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빛이 있다. 빛이 있기 전에는 어둠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성경의 창세기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빛은 움직이고 반사할 수 있어서 그만큼 어둠을 줄인다. 거울은 항상 빛을 온전히 투영해 나누어준다. 어두운 날이면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둡고, 밝은 햇빛이 있는 날 모습은 해와 함께 빛난다. 일곱 살 정인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집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하루는 이층으로 가는 나무 계단을 올라서 창가로 갔다. 벽 시계가 조용한 초침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는 아카시아 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인은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넓었던 창문 턱 공간에는 액자와 책들이 놓여 있었다.
정인은 거기서 두 개의 네모난 거울이 경첩으로 한 면을 맞대고 붙어 있는걸 보았다. 마주보는 거울은 서로가 서로의 영상을 투영하며 계속 안 쪽으로 똑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거울 사이에 손가락을 넣으니 똑 같은 손가락 모양이 점점 작아지면서 이어진다.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면 길게 줄서 있는 작은 손가락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정인의 마음은 이상 야릇한 것을 느꼈다. 작은 공간에 갇혀 있지만 끝 없이 이어져 있다. 한 방울 물에 비친 태양처럼 세상 안에 다른 작은 세상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 시절의 기억은 모호한 바다를 떠다니는 배처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정인은 아기 조카를 보며 자신이 아기였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힌트를 얻는다. 하늘색 턱받이를 목에 두르고 점박이 옷을 입은 이 아기는 앉아서 정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어디론가 기어간다. 쇼파를 만나면 그 위로 기어오른다. 쇼파 등의 커다란 쿠션 위로도 올라가려 바둥거려 보지만 안 되서 헉헉 소리를 내고 있다. 어른들은 힘들지 않아도 헉헉 소리를 내지만 이 아기는 꼭 힘들때만 소리를 낸다. 아직도 바둥대고 있는 아기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마루에 내려주면 이제는 장난감 정글이 있는 곳으로 기어간다. 초록색 플라스틱 나무를 손으로 잡으며 겨우 일어나더니 나무에 달린 기린 인형의 귀를 입에 물고 빤다. 다가가 그 모습을 보면 입에 기린 귀를 문 채 정인을 빤히 쳐다본다. 하얗고 까만 눈의 대비가 선명하다.
정인은 이 아기를 처음 대하고 충격을 받았다. 가치판단이 없이 무구함 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정인 자신은 무서울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각이 많은 어른들 옆에서 이 아기는 언제나 평화롭게 놀고 있다. 상대를 속이지 않고, 미워하는 것도 없으며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표정에 전광판처럼 나타난다. 정인도 아기로서 엄마 앞에서 기어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도 이런 순진무구함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언제 다 잃어버렸는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정인이 기억이라는 관념을 이해하기 시작한 건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서울 서쪽의 작은 도시였던 광명시에는 ‘자수하여 광명 찾자’ 라는 현수막이 도시 어귀에 걸려 있었다. 정인은 광명을 찾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고 자수하면 도시를 어떻게 찾게 되는 건지 생각했다. 지저분한 회색 개천이 서울과 경계를 이루며 흘렀고 그 개천가의 20평 짜리 연립주택에 엄마, 아빠, 누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지금처럼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고 장래의 꿈도 없었다. 머리 아픈 생각보다 보다는 원초적인 기쁨과 공포가 희미한 기억의 영상을 남기고 있다.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위 문장을 처음 읽었다. 마음에 울림이 퍼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십 년이 넘게 지났고, 난쏘공 책을 두세 번 더 읽었지만 문장은 변함없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팬지의 꽃말은 “나를 생각해 주세요” 이다. 두 송이의 팬지는 한 쌍의 남여를 나타내고, 어린 소녀가 그걸 폐수에 버렸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행복을 포기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난장이의 딸 영희는 갈 곳 없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망치는 길로 들어선다.
그녀는 집을 나와 입주권을 사들인 부동산 업자를 찾아간다. 이 업자는 전부터 예쁘게 생긴 영희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남자는 영희에게 옷을 여러 벌 사주고는 영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데려 간다. 영화 <강남 1970>에 나올 만한 욕망에 충실한 남자인 것 같다. 영희는 날마다 그와 자면서 몸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 헐값에 팔려버린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떨어져 버린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에 심란한 꿈도 꾼다. 꿈 속에서 오빠들이 공장에 취직되어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난장이 아버지가 달을 왕복하는 모습도 본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린 딸을 걱정하는 모습도 본다.
“너의 증조할머니 동생 한 분이 알몸 시체로 수리조합 봇물에 막혀 있었단다. 왜 그랬는지 아니? 주인 서방과 잠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야. 주인 여자가 너의 증조할머니 동생을 사매질해 숨지게 했단다.”
“엄마, 전 달라요.”
“같아.”
“달라요.”
“같아.”
“달라요!”
영희의 윗 대 어른인 증조할머니 동생은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알몸 시체로 저수지에 버려진다. 떠내려가다 봇물에 걸린 모습으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었다. 노비가 있던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일이 충분히 가능했고, 주인 여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가난은 난장이 아버지 가문에 대를 이어 내려왔고, 이제 영희도 선조 할머니처럼 몸을 내주며 생활을 찾는 형편이다. 그녀는 부동산 투기업자의 금고 안에 있던 입주권과 돈을 훔쳐서 새벽에 몰래 빠져나온다. 하지만 이미 철거가 되어 폐허가 된 집에 돌아왔을 때 난장이 아버지가 높은 굴뚝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갔다. 아버지가 벽돌 공장 굴뚝 위에 서서 손을 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조각마루 끝에 밥상을 올려놓았다. 의사가 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나의 손을 잡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이 느리게 나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울지마, 영희야.”
큰오빠가 말했었다.
“제발 울지마. 누가 듣겠어.”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 오빠는 화도 안 나?”
“그치라니까.”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 버려.”
“그래. 죽여 버릴께.”
“꼭 죽여.”
“그래. 꼭.”
“꼭.”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은 단편 마다 화자가 바뀐다. 난장이의 자식들이 화자가 되기도 하고 주부(신애)나 기업 후계자(경훈)가 화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자가 이렇게 다양한 시점을 취한 이유는, 같은 현상도 시점에 따라 완전히 달리 보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첫 단편 ‘뫼비우스의 띠’ 에서 나온 두 굴뚝 청소부 아이 이야기가 그걸 뒷받침해주고 있다.
계층에 따라 분류하면 한 쪽 끝에는 빈민층이 있다. 판자촌에서 쫓겨나는 난장이와 그 가족들, 곡예단에 속해서 매를 맞는 곱추와 앉은뱅이 등이다. 그보다 조금 나은 계층은 대학생 출신 노동운동가 지섭과 주부 신애가 있다. 반대로 재벌 가문에 속한 경훈과 부유한 집안에 속하지만 무언가 변화를 바라는 윤호와 은희도 있다. 작가는 하지만, 계층의 편을 가른 다음 한 쪽을 맹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더 탐욕스럽게 하는 병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래 ‘우주여행’ 단편의 부분을 읽어보자.
“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벌써 끝났을 거야. 이젠 책임을 져야 돼. 그렇지만 내가 아주 죽는 거로 믿지 마. 달나라에 가서 할 일이 많아. 여기서는 무엇하나 이룰 수가 없어. 지섭이 형이 책에서 읽었던 대로야.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여기서 잃은 것들을 그곳에 가서 찾아야 돼. 자 망설이지 말고 쏴.”
윤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은희가 겨냥한 총끝을 그는 보았다.
“그럼 나를 위해서 한 가지만 도와 줘.” 하고 은희가 말했다.
“우주인을 만나면 내 답안지를 훔쳐가지 말라고 해.” 은희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다. 윤호는 온몸의 힘을 잃었다.
“이제 쏴.” 다시 말했다.
은희는 권총을 든 채 외투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그 안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권총을 책상 위에 놓고 팔을 내리자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다가가 눈물로 범벅이 된 윤호의 얼굴을 가슴과 두 팔로 감싸안았다.
윤호는 어머니가 일찍 죽은 바람에 애정이 결핍된 상태였다. 윤호의 가정교사 지섭은 그에게 난장이네 가족 이야기를 해준다. 윤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알게 될 수록 같이 어울리는 부유층 아이들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깨끗한 마음씨를 가진 은희라는 여자애를 발견하고 좋아하게 된다. 대학 입시시험이 끝나고 자신의 집에서 은희를 만난 윤호는 자살을 하려던 마음을 버린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찾아낸 권총을 은희에게 건내주고 눈물을 흘린다. 은희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던 윤호를 어머니처럼 다가가 안아준다. 여기서 작가가 강조하는 건 ‘사랑’ 이고 그 반대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과 약속과 맹세를 지키지 않음(믿음이 없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섭은 가정교사일을 하지만 공장에도 취업하고 노동자를 교육시키는 일도 맡는다. 공장 노동자인 영수, 영호의 아버지인 난장이와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는데, 집이 헐리게 된 사정을 알고 난장이 집에 찾아온다. 열심히 일해도 더 절망에 빠지는 세상에서 난장이와 지섭은 결국 정신에 분열을 일으킨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처럼 대사가 이그러진다. 번번히 시점이 변하고, 아련한 분위기 가운데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지섭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하긴!”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
“얘들아!” 어머니의 불안한 음성이 높아졌다.
아버지와 지섭은 우리에게 대기권 밖을 날아다니는 사람들로 보였다. 두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달을 왕복했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은 망원 렌즈를 지키는 일야. 달에는 먼지가 없기 때문에 렌즈 소제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지. 그래도 렌즈를 지켜야 할 사람은 필요하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넌 이때까지 뭘 배웠니?”
아버지가 말했다.
“뉴턴이 그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고 삼 세기가 지났어. 너도 그걸 배웠지? 국민학교 때부터 배웠어. 그런데 우주에 관한 기본 법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그런데 누가 아버지를 달에 모시고 가겠대요?”
“지섭이가 미국 휴스턴에 잇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난장이가 애써 지은 판잣집은 철거반이 부수러 오고 이제 달리 갈 곳도 없다. 불쌍한 그의 마음은 결국 꿈의 세계로 도피해 버렸다. 휴스턴 우주센터의 로스씨를 통해 달로 가서 천문대 일을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이다. 달나라는 고통이 없는 이상세계를 뜻하고, 천문 관측일은 별을 쫓는, 다시 말해 꿈을 찾는 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야학으로 공부를 한다. 그는 환상에 빠진 아버지와 달리 좀더 현실적인 사회분석을 하고 공책에 아래와 같은 말들을 써놓는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햄릿을 읽고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양반이 노비의 생산물을 가져가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에게 당연한 일이라 서로에게 불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지금은 없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지 현재 시대에도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일 안하고 먹고 노는 사람 따로 있다는 건 같다. 과거의 착취가 정직했다는 말은 현대의 착취가 형태를 바꾼 덕분에 더 비밀스럽고 위선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영수는 이 같은 부조리를 자각했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결함 덕분에 더 비참한 운명으로 몰락한다. 훗날 그는 교도소에 갇히고, 교수형을 당한다.
대학생 시절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책을 처음 읽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 충격은 짜릿한 게 아니고 음울하고 야릇한 느낌의 충격이었다. 보통의 소설과 다르게 이야기 흐름과 시점이 뒤죽박죽 되어 있고 무대는 70년대 수도권 빈민촌이지만 동화책에 나올 만한 상황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게다가 서술이 건조하고 간결하지만 서정적인 느낌이 난다.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문단이다.
“나는 도도새다.”
지섭이 말했었는데, 윤호는 이렇게 근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형, 도도새는 어떤 새지?”
“십칠 세기말까지 인도양 모리티우스 섬에 살았던 새다. 그 새는 날개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개가 퇴화했다. 나중엔 날을 수가 없게 되어 모조리 잡혀 멸종당했다.”
도도새(Dodo Bird)는 서양의 대항해 시대 이후 행해진 인간의 미개지 훼손으로 발견된 지 180년 만에 완전히 사라진 새이다. 힘 없는 동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인간의 잔인성을 상징한다. 작품 속 지섭은 빈민 노동자들에게 연민을 품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지식인이다. 스스로 도도새라고 하는데, 날개가 없어 걸어다닐 수 밖에 없지만(사회적 힘이 없음) 그 처지로나마 투쟁하는 자신의 상황을 빗대었다. 싸우지 않는다면 도도새처럼 멸망하고 말 것이다.
12편의 단편 소설이 묶어진 이 작품은 각각의 단편이 독립적인 이야기를 진행하면서도 등장인물과 사건이 계속 중첩되면서 나아간다. 첫 번째 단편인 ‘뫼비우스의 띠’ 와 마지막 단편인 ‘에필로그’ 는 수미상관적이며 동시에 액자식 구조이다. 먼저 한 고등학교 교실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있고 그들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한 교사가 나와서 꼽추와 앉은뱅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필로그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꼽추와 앉은뱅이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별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이런 구조는 난장이와 도도새, 머리카락좌 같은 표현과 함께 소설의 환상적이고 슬픈 분위기를 잘 구현한다.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상기는 첫 단편에서 학생들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교사가 한 말이다.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 즉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게 하는데 쓰이곤 한다. 그 같은 상황이 소설 안 판자촌 철거 소동에서 보여진다. 1971년 실제 있었던 경기도의 ‘광주 대단지 사건’ 이 배경이다. 당시 서울은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판자촌이 과포화된 상태였다. 정부는 이걸 정리하기 위해 판자촌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 동조해 가난한 사람들은 집단 대이동을 해서 황무지에 판자집을 새로 만들고 삶을 꾸려나간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토지 개발 붐을 타고 재개발이 추친되고 구청에서는 철거 계고장이 나온다. 계고장의 내용은 지었던 집을 자진 철거하고 떠나야 하며 만약 자진해서 않으면 ‘주택 개량 촉진 임시 조치법’ 에 따라 강제 철거 하고 그 비용도 판자집 주민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개(疏開)되는 사람들에게 아파트 입주권이 배분되긴 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그들은 아파트 살 돈이 없어서 판자촌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판자촌을 불도저로 밀고 정리된 땅에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들어와 돈을 번다. 그들과 공생하는 부패 관료들은 법을 강조한다. 이럴 때 ‘법’ 은 기득권자를 위한 차가운 도구로 쓰인다. 아래는 난장이가 철거에 대해 자식들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시에서 아파트를 지어 놨다니까 얘긴 그걸로 끝난 거다.”
“그건 우릴 위해서 지은 게 아녜요.”
영호가 말했다.
“돈도 많이 있어야 되잖아요?”
영희는 마당가 팬지 꽃 앞에 서 있었다.
“우린 못 떠나. 갈 곳이 없어. 그렇지 큰 오빠?”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영호가 말했다.
“그만둬.”
내가 말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멋진 상처를 가지고 나는 세상에 왔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나오는 몸치장의 전부였다.
I came into the world with a fine wound; that’s all I have to my name.
<시골의사>는 카프카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두 개의 단편 중 하나이다. 상기의 구절은 작중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이 집으로 왕진 온 시골의사에게 한 말이다.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대사이다.
카프카의 여느 작품들처럼 여기도 악몽 속을 열심히 헤매고 다니는 것 같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직업이 의사인 이 남자와 죽어가는 소년이 소설의 두 주인공이다. 이 외에도 하녀인 ‘로자’ 가 있고 그녀를 유혹해서 거의 강간하는 ‘마부’ 도 있다.
<성>이나 <소송>에도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작품 속의 남자는 젊은 여자를 금세 육체적으로 범한다. 초면에 껴안고 애무를 하더니 어느새 약혼자가 되어있는 등. 카프카의 소설은 어두운 무의식을 민감하게 포착하는데, 도덕의 제어를 받지 않고 꿈틀대는 성 에너지를 극화한 것 같다. 처음엔 이상하지만 읽다 보면 거부하기 힘든 중독성이 뭔지 알게된다.
연인 관계인 것 같은 하녀 로자를 집에 두고(마부의 성적인 제물이 될 것을 두려워함), 시골의사는 마차를 타고 앓아누운 소년의 집에 도달한다. 마차를 준비하는 과정이나 길을 달리는 모습 모두 꿈 속의 장면 같다. 시골의사는 소년을 진찰하고는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한다.
짐작했던 대로다. 소년은 건강한 것이다. 약간 혈색이 나쁘고 걱정하는 어머니가 커피를 흠뻑 먹여놓았을 뿐, 건강하고, 그저 발길로 뻥 차 침대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세계를 개선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누워 있게 내버려 두자. 나는 구역(區域)에 고용되어 있는데, 이건 너무하다 싶은 지경까지 나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봉급은 적은데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인색하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나는 로자를 돌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야 소년이 권리가 있을 터이며 나 역시 죽고 싶다. 여기 이 끝없는 겨울에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이 작품을 해석하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시골 의사와 환자 소년을 다른 두 사람으로 보지 않고, 카프카 자아 안에 있는 인격을 둘로 분리한 것으로 파악한다. 시골의사는 자신이 세계를 개선하는 사람이 아니고 고용되어 있는 처지라고 하는데,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토로한 것이다. 시골의사는 소년이 멀쩡한 줄 알았지만 나중에야 그의 옆구리에 끔찍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발견한다, 정말로 소년이 아프다는 것을. 그의 오른쪽 옆구리, 허리께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상처는 여러 가지 농담(濃淡)의 장밋빛, 깊은 곳은 진하고 가장자리께로 올수록 옅어지며 고르지 않게 모인 피로 연하게 오돌도돌한 것이 파헤친 광산처럼 열려 있었다. 그것은 멀리서 본 모양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더 심한 상태가 나타났다. 누가 그것을 나직이 으흑 소리를 토하지 않고 들여다보겠는가? 굵기와 길이가 내 작은 손가락만한 벌레들이 본디 색깔에다가 피까지 뿌려져 분홍색으로, 상처의 안쪽에 들러붙은 채 조그만 흰머리와 수많은 작은 발들로 빛 있는 쪽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야, 너를 도울 길이 없구나. 나는 너의 큰 상처를 찾아내었다. 네 옆구리의 이 꽃으로 말미암아 너는 죽을 것이다.
이 무서운 상처는 소년 – 카프카 자신 – 의 가장 어두운 일면을 나타낸다. 세상에 나오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멋진 상처’ 이다. 하지만 상처가 꽃처럼 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카프카는 스스로를 외롭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인간라고 인식했다. 그 때문에 연인을 만나 사랑하면서도 맘껏 다가서지 못하고 약혼과 파혼을 반복한다. 하지만 상처는 역설적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가 평생을 두고 몰두한 글쓰기는 고난과 상처로부터 만 제대로 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프카에게 궁극적인 구원은 죽음이 되고 말았는데, 그의 육체적 상처였던 폐-후두 결핵이 악화되어 연인 도라 디아만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그의 문학이 줄곧 예기해왔던 처절하지만 예술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카프카가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자살과 같은 느낌,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의 죽음 같은 충격. 정신의 얼음을 깨는 도끼. 카프카가 문학에서 이끌어 내려 했던 건 이런 어마어마한 심상들이었다. 편지를 쓸 당시 그는 무명작가였는데, 비록 죽고 나서는 진가를 인정받게 되지만, 자신이 써내려가고 있는 글의 가능성을 잘 깨닫고 있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 같기만한 그의 작품이 어떻게 그토록 특별한 촉매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단편 <변신>은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의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이다. 이 평범하고 선량한 남자는 어느날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큰 갑충(甲蟲)으로 변한다. 장면 두 개가 계속 기억에 남았다. 집에서 여동생이 아름답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듣고는, 이런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자신(그레고르)이 벌레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장면이 하나.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그레고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니 가족들이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나들이 가는 장면이 두 번째였다. 이상한 유머가 넘쳐서 이토 준지 공포 만화를 읽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독의 삼 부작으로 꼽히는 최고의 작품 <소송>, <성>, <실종자> 는 상당한 마음가짐과 인내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일단 기승전결이 없고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른채, 이상하고 장황한 설명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래 옮긴 <소송>의 한 부분을 보면 전형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변호사는 그에게 뭔가를 자세히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물어봐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질문이야말로 가장 주가 되는 일이 아닌가. 자기라면 이 일에 필요한 온갖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변호사는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거나, 아니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귀가 잘 안 들리는지 책상 위로 몸을 약간 구부린 채 수염 한 가닥을 잡아당기며 양탄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아마 K가 레니와 함께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인 것 같았다. 이따금 변호사는 K에게 아이들에게나 할 법한 별 내용 없는 훈계 몇 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그것은 정말 따분하고도 쓸데없는 이야기들이라서 K는 최종 수임료를 정산할 때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변호사는 그를 충분히 주눅 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다시 약간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들었다.
그는 당연히 즉시 작업에 착수했고, 첫 청원서가 이미 거의 완성 되었다고 했다. 변호사 측의 첫 인상이 소송의 전체 진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첫 청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K가 유념해야 할 점도 있는데, 법원에서 첫 청원서를 전혀 읽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즉 법원에서는 당분간은 피고인을 심문하고 관찰하는 것이 글로 써놓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첫 청원서를 다른 서류들 속에 그냥 던져놓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K의 목숨이 걸린 것이건만 무슨 죄 때문에 걸린 재판인지는 작품 끝까지 안 나온다. 변호사는 일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것 같고 도움 안 되는 훈계만 던진다. 첫 청원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다가, 정작 법원에서는 청원서를 전혀 읽지 않는다는 설명도 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설명은 작품 전체에 걸쳐 열심히 반복된다. 처음 읽으면 뜬금없다가 나중으로 가면 점점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일관적으로 비이성적인 설명이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자폐증이 있는 아이가 물건을 가지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걸 보는 느낌이다. 카프카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독자를 이끌지만, 그가 혼란을 주기 위해 혼란스러운 글을 쓴 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왜 이런 뒤죽박죽 글이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가 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는 이성이 앞서는 명료한 정신을 그리려 했던게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야릇한 꿈과 같은 환상에 주목했다. 환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비논리적 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관해 논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글을 읽어보자. 카프카를 가장 탁월하게 분석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꿈 속에서 욕망과 공포 같은 원초적 정신 에너지는 꿈틀대지만 논리나 기억의 연결은 흩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도 꿈 속에서는 바보짓을 하고 헤맨다. <성>에 나오는 측량사 K의 행동을 생각해보자. 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욕망)는 확고하지만, 노력하는 K의 행동은 이성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다. 마치 불안한 악몽 속에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투쟁하는 남자 같다.
카프카 작품 속 ‘꿈의 바보짓’ 은 다른 중요한 의미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꿈이 아닌 진짜 생에서의 투쟁도 반드시 명료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토마스 만은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 라고 표현했다.
생의 그림자 놀이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플라톤이 얘기한 ‘동굴의 우상’ 개념과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동굴 속에 묶여서 평생 산다고 할 때, 동굴 밖 존재로부터 전해지는 이미지는 모두 그림자이다. 하지만 동굴 속 사람은 그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산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동굴 속 존재라고 여기지 않으며, 세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한정된 경험과 숙명적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이유 없이 재판에 걸리고, 결국 처형당하는 <소송>의 주인공 K 나 아버지에게 익사형을 언도받고 스스로 강물로 달려가 형을 집행하는 <판결>의 주인공 게오르그를 보면 ‘존재 자체가 유죄’ 라는 관념이 나타난다.
이유 없이 처벌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이유도 모른채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한계(동굴의 우상)를 가지고 이상한 그림자 놀이(삶의 투쟁)에 몰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처음으로 표현한 실존주의적 원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식과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몽환성이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특이한 분위기가 합쳐져서 독자를 그의 글에 빠지게 만드는데, 마음에 고통을 주는 재앙처럼 강렬한 문학의 힘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