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III –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2005년 영화배우 이은주씨가 자살했을 때 인터넷 뉴스 댓글에는 왜 저렇게 젊고 예쁘고 명성도 있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하는 글이 많았다. 하지만 유서 내용에도 있듯이 자신이 겪는 힘듦은 자신에게만 실제적이고, 가늠이 가능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이 겪는 행복도 스스로에게만 지극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 않고, 행복을 자가 생산할 수 있으면 불행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을 누렸던 역사 인물을 생각해보면, 니체가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살아 생전 그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스스로가 자기를 인정했다. 니체의 책 <이 사람을 보라>의 목차엔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가?’ 등의 제목이 있다… 니체의 똑똑한 친구들도 니체의 글을 반 쯤 밖에 이해 못했던 것 같다. 대표적 친구인 에르빈 로데(Erwin Rohde) – 당대의 유명한 그리스 고전문헌 학자였음 – 에게 니체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짜라투스트라>로서 독일어를 완성에 이르게 했다고 자부하네. 그것은 루터와 괴테를 이은 제3의 발전이었네.
하지만 로데는 짜라투스트라 책을 힘겹게 읽었고, 그 다음으로 출간된 책 <선악의 저편>을 읽은 후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니체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직업을 갖는거야!” 라고. (니체, 그의 삶과 철학 by 레지날드 J. 홀링데일 p65)
당시 니체는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결혼할 배우자 찾는 것도 안하고, 혼자 휴양하면서 친구에게도 대중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책만 쓰고 있었다. 안정된 직업과 가정, 사회적 지위까지 있던 로데는 니체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삶이 반영된 글에도 당연히 공감하지 못했다. 자기 능력의 백 분의 일도 인정받지 못했던 니체가 어떻게 자기확신과 행복을 가졌을까는 연구해 볼만한 주제이다. 나는 <비극의 탄생> 책에 나온 아래의 구절이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현존과 세계는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미적인 현상은 사람에게 행복감을 준다. 예쁜 연예인을 보며 정줄 놓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예쁜 여자 말고 다른 수많은 사물에서 그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지금 사는 것(현존)과 주위 세상(세계)는 더 없이 만족스러워(정당화)진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하다. 최고가치의 상실에 대한 선언으로 해석되며, 꼭 기독교적 신에 대한 반대는 아니다. 이 말의 중요성은 신은 죽었는데 이제 뭘 할거냐는 것이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하나님처럼 섬기는 무언가가 있다. 출세나 재산, 외모, 사람들로부터 인정 같은 것이다. 이은주씨는 이걸 모두 가졌지만 행복을 얻지 못했었다. 누구나 나름의 가치 추구를 하고 있고, 충족받지 못하면 허무해지고 고독해진다. 니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서 영속적인 행복의 길을 찾았다.
자신의 상태를 예술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자신에게 닥친 슬픔과 고통,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모든 것을 순식간에 돌로 만들어버리는 고르고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능력이다. 그것은 고통이 전혀 없는 세계에서 유래한 시선이다. (J3, 334)
니체는 자신 생의 요소와 그 누림을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게 느꼈던 것 같다. 슬프고 우울해도, 어떤 대단한 역사나 문학 안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느끼면, 고난도 미학적 현상으로 치환된다. 주위 사람들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일자리에서 별 볼일 없는 성과를 낼 때도 즐겁게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니체는 자신의 시대에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인기가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면 가치를 창조하는데 매우 뛰어 났고, 거기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