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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 – 보이지 않는 악마

카프카는 자신의 단편소설 중 <시골의사>와 <판결>을 특히 맘에 들어 했다고 한다. 두 작품을 읽어보니 동감이 갔다. 카프카가 아니면 누구도 아닐 황량하고 아름다운 문학이었다. 아래는 단편 <시골의사>의 잊기 어려운 결미 부분이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집에 돌아가지는 않겠다. 나의 번창하는 의사생활은 망했다. 후임자가 내 자리를 넘본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 그가 나를 대신하지는 못할테니. 내 집 안에서는 구역질나는 마부가 날뛰고, 로자는 그의 제물이다.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벌거벗은 채, 이 불운을 극한 시대의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지상(地上)의 마차에다 지상의 것이 아닌 말들로, 늙은 나는 나를 이리저리 내몰고 있구나. 내 털외투가 마차 뒤에 걸려 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고 변덕스러운 환자 주위의 불한당들 중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속았구나! 속았어!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던 것 – 그것은 결코 보상할 수가 없구나.

두서없는 시골의사의 말은 시적이지만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가 살아온 인생에서 피어난 특이한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흔히 고독, 소외, 불안, 항거불능 같은 단어로 대표된다. 카프카의 여인 중 한 명이었던 밀레나 폴락이 남긴 추도사가 있는데, 남자를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 쓴 것이니 만큼 그 심리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보여준다. 한 번 읽어보자.

카프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하지만 세상에 낙담한 채 자신의 길만을 외롭게 걸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무방비 상태의 인간을 전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악마 로 가득 찬 세계를 보았다. 카프카는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예민했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가 그렇듯 투쟁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 카프카는 타인을 알 수 있는 위대한 감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별나고도 심오한 방법으로 세계를 파악했던 카프카는 그 자체로도 유별나고도 심오한 하나의 세계였다. … 이 책들은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인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때문에 카프카는 이 세계를 감당할 수 없으며,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면 카프카에겐 죽음만이 남는 것이다.

밀레나가 말한대로 카프카는 예민하고 고결한 존재였다. 그는 유별난 방법으로 세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보았는데, 그건 부조리로 가득차 있는 꿈과 같은 세계였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는 말은 카프카는 현실의 부조리(아이러니)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존주의는 보통 “정해진게 없고 모든게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문학과 실존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다.

만약 카프카가 가졌던 세계관와 거리가 먼, 소속감과 정동이 뚜렷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소설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본들 미친놈 일기장 읽는 것과 비슷할 뿐일 것 같다. 카프카의 책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그들 역시 고독하고 정신적 투쟁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척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모든 배경을 취합해 <시골의사>의 마지막 단락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골의사는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기 때문에 의사생활이 망해버린다. 이는 인생에서 생의 방향을 정확히 인도하는 경보는 없다는 걸 의미한다. 잘못된 신호로 그는 연인 로자를 구역질나는 마부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림). 벌거벗었다는 건 마음을 지켜주는 방어막(신앙이나 은총)이 없다는 걸 뜻하고, 말들은 원초적 본능을 상징한다(프로이트의 분석에도 나와있듯이). 하지만 지상의 것이 아닌 말이기 때문에(본능을 떠난 천상의 정신에도 매어 있으므로) 그는 혼란스럽다. 구원을 주는 털외투는 손에 닿지 않고 불한당 들은 의사(치유자)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보상받을 수 없다. 정해진 게 없는 인생에서 한 번 지나간 길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V – 멋진 상처

멋진 상처를 가지고 나는 세상에 왔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나오는 몸치장의 전부였다.
I came into the world with a fine wound; that’s all I have to my name.

카프카 시골의사 I Entry-Wound_art.jpg<시골의사>는 카프카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두 개의 단편 중 하나이다. 상기의 구절은 작중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이 집으로 왕진 온 시골의사에게 한 말이다.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대사이다.

카프카의 여느 작품들처럼 여기도 악몽 속을 열심히 헤매고 다니는 것 같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직업이 의사인 이 남자와 죽어가는 소년이 소설의 두 주인공이다. 이 외에도 하녀인 ‘로자’ 가 있고 그녀를 유혹해서 거의 강간하는 ‘마부’ 도 있다.

<성>이나 <소송>에도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작품 속의 남자는 젊은 여자를 금세 육체적으로 범한다. 초면에 껴안고 애무를 하더니 어느새 약혼자가 되어있는 등. 카프카의 소설은 어두운 무의식을 민감하게 포착하는데, 도덕의 제어를 받지 않고 꿈틀대는 성 에너지를 극화한 것 같다. 처음엔 이상하지만 읽다 보면 거부하기 힘든 중독성이 뭔지 알게된다.

연인 관계인 것 같은 하녀 로자를 집에 두고(마부의 성적인 제물이 될 것을 두려워함), 시골의사는 마차를 타고 앓아누운 소년의 집에 도달한다. 마차를 준비하는 과정이나 길을 달리는 모습 모두 꿈 속의 장면 같다. 시골의사는 소년을 진찰하고는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한다.

짐작했던 대로다. 소년은 건강한 것이다. 약간 혈색이 나쁘고 걱정하는 어머니가 커피를 흠뻑 먹여놓았을 뿐, 건강하고, 그저 발길로 뻥 차 침대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세계를 개선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누워 있게 내버려 두자. 나는 구역(區域)에 고용되어 있는데, 이건 너무하다 싶은 지경까지 나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봉급은 적은데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인색하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나는 로자를 돌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야 소년이 권리가 있을 터이며 나 역시 죽고 싶다. 여기 이 끝없는 겨울에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이 작품을 해석하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시골 의사와 환자 소년을 다른 두 사람으로 보지 않고, 카프카 자아 안에 있는 인격을 둘로 분리한 것으로 파악한다. 시골의사는 자신이 세계를 개선하는 사람이 아니고 고용되어 있는 처지라고 하는데,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토로한 것이다. 시골의사는 소년이 멀쩡한 줄 알았지만 나중에야 그의 옆구리에 끔찍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발견한다, 정말로 소년이 아프다는 것을. 그의 오른쪽 옆구리, 허리께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상처는 여러 가지 농담(濃淡)의 장밋빛, 깊은 곳은 진하고 가장자리께로 올수록 옅어지며 고르지 않게 모인 피로 연하게 오돌도돌한 것이 파헤친 광산처럼 열려 있었다. 그것은 멀리서 본 모양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더 심한 상태가 나타났다. 누가 그것을 나직이 으흑 소리를 토하지 않고 들여다보겠는가? 굵기와 길이가 내 작은 손가락만한 벌레들이 본디 색깔에다가 피까지 뿌려져 분홍색으로, 상처의 안쪽에 들러붙은 채 조그만 흰머리와 수많은 작은 발들로 빛 있는 쪽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야, 너를 도울 길이 없구나. 나는 너의 큰 상처를 찾아내었다. 네 옆구리의 이 꽃으로 말미암아 너는 죽을 것이다.

이 무서운 상처는 소년 – 카프카 자신 – 의 가장 어두운 일면을 나타낸다. 세상에 나오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멋진 상처’ 이다. 하지만 상처가 꽃처럼 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카프카는 스스로를 외롭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인간라고 인식했다. 그 때문에 연인을 만나 사랑하면서도 맘껏 다가서지 못하고 약혼과 파혼을 반복한다. 하지만 상처는 역설적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가 평생을 두고 몰두한 글쓰기는 고난과 상처로부터 만 제대로 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프카에게 궁극적인 구원은 죽음이 되고 말았는데, 그의 육체적 상처였던 폐-후두 결핵이 악화되어 연인 도라 디아만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그의 문학이 줄곧 예기해왔던 처절하지만 예술적인 죽음이었다.

이어지는 글 –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 재앙 같은 죽음 같은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카프카가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자살과 같은 느낌,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의 죽음 같은 충격. 정신의 얼음을 깨는 도끼. 카프카가 문학에서 이끌어 내려 했던 건 이런 어마어마한 심상들이었다. 편지를 쓸 당시 그는 무명작가였는데, 비록 죽고 나서는 진가를 인정받게 되지만, 자신이 써내려가고 있는 글의 가능성을 잘 깨닫고 있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 같기만한 그의 작품이 어떻게 그토록 특별한 촉매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단편 <변신>은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의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이다. 이 평범하고 선량한 남자는 어느날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큰 갑충(甲蟲)으로 변한다. 장면 두 개가 계속 기억에 남았다. 집에서 여동생이 아름답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듣고는, 이런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자신(그레고르)이 벌레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장면이 하나.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그레고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니 가족들이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나들이 가는 장면이 두 번째였다. 이상한 유머가 넘쳐서 이토 준지 공포 만화를 읽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독의 삼 부작으로 꼽히는 최고의 작품 <소송>, <성>, <실종자> 는 상당한 마음가짐과 인내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일단 기승전결이 없고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른채, 이상하고 장황한 설명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래 옮긴 <소송>의 한 부분을 보면 전형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변호사는 그에게 뭔가를 자세히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물어봐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질문이야말로 가장 주가 되는 일이 아닌가. 자기라면 이 일에 필요한 온갖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변호사는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거나, 아니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귀가 잘 안 들리는지 책상 위로 몸을 약간 구부린 채 수염 한 가닥을 잡아당기며 양탄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아마 K가 레니와 함께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인 것 같았다. 이따금 변호사는 K에게 아이들에게나 할 법한 별 내용 없는 훈계 몇 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그것은 정말 따분하고도 쓸데없는 이야기들이라서 K는 최종 수임료를 정산할 때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변호사는 그를 충분히 주눅 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다시 약간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들었다.

그는 당연히 즉시 작업에 착수했고, 첫 청원서가 이미 거의 완성 되었다고 했다. 변호사 측의 첫 인상이 소송의 전체 진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첫 청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K가 유념해야 할 점도 있는데, 법원에서 첫 청원서를 전혀 읽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즉 법원에서는 당분간은 피고인을 심문하고 관찰하는 것이 글로 써놓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첫 청원서를 다른 서류들 속에 그냥 던져놓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K의 목숨이 걸린 것이건만 무슨 죄 때문에 걸린 재판인지는 작품 끝까지 안 나온다. 변호사는 일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것 같고 도움 안 되는 훈계만 던진다. 첫 청원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다가, 정작 법원에서는 청원서를 전혀 읽지 않는다는 설명도 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설명은 작품 전체에 걸쳐 열심히 반복된다. 처음 읽으면 뜬금없다가 나중으로 가면 점점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일관적으로 비이성적인 설명이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자폐증이 있는 아이가 물건을 가지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걸 보는 느낌이다. 카프카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독자를 이끌지만, 그가 혼란을 주기 위해 혼란스러운 글을 쓴 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왜 이런 뒤죽박죽 글이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가 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는 이성이 앞서는 명료한 정신을 그리려 했던게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야릇한 꿈과 같은 환상에 주목했다. 환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비논리적 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관해 논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글을 읽어보자. 카프카를 가장 탁월하게 분석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꿈 속에서 욕망과 공포 같은 원초적 정신 에너지는 꿈틀대지만 논리나 기억의 연결은 흩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도 꿈 속에서는 바보짓을 하고 헤맨다. <성>에 나오는 측량사 K의 행동을 생각해보자. 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욕망)는 확고하지만, 노력하는 K의 행동은 이성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다. 마치 불안한 악몽 속에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투쟁하는 남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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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작품 속 ‘꿈의 바보짓’ 은 다른 중요한 의미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꿈이 아닌 진짜 생에서의 투쟁도 반드시 명료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토마스 만은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 라고 표현했다.

생의 그림자 놀이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플라톤이 얘기한 ‘동굴의 우상’ 개념과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동굴 속에 묶여서 평생 산다고 할 때, 동굴 밖 존재로부터 전해지는 이미지는 모두 그림자이다. 하지만 동굴 속 사람은 그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산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동굴 속 존재라고 여기지 않으며, 세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한정된 경험과 숙명적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이유 없이 재판에 걸리고, 결국 처형당하는 <소송>의 주인공 K 나 아버지에게 익사형을 언도받고 스스로 강물로 달려가 형을 집행하는 <판결>의 주인공 게오르그를 보면 ‘존재 자체가 유죄’ 라는 관념이 나타난다.

이유 없이 처벌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이유도 모른채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한계(동굴의 우상)를 가지고 이상한 그림자 놀이(삶의 투쟁)에 몰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처음으로 표현한 실존주의적 원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식과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몽환성이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특이한 분위기가 합쳐져서 독자를 그의 글에 빠지게 만드는데, 마음에 고통을 주는 재앙처럼 강렬한 문학의 힘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글 –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V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데미안과 카프카

무슨 설문조사 결과에서 읽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대학 입시 면접에서 교수가 “이제까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무언가?” 라고 물으면 면접 학생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가장 많이 얘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에 물어보면 이걸 읽고 좋았다는 사람보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지겨웠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현 입시제도 내에서 불쌍한 고교생들은 시키는 공부를 군말없이 할 것을 압박받는다. 지금 힘든 것도, 삶의 의미도 일단 잊고, 입시 공부에 무당 접신하듯 몰두하는 것이다. 반면 <데미안>의 주제는 인간 각자가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래 옮긴 데미안 책 구절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내 가슴 속에서 치솟는 어떤 것, 나는 오로지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

내 가슴 속에서 솟는 어떤 것은 존재의 본류로부터 흘러나오는 정신이다. 형언할 수 없고, 개척되지 않았지만, 나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운명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려운 이유는 존재 본류를 가로막는 인공적인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이란 세상에 길들여지며 정신에 들어와버린 티끌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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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의 “Geopoliticus Child Watching the Birth of the New Man”

티끌 즉 가짜 자아는 집단 가치의 형태로 들어오며, 사회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본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자아와 계속 마찰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학벌의식, 외모 컴플렉스, 명예욕 같은 것들이다. 좋은 대학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데미안에 따르면 주체적 운명의 길이 아닌, 사회가 준 숙제를 푸는 것 정도이다.

그래서 만일 고교생이 진정 <데미안>에 감동받았다면, 명문대 입시 사람 공장이 되어있는 현 교육체제 부터 비판하고, 유명 래퍼 도끼처럼 자수성가하는 예술의 길을 갈 것 같다. 하지만 늘 사회는 돌출 행동을 하는 모난 돌에 정을 맞추려 하고, 보수적인 대학입시 면접관들도 도끼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주제를 돌려 프란츠 카프카로 돌아가 보자. 카프카도 데미안이 말하는 ‘가슴 속에서 치솟는 것’ 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글쓰기’ 라고 하는 창작 행위에 중심을 두고 있다.

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몰입은 아주 순수했던 것 같다. <카프카 평전>에 실린 편지나 생전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작품 <화부>로 폰타네 문학상을 받았지만 기뻐하지 않았고, 자기 작품이 왜 빨리 유명해지지 않나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는 폐결핵에 걸려 죽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남긴 원고를 모두 불태워 줄 것을 부탁까지 했다.

그는 글 쓰는 것에 자기 존재를 걸었고, 마치 화가 반 고흐가 그림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을 보는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내게 들었던 궁금증은 ‘글쓰기’ 가 어떤 느낌을 주었길래 그렇게 일생을 걸었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한국 고교생이 하는 입시 공부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는 이주동作 <카프카 평전>에서 옮긴 내용인데 한 번 읽어보자.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행복, 능력 그리고 가능성” 을 “문학적인 것” 으로 이용해왔는데, 그가 글을 쓸 때면 슈타이너가 말하는 “천리안적인 상태”, 즉 “망아 상태” 에 종종 빠지게 되며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이 이루어지고,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모든 한계를 느낀다” 고 밝혔다.

망아(忘我) 상태는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세계와 합쳐져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말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흠뻑 젖는다든지, 사랑하는 연인을 안고 있을 때의 기분이다. 자아의 감각이 없기 때문에 아집도 없고, 천리안적인 직감을 느낀다. 이런 예술가의 육감(六感)이라 부를 수 있는 감각이 카프카에게는 ‘가슴에 치솟는 어떤 것’이었으며, 거기에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매이지 않고 예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글 –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 – 우울하다면

마음 속 즐거움이 어디갔는지 모르는 때가 있다. 아침 일찍부터 직장 가서 일하지만 의욕이 없다. 퇴근 후 집에서 TV를 보는 것도 재미없고, 운동이나 다른 취미를 찾을 마음도 안 든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 언제나 화장한 얼굴의 남여 주인공 – 운동할 때도 잘 때도 화장하고 있다 – 은 열띤 표정으로 인생의 목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공허하다. 어려서 기계처럼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를 하다가, 커서는 기계처럼 직장에서 시키는 일을 처리한다. 사회 전체가 강물처럼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출세에 대한 욕구가 채워진다면, 아니면 쾌락이나 마약에 퐁당 빠질 수 있다면 삶의 의미에 대한 걱정도 안하게 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권력도 없고 쾌락을 편하게 누릴 수 없다. 험담과 불평만 쌓여갈 뿐이다. 이런 우울한 강물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는가? 카프카를 생각하게 된 계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도 평범한 소시민으로 태어났으며, 다수 대중과 마찬가지로 암담한 생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카프카는 암담을 예술적으로 뛰어넘었고, 삶을 문학 작품처럼 만들었다. 어떻게 그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자.

카프카는 19세기 말엽 보헤미아(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중산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래는 아이 시절의 사진 들인데 참 어여쁘게 생겼다. 하지만 아이 카프카가 집에서 귀여움만 받은 건 아니었다.

Baby kafka 3 combined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자수성가한 상인이었고 기골이 장대했는데, 집안에서 폭군처럼 살았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은 생활력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폐쇄적이고 고집이 세다는 단점도 보통 같이 있다. 그는 자신과 아주 다른  아들(감상적이고, 생활력 없고, 연약한 체격의 카프카)에게 막말을 일삼고 윽박질렀다.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년 시절의 상처를 훗날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라는 책에서 밝혔다.

대체로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힘들게 일하셨고, 자식들을 위해, 특히 저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셨다구요. 그 덕에 제가 아무런 걱정 없이 호사스럽게 살았고, 배우고 싶은 건 무엇이건 마음대로 다 배울 수 있었다구요. 배고픔으로 근심한 적이 없었다는 건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다는 말 아니냐구요.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고마운 줄 알라고 하신 적이 없다구요. … 그런데 저만 이상하게 옛날부터 아버지로부터 숨으려고 했다는 거죠. 제 방 안으로, 책 속으로, 정신 나간 친구들 틈으로(막스 브로트 같은 친구들), 또 엉뚱한 생각 속으로 틀어박히려고만 했다는 거예요.

읽어보니 슬프다. 아버지 헤르만은 아들의 평생 친구인 막스 브로트를 정신 나갔다고 생각했고, 아들이 몰두한 일 – 글쓰기, 문학책 읽기, 정신나간 친구와 모임 등등 – 을 모두 무시했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그것도 편한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헌신한 건 사실이고, 그건 마음에 죄책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갈팡질팡은 나중에 <판결>이라는 단편에 몽환적으로 나타난다. 카프카는 아버지로 인해 자신감은 쪼그라 들었지만, 예민하면서 감수성 풍부한 성격을 키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모계 쪽 기질을 이어받은 결과이기도 하다. 아래는 이주동 님作 <카프카 평전>에서 옮긴 내용인데 한 번 읽어보자.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장티푸스로 일찍 돌아가셨다. 딸의 죽음으로 해서 어머니의 외할머니께서는 우울해지기 시작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딸이 죽은 지 일 년 후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분의 시체는 엘베강에서 인양되었다.

카프카는 이러한 외가의 특성 중에서 무엇보다 자신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특성 이외에도 “부끄러움을 잘 타며 지나칠 정도로 겁먹은 듯한 겸손함, 소심함 그리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것” 이라고 말했다.

지나친 겸손함과 소심함은 카프카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그가 쓴 연애 편지들이 사후 유명세를 타고 출판되었는데, 자신이 불안정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걸 줄곧 토로하는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카프카를 심리적 안정에서 멀어지게 한 건 가정환경 말고도 또 있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민족 국가이긴 했지만 그 속에서도 유대인은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거의 평생 살았던 도시 프라하는 체코인이 다수였지만 지배계층은 독일어를 쓰는 게르만인이었다.

카프카는 신분 상승을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일계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고, 대학에서는 법률 전공을 택했다. 유대인으로서 인종 편견에 대비해야 했고, 다수 민족(체코인)에 속하지도 않으면서, 독일어를 쓰는 상류층에 끼어들도록 교육받았으니 소속감이란걸 가지기 힘든 상황이다. 예를 들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이슬람 권에서 온 사무직 근로자로 사는 것과 기분이 비슷했을 것 같다. 카프카의 작품은 소외와 불안, 항거불능의 감정을 잘 녹여내었다고 평가받는데, 스스로의 쓰린 경험을 승화한 것이라 더욱 진실하다. 그는 사람을 히키코모리로 만드는 장애물들을 문학을 이용해 예술적으로 극복했다. 즐거움을 잊고 사는 일반인에게 귀감이 될 부분이다. 구체적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서 쓰도록 하겠다.

이어지는 글 –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