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 I – 천하를 가르는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기 1600년 음력 9월 15일에 미노 국 세키가하라(현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마치)에서 벌어진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결전이다. 천하를 가르는 전투(天下分け目の戰い; 텐카와케메노 타타카이)로 불리는 이 결전에서 일본 전국의 다이묘(봉건 영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웠다. 한 편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신 이시다 미쓰나리가 지휘했던 서군이었고, 다른 편은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었다. 양측에서 각각 약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결전을 벌였지만 전투는 불과 한 나절 만에 끝난다.
타이코라는 직위로 일본 전국을 통치하던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그를 이은 건 불과 6세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였다. 전국 최대의 다이묘로 약 255만석의 석고를 가지고 있던 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빼앗으려는 야심을 품는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나름의 안전장치를 강구해두었었다. 고다이로(五大老;오대로)와 고부교(五奉行,오봉행) 조직이 그것이다. 고다이로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다섯 명의 대 다이묘 연합체였다. 유력 다이묘들이 세력 균형을 이뤄 히데요리의 권력이 침범받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고부교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행정의 실권을 쥐었던 다섯 명의 관료 연합체이다. 현대 정부로 치면 주요 장관 모임과 비슷하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고부교의 일원이었다.
히데요시는 고다이로들이 서로 견제하고, 고부교는 자신이 남긴 행정 지침에 따라 유력 다이묘들을 제한하는 체제를 구상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다이로의 수장 격인 이에야스의 힘이 너무 거대하다는데 있었다. 이에야스는 부교들의 행정 권한을 무력화하면서 자신을 거역하는 다른 다이묘들을 토벌하려 했다. 물론 이에야스는 속마음을 감추고 어린 후계자인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거라고 선전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불과 19만석의 소 다이묘였지만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을 기치로 반 이에야스 세력을 결집시킨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그동안 수많은 문학과 영상 작품을 통해 다루어졌다. 그중 시바 료타로作 동명 소설인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상과 안위, 세력과 세력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 군상을 흥미롭게 묘사해 놓은 작품이다. 아래는 감명깊이 읽었던 소설 속 장면이다. 미쓰나리의 맹우인 오타니 요시쓰구는 히데요시의 촉망받는 부하였지만, 문둥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후 반 은거상태에 있었다. 그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친구 미쓰나리를 위해 서군 측에 가담하여 싸운다. 한 때 호각을 이루던 전세가 아군측 다이묘의 배반이 속출하여 완전히 기울어졌을때 전쟁터에서 할복 자살함으로써 장렬한 생애를 마친다.
“슬슬 배를 가르겠네.” 요시쓰구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측근 30명 정도가 마지막 돌격을 건의했다.
“쓸데없는 일, 각자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건사하게나.” 요시쓰구는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긴고 주나곤 향해 원한의 창을 겨누고 기쁜 마음으로 죽고 싶습니다.” 하며 달려나가 시작했다.
요시쓰구는 큰 소리로 그들을 불러 세우더니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가려거든 가게나. 그런데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소경이네. 그대들의 분전을 볼 수가 없어. 그러니 달려나가는 자들은 한 명씩 내 앞에 와서 이름을 말하도록.”
다들 요시쓰구의 가마 앞으로 말을 타고 나와 자기 이름을 댔다. 요시쓰구가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주면 그들은 목례를 하고 적군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고작 5만석의 낮은 신분이었지만 요시쓰구는 무사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Notes:
- 도요토미가의 석고는 그보다 적은 약 220만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