이었지만 달이 보였다. 두 개의 달이 있는 이계로 같이 가게 된 건, 이런 상징과 연결되어 있다. 덴고는 나중에 아버지가 있던 요양원에서 빈 침대 위에 공기 번데기가 있고 그 안에 소녀인 아오마메가 있는 것을 목격한다. 아버지의 생령이 머물던 곳에서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 즉 다른 세계로 이동한 아오마메와 맺어지게 될 거라는 표식이다.

표식대로 덴고는 아오마메와 20년 만에 재회를 하고 둘이 손 잡고 수도고속도로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서 1Q84를 탈출한다. 달은 어두운 무의식을 상징하는데, 그게 두 개인 세계는 무의식이 분열되어 있는 곳이고, 그런 정신의 분열이 치유되고 덴고와 아오마메가 영육으로 합쳐져서 관계의 희망인 아기를 잉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표현하는 사랑은 초현실적이고 실제 세계의 사랑에 참고가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자본주의는 교환 가치로 물건이든 사람이든 평가하게 한다. 외모 재산 사회적지위 등으로 종합 점수를 매길 수 있다.

Carl Gustav Jung

그걸 초월한 것이 칼 구스타프 융이 말했던 원형(Archetype) 아니마 아니무스(Anima Animus)이다. 자신 존재의 본질에 가장 부합하는 이성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집합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으로 잠재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이성에게로 끌리게 하는 진정한 힘은 자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아닌, 피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거고, 아니마 아니무스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닌 둘을 종합한 것이다.

하루키 작가가 보여주는 사랑은 정신의 원형을 상징으로 잘 드러내고 있고, 대중문화 작품의 테마인 구속과 해방과 맺어짐이라는 메타포를 아름답게 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