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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 I –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상징 해석의 출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작품을 왜 읽느냐고 물어본다면 ‘재미 있으니까’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를 뺀 나머지 장편 소설은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과 상징이 온통 얽혀 있다. 그래서 줄거리가 논리적으로 머리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재미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작가가 문학계에서 명성을 날리기 위해 일부러 난해하게 쓴 건 아니다. 문체를 이해하려면 하루키가 직접 여러 매체를 통해 말했던 사실을 종합해보면 좋다.

…머리가 그런 융통무애融通無碍의 상태가 되면 그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말을 바꾸면, 상상력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입체적으로 자유자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 거기서 내가 유념 했던 점은 우선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다양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나 이미지나 광경이나 언어를 소설이라는 용기 안에 척척 집어넣고 그걸 입체적으로 조합해 나간다. 그리고 그 조합은 통념적인 논리나 문학적인 언어와는 무관한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기본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그런 작업을 추진하는 데는 무엇보다 음악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요령으로 문장을 만들어갔습니다. 주로 재즈가 도움이 됐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재즈는 다채로운 엇박(offbeat; syncopation)과 즉흥연주(improvization)가 돋보이는 장르이다. 그래서 전통적 구조의 소설(기승전결과 명확성의)과 하루키의 소설은 클래식과 재즈 음악 만큼 차이가 난다. 또한 ‘설명하지 않는’ ‘융통무애’ 함도 중요한 시사점이다. <양을 쫓는 모험> 작품의 말미에는 세상과 동떨어진 산장이 나오고, ‘양 사나이’라는 이계의 인물이 떡 등장한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전환이 된건데, 주인공 ‘나’는 양 역할의 연극 복장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남자를 보고 놀라지도 않는다. 이런 환상이 창작과정의 융통무애하고 의지에서 벗어난(설명하지 않는) 머리에서 나온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하루키 작가가 직접 그려서 책 삽화로 삼은 ‘양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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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명으로 평가 받는 프란츠 카프카는 새벽마다 혼자 글을 “마치 유령의 손에 의해 써내려 가듯 신비적인 망아 상태에 빠져” 썼다고 고백했었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라는 장편을 썼을 만큼, 글쓰기 방식에서도 둘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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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

The Paris Review 라는 곳과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을 챈들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결합이라고 했다. 먼저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 작가이다.
 

(좌) 레이먼드 챈들러 (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하루키는 한 문학비평가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소설(양을 쫓는 모험)은 구조에 대해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습니다. 그 외로운 도시 생활자입니다. 그러면 그가 뭔가를 찾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마침내 발견했을 때, 그 무언가는 이미 손상되어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챈들러가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대화 R・챈들러, 혹은 도시 소설에 대해」『Eureka』1982년 7월호

하루키는 챈들러의 장편 <기나긴 이별>을 12번이나 읽었다고 밝혔다. <양을 쫓는 모험>과 <기나긴 이별>의 유사점은 중심 테마와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루키 작품의 공통점인 친구, 아내 혹은 연인의 상실과 <기나긴 이별>에서의 친구(테리 레녹스) 상실은 대칭된다. <양을 쫓는 모험>은 제목 그대로 전형적 추리소설의 구조 – 일본 정관계를 뒤에서 주무르는 거물의 부하를 만나고, 사라진 친구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며,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을 쫓음 – 를 따르기 때문에 챈들러 작품과 유사하다.
 
참고로 <기나긴 이별>의 주인공이자 챈들러 소설의 간판인 ‘필립 말로’는 셜록 홈즈 다음으로 유명한 사설 탐정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로 1942년부터 1975년까지 9개, 메이저 TV 시리즈로 1954년부터 2007년까지 6개 작품이 나옴). 말로의 성격은 하루키 장편 소설의 1인칭 주인공과 많이 닮았다. 술 담배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지만 선을 지키고, 가족과 깊은 연결 없이 혼자 쓸쓸히 지내지만, 헛된 감정의 소용돌이(허영, 질투, 증오)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대문호이다. 하루키는 특히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좋아했고, 이 길고 긴 책을 4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민음사판 기준, 3권 전집, 총 1700 페이지).
Reference : New York Times Magazine , Sam Anderson과의 대담
 
도스토예프스키는 대표작 <죄와 벌>에서 볼 수 있듯이 선악이 상당히 대비되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인간 심리를 탐구했다. 라스콜리니코프, 소피야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보면 작가의 분열하는 인격을 따로따로 떼어낸 분신을 보는 것 같다

 

(좌) 라스콜리니코프 : 투쟁하는 인격 (중) 소피야 : 선한 분신 (우) 스비드리가일로프 : 악한 분신

 

결국 종합하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 기법을 쓰면서,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줄곧 다루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다는 건데, 이 말이 <양을 쫓는 모험>을 이해하는데 키 포인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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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계(現實界)와 이계(二界) 사이에 있는 상징들, 그리고 칼 구스타프 융

일본 독자의 서평을 읽어보면, 이계라는 단어가 나온다. 일단 별을 등에 진 양과 양박사라는 존재도 그렇고, 마지막에 나오는 산장이라는 공간과 양사나이라는 인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계와 이계 사이에 있다(아래 링크).
Hatena Blog
 
이것 때문에 소설이 갑자기 만화가 된 것 같고, 이야기 흐름과 주제를 놓쳐버리게 된다. 앞서 언급한 챈들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도 이런 특징은 없고, 프란츠 카프카와는 약간 비슷한 하루키 작가의 독특한 부분이다. 이런 비현실성, 달리 말하면 마술적 리얼리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를 알면 좋다.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정신의학의 선구자 프로이트는 의식 무의식을 나누고 그걸 이드-자아-초자아로 세분화 했다. 그런데 한때 프로이트의 후계자였던 융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무의식에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영역이다.
 


 

의식 저편 아주 깊은 곳에는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건데, 이걸 수긍하면 별 모양을 품은 양이 왜 양박사에게 심어졌다가 흑막의 보스에게 넘어갔는지, 그리고 그걸 잃은 사람이 왜 빈껍데기처럼 되고, 그걸 이어받을 사람이 왜 두려워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융은 인간이 가진 사랑 증오 분노 공포 같은 감정을 에너지의 전이로 파악한 것 같다.

물리학에서도 에너지와 그것의 여러 가지 표현, 즉 전기, 빛, 열 등에 관해 말한다.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심리학도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취급한다. 말하자면 강도의 측정, 양의 많고 적음을 다룬다. 그런데 나타나는 형태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리비도를 에너지로 본다면 일종의 통일된 관점을 갖게 된다. 그러면 리비도의 성질에 관한 논쟁적인 질문, 즉 그것이 성이냐 권력이냐 배고픔이냐, 그밖의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예를 들어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가장 과학적 설명이 빅뱅(Big Bang)인데, 태초에 폭발이 있었고, 그게 한 점에서 퍼져 나갔다. 이걸 공간적 확장이라 볼 수 있지만, 에너지의 뻗어나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주의 시작처럼 정신에너지도 그렇게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개체에게 영향을 준다고 한다면 집단무의식과 비슷해진다.
 

빅뱅 상상도

 
융은 세계 여러 곳의 다른 문명에 공통적인 상징과 신화 그리고 개인적인 꿈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집단무의식의 근거로 삼았다. 인터넷 같은 장거리 통신이 없던 시대에, 절대 소통될 수 없는 장소들에서 각각 거의 유사한 신화가 나타나고, 비슷한 개인적 꿈을 꾼 기록도 있다는 것이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발현되고, 꿈의 상징이나 신화를 낳는 근원으로서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문제가 되는 ‘양’은 전승되어 내려오는 근원적 악으로서의 원형 ‘그림자’와 유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칼 구스타프 융 사상적 해석은 일본의 융 심리학 일인자인 가와이 하야오 라는 학자와의 대담인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에서 논의된 바 있다.
 
다음 글에서는 별을 등에 품은 양, 양 박사, 양 사나이, 쥐(주인공의 친구), 신비로운 귀를 가진 여자(주인공의 애인)에 대한 개별 상징 분석을 해보려고 한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 작품 해설과 주인공 성격 분석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어머니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른 감정체계를 가지고 있던 주인공 뫼르소는 아기 때부터 자기를 키워줬던, 그리고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에게 별 감흥이 없다. 이 사실은 그가 나중에 살인사건에서 사형을 언도 받는데 큰 공헌을 한다.
 
​심리학적으로 Anomie(동정심 공감능력 없음)로 볼 수 있는 뫼르소의 성격이 왜 시대를 흔든 대작의 주인공 성격이 되어야 했을까? 그건 그를 단순한 사이코패스로 볼 수 없게 하는 사회적 성격 형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쓸쓸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존재양식이 뫼르소 같은 사람을 양산하고 있으니까.
 
​죽기 전날 사형수 감방 안에서 뫼르소는 간만에 어머니를 떠올린다. 기력도 없이 양로원에 갇힌 처지면서 새 약혼자를 만들려고 했던 어머니. 뫼르소 자신이 가졌던 삶에 대한 반항과 자유, 그로인해 더 많이 느끼며 살 수 있었던 열정, 그것이 어머니의 열정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다가올 단두대 처형에도 열정과 사랑으로 동화되어 버리는 경지를 보여준다.
 
​정말 이상하면서 슬프며 장엄한 결말이다.
 

 

폭풍의 언덕 – 사랑의 고통과 황홀 그리고 잔인함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1818년 영국의 북부 변방인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났고, 1848년 30세의 나이로 결핵에 걸려 죽었다. 그녀의 다른 3명의 자매와 1명의 남동생은 모두 어려서 죽거나, 30대 초반의 나이를 못 벗어나고 병으로 죽었다. 생전에 작가로 명성을 얻었던 언니 샬럿 브론테 만이 예외로 그나마 38세까지 생존했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들은 젊은 나이에 열병이 걸리고 금새 죽어나간다. 캐서린 언쇼, 힌들리 언쇼, 에드거 린턴 모두 그렇게 죽었다. 죽음은 에밀리 브론테의 곁에 삶과 이질적이지 않은 영역으로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도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유령처럼 맴돌며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는 작품에서 유령이 된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에밀리 브론테는 평생 독신이었고, 시골 요크셔를 떠나 오래 산 적이 없었다. 세속적이고 시류에 휩쓸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겪어 볼 기회가 없었고, 찾지도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폭풍이 몰아치는 고향 벌판의 장엄한 풍경은 사랑의 감정에 어떤 불가사이한 신비함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즉 사랑은 그냥 인간 안에 갇힌 감정이 아니라, 비나 바람처럼 형태를 바꾸며 세차게 세계를 떠도는 것으로. 그래서인지 작품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절대적인 상호 공명과 처절함으로 일관되어 있다.
 
캐서린은 넬리에게 말한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을 거야.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가 올라갈 수 없는 고상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게 되자 히스클리프는 폭풍의 언덕을 떠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천한 신분을 벗고 신사가 되어 다시 찾아온다. 그는 당시 불치병이었던 열병(뇌수막염)을 앓아 죽어가는 옛 연인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너는 나를 사랑했잖아. 그런데 너는 무슨 자격으로 나를 떠났니? … 곤궁도, 영락도, 죽음도, 하느님이든 사탄이든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는데, 네가 네 손으로 우리를 갈라놓은 거야. 내가 네 가슴을 찢은 게 아니야, 네가 네 가슴을 찢은 거야, 네 가슴을 찢으면서 내 가슴까지 찢어놓은 거야. 내 목숨이 질긴 만큼 내 괴로움도 질기단 말야. 내가 살고 싶겠냐? 내가 어떻게 살겠냐? … 네 영혼이 무덤에 있는데 너라면 살 수 있겠어?

 
찬찬히 읽으면 히스클리프의 격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모든 어려움을 넘어 죽을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현세의 내게도 울림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많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그들 만큼 잊을 수 없는 생의 의미로 남길 수 있을지.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作 – 시간과 영원히 흐르는 강물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가 192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옛날 책이지만 문체가 아름답고, 생의 의미를 찾아 헤메는 주인공의 노력이 비장해서 재미있다.
 
​소설 <데미안>이 주인공 꼬마 싱클레어가 어른이 되어 군대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 과정을 다룬다면, <싯다르타>는 주인공 싯다르타가 부잣집 아들에서, 거지 중(사문)이 되었다가, 속세 생활에 빠졌다가, 마침내 강가에서 해탈을 이룰 때까지를 다룬다. 두 소설의 배경은 동서양으로 매우 다르지만, 구도의 길을 보여준 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소설의 중요한 주제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와 “완성자는 미소짓는다” 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실제로 쓸 수 있는 건 영원한 현재 뿐이다. 작품에서는 이걸 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흘렀고, 죽은 후에도 흐를 강물에 발을 담그면서 시간의 초월성을 깨닫는 걸로 묘사한다.
 
불교 사상을 독실한 기독교 선교사 집안의 아들인 헤세가 얘기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책이 나왔던 1920년대라면,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지도 않았고, 요가 명상 같은 동양사상 붐이 있지도 않았을 텐데.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 박사(1814년-1893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듯 하다.
 
아래에 책의 내용을 설명한 유튜브 링크를 올려 두었다.
 

헤르만 헤세 모든 시작은 신비롭다 – 알로이스 프린츠 作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는 주인공 꼬마 에밀 싱클레어의 입을 빌어서 세상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선함과 밝음으로 대표되는 부모님, 학교 선생님, 수도원 목사님의 세계. 다른 하나는 미지의 영역이어서 두렵지만, 흥분과 쾌락을 동반한 악마의 세계였다.

먹고 싶은 거 먹고(술 포함), 남녀의 교접에 죄책감이 없고, 공부할 의무도 없는 세계였다.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무서운 동네 형, 하녀 하인들, 도시의 극빈층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두 세계’ 구분은 간명하고 재미있었다. 이는 헤세가 살면서 겪은 내면 투쟁의 두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마음 속 싸움이 없다면 괴로움도 없고, 생각도 더 단순해져서 좋을 테지만… 헤세는 반대로 그 투쟁 속에서 평생 살았고, 한 때는 망가져서 정신병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예지(叡智)를 가지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 모든 시작은 신비롭다> 책은 헤세의 전 생애를 그의 작품과 더불어 보여준다. 양극의 투쟁이 없던 순수한 아기 시절부터 책의 서술은 시작한다. 아래는 어머니 ‘마리 헤세’의 회고 장면이다.

…태어난 지 18일이 지난 뒤 마리 헤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1877년 7월 2일 월요일. 힘겨운 낮이 지나갔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저녁 6시 반에 간절히 바라던 아기, 우리 헤르만을 주셨다. 정말 크고 무겁고 예쁜 아기를 주셨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보챘고, 맑고 푸른 시선을 밝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빛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건강하고 힘센, 진짜 멋진 사내아이였다. – p29

푸른 눈의 크고 예쁜 아기를 낳은 여인의 기쁨이 잘 그려져 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에 충만해 있긴 했지만, 경건하고 기독교적인 집안의 전통에 따라 아이를 훈육하려 했다. 즉 따뜻한 사랑만 줄 수는 없었다. 여기서 헤세의 첫 번째 투쟁 대상이 정해져 버린다. 그는 기독교 사상이 뭔가 좋은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마음으로 살갑게 느낄 수는 없었다.

경건주의는 세속화 경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고 “살아 숨쉬는 신앙”을 지키려고 했다. 이러한 생명력을 결정하는 것은 교리나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감동이었다. 개인적으로 신앙을 체험하는 사람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체험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정해져 있는 경건주의적인 세계상에 주관적으로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현세적인 세계와 신적인 피안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이 이 세계상을 지배했다. 피안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적인 삶은 방황과 유혹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여자의 속성을 띠는 현세”의 유혹들에 맞서야 했다. 그러한 사람은 보다 나은 내세를 기대하는 종교적인 기쁨을 간직한 채, 불평 없이 일상의 수고와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 34p

헤세는 세상의 지배적인 이념인 ‘기독교 신앙’에 감동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반면 “여자의 속성을 띠는 현세”에는 많은 감동을 받고 만다. 이 감동은 그를 주류 사회의 안전한 입신 경로에서 그를 이탈 시킨다.

지금으로 치면 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외국어 고등학교라고 할 수 있는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Maulbronn Monastery School)에 입학했는데, 학생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건한 우등생 집단에 들어간 것이다. 헤세는 학교의 엄격한 사상 교육에 괴로워하다가 나중에는 무단 도주하고 만다. 이틀간 수도원 근처 마을의 들판을 떠돌고 나서 다시 잡혀 들어온다. 학교에서 조기 방학을 시켜주어서 집으로 돌아왔고, 본격적인 정신병 유사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주의 방학 뒤에 헤르만은 다시 마울브론으로 보내졌다. 그의 화상은 완쾌되었다. 하지만 극심한 두통이 다시 그를 괴롭했다. 이제 그는 편지 속에서 부모님을 ‘당신들’ 이라고 불렀다. 예전 친구들과의 사귐은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 친구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며,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했다. 헤르만이 옆 침대를 쓰는 친구 오토 하르트만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자 그들은 헤르만이 정말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 일로 친구의 아버지 하르트만 교수가 헤세 가족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정신과 의사’ 에게 헤르만을 진찰시켜보라고 충고했다. – 74p

기숙사 옆 침대 학생에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부모님을 ‘당신들’ 이라고 부르고, 정신과 진찰을 권유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헤르만 헤세 타락과 방황의 시초에 불과했다. 몇 차례의 정신병원 감금 생활과, 첫사랑에게 차임, 권총 자살 시도가 쭉 이어진다. 다음 글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作 – 착하게 살다가 망하기

 
우연으로 운명이 우습게 돌변하기도 하지만, 세상 일들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오래도록 쌓였던 원인들이 점점 뭉쳐지고, 우연한 사건은 단지 커진 덩이를 살짝 밀어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잣집 아이를 보고서, 훗날 이 아이가 자살 시도를 5번이나하고(3번의 동반자살 시도 포함), 마약중독자가 되고, 공산주의 조직원도 되보고, 정신병원에 격리도 될 거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간 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일생에는 그런 일들이 펼쳐졌고, 이 비극은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요조’를 통해 거의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다.
 

좌측에서 두 번째 웃고 있는 아이가 오사무 (출처 M Train.Japanese. Young boy Osamu)

 
이 작품의 매력은 타락하고 더 타락하는 주인공의 몰락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우습게 펼쳐진다는 데 있다. 주인공 소년 오오바 요조(大庭葉蔵)는 소설 속 회고록의 평가대로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려, 다른 사람 눈에 거슬리거나 주목 받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따라서 주변인의 기색과 기분을 언제나 살펴야 했으므로 인간 관계는 피곤하고 피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다만 요조 못지 않게 순수하면서 이미 망해서 부담이 안 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가까운 사이가 되곤 했다. 아래는 고등학생 요조가 술집에서 절망적 처지에 있는 기생 쓰네코을 만났을 때의 일화이다.

함께 자면서 그 사람은 나보다 두 살 연상이라는 것, 고향은 히로시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여자는 “나한테는 남편이 있어. 히로시마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었어. 작년 봄 함께 가출해서 도쿄로 도망쳐 왔지만, 남편은 도쿄에서 제대로 일을 잡기도 전에 사기죄로 잡혀서 형무소에 들어갔어. 나는 매일 이런 것 저런 것 차입하러 형무소에 다니고 있지만 내일부터는 그만둘래.”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된 셈인지 여자의 신세타령 같은 것에는 전혀 흥미를 못 느끼는 성격인데, 여자들이 얘기를 잘 못하는 것인지 얘기의 중점을 잘못 잡는 것인지, 어쨌든 저는 늘 마이동풍이었던 것입니다.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탄보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 라고 하지만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지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 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무엇보다도 그 창녀들은 명랑했습니다)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낸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이런 엄청난 말을 아무 주저 없이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이 수기 전체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요조는 아주 드물게 자신과 비슷한, 궁상맞아 보이는 이 여자에게 깊이 빠졌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진게 아니어서 동침 후 그녀를 다시 찾지 못한다. 학생이라 돈이 없다는 핑계를 남기고는.
 
하지만 또 어느 날 친구와 같이 술 먹어서 용감해진 주인공은 다시 그녀가 있는 기생집을 찾는다.

“돈 떨어지는 날이 인연 끊어지는 날이라고 하셔서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담이었나 봐. 정말로 와주지 않았어. 참 복잡한 인연의 끝이네. 내가 돈을 벌어서 대주어도 안 될까?
 
“안 돼.”
 
그러고 나서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 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게이샤 여자와의 동반 투신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실제로 했던 두 번째 자살 시도를 그린 것이다. 그가 21세의 나이 때, 긴자의 술집여자이자 유부녀(18세 어린나이의 유부녀였다)인 타나베 시메코란 여자와 같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신기하지만, 여자는 죽고 남자만 살아서 바다에서 나왔다.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이 허리띠는 가게 친구한테 빌린 거니까 하면서 허리띠를 풀어서는 개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고, 저도 망토를 벗어서 같은 곳에 놓아두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기도 했고 또 아버지 이름도 얼마간은 소위 가치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문에서도 꽤 크게 다루었나 봅니다.
 
저는 해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고향에서 친척 중 한 사람이 와서 이런저런 뒤처리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온 집안 식구가 격노하고 있으니 이젠 생가로부터 의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저한테 말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보다도 죽은 쓰네코가 그리워서 훌쩍훌쩍 울고만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때까지 만났던 숱한 사람들 중에 그 궁상맞은 쓰네코만을 좋아했던 것이니까요.

이런 막장스런 자살극도 주인공 요조의 인생 굴곡 전체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순수했던 한 인간이 망가져가는지가 작품을 통해 쭉 나오는데, 다음 글에서 이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