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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出師表), 극진히 위하는 마음 – 삼국지연의 제갈량(諸葛亮) 분석 I

의대 학생 시절 병원 실습을 돌던 중 겪은 사건이다. 한 중년 남자가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고,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동행했다. 혈액검사를 해 보니 전해질의 불균형이 발견되었다. 칼륨(K = Potassium) 수치가 낮았는데, 이는 가장 먼저 교정해 주어야 하는 혈액 전해질(Serum electrolyte) 이다. 칼륨은 근육 세포의 움직임에 큰 역할을 하므로 수치가 너무 낮거나 높으면 심장 부정맥이 발생해서 급사할 수 있다.

의사는 칼륨을 보충하기 위해 염화칼륨(KCl, K 보충을 위해 흔히 쓰는 약제) 주사를 처방했고 신규 간호사가 KCl 앰플을 딴 후 생리 식염수에 혼합해서 환자에게 정맥주사 했다. 그런데 이 간호사는 그만 혼합 농도를 혼동해서 과량의 KCl을 단숨에 주사해 버렸다. 중년 남자는 온몸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

남자를 동행한 여자는 사실 아내가 아니었고 애인이었다. 본처와는 별거 중인 듯 했다. 여자는 죽은 남자를 울며불며 부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끔찍히 잘 해줬는데…”

이 외침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누군가를 끔직하게 아껴 준다는 것, 극진한 마음으로 섬긴다는 건 인생을 걸어볼 미학이 되는 것 같다. 필자는 이성 관계가 아니어도 이렇게 극진한 마음을 평생 보여주었던 사람이 자주 떠오른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재상 제갈공명이다. 그는 당대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적 충성에 투철한 사람이었다. 제갈량이 자기 주군을 위해 했던 언행(言行)들을 살펴보면 이보다 더 헌신하는 마음이 세상에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제갈량이 촉(蜀)의 후주(後主)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 내용의 일부이다(이문열 역 삼국지연의 참고).

선제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시기 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익주는 싸움으로 피폐해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걸린 위급한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罷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그러하되 곁에서 폐하를 모시는 신하는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된 무사는 밖에서 스스로의 몸을 잊음은, 모두가 선제의 남다른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께 이를 보답하려 함인 줄 압니다.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제갈량의 문장은 간명하면서도 무겁고, 진정이 느껴진다.

신은 본래 아무 벼슬 못한 평민으로 몸소 남양에서 밭 갈고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목숨이나 지켜 살 뿐 조금이라도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쓰이게 되기 바라지 않았습니다.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선제께서는 신의 보잘것없음을 꺼리지 않으시고, 귀한 몸을 굽혀 신의 초가를 세 번이나 찾으시고 지금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이에 감격한 신은 선제를 위해 구치로 닫고 헤맴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라는 구절이 나온다. 제갈량의 일생은 자신을 알아준 군주에게 완전히 바쳐진 것이었고 그의 아들을 위한 대를 이은 충성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 합니다. 원정을 청하는 표문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올라 말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泣, 不知所云.

출사표의 결미 부분이다.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그런지 잘 말해주는 문장이다.
 

책 소개 <예정된 전쟁> – 미국은 소련과 일본의 힘을 조정했고, 이제는 중국에게 그러려고 한다

 
대한민국의 최대 적대국은 북한이다. 국방백서의 ‘주적’ 표현이 올해 1월 삭제되긴했다. 하지만 그걸 지운다고 북한이 우리나라를 적이 아닌 친구로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면 현재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주적은 누구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중국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이었고, 한때는 동맹국 일본이 헤게모니를 차지할 경쟁국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안보 역량의 중심을 중국 봉쇄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2018년 8월 통과된 화웨이 제제(미 정부 유관기관에서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는 국방수권법안(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에 의한 것이었다.
https://money.cnn.com/2018/02/14/technology/huawei-intelligence-chiefs/index.html
 
중국이 야심차게 추친하고 있는 대륙 해양 프로젝트 일대일로(一帶一路; Belt and Road Initiative, BRI) 또한 미국 안보에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다. 냉전 시절 미국은 소련 봉쇄를 위해 서유럽을 중심으로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를 세웠고, 동아시아에는 일본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한 안보 동맹을 구축했다. 만일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동아시아 – 남아시아 – 중동 – 유럽을 아우르는 우호적 경제 벨트를 구축하면 나토나 일본 한국의 봉쇄 역할이 희석되어 버린다.
 
그래서 미국은 올해 3월 이탈리아가 서방선진국 모임 G7 최초로 중국과 일대일로 MOU를 체결하자 경고 메세지를 보냈다. 백악관 안보담당 대변인(White House National Security Council spokesperson)인 가렛 마르퀴스(Garrett Marquis)는 “이탈리아가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경제에 도움 되지 않을 것이며, 이탈리아의 국제적 명성만 해칠 것” 이라고 말했다.
https://www.reuters.com/article/us-china-italy-belt-and-road/italy-aims-to-sign-preliminary-belt-and-road-deal-with-china-idUSKCN1QN0D4
 
​냉전 시대 미국의 소련 봉쇄는 결국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연합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과거를 돌아보면 미국과 중국은 냉전(冷戰)이 아닌 열전(熱戰)으로 이미 맞붙은 적이 있다. 1950년 10월 18일, 18만 명이 넘는 중공군은 야음을 통해 압록강을 도강했다. 그리고 한 사학자가 “근대 전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매복” 이라고 명명한 작전에서 유엔군에게 완벽한 기습공격을 가했다.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Ma em ill an, 2008. P. 372
 

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osin_Reservoir#/media/File:Second_Phase_Campaign.jpg

 

전선은 압록강 주변에서 지구 위도 3도 아래인 휴전선으로 되돌려졌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미군은 3만 6,000명이라는 막대한 사망자를 내었다. 중국 측도 이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 사망자를 낳았겠지만(공식기록이 없음) 전략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69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제 중국은 전쟁을 하더라도 농민 출신 병사들을 인해전술로 밀어 넣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산업 역량을 구축했다. 미국은 이렇게 강대해진 중국을 경계하고 있다.
 
<예정된 전쟁> 책의 저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하버드 케네디스쿨 학장, 하버드 벨퍼과학국제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공직으로는 레이건과 클린턴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 특보, 국방부 차관보를 맡기도 했다. 이런 경력을 가진 인물이 쓴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대응에 대한 책은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이 과거 100년간 초강대국으로 굴림하면서 어떻게 소련과 일본 같은 경쟁국들을 파악했으며, 결국은 봉쇄하고 헤게모니를 빼앗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재미있었다. 아래에 책 안의 구절을 옮기고 마치겠다.

유라시아 대륙 국가들을 연결하겠다는 일대일로의 약속은 전략 지정학적인 힘의 균형이 아시아로 넘어가는 비전을 반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1세기 전에 지정학의 창시자인 할포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가 한 주장을 떠올리게 된다. 1919년에 그는 유라시아를 ‘세계도’라고 이름 붙이고, “세계도를 지배하는 자가 전 세계를 지휘한다”는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만약 2030년까지 지금의 목표가 달성된다면 매킨더의 유라시아 개념은 처음으로 현실이 된다. 일대일로의 고속철도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베이징까지 화물 운송 기간을 한 달에서 이틀로 줄일 것이다. 매킨더의 비전은 한 세기가 넘도록 전략가들의 생각을 그토록 지배해 마지않았던, 해군력 중심적 위치에 관한 머핸의 논지까지 무색케 만들지도 모른다.
 
책 <예정된 전쟁> 201 페이지

1949년까지 소련은 독자적으로 핵폭탄 실험을 함으로써 미국의 핵무기 독점 상태를 깨는 데 성공했다. 8년 뒤에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를 우주로 쏘아 보냄으로써 과학과 기술 영역에서 앞서간다고 자부하고 있던 미국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한편, 소련 경제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의 연 경제성장률도 (적어도 공식 보고에 따르면) 평균 7퍼센트에 달하여(각주149), 소련이 미국 경제와 맞먹거나 능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촉발시켰다. 1960년대에 베스트셀러까지 되었던, 폴 새뮤얼슨이 집필한 교과서 <경제학: 경제 분석의 기초>에는, 1980년대 중반쯤이면 소련의 GNP가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상치가 나와 있다. 새뮤얼슨의 예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소련은 두 가지 영역에서 미국을 따라잡았다. 바로 군사비 지출과 철강 생산이었다. 모두 1970년대 초에 일어난 일이었다.
(각주149) Wilfried Loth, “The Cold War and the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in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2, ed. Melvyn Leffler and Odd Arne Westad(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514.
 
책 <예정된 전쟁> 415 페이지

 

역사책 추천 –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 통사>

중세 이탈리아 출신 군인으로 신성로마제국 군대 총사령관을 지냈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Raimondo Montecuccoli)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첫째 필요한 건 돈이다. 두번째로도 돈이 필요하다. 세번째로도 역시나 돈이 필요하다.
 
To wage war, you need first of all money; second, you need money, and third, you also need money.

사령관으로서 야전에 나가 돈 없어서 죽을 고생을 많이하고 이 말을 남긴게 아닐까.

한편 고대 중국의 군사전략가 손자(孫子)도 돈과 전쟁의 관계를 생각하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출처 孫子兵法 第二 作戰篇)

손자가 말하기를, 무릇 군사를 쓰는 법은, 치거 1,000사(駟), 혁거 1,000승(乘), 대갑 10만명에, 천리의 군량을 먹이려면, 안팎의 비용, 빈객의 쓰는 것, 교칠의 재료, 거갑의 받듦이 하루에 천금의 비용이 든다. 이러한 연후에 10만 명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
 
孫子曰 凡用兵之法, 馳車千駟 革車千乘
帶甲十萬 千里饋糧, 則內外之費 賓客之用
膠漆之材 車甲之奉, 日費千金 然後十萬之師車矣
 
오랫동안 군대가 전선에 있으면 국가재정이 부족해진다. 병사들의 예리함이 꺾어져 전투력이 약화되면, 다른 나라의 통치자가 그 폐단을 노리고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지혜로운 자라도 그 뒷일을 수습할 수 없다.
 
久暴師則國用不足
夫 鈍兵挫銳 屈力殫貨, 則諸候乘其弊而起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

장기전으로 돈, 재정이 부족해지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일을 수습 못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한신(韓信)같이 천재적 지휘관이 있어도 병참이 절망적이고, 병사들이 밥을 굶으면 전쟁에서 이길 도리가 없어진다.

​삼국지연의 소설을 읽어보면 왕후장상들의 성격에 대한 묘사와 책략과 책략이 부딪쳐서 거기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상황이 계속 나온다. 하지만 승패를 이미 결정해주는 경제력과 그걸 지탱하는 농업, 또 그걸 분배하는 상업와 운송업 체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제갈량이 기산에 둔전을 만들고 목우유마로 곡식 운송을 편하게 했다는 부분만 생각난다.

​일본 교토대 교수였던 미야자키 이치사다(1901~1995년)가 저술한 이 <중국통사> 책은 소설과 달리, 아주 실증적으로 전쟁과 역사를 논해서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돈으로 기업을 사고 움직이는 기업인이 읽어도 도움될 만한 내용이 많이 있다. 먼저 아래의 중국 명나라 말기 이자성 반란을 서술한 부분을 읽어보자.

​섬서는 고대에는 국도(國都)가 위치하고 생산력이 가장 높은 비옥한 땅으로 알려졌는데, 시대가 내려옴과 함께 기후가 건조해져 자주 가뭄의 피해를 입는 척박한 땅이 되어 갔다. 그렇지만 군사상의 요충지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서 명이 중시하는 북방의 9개 변진 중 3개 변진이 섬서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명의 북방 방위는 중점이 동부로 편중되기 쉽고 서방은 등한시 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방면은 교통이 불편하므로 중앙에서 군수품을 운반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은을 급료로 주어 현지에서 조달하게 했는데, 은은 상관에 의해 횡령되기 쉽고 또 토지가 척박하기 때문에 식량을 입수하기 곤란했다. 마침내 군대가 기아를 호소해 폭동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잇따랐지만 명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유효한 수단을 쓰지 못하는 가운데 반란은 더욱더 확대되었다. 이 반란군 토벌에 나선 정부군 또한 급양(병사나 말에 공급되는 물자)이 나쁜 데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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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자성이나 장헌충은 여러 번 패주해 포로가 될 뻔했는데, 비록 이때 그들이 포살되었다 해도 그것으로 반란이 수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조의 말기적 증상으로 일어나는 반란은 개인 한두명이 기도한 것이 아니며 굶주린 민중이나 군대가 사회적 필연의 결과로서 일으킨 반란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내란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화폐 경제 상황이나, 국가 통치 시스템의 붕괴, 그에 따라 반란 토벌군이 반란군에 더해지는 웃긴 과정을 조리있게 설명했다. 아래의 태평천국 난에 대한 서술도 읽어보자.

​상해 개항에 의해 중국 내지의 물자가 종래보다도 단거리로 외국선에 적재되게 되면 그만큼 중국의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이치인 동시에, 외국 물자가 중국 내지로 운반되는 경로 또한 큰 변동을 겪어 종래 번영하고 있던 간선이 급속히 한산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이 광동으로부터 광서를 거치고 호남에서 양자강으로 나오는 경로이다. 특히 이 경로는 광동에 양륙된 아편이 중국 내지로 운반되는 주요 도로가 되어 있었다. 아편은 값비싼 상품이므로 보통은 교통이 불편한 이 궁벽한 산길이 관헌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데 도리어 알맞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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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른 무역 상품과 마찬가지로 아편이 양륙된 항구가 광동으로부터 상해로 이동하자 거기서 일어난 것이 광서 호남 루트 아편 상인의 실업이다. 이것이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원래 밀매 상인이란 것의 본질은 실업자가 많고, 선의로 받아들이면 실업보험금의 수령자였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번에 그들이 실업했다는 것은 실업보험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업자가 또 실업했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가면 좋을까. 폭동, 반란을 일으키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이리하여 일어난 것이 태평천국이었다.

보통의 역사책은 태평천국군의 주축은 농민층이고, 서방에서 들어온 기독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은 이색적 집단이었다고들 묘사한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역사적 진실을 논하는 데 있어서 ‘농민층’, ‘기독교’ 라는 요소보다는 인민들을 반란군이 되도록 내몬 당시 경제 상황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종교나 이념 결집 없이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돈(경제력/물자)을 결집시키지 못하면 전쟁도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편전쟁으로 인한 상해 개항 – 내륙 물자 운송 경로의 대변화 – 호남 아편 밀매 운송업의 몰락 – 반란군 집결의 서막 식으로 실증적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역사책을 읽으며 과거 사건을 현재의 경제 정치 상황에 대입해서 운명을 예측해보면 아주 재미있다. 아래 소개하는 책 속 논평을 읽으면 북한의 미래에 대한 시사점이 되는 것 같아 좋았다. 난세는 불경기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이 인상깊다. 아무튼 지금까지 읽었던 중국역사책 중에 최고로 꼽을 수 있는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님의 <중국통사> 책이었다.

72 page
그들 중 다수는 우선 지방관에 임명된다. 그런데 지방관의 성적은 무엇보다도 조세 징수의 실적에 의해 평가된다. 여기에 신관료는 불문곡직 먼저 경제 재정의 실태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 성적은 중앙에 보고되고 성적의 여하에 따라 승진의 늦고 빠름이 결정되고 만다.
관료의 총수인 천자 또한 한가롭지는 않다. 조정의 대신과 함께 관료 인사의 진퇴나 국고 재정의 충실이나 결손에 노심초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료와 군대의 봉급 지불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군대의 급여가 부도가 나는 사태에 이르면 천자는 그 지위를 보존할 수가 없다. 사실 그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으니, 명이 멸망한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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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page
…명군에 의해 잘 다스려지는 치세가 생기고 암군에 의해 어지러운 난세가 시작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 것처럼 생각되어 왔지만, 실은 치세란 것은 호경기, 난세란 것은 불경기의 다른 이름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호경기 불경기는 그때그때의 군주 개인의 정책에 의해 좌우되기가 어려우므로 예전부터의 군주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그다지 타당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사도세자 思悼世子, 정신병

사도 movie_image

세자인 아들은 궁중 내시와 나인들을 수 없이 죽였다. 한 번은 내시를 죽이고 그 목을 잘라 혜경궁 처소까지 들고 들어왔다. 그걸 본 아내 혜경궁 홍씨와 궁인들은 소스라쳤다. 하지만 세자 신분상 사소한 살인은 죽을 죄가 아니었다. 그가 혼란한 정신에 아버지 임금인 영조를 죽이겠다는 말까지 뱉자 결국 대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는 정치 음모론 시각에서 벗어나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갈등을 주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정신병이 있는 사람의 실체와 그와 반응하는 인간 역동이 자세히 나와있지는 않은 것 같다. 부드럽고 지적으로 보이는 배우 유아인씨에게는 기괴하고 강박적인 살인자의 이미지가 나오지 않는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상처받은 미남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몰입이 잘 안 되었다. 하지만 눈물 흘리는 약한 인간으로서의 세자는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정사 자료인 <조선왕조실록>과 야사 자료인 <한중록>을 살펴보면 둘 다에서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확인된다.

정축년·무인년 (영조33~34년) 이후 (사도세자의)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병이 발작할 때에는 (사도세자가)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38년 윤 5월 13일자

한중록은 친정 집안을 방어하기위해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거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2014년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이 한중록을 분석해서 논문을 냈고, 한중록의 내용은 허구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도세자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 논문 링크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도세자는 여러 차례의 우울삽화 및 조증삽화를 겪었으며, 기분 삽화가 재발과 관해를 반복하는 경과를 보였던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직계가족을 중심으로 가족들의 정신증상 유무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기분장애의 가족력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사도세자에게 양극성 장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도세자는 즐거움과 우울·분노가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정신병인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거라고 추정했다. 양극성 장애는 아직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병이다. 유전적 요인, 신경생물학, 정신약물학, 내분비 기능의 이상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정신역동의 관점에서 보면 우울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우울증에 대항하는 방어로 조증을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아버지 영조의 엄격한 훈육이 아들을 질식하게 했고, 결국 유전적인 요인과 맞물려 우울증에서 조증, 정신병인 양극성 장애로 발전해갔다고 생각된다.

임금 영조는 당연히 정신병자 세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과 가망 없는 화해를 시도했으며, 아들에게 왜 사람과 동물을 죽였느냐고 물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용포를 부여잡더니 아래과 같이 털어놓는다.

“소자는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세자가 대답했다.
“어째서 상처를 받았느냐?” 왕이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사랑해주시지 않아서이옵고
또, 아아, 아바마마께서 늘 저를 꾸짖으시니 소자는 아바마마가 무섭사옵니다.”

정말 슬픈 대목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아들을 더욱 꾸짖을 뿐이었다. 1762년,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왕에게 아들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사도세자가 이미 백여명의 궁인들을 죽이고, 아버지 임금까지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이다. 만일 노론 당파의 정치 음모론(이덕일 사관)이 사실이라면 생모가 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할 이유가 없다. 그녀는 미친 아들이 사사 당하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손자인 세손만은 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영빈 이씨는 친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간 죄의식에 괴로워하며 “내 무덤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탄했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한다. 왕족으로서 고상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내려준 것이다. 하지만 영조의 처분에 광증의 아들은 울며불며 말한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사오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오소서.

하지만 이미 돌아갈 길은 없었다. 사도세자는 여름 폭염 속에 뒤주에 갇혀 사경을 헤매다 8일 만에 아사(餓死) 한다. 시체로 나온 세자에게는 자기 오줌을 받아 마신 흔적이 있었다. 조선시대 가장 기괴하고 슬펐던 부자(父子) 간의 갈등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사도 2
아들 정조는 아비가 미쳐서 죽어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왕으로 즉위하던 날 대전에 모인 신하들 앞에서 처음 꺼낸 말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었다. 그는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를 장성하여 왕이 될 때까지 하루도 잊지 못한 것 같다. 영화 <사도>의 말미에 정조(소지섭 분)가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부채춤을 추며 울던 모습은 그래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II – 이에야스의 책략

메이지유신 성공 후 일본의 신정부는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인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육군의 편제와 전술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래서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을 군사고문으로 초빙했는데 일본인들은 메켈에게 결과를 알리지 않은 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양군의 병력 포진도를 보여주었다. 메켈은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실제 전투의 결과는 한 나절도 버티지 못한 서군의 참패였다. 서군의 주요 다이묘였던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3만 3천여명 군대는 전투에서 괴멸, 와해되었다.

전투 시작 당시 서군 측의 미쓰나리는 사사오 산(笹尾山)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덴만 산(天満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마쓰오 산(松尾山)에 각각 포진했다. 게다가 총대장을 맡은 모리 가문을 대표해서 참전한 모리 히데모토는 전선 후방의 난구 산(南宮山)에 주둔해서 동군의 퇴로를 끊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동군의 총 대장 이에야스는 산 아래 좁은 분지에 학익진(鶴翼の陣) 형태로 포위된 진세를 상관치 않고 전투를 시작한다. 외교 책략으로 이미 모리와 고바야카와의 배신을 확정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리 데루모토는 석고 120만석으로 서부 일본의 최대 다이묘이자 히데요시 정권하 다섯 유력 다이묘의 모임인 고다이로(五大老,오대로)의 일원이었다. 데루모토는 서군의 총 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전쟁에 대한 모리 가문내의 의견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도 않고 오사카 성에서 후계자 히데요리를 보호하며 자중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의 조카였던 인연으로 추코쿠의 다이묘였던 고바야카와가의 양자로 들어간 인물이다. 서군 내에서 주력군을 이루는 약 1만2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그는 전투 전 이미 이에야스측과 내통한 상태였다. 결전 초기 서군에 우세한 전세가 펼쳐지자 사태를 방관하며 그대로 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초조해진 이에야스 측의 위협 사격을 당했고, 결국 아군의 허리를 찌르는 결정적인 배신을 감행한다.

서군의 실질적인 총수 이시다 미쓰나리는 동군과 대등한 병력을 집결시켜서 유리한 위치에 포진시켰지만 전군을 일사 분란하게 지휘할 수가 없었다. 서군을 대표할 직위도 없었고 이에야스처럼 자기 영지에서 대군의 중추가 될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히데요리가 장성한 성인이어서 전쟁터에 참전할 수 있었다면 그 상징성 때문에 싸움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 밖을 나가본적도 없던 8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크기 전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동분서주했다.

이에야스는 영지에서 약 7만명의 하타모토(旗本;はたもと;다이묘직계군사)를 동원했고 이중 반을 세키가하라에 투입했다. 그리고 전쟁 전 외교 책략으로 서군을 분열시켜 놓았다. 결국 전투를 방관한 모리 군과 전투 중에 창 끝을 돌린 고바야카와 군으로 인해 세키가하라의 승부는 결정되었다. 클레멘스 메켈 같은 전문 군인이 금방 예측했던 포진 상의 우위를 정치적 책략으로 무력화시킨 이에야스의 승리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I – 천하를 가르는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기 1600년 음력 9월 15일에 미노 국 세키가하라(현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마치)에서 벌어진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결전이다. 천하를 가르는 전투(天下分け目の戰い; 텐카와케메노 타타카이)로 불리는 이 결전에서 일본 전국의 다이묘(봉건 영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웠다. 한 편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신 이시다 미쓰나리가 지휘했던 서군이었고, 다른 편은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었다. 양측에서 각각 약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결전을 벌였지만 전투는 불과 한 나절 만에 끝난다.​

타이코라는 직위로 일본 전국을 통치하던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그를 이은 건 불과 6세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였다. 전국 최대의 다이묘로 약 255만석의 석고를 가지고 있던 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빼앗으려는 야심을 품는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나름의 안전장치를 강구해두었었다. 고다이로(五大老;오대로)와 고부교(五奉行,오봉행) 조직이 그것이다. 고다이로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다섯 명의 대 다이묘 연합체였다. 유력 다이묘들이 세력 균형을 이뤄 히데요리의 권력이 침범받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고부교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행정의 실권을 쥐었던 다섯 명의 관료 연합체이다. 현대 정부로 치면 주요 장관 모임과 비슷하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고부교의 일원이었다.

히데요시는 고다이로들이 서로 견제하고, 고부교는 자신이 남긴 행정 지침에 따라 유력 다이묘들을 제한하는 체제를 구상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다이로의 수장 격인 이에야스의 힘이 너무 거대하다는데 있었다. 이에야스는 부교들의 행정 권한을 무력화하면서 자신을 거역하는 다른 다이묘들을 토벌하려 했다. 물론 이에야스는 속마음을 감추고 어린 후계자인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거라고 선전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불과 19만석의 소 다이묘였지만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을 기치로 반 이에야스 세력을 결집시킨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그동안 수많은 문학과 영상 작품을 통해 다루어졌다. 그중 시바 료타로作 동명 소설인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상과 안위, 세력과 세력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 군상을 흥미롭게 묘사해 놓은 작품이다. 아래는 감명깊이 읽었던 소설 속 장면이다. 미쓰나리의 맹우인 오타니 요시쓰구는 히데요시의 촉망받는 부하였지만, 문둥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후 반 은거상태에 있었다. 그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친구 미쓰나리를 위해 서군 측에 가담하여 싸운다. 한 때 호각을 이루던 전세가 아군측 다이묘의 배반이 속출하여 완전히 기울어졌을때 전쟁터에서 할복 자살함으로써 장렬한 생애를 마친다.

“슬슬 배를 가르겠네.” 요시쓰구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측근 30명 정도가 마지막 돌격을 건의했다.
“쓸데없는 일, 각자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건사하게나.” 요시쓰구는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긴고 주나곤 향해 원한의 창을 겨누고 기쁜 마음으로 죽고 싶습니다.” 하며 달려나가 시작했다.

요시쓰구는 큰 소리로 그들을 불러 세우더니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가려거든 가게나. 그런데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소경이네. 그대들의 분전을 볼 수가 없어. 그러니 달려나가는 자들은 한 명씩 내 앞에 와서 이름을 말하도록.”

다들 요시쓰구의 가마 앞으로 말을 타고 나와 자기 이름을 댔다. 요시쓰구가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주면 그들은 목례를 하고 적군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고작 5만석의 낮은 신분이었지만 요시쓰구는 무사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Notes:

  1. 도요토미가의 석고는 그보다 적은 약 220만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