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 새로운 삼성 II

화웨이의 설립자 런정페이는 1944년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학교 교장, 모친도 교사였던 교육자 집안이었다. 부모의 교육열 덕분인지 명문 충칭건축공정학원(현 충칭 대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이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중국 전국을 휩쓴 이 난리로 학교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사상 투쟁 시위를 하러 몰려나갔다. 런정페이의 부친은 국민당을 위해 부역했던 경력으로 인해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기억해라. 지식은 힘이다.” 라고 당부했던 아버지의 염원대로 독학에 열중했다. 대학시절 그는 전자 기술 이외에도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의 사상을 연구한다. 아래는 그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런정페이는 암울했던 대학시절에 마오쩌둥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이는 엔지니어로서 상대적으로 경영전략에 취약했던 런정페이가 화웨이를 키우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화웨이의 연구와 기술 개발에는 마오쩌둥 사상의 ‘우수한 병력을 집중시켜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다’ 는 전략이 적용되었다. 또 자기반성과 사내 캠페인 등, 그동안 화웨이의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중대한 정책에도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마오쩌둥 사상이라고 하면 소수의 운동권 사람만 읽는 공산주의 정치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런정페이가 경영 지침으로 사용했던 건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이었던 것 같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국공내전(1946~1949년)은 2천여 년 전의 초한전(楚漢戰)과 비슷했다. 항우는 유방을 훨씬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마음대로 그를 죽일 수 있던 때도 있었다(홍문지연 鴻門之宴). 하지만 유방은 항우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무너뜨렸다. 항우가 정공을 걸 때는 지연전과 유격전을 벌였고, 상대 진영을 이간시키는 책략도 필사적으로 사용했다.

마오쩌둥도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전쟁을 이겼다. 전쟁 발발 당시 병력은 국민당군 430만 명 대 공산당군 120만 명으로 4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국민당 측은 베이징, 난징,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 장비에 있어서도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군의 잉여 무기를 넘겨받은 장제스 측이 유리했다. 공산당군은 해군과 공군이 없었고, 소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보병이 주력이었다.

미국은 물론,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도 마오쩌둥의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스탈린은 1945년 7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장제스 정부의 외무장관 송자문(宋子文)과 회담하고 중소 우호 동맹 조약(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을 체결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 권력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뒤집고 공산군은 불과 4년 만에 장제스의 군대를 붕괴시키고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특유의 게릴라(빨치산) 전술을 썼는데, ’16字 전법’이라고 불리는 전술이다.

敵進我退 적이 공격하면 후퇴
敵駐我擾 적이 멈추면 교란
敵疲我打 적이 피로하면 공격
敵退我追 적이 후퇴하면 추격
 
병력에서 앞설 때만 공격하고 필요 없이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준비 없이 싸워서는 안 되며, 승산 없이 싸워서도 안 된다.
농촌을 장악한 후 도시를 포위 공격, 섬멸한다.

화웨이가 경쟁 기업과 싸워온 과정도 빨치산 전쟁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던 것이다. 화웨이는 기술력과 브랜드 명성이 있는 다국적 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 먼저 기반을 쌓았다. 본토 기업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후 지원 서비스에 정성을 다했다. 경쟁입찰, 계약에 이르기까지 화웨이는 반드시 경쟁기업보다 많은 인력과 자금을 집중 투입해서 돌파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단지 우수한 전술의 성과만은 아니었다. 아래는 <위기를 경영하라> 책에 실린 예화이다.

…영업사원들이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각종 제품이 소개된 자료와 샘플을 둘러메고 밤낮으로 뛰어다녔지만, 1년 동안 전국 500여 현(縣)을 훑고 다녔음에도 주문량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 번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인 이춘 전신국과 계약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절박했던 런정페이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영업사원뿐 아니라 수석연구원들까지 총출동시켰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기술교류, 프로세스 점검, 설비 테스트 등을 수십 차례나 거듭했다. 마침내 최종 입찰을 하던 날, 그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그들은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체면도 잊은 채 고개를 떨구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화에서 보이듯 화웨이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헌신은 눈부실 정도이다. 장군(경영자)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실행하는 병사(직원)들의 사기가 없다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이렇게 계약을 못 따면 통곡까지 하는 특별한 기업 문화는 특별한 소유구조로부터 왔다.

‘여러분은 회사의 주인’ 이라는 팻말만 있고 실제 번 돈과 주식은 회장 가족들이 독점하는 회사가 많다. 반면 화웨이는 경영자와 종업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종업원 지주제(Employee Shareholding Plan) 회사이다. 그래서 직원의 꿈이 회사의 꿈이 되고, 회사의 목표가 직원의 목표가 되는 응집력 강한 조직을 일구어 냈다. 직장에 야전침대를 깔아 놓고 야근을 하고, ‘화웨이 늑대’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분투하는 정신은 제도에 기반한 충성심에서 왔다. 중국 기업에 대한 흔한 편견을 깰 만한 우수한 기업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글 – 화웨이, 새로운 삼성 I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