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세 VIII – 조반유리 造反有理
나이 10살에 이미 거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인은 누구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었을까? 그 품에 사람은 없었다. 정인은 수줍은 남자애라서 친구가 없다시피 했다. 혼자 즐기는 오락과 만화와 영화의 품에만 안겨 있을 뿐이다. 정인은 투명하고 둥근 어항에서 헤엄치는 분홍색 금붕어였다. 따뜻한 피를 그리워하는 작은 냉혈동물이었다. 하지만 정인의 이마저 보금자리도 결국 엄마의 침입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때 정인은 드래곤볼이라는 일본 만화책에 빠져있었었다. 일주일에 이천원 밖에 안 되는 용돈을 알뜰히 모아 오백원 짜리 해적판 만화책을 차곡차곡 수집했다. 용돈은 학교 준비물을 사라고 주어졌지만 정인은 만화책을 위해 모두 희생했다. 결국 30권이 넘는 만화책 전집을 모을 수 있었는데 방 바닥에 책을 흩어놓고는 뒹굴뒹굴 구르며 아무 책이나 골라 읽곤 했다. 드래곤볼은 어느 권을 읽든 놀랍게 재미있었다.
정인은 하교 길에 간만에 나온 새 드래곤볼 단행본 한 권을 사고는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멀리 언덕 가에 있는 집을 바라보았는데 마당에서 무얼 태우는지 연기가 은은히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정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니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 마당 한 켠에 드래곤볼 만화책이 수북히 쌓여있었고, 어머니는 무더기 곁에 앉아서 나무 막대기를 불쏘시게 삼아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이건 정인이 그동안 즐겨온 유희활동이 집 안에서 완전히 금지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정인의 어머니는 대학입시가 얼마 안 남았다는 심려를 10살짜리 국민학생 정인을 보며 느끼고 있었다. 입학 고시까지 8년이라는 세월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타는 초조함은 시간을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정인은 이제 집에서 노는 꼴을 보이지 않고 어떻게든 공부하는 꼴을 보여야 했다. 어머니는 정인이 방과 후에 집에 돌아오면 저녁식사를 먹였다. 그리곤 책상에 앉혀서 공부를 시켰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책을 읽기도 했고 아니면 무슨 뜨개질 같은 걸 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된 목적은 감시였다. 정인은 전과와 문제집을 펴놓고 열심히 딴 생각에 잠겨 들었다. 국영수 과목은 모두 더럽게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정인의 마음에 들었던 과목이 있었는데 바로 역사 과목이었다.
정인은 엄마가 참고서 말고 사다 주는 드문 책이었던 한국사 만화책 전집과 교양 서적들을 재미있게 읽었었다. 특히 일본 만화책을 엄마가 모조리 태워버린 이후로는 더욱 반복해서 읽었다. 그래서 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들은 모두 익히 외우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정인은 수 많은 역사 사건 들 중 민란에 대한 이야기에서 제일 흥미를 느꼈다. 역사의 해석에 따르면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착취에 허덕이다 결국은 봉기해서 일어난다. 착취는 과도한 세금일수도 과도한 노역일 수도 있었다. 명백한 것은 사회에는 항상 소수의 지배자가 있었고 거기에 복종하며 노예로 사는 다수가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