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세 VI – 거리의 싸움꾼
정인이 즐긴 두 번째 주요 유희는 오락실이었다. 이건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가장 즐거운 취미활동이 되었다. 어떻게 돈이 들어오든 100원만 생기면 먼저 오락실로 달려갔다. 허름한 상가 건물 지하에 있는 오락실에서 들리는 효과음은 몽환적이었다. 담배연기가 안개처럼 깔려 있는 어두운 실내는 숭고한 인생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인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 듣던 동화같은 전자음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 마치 그 소리가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려 주는 주문이 되는 것 처럼.
당시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2 라는 게임이 전국 오락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주인공 수가 8명이나 되고 공격버튼이 6개나 있던 획기적인 게임이었다. 조이스틱을 잽싸게 돌리고 버튼을 타다다닥 눌러서 펼치는 공격 동작은 아주 부드러웠다. 정인은 인간 신체의 움직임이 구현하는 아름다움을 현대 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락실 오락을 통해서 배웠다. 특히 같이 구르면서 발을 상대 배 위에 놓고 던져 버리는 켄의 기술은 실로 예술의 경지였다.
8명의 주인공은 각자 뚜렸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에 가까운 놈들도 있었고 비교적 사람에 가까운 놈들도 있었다. 브랑카, 달심, 장기에프, 혼다가 전자에 속했고 류, 켄, 가일, 춘리는 후자였다. 이 게임의 백미는 일 대 일 대전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전의 오락이 혼자 아니면 둘이서 같이 미션을 완수하는 것이었던 반면 스트리트 파이터는 두 명이 맞붙어 실력을 겨루는 게임이다. 오락실 마다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애들 몇 명씩 생겨났는데 이들 뒤에는 조작법을 구경하려는 관중이 구름처럼 몰리곤 했다. 실력만 있으면 다른 사람을 게임 상에서 줘 팰수 있고 게다가 자신의 실력을 놀라운 듯 보는 관중이 있다는 사실은 정인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는 미친듯이 조이스틱을 움직이며 연습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2 에서 최강은 가일과 달심이었다. 둘 다 장풍을 쏠 수 있었고 특화된 얍삽이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정인은 대중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중국 무술 소녀 춘리를 가장 아꼈다. 그녀는 까만 스타킹 신은 반짝이는 다리로 멋도 모르는 국민학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강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가볍고 점프가 빠르지만 가일이나 류, 켄 같이 대공기가 강한 놈들에게 쉽게 잡히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정인은 애정을 가지고 춘리의 싸움 기술을 혁신시켰다. 그는 춘리의 빠른 스탭을 이용해서 이리저리 지상에서 움직이다 갑자기 하단 발 차기를 썼다. 페이크 동작을 넣고 갑자기 상대방 등 뒤로 휙 점프를 해서 바로 던지기 기술을 걸었다. 상대방은 이 새로운 기술에 정신없이 속아 넘어갔다.
정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많은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 국민학생은 하루 종일 스트리트 파이터만 생각했다. 페이크에 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하단 발이 아닌 중단 주먹을 쓰기도 했고 제자리 점프를 그냥 뛰기도 했다. 밤이 될 때까지 오락실에서 있다 집에 돌아와도 춘리만 생각했다. 밤에 불끄고 잘 때도 어두운 천장에서는 상상 속의 춘리가 이리저리 점프하며 날아다녔다.
그렇게 몇 달을 오락실에 다니니 정인은 유명한 고수가 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춘리가 가일이나 달심을 농락하며 이기는 모습을 경외감에 차서 바라보았다. 그날도 정인은 학교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오락실로 달려가 백원 동전을 넣고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정인에게 도전한 상대방은 류를 쓰고 있었는데 정인과 높은 오락기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첫 판에 정인은 류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류가 장풍을 쏘면 제자리 점프로 피했고 류가 앞으로 점프하면 재빨리 뒤로 물러나 착지 지점에 하단 발차기를 걸어 넘어뜨렸다. 오락기 뒤 편의 남자가 씨발 씨발하며 동전을 다시 넣는 소리가 들렸다. 정인은 또 여유있게 그를 눌러주었다. 그는 가일로 바꾸어서 도전해왔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정인은 절대 허점이 큰 동작을 쓰지 않았다. 가일의 소닉붐을 피하며 접근해 아래 발차기를 하고 그대로 던지기로 연결시켰다. 그렇게 몇 번 당한 상대가 긴장해 어쩔줄 모르고 있으면 휙 등 뒤로 날아가 또 던지기를 걸었다.
하지만 이때 정인은 너무나 자기 실력에 도취되어 있었다. 조금은 가상 현실 세계에서 물러나 현실의 분노가 초래하는 씩씩 소리에 주의했어야 했다. 정인은 콤보 어택을 시작했다. 이건 날라차기의 타점을 최대한 늦춰서 때리고 지상에서 연속 공격을 하는 건데 2~3번의 콤보가 성공하면 잘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상대방은 5단, 6단 콤보까지 얻어맞고 있었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전혀 방어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잔뜩 열받아 있던 상대는 정인을 두들겨 패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의 싸움꾼 이 오락실의 싸움꾼이 된 것이다. 첫 공격은 중단 발차기 였다. 일격에 정인은 오락실 의자 뒤로 털썩 쓰러졌다. 이어서 그가 구사하는 콤보에 때리는 족족 맞았다. 때리면서 “이 X새끼가 얍삽이를 써!”, “X발놈이 그딴식으로 께임을 해!” 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정인의 등 뒤에서 그의 플레이를 구경하던 관객들은 어느새 현실 세계의 폭행으로 바뀐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그들에게는 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정인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수그린채 계속 불쌍하게 얻어맞았고, 오락실 동전 교환 아줌마가 와서 말리는 바람에 이 싸움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