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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세 IV – 이승복 어린이 사건

모사세 IV S7309946.jpg아무튼 정인은 그때 몰랐다. 자꾸 꾸지람을 듣고 사랑 받지 못하는 게 싫으면 사랑을 더 요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스무 살이 넘어 여자친구를 사귀고 나서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의 운명은 완전한 운에 맡겨져 있었다. 세상에 던져진 후에 만나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 줄지 안 사랑해 줄지는 행운에 따른다. 엄마 아빠가 쌓아놓은 업(業)에 따라 아이는 광대가 되기도 하고 묘기 부리는 동물 아니면 서커스 단장으로 성공도 한다. 하얗고 티 없는 피부에 히스테리가 들어와 아이들은 일찍이도 작은 악마로 변해 간다.

정인의 유년에 결정적인 ‘공포’ 를 심어 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건 ‘이승복 어린이 사건’ 이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학교 강당에 학년 전체가 모여 이승복 어린이 영화를 보았었다. 정인은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고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비는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찢어서 죽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공포감이 강당을 뒤덮고 있었다. 영화는 강원도 산골의 어느 아름다운 마을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밝은 햇살도 초록색 나무로 덮인 산골짜기도 다른 아름다운 풍경도 마지막 살인사건을 위한 무대장치가 되었다. 영화 초반부는 공산당 공비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좋은 마을을 살육의 공포에 빠뜨렸는지를 웅변해주고 있었다. 운동회를 맞아 운동장에는 이승복 어린이네 학교 아이들이 하하호호 뛰어 놀고 있다. 이승복 어린이가 나무에 올라가는데 뒤따라 올라오던 어린이가 실수로 반바지를 잡아 당기는 바람에 그의 둥그런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보통 때면 깔깔 웃는 장면이었지만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정인은 어린 나이에 이미 공포 영화가 감정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줌으로써 극한의 공포를 끌어낸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매우 험상 굳게 생긴 공산당 공비들은 어두운 밤을 타서 산골짜기 마을로 침입한다. 그리고 드디어 이승복 어린이 가족의 집에 초대도 받지 않고 난입한다. 처음부터 죽이러 들어간 건 아니어서 가족들과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눈다. 이승복 어린이가 공비 살인마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공비가 승복 어린이의 연필을 보더니 “이거 미제 맞지?” 라고 말한 것을 어린이가 “아니에요. 이건 국산이에요” 라고 대답한 게 시초였다. 공비는 이렇게 좋은 연필을 남한이 만들었을리 없다고 말하며 흥분한다. 하지만 이승복 어린이는 물러서지 않았고 급기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치명적인 말을 하고 만다.

정인은 입 안에 새빨간 피가 가득 찬 채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던 이승복 어린이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다. 북한군은 말 한마디 잘못 뱉은 아이의 입술 양쪽에 엄지 손가락을 걸고 찢어 숨통을 끊었다. 북한군은 악마를 넘어선 존재였다. 악마도 색깔은 까맣고 꼬리가 갈라져 귀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새빨간 피가 새하얗게 될 수 없듯이 북한군은 결코 좋은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악마를 능가하는 악마, 악마를 연쇄 살인으로 죽이는 악마였다!

정인이 경악에 찬 채 어두운 강당을 나와서 주위의 아이들을 살펴보니 다들 눈이 벌개져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이들이 우는 게 방금 본 공포 영화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죽은 이승복 어린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모사세 III – 유혹과 강박

아이 정인의 기억은 원초적인 감정 덩어리가 비누방울 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기억 안에는 정확한 언어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펑 터지기 쉬웠다. 정인은 외모 만 보면 그냥 사탕 막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그의 정신까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어른 정인은 아이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부터 이미 굉장한 크기의 에너지가 유혹과 강박 공포의 형체를 띠고 머리를 휘젖고 있었구나 생각을 한다.

정인이 느꼈던 ‘유혹’ 을 말해주는 일화는 이렇다. 꼬마 정인은 가족들과 광나루 근처에 있는 넓은 야외 수영장에 갔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수영복을 입은 수 많은 사람들이 수영장을 어항처럼 메우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성이 정인의 시선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당시에 흔치 않은 노출이 심한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보통 수영복과 다르게 가슴과 가슴사이가 길게 도로가 난 것 처럼 파여 있었다. 도로 양측으로는 당연히 유방 언덕이 솟아 있었다. 정인은 일차 성징만 가진 꼬마였다. 하지만 여자의 도발적인 모습은 원래 유혹의 대상이 아닌 꼬마에게 충분한 전기 충격을 주었다. 이 미모의 여성은 선글라스 안에서 왜 이 얘가 자기 야한 모습을 넊나가서 보고 있는 걸까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정인이 느꼈던 건 알 수 없는 미로와 같은 정신을 헤매는 강렬한 전기의 흐름이었다.

다음으로 강박이라는 건 정인에게 자연스럽게 박혀버린 생각의 흐름이다. 여기에는 엄마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엄마는 정인을 늘 감시하고 통제하는 존재였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11년후에 벌어질 대학입시 전쟁의 조망은 정인의 가정 전체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정인은 학교 수업 진도와 숙제를 어머니에게 확인 받아야 했는데 이건 매일 벌어지는 고문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공부가 더럽게 재미 없다는 걸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셰퍼드에 비유했다. 주인이 감시를 안 하면 일 안하고 먹고 노는 동물. 정인은 훗날 셰퍼드가 머리 좋고 강인하며 충성심 강한 훌륭한 개라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위로 되는 사실은 아니었다. 모든 걸 통제했던 엄마가 준 강박의 에너지는 몹시도 강한 것이어서 다른 이미지의 그녀를 떠올리기 어렵게 했다. 한 번은 부모님이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엄마는 활짝 웃는 반가운 미소로 정인을 맞았다. 이 표정이 정인에겐 낯선 놀라움이었다. 그는 자신이 엄마에게 반가울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모사세 II – 인어공주

어린 정인이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만화영화는 원초적인 기억의 영상을 많긴 남긴 것들이었다. 안데르센 동화가 만화로 등장했는데 그 신비하고 슬픈 이야기는 꼬마의 심금을 울렸다. 바다에 살던 인어공주는 인간 왕자를 우연히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사랑이 깊어진 나머지 마녀와 거래를 한다. 자기의 예쁜 목소리를 희생하는 대신 인간과 같은 두 다리를 얻은 것이다. 그녀는 바다에서 걸어 나와 왕국으로 가서 왕자를 만난다. 그녀는 왕자에게 얼마간 귀여움을 받았고 행복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자는 곧 이웃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때 그녀에게 인어 시절의 언니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머리칼과 맞바꾼 칼을 건네며 이걸로 왕자를 찌르면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하자고 설득한다. 인어공주는 고뇌하지만, 사랑하는 왕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왕자의 결혼식 전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다. 마녀와의 거래에는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바다의 거품이 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국 인어공주의 영혼은 물가에 영원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품이 되어 버린다. 마치 끝 없이 그리워하며 갈구하는 인간 모두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어공주 이야기는 정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때 정인은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게 무언지 몰랐다. 하지만 인어공주가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랬기 때문에 죽고 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이런 이해가 정인을 더 냉정하고 조심스런 아이로 만든 건 아니었다. 다만 이상한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정인은 매일마다 인어공주의 꿈을 꾸었다. 아름답고 가녀린 그녀는 인간 세상으로 올려져 큰 어항 같은 것에 들어 있었다. 꿈이 반복되고 깊어지면서 정인은 자신이 인어공주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아이의 생각은 동화보다 더 동화적이어서 이불 안의 뜨거운 방바닥에서 땀이 뻘뻘 나는 것을 오래 참고 있으면 자기가 인어로 변할 거라고 믿었다. 훗날 어른 정인은 프로이트의 책을 읽고 나서 왜 그렇게 인어가 되고 싶어 했었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일곱 살 정인의 하루하루는 강물 흘러가듯 흘러가고 있었다. 금방 끝나는 학교 숙제를 마치면 나머지 시간엔 한가히 날아가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놀면 되었다. 그 날은 잡초와 민들레가 무성한 개천가를 걷는 하교 길이었다. 강둑으로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고 풀밭을 비추는 햇빛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와 했던 테니스 공 던지기를 생각했고 베란다에서 키우던 강남콩 화분도 생각했다. 화분은 슬기로운 생활 과목의 숙제였는데 싹이 돋고 자라는 게 신기해서 30분 마다 한 번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러 가보곤 했다. 어제는 싹이 땅에서 2센티 정도 나와 있었다. 그저께는 작은 떡잎 두 개가 보이는 정도였다. 점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한 달 전에는 아예 화분에 콩을 키우지 않았다. 그때 콩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줄기에 달려 자라고 있었겠지. 그렇담 1년 전 그리고 그보다 더 1년 전에는? 그때는 아예 콩 줄기도 없었을 텐데… 모양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콩은 그렇다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 일까? 정인은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왔는지 다 기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도 운동장에서 놀았던가? 어떤 다른 숙제가 있었던가? 더 강렬했던, 주로 어둡고 무서웠던 영상의 단편이 존재하지만 일상의 기억은 없었고, 그 기억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나날들이 있었다. 과거는 하나의 빈 공간으로 녹아 있었다. 다만 정인의 기억이 시작된 날 인생 기록의 첫 페이지가 쓰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인은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나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엄마 배 속에서 자라나 몸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처음부터 내가 나인지 알고 있지는 않았다. 배 속에서 나와 세상을 보았을 때 비로소 나를 나라고 불러주는 존재가 주위에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정인아 착하지 정인아 이렇게. 그래서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면서 만들어 졌다. 만약 주위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를 만져줘서 감촉의 차이를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세계와 구별이 없이 한데 녹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난 이렇게 세상에 풀처럼 피어나 버렸다. 그래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고 있다. 나를 나라고 부르는 그 개체, 자아, 생명, 그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 그건 천천한 맺힘이 있었고 끝에도 천천한 사라짐이 있을 것이다. 누가 나를 불러도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을 때, 그 때 내 몸의 응집도 무너지고 맥박도 사라져, 품고 있던 영혼도 다시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구름이 모여 비가 되어 내리듯, 그 비가 작은 개울이 되고 강이 되어 흐르듯, 그 강이 넓은 바다와 찬란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아가듯. 그리고 저 하늘이 늘 영원한 하늘 그대로 인 것처럼.”

모사세 I – 영원 반사

세상에는 빛이 있다. 빛이 있기 전에는 어둠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성경의 창세기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빛은 움직이고 반사할 수 있어서 그만큼 어둠을 줄인다. 거울은 항상 빛을 온전히 투영해 나누어준다. 어두운 날이면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둡고, 밝은 햇빛이 있는 날 모습은 해와 함께 빛난다. 일곱 살 정인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집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하루는 이층으로 가는 나무 계단을 올라서 창가로 갔다. 벽 시계가 조용한 초침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는 아카시아 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인은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넓었던 창문 턱 공간에는 액자와 책들이 놓여 있었다.

정인은 거기서 두 개의 네모난 거울이 경첩으로 한 면을 맞대고 붙어 있는걸 보았다. 마주보는 거울은 서로가 서로의 영상을 투영하며 계속 안 쪽으로 똑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거울 사이에 손가락을 넣으니 똑 같은 손가락 모양이 점점 작아지면서 이어진다.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면 길게 줄서 있는 작은 손가락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정인의 마음은 이상 야릇한 것을 느꼈다. 작은 공간에 갇혀 있지만 끝 없이 이어져 있다. 한 방울 물에 비친 태양처럼 세상 안에 다른 작은 세상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 시절의 기억은 모호한 바다를 떠다니는 배처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정인은 아기 조카를 보며 자신이 아기였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힌트를 얻는다. 하늘색 턱받이를 목에 두르고 점박이 옷을 입은 이 아기는 앉아서 정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어디론가 기어간다. 쇼파를 만나면 그 위로 기어오른다. 쇼파 등의 커다란 쿠션 위로도 올라가려 바둥거려 보지만 안 되서 헉헉 소리를 내고 있다. 어른들은 힘들지 않아도 헉헉 소리를 내지만 이 아기는 꼭 힘들때만 소리를 낸다. 아직도 바둥대고 있는 아기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마루에 내려주면 이제는 장난감 정글이 있는 곳으로 기어간다. 초록색 플라스틱 나무를 손으로 잡으며 겨우 일어나더니 나무에 달린 기린 인형의 귀를 입에 물고 빤다. 다가가 그 모습을 보면 입에 기린 귀를 문 채 정인을 빤히 쳐다본다. 하얗고 까만 눈의 대비가 선명하다.

정인은 이 아기를 처음 대하고 충격을 받았다. 가치판단이 없이 무구함 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정인 자신은 무서울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각이 많은 어른들 옆에서 이 아기는 언제나 평화롭게 놀고 있다. 상대를 속이지 않고, 미워하는 것도 없으며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표정에 전광판처럼 나타난다. 정인도 아기로서 엄마 앞에서 기어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도 이런 순진무구함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언제 다 잃어버렸는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정인이 기억이라는 관념을 이해하기 시작한 건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서울 서쪽의 작은 도시였던 광명시에는 ‘자수하여 광명 찾자’ 라는 현수막이 도시 어귀에 걸려 있었다. 정인은 광명을 찾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고 자수하면 도시를 어떻게 찾게 되는 건지 생각했다. 지저분한 회색 개천이 서울과 경계를 이루며 흘렀고 그 개천가의 20평 짜리 연립주택에 엄마, 아빠, 누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지금처럼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고 장래의 꿈도 없었다. 머리 아픈 생각보다 보다는 원초적인 기쁨과 공포가 희미한 기억의 영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