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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카리아트 I – 편리한 사용과 폐기

니트족은 세련된(neat) 사람들 집단이 아닌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영어 ‘NEET’ 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이라는 뜻이다. 즉 학생도 아니고, 직업도 없고, 직업을 얻기 위한 훈련도 안 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니트족의 심각성은 헬조선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손 꼽히는 선진국에다 일억 총중류(一億總中流) – 인구 일 억 명이 죄다 중산층 – 라는 자부심이 있던 일본에도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의 저자 아마미야 가린은 눈에 띄는 경력의 소유자이다. 일본 홋카이도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세련된 입시 대비 전략에는 거리가 먼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대 입시에 연거푸 떨어진다. 무작정 상경한 그녀는 편의점 알바와 식당 웨이트리스 일을 수년간 했고, 박봉과 사장의 구박에 결국에는 술집 일로 진출한다. 열심히 일해도 밑바닥에 더 박힌다는 좌절을 느낀 그녀는 대안적 활동에 뛰어든다. 처음에는 극우 펑크 록 밴드인 ‘유신적 성숙’, ‘대 일본 테러'(이름부터 정말 극우적이다)를 결성해 보컬로 활동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자신에게는 좌익 청년 운동이 더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가난뱅이의 역습>, <생지옥 천국> 등 진보 시각의 저서로 유명세를 얻으며 전문작가가 되었고, 아르바이트 인생에서도 같이 탈출한다. 스스로 피끓는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아마미야 가린은 사회로부터 노력이 부족하다는 취급을 받는 비정규직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이런 문제의 총체적 시작으로 지적한 것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 그리고 그걸 일본에서 용감하게 선도한 고이즈미 전 총리였다. 신자유주의가 청년 니트족과 무슨 상관인지, 어떻게 일본까지 전파되었는지 알려면 우선 그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한 책의 내용이다(page 287).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인플레이션과 부채 때문이에요. 어떻게 복지 국가 요소들을 약화시킬까 하는 것에 고심하는 경제학이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되어갔습니다. 그때까지의 주류는 소위 케인즈 경제학이죠. 케인즈의 사고방식은 ‘실업을 어떻게 해소할까, 실업이 사회에는 악이다.’ 라는 발상 위에 서 있습니다. 구멍 파서 메우는 데도 정부가 돈을 내면 거기에서 고용이 발생합니다. 적자가 나든 빚이 되든 어쨌든 정부는 그걸 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 케인즈 경제학을 무너뜨리는 데 전력한 학자들이 언젠가부터 미국의 정권 중심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걸 통화주의monetarism 혹은 공급supply side 경제학(수요보다 공급을 중시하는 경제학. 대규모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해 민간 투자와 기업 성장을 도움으로써 국내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균형 재정주의라고도 하고요. 회계 연도에서 가능한 한 수지를 맞춥니다. 정부는 돈을 쓰지도 말고 빌리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라는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고용을 촉진하고 실업을 억제하는 걸 선호했다. 하지만 영국병(1960,70년대 영국 경제 쇠퇴의 원인을 과다 복지와 연결되는 노동자의 비능률성으로 파악)과 스태그플레이션을 동반한 오일쇼크(1973,79년)로 인해 케인즈식 경제에 대한 의문이 나타난다. 그 대안으로 신자유주의가 급부상했는데,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표적 정책 추진자였다. 신자유주의는 서구 열강의 경제적 부활을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동구 공산권 블록과의 경제 전쟁은 서구의 승리로 끝난다(냉전 종식). 하지만 2008년 미국 발 세계 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신자유주의는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서구의 신자유주의는 복지 국가의 늘어진 노동 능률을 개선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태평하게 일해도 급여와 정년이 보장되는 공기업 일자리를 대폭 민간으로 넘기고, 노동 시장의 유연화(비정규직 고용을 늘리고, 정규직 해고는 편리하게)를 추구했다. 그러면서 금융 기관의 규제를 완화해서 실물 경제와 동떨어져 움직이고, 현금 흐름 예측이 어려운 수많은 파생 금융 상품을 탄생시켰다. 이런 실체가 불분명한 사이버적 금융 상품은 2008년 가을 미국 발 대폭발을 일으킨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 불리는 이 위기에서 신용 등급이 낮은(실물 자산이 부족한) 개인들은 주택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았고, 금융기관들은 그 대출 채권을 토대로 파생 상품을 만들었고, 다른 금융기관들이 그 파생 상품에 또 파생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런데 불황으로 실물 자산인 담보 주택 가격이 떨어지자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이어진 파생에 파생된 금융 상품들도 같이 부도가 나고 말았다. 결국 이런 상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미국 굴지의 금융 기관들이 파산했고, 그 금융 기관과 이어진 세계의 기업과 금융사 들도 같이 밑바닥에 빨려 들어갔다.

일본의 경우 2008년 세계 경제 위기의 훨씬 이전인 1990년대 초부터 불황이 시작되었었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10년’ 이었다가 나중에는 ‘잃어버린 20년’(2000년대), ‘잃어버린 30년’(현재)으로 자꾸 더 길게 잃어버리는 경제 위기 속에 일본 정부는 심각한 자구책을 마련한다.

고이즈미 정권은 2001년에 집권했는데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를 제창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일환으로 노동자 파견법을 손보는데 이것이 종신고용, 연공서열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특유의 기업 고용 형태를 변형시킨다. 고이즈미의 보수 자민당 정부는 일경련(日經連; 일본경제인연합회)과 연합해서 개혁을 추진했는데 아래는 그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page 45).

불황에 직면해서 일경련은 일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셋으로 분류할 것을 제언했다.
 
1. 장기 축적 능력 활용형
2. 고도 전문 능력 활용형
3. 고용 유연형
 
의미만으로도 알 수 있듯, 1은 기업의 중핵이 되는 사원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들은 기존의 정규직 사원같이 장기 고용에 승급, 승진도 있다. 2는 전문적인 기능을 가지는 계약 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장기 고용이 아니라, 연봉제나 성과급이 적용된다. 그리고 3은 한시적 고용, 시급제로서 승급 같은 것은 없다. 이 3이 지금 매우 급증하고 있는 일회용 노동력이다.

이 같은 개혁은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와 아주 비슷한 반향을 일본 전 사회에 불러일으켰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글에서 이어하도록 하겠다.

프레카리아트 II – 위험한 데는 니가 가라

화웨이, 새로운 삼성 II

화웨이의 설립자 런정페이는 1944년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학교 교장, 모친도 교사였던 교육자 집안이었다. 부모의 교육열 덕분인지 명문 충칭건축공정학원(현 충칭 대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이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중국 전국을 휩쓴 이 난리로 학교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사상 투쟁 시위를 하러 몰려나갔다. 런정페이의 부친은 국민당을 위해 부역했던 경력으로 인해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기억해라. 지식은 힘이다.” 라고 당부했던 아버지의 염원대로 독학에 열중했다. 대학시절 그는 전자 기술 이외에도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의 사상을 연구한다. 아래는 그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런정페이는 암울했던 대학시절에 마오쩌둥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이는 엔지니어로서 상대적으로 경영전략에 취약했던 런정페이가 화웨이를 키우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화웨이의 연구와 기술 개발에는 마오쩌둥 사상의 ‘우수한 병력을 집중시켜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다’ 는 전략이 적용되었다. 또 자기반성과 사내 캠페인 등, 그동안 화웨이의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중대한 정책에도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마오쩌둥 사상이라고 하면 소수의 운동권 사람만 읽는 공산주의 정치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런정페이가 경영 지침으로 사용했던 건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이었던 것 같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국공내전(1946~1949년)은 2천여 년 전의 초한전(楚漢戰)과 비슷했다. 항우는 유방을 훨씬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마음대로 그를 죽일 수 있던 때도 있었다(홍문지연 鴻門之宴). 하지만 유방은 항우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무너뜨렸다. 항우가 정공을 걸 때는 지연전과 유격전을 벌였고, 상대 진영을 이간시키는 책략도 필사적으로 사용했다.

마오쩌둥도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전쟁을 이겼다. 전쟁 발발 당시 병력은 국민당군 430만 명 대 공산당군 120만 명으로 4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국민당 측은 베이징, 난징,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 장비에 있어서도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군의 잉여 무기를 넘겨받은 장제스 측이 유리했다. 공산당군은 해군과 공군이 없었고, 소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보병이 주력이었다.

미국은 물론,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도 마오쩌둥의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스탈린은 1945년 7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장제스 정부의 외무장관 송자문(宋子文)과 회담하고 중소 우호 동맹 조약(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을 체결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 권력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뒤집고 공산군은 불과 4년 만에 장제스의 군대를 붕괴시키고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특유의 게릴라(빨치산) 전술을 썼는데, ’16字 전법’이라고 불리는 전술이다.

敵進我退 적이 공격하면 후퇴
敵駐我擾 적이 멈추면 교란
敵疲我打 적이 피로하면 공격
敵退我追 적이 후퇴하면 추격
 
병력에서 앞설 때만 공격하고 필요 없이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준비 없이 싸워서는 안 되며, 승산 없이 싸워서도 안 된다.
농촌을 장악한 후 도시를 포위 공격, 섬멸한다.

화웨이가 경쟁 기업과 싸워온 과정도 빨치산 전쟁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던 것이다. 화웨이는 기술력과 브랜드 명성이 있는 다국적 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 먼저 기반을 쌓았다. 본토 기업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후 지원 서비스에 정성을 다했다. 경쟁입찰, 계약에 이르기까지 화웨이는 반드시 경쟁기업보다 많은 인력과 자금을 집중 투입해서 돌파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단지 우수한 전술의 성과만은 아니었다. 아래는 <위기를 경영하라> 책에 실린 예화이다.

…영업사원들이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각종 제품이 소개된 자료와 샘플을 둘러메고 밤낮으로 뛰어다녔지만, 1년 동안 전국 500여 현(縣)을 훑고 다녔음에도 주문량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 번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인 이춘 전신국과 계약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절박했던 런정페이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영업사원뿐 아니라 수석연구원들까지 총출동시켰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기술교류, 프로세스 점검, 설비 테스트 등을 수십 차례나 거듭했다. 마침내 최종 입찰을 하던 날, 그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그들은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체면도 잊은 채 고개를 떨구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화에서 보이듯 화웨이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헌신은 눈부실 정도이다. 장군(경영자)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실행하는 병사(직원)들의 사기가 없다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이렇게 계약을 못 따면 통곡까지 하는 특별한 기업 문화는 특별한 소유구조로부터 왔다.

‘여러분은 회사의 주인’ 이라는 팻말만 있고 실제 번 돈과 주식은 회장 가족들이 독점하는 회사가 많다. 반면 화웨이는 경영자와 종업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종업원 지주제(Employee Shareholding Plan) 회사이다. 그래서 직원의 꿈이 회사의 꿈이 되고, 회사의 목표가 직원의 목표가 되는 응집력 강한 조직을 일구어 냈다. 직장에 야전침대를 깔아 놓고 야근을 하고, ‘화웨이 늑대’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분투하는 정신은 제도에 기반한 충성심에서 왔다. 중국 기업에 대한 흔한 편견을 깰 만한 우수한 기업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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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 새로운 삼성 I

1970년대 빌 게이츠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고, 그 예측은 부를 안겨주었다. 퍼스널 컴퓨터(PC)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전 세계 집과 회사 마다 컴퓨터가 쓰이게 될 모습을 상상했고, 독점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들려고 했다. 회사 이름은 작음(Micro)과 소프트웨어(Soft)를 결합한 Microsoft 로 지었다. 비슷한 시기의 스티브 잡스도 미래 IT 시대를 잘 예견했고, 회사의 로고로 생각의 혁신을 뜻하는 뉴튼의 사과 그림을 택했다.

1987년 런정페이(任正非)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퇴직 장교로 43세 였다. 애국 군인 답게 어려운 상황에도 중화유위(中華有爲), 즉 “중화민족에 미래가 있다” 고 외치며 분투했다. 그리고 그 말을 줄인 ‘화웨이’ 를 사명(社命)으로 한 회사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2만1천 위안(우리돈 360만원), 작은 작업실에 6명의 직원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미국 특유의 개인 창의성을 강조했다면, 화웨이는 국가주의적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설립자의 개인 이력도 차이가 많이 난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 명문가 출신에 변호사 아버지를 두었고, 중퇴하긴 했지만 하버드 대학 입학생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입양아 출신이지만, 리버럴 아트 분야에서 유명한 리드 대학교 중퇴에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천재 엔지니어를 동업자로 두는 행운을 누렸다. 한 명은 고급 인텔리로서 혁신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히피 예술가 기질을 가지고 혁신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런정페이는 40대 중반 퇴직 군인 신분으로 화웨이를 설립했다. 군대에서 통신장교를 지냈던 것이 IT와 연결되는 유일한 경력. 게다가 당시 중국은 IT 변방국이어서 정보통신의 혁명을 체감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런정페이와 화웨이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다. 화웨이는 현재 연매출 50조원 규모의 거대 IT 기업이다. 2010년에는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2014년에는 톰슨로이터 선정 세계 100대 혁신 기업이 되었다.


 
중국 로컬기업에서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한 샤오미나 화웨이 같은 기업들은 쉽게 과소평가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 내수 시장의 엄청난 크기 덕분에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화웨이가 그 내수 시장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미 일류 통신 기술을 보유하고 중국에 진출해 있던 에릭스, 지멘스, 알카텔 같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야 했고, 중흥통신(ZTE) 같은 중국 내 라이벌과도 싸워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쉽게 보이지 않으며 정당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먼저 화웨이와 런정페이는 그들만이 쓸 수 있는 기업 전략을 사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은 최첨단 기술력에 디자인 요소와 유저인터페이스를 가미해 독점 시장을 만들어 냈다. 제 3세계 기업으로 통신회사 후발주자였던 화웨이는 최첨단 기술력도 없고, 디자인을 신경쓰는건 사치였다. 결국 경쟁자인 다국적 기업에 앞설 수 있는 로컬 서비스에 중점을 두었다. 아래는 양사오룽이라는 저자가 런정페이와 화웨이의 발전을 분석한 <위기를 경영하라>라는 책에서 옮긴 내용이다.

그들(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핵심기술만 믿고 고객관리를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각 지역 전신국과 거래할 때에도 최고 책임자 외에는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웨이는 그렇지 않았다. 런정페이는 직원들에게 거래처에서 만나는 사람의 직무나 직책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화웨이 사람들은 제품 생산과 판매, 경쟁입찰 그리고 계약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에서 만나는 모든 담당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최고 책임자, 사무직원, 수석 엔지니어, 테스트 엔지니어 등 접촉하는 모든 고객들이 존중받는다고 느끼도록 했다. 이런 자세는 나중에 해외시장에서도 계속되었다.
 
창업 초기, 화웨이는 중국기업을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중국 우전부의 간부 및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큰 도움을 받은 런정페이는 이들이 퇴직한 후에도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케팅 부서에 화웨이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분들이니 수시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우라고 당부하고 매년 기념일을 챙겨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퇴직자들은 인연을 소중히 하고 감사할 줄 아는 런정페이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런정페이는 상대 회사의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했고, 화웨이의 장단점 역시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 평가에 따라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만 철저하게 싸웠다.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를 연상시킨다. 손자병법 말고도 기업가 런정페이를 감화시켰던 다른 사상도 있었는데 다음 글에서 연결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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