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과 공空 – 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는 해석이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작가분의 감정선을 따라가야 이해가 된다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2번째 연작의 화자, 영혜의 형부가 중요하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 – 몽고반점 – 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단편에서 각기 다른 눈높이의 화자로 주인공 영혜를 묘사하고 있다. 몽상적 성격의 실패한 예술가인 형부는 영혜의 독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또 가장 감정적으로 찬탄하고 있다.
 
그는 영혜가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니고,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고,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라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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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몽고반점> 말미에서 영혜랑 형부는 둘 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데, 그때 형부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p177

죽어도 좋다는 건데, 실제로 뛰어 내리려다 응급요원의 제지를 받고 실패한다. 그를 이렇게 미치게 한 것은 강렬한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는 처제 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몽고반점이 뭐길래 이런 거친 감정이 생기고 처제와 관계를 가지는 예술 작품을 찍게 되는건지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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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다라 मण्डल

몽고반점을 성적인 페티시즘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작가분의 의도는 아닌 것 같다. 형부는 영혜의 몽고반점을 실제로 처음 보고 이렇게 생각을 한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20

어떤 쉬운 욕망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동물적이지 않은, 태고의 초록색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영감靈感이고, 그게 예술작품을 만들려는 집념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반점이 어떻게 그런 영감을 낳을 수 있는지 갸웃할 것이다.
 
형부가 몽고반점에 꽂혔다면 영혜는 꽃에 꽂혀 있다. 그래서 외설적이고 부적절해 보이는 비디오 촬영에도 응한 건데, 그녀 말에 따르면 꽃은 나쁜 꿈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독제 같은 것이었다.
 
첫 번째 행위 예술 촬영 후에 형부는 영혜에게 전화를 하고, 꽃을 지우지 않았느냐고 물어본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요. 나중에 지워지더라도 다시 그려주면 좋겠어요.”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도살과 피에 연관된 꿈을 꾸면서 부터인데, 몸에 그려진 꽃은 힘든 환상을 없애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술 주문처럼 몽고반점과 꽃은 형부와 영혜를 각각 움직였다. 이 같은 이미지가 투영된 실제 예술 작품이 있다.
 


 


 

일본의 작가 쿠사마 야요이くさま やよ 인데, 이 분은 물방울이나 호박을 소재로 여러 설치 예술품을 만들어 냈다.
 


 

그녀에게 호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아래는 그 마음을 토로한 글이다.

호박은 애교 있고 굉장히 야성적이고
밝게 웃는 기운이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
나, 호박 너무 좋아!
호박은 나에게 어린시절 마음의 고향으로
무한대의 심령을 가지고 … 시적인 평화를 준다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성한 자태이고
전 세계 인생의 환희의 근원이기도 하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간다.

하나의 형태가 마음 속에서 거의 신성한 힘을 주는 상징이 되어서, 그게 악몽 – 쿠사마 야요이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정신분열증 – 을 없애고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원천도 되었다. 영혜 형부의 예술 작품도 똑같이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상징은 특정 종교의 수행 과정에서 쓰이기도 한다. 아래는 ‘만다라मण्डल’라고 하는 문양이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힌두교와 불교의 명상 수행을 돕기 위해 고안되었다. 20세기 초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Jung)이 무의식 치료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서양에 소개되었고 대중성을 얻었다. 상징이 정신치유로 이어지는 다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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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십만 볼트의 전류

형부는 영혜의 남편 보다도, 언니인 인혜 보다도, 영혜의 특이한 지점을 잘 이해했다. 그건 두 사람이 보통 사람과는 ‘기쁨을 느끼는 통로’가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 예술로 교감할 수 있었다. 형부가 기쁨을 느끼는 부분을 먼저 보자.

붓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듯 미세히 떨리는 그녀의 육체를 느끼며 그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마침내 오른쪽 허벅지를 지나 가느다란 발목까지 이어지는 긴 줄기와 잎사귀를 완성했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p122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감동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큰 기쁨을 저런 행위로 느낄 수 있을까 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형부도 영혜도 그동안 보통 사람이 겪지 못한 바닥 깊은 고통을 느껴왔기 때문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특별한 통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큰 고통이 큰 기쁨으로 상쇄된 것이다.
 
아래는 형부가 영혜 마음의 바닥을 느끼고 묘사한 부분들이다.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p110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p 125

상처와 악몽의 지배로 깨진 영혜의 정신은 백치가 되는 걸 넘어 더 깊은 곳으로 간 것 같다. 인간의 언어로 된 표상도 없는 이계異界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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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色과 공空 –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모든 것이 비워진

영혜는 자기에게 악몽을 주는 게 먹는 고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꽃에 감화 되고 나서는, 그것은 결국 자기 뱃 속에서 올라온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늘 달라요. 어떨 땐 아주 낯익은 얼굴이고, 어떨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에요.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 썩어서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해요.”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박명 속에서 술렁거리고 있었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p171

여기서 작품의 중심 주제가 드러난다. 배라는 건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다.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나는 것처럼.
 
영혜는 그간의 피웅덩이 꿈이 고기 같은 물질적인 것에서 온 것이 아니고, 어떤 정신적인 것, 그것도 생명이 나오는 장소(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꽃(생명의 시원) 그림이 자기 몸에 그려진 채 남녀의 교접(생명을 잉태하는 행위)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형부도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가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p176

눈은 세상을 보는 창인데, 거기에 모든 것이 담겼으면서도 모든 것이 비워져있다. 조금 어려운데 불교적으로 풀이하면 이해가 된다. 한강 작가님의 어버지인 한승원님도 문학 작가였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열반에 대한 소설을 남긴 바 있다. 당연히 그 영향이 배었을 것 같다.
 
경전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색(色)은 물질적인 세계와 그 현상들을 나타내고, 공(空)은 그런 물질적인 존재들이 사실 실체가 없이 비어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불교에서 화두로 던져진 것이다.
 
결국 세상을 보는 눈이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고, 영혜도 형부도 어떤 면에서는 해탈의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거리낌 없어지는 에너지에 휩싸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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