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어머니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른 감정체계를 가지고 있던 주인공 뫼르소는 아기 때부터 자기를 키워줬던, 그리고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에게 별 감흥이 없다. 이 사실은 그가 나중에 살인사건에서 사형을 언도 받는데 큰 공헌을 한다.
심리학적으로 Anomie(동정심 공감능력 없음)로 볼 수 있는 뫼르소의 성격이 왜 시대를 흔든 대작의 주인공 성격이 되어야 했을까? 그건 그를 단순한 사이코패스로 볼 수 없게 하는 사회적 성격 형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쓸쓸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존재양식이 뫼르소 같은 사람을 양산하고 있으니까.
죽기 전날 사형수 감방 안에서 뫼르소는 간만에 어머니를 떠올린다. 기력도 없이 양로원에 갇힌 처지면서 새 약혼자를 만들려고 했던 어머니. 뫼르소 자신이 가졌던 삶에 대한 반항과 자유, 그로인해 더 많이 느끼며 살 수 있었던 열정, 그것이 어머니의 열정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다가올 단두대 처형에도 열정과 사랑으로 동화되어 버리는 경지를 보여준다.
정말 이상하면서 슬프며 장엄한 결말이다.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1818년 영국의 북부 변방인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났고, 1848년 30세의 나이로 결핵에 걸려 죽었다. 그녀의 다른 3명의 자매와 1명의 남동생은 모두 어려서 죽거나, 30대 초반의 나이를 못 벗어나고 병으로 죽었다. 생전에 작가로 명성을 얻었던 언니 샬럿 브론테 만이 예외로 그나마 38세까지 생존했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들은 젊은 나이에 열병이 걸리고 금새 죽어나간다. 캐서린 언쇼, 히스클리프, 힌들리 언쇼, 에드거 린턴 모두 그렇게 죽었다. 죽음은 에밀리 브론테의 곁에 삶과 이질적이지 않은 영역으로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도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유령처럼 맴돌며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는 작품에서 유령이 된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에밀리 브론테는 평생 독신이었고, 시골 요크셔를 떠나 오래 산 적이 없었다. 세속적이고 시류에 휩쓸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겪어 볼 기회가 없었고, 찾지도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폭풍이 몰아치는 고향 벌판의 장엄한 풍경은 사랑의 감정에 어떤 불가사이한 신비함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즉 사랑은 그냥 인간 안에 갇힌 감정이 아니라, 비나 바람처럼 형태를 바꾸며 세차게 세계를 떠도는 것으로. 그래서인지 작품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절대적인 상호 공명과 처절함으로 일관되어 있다.
캐서린은 넬리에게 말한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을 거야.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가 올라갈 수 없는 고상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게 되자 히스클리프는 폭풍의 언덕을 떠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천한 신분을 벗고 신사가 되어 다시 찾아온다. 그는 당시 불치병이었던 열병(뇌수막염)을 앓아 죽어가는 옛 연인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너는 나를 사랑했잖아. 그런데 너는 무슨 자격으로 나를 떠났니? … 곤궁도, 영락도, 죽음도, 하느님이든 사탄이든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는데, 네가 네 손으로 우리를 갈라놓은 거야. 내가 네 가슴을 찢은 게 아니야, 네가 네 가슴을 찢은 거야, 네 가슴을 찢으면서 내 가슴까지 찢어놓은 거야. 내 목숨이 질긴 만큼 내 괴로움도 질기단 말야. 내가 살고 싶겠냐? 내가 어떻게 살겠냐? … 네 영혼이 무덤에 있는데 너라면 살 수 있겠어?
찬찬히 읽으면 히스클리프의 격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모든 어려움을 넘어 죽을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현세의 내게도 울림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많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그들 만큼 잊을 수 없는 생의 의미로 남길 수 있을지.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가 192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옛날 책이지만 문체가 아름답고, 생의 의미를 찾아 헤메는 주인공의 노력이 비장해서 재미있다.
소설 <데미안>이 주인공 꼬마 싱클레어가 어른이 되어 군대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 과정을 다룬다면, <싯다르타>는 주인공 싯다르타가 부잣집 아들에서, 거지 중(사문)이 되었다가, 속세 생활에 빠졌다가, 마침내 강가에서 해탈을 이룰 때까지를 다룬다. 두 소설의 배경은 동서양으로 매우 다르지만, 구도의 길을 보여준 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소설의 중요한 주제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와 “완성자는 미소짓는다” 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실제로 쓸 수 있는 건 영원한 현재 뿐이다. 작품에서는 이걸 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흘렀고, 죽은 후에도 흐를 강물에 발을 담그면서 시간의 초월성을 깨닫는 걸로 묘사한다.
불교 사상을 독실한 기독교 선교사 집안의 아들인 헤세가 얘기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책이 나왔던 1920년대라면,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지도 않았고, 요가 명상 같은 동양사상 붐이 있지도 않았을 텐데.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 박사(1814년-1893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듯 하다.
아래에 책의 내용을 설명한 유튜브 링크를 올려 두었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는 주인공 꼬마 에밀 싱클레어의 입을 빌어서 세상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선함과 밝음으로 대표되는 부모님, 학교 선생님, 수도원 목사님의 세계. 다른 하나는 미지의 영역이어서 두렵지만, 흥분과 쾌락을 동반한 악마의 세계였다.
먹고 싶은 거 먹고(술 포함), 남녀의 교접에 죄책감이 없고, 공부할 의무도 없는 세계였다.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무서운 동네 형, 하녀 하인들, 도시의 극빈층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두 세계’ 구분은 간명하고 재미있었다. 이는 헤세가 살면서 겪은 내면 투쟁의 두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마음 속 싸움이 없다면 괴로움도 없고, 생각도 더 단순해져서 좋을 테지만… 헤세는 반대로 그 투쟁 속에서 평생 살았고, 한 때는 망가져서 정신병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예지(叡智)를 가지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 모든 시작은 신비롭다> 책은 헤세의 전 생애를 그의 작품과 더불어 보여준다. 양극의 투쟁이 없던 순수한 아기 시절부터 책의 서술은 시작한다. 아래는 어머니 ‘마리 헤세’의 회고 장면이다.
…태어난 지 18일이 지난 뒤 마리 헤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1877년 7월 2일 월요일. 힘겨운 낮이 지나갔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저녁 6시 반에 간절히 바라던 아기, 우리 헤르만을 주셨다. 정말 크고 무겁고 예쁜 아기를 주셨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보챘고, 맑고 푸른 시선을 밝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빛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건강하고 힘센, 진짜 멋진 사내아이였다. – p29
푸른 눈의 크고 예쁜 아기를 낳은 여인의 기쁨이 잘 그려져 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에 충만해 있긴 했지만, 경건하고 기독교적인 집안의 전통에 따라 아이를 훈육하려 했다. 즉 따뜻한 사랑만 줄 수는 없었다. 여기서 헤세의 첫 번째 투쟁 대상이 정해져 버린다. 그는 기독교 사상이 뭔가 좋은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마음으로 살갑게 느낄 수는 없었다.
경건주의는 세속화 경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고 “살아 숨쉬는 신앙”을 지키려고 했다. 이러한 생명력을 결정하는 것은 교리나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감동이었다. 개인적으로 신앙을 체험하는 사람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체험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정해져 있는 경건주의적인 세계상에 주관적으로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현세적인 세계와 신적인 피안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이 이 세계상을 지배했다. 피안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적인 삶은 방황과 유혹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여자의 속성을 띠는 현세”의 유혹들에 맞서야 했다. 그러한 사람은 보다 나은 내세를 기대하는 종교적인 기쁨을 간직한 채, 불평 없이 일상의 수고와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 34p
헤세는 세상의 지배적인 이념인 ‘기독교 신앙’에 감동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반면 “여자의 속성을 띠는 현세”에는 많은 감동을 받고 만다. 이 감동은 그를 주류 사회의 안전한 입신 경로에서 그를 이탈 시킨다.
지금으로 치면 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외국어 고등학교라고 할 수 있는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Maulbronn Monastery School)에 입학했는데, 학생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건한 우등생 집단에 들어간 것이다. 헤세는 학교의 엄격한 사상 교육에 괴로워하다가 나중에는 무단 도주하고 만다. 이틀간 수도원 근처 마을의 들판을 떠돌고 나서 다시 잡혀 들어온다. 학교에서 조기 방학을 시켜주어서 집으로 돌아왔고, 본격적인 정신병 유사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주의 방학 뒤에 헤르만은 다시 마울브론으로 보내졌다. 그의 화상은 완쾌되었다. 하지만 극심한 두통이 다시 그를 괴롭했다. 이제 그는 편지 속에서 부모님을 ‘당신들’ 이라고 불렀다. 예전 친구들과의 사귐은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 친구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며,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했다. 헤르만이 옆 침대를 쓰는 친구 오토 하르트만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자 그들은 헤르만이 정말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 일로 친구의 아버지 하르트만 교수가 헤세 가족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정신과 의사’ 에게 헤르만을 진찰시켜보라고 충고했다. – 74p
기숙사 옆 침대 학생에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부모님을 ‘당신들’ 이라고 부르고, 정신과 진찰을 권유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헤르만 헤세 타락과 방황의 시초에 불과했다. 몇 차례의 정신병원 감금 생활과, 첫사랑에게 차임, 권총 자살 시도가 쭉 이어진다. 다음 글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우연으로 운명이 우습게 돌변하기도 하지만, 세상 일들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오래도록 쌓였던 원인들이 점점 뭉쳐지고, 우연한 사건은 단지 커진 덩이를 살짝 밀어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잣집 아이를 보고서, 훗날 이 아이가 자살 시도를 5번이나하고(3번의 동반자살 시도 포함), 마약중독자가 되고, 공산주의 조직원도 되보고, 정신병원에 격리도 될 거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간 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일생에는 그런 일들이 펼쳐졌고, 이 비극은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요조’를 통해 거의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다.
좌측에서 두 번째 웃고 있는 아이가 오사무 (출처 M Train.Japanese. Young boy Osamu)
이 작품의 매력은 타락하고 더 타락하는 주인공의 몰락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우습게 펼쳐진다는 데 있다. 주인공 소년 오오바 요조(大庭葉蔵)는 소설 속 회고록의 평가대로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려, 다른 사람 눈에 거슬리거나 주목 받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따라서 주변인의 기색과 기분을 언제나 살펴야 했으므로 인간 관계는 피곤하고 피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다만 요조 못지 않게 순수하면서 이미 망해서 부담이 안 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가까운 사이가 되곤 했다. 아래는 고등학생 요조가 술집에서 절망적 처지에 있는 기생 쓰네코을 만났을 때의 일화이다.
함께 자면서 그 사람은 나보다 두 살 연상이라는 것, 고향은 히로시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여자는 “나한테는 남편이 있어. 히로시마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었어. 작년 봄 함께 가출해서 도쿄로 도망쳐 왔지만, 남편은 도쿄에서 제대로 일을 잡기도 전에 사기죄로 잡혀서 형무소에 들어갔어. 나는 매일 이런 것 저런 것 차입하러 형무소에 다니고 있지만 내일부터는 그만둘래.”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된 셈인지 여자의 신세타령 같은 것에는 전혀 흥미를 못 느끼는 성격인데, 여자들이 얘기를 잘 못하는 것인지 얘기의 중점을 잘못 잡는 것인지, 어쨌든 저는 늘 마이동풍이었던 것입니다.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탄보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 라고 하지만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지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 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무엇보다도 그 창녀들은 명랑했습니다)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낸 하룻밤은 저한테는 행복하고(이런 엄청난 말을 아무 주저 없이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이 수기 전체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요조는 아주 드물게 자신과 비슷한, 궁상맞아 보이는 이 여자에게 깊이 빠졌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진게 아니어서 동침 후 그녀를 다시 찾지 못한다. 학생이라 돈이 없다는 핑계를 남기고는.
하지만 또 어느 날 친구와 같이 술 먹어서 용감해진 주인공은 다시 그녀가 있는 기생집을 찾는다.
“돈 떨어지는 날이 인연 끊어지는 날이라고 하셔서 농담인 줄 알았더니 진담이었나 봐. 정말로 와주지 않았어. 참 복잡한 인연의 끝이네. 내가 돈을 벌어서 대주어도 안 될까?
“안 돼.”
그러고 나서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 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게이샤 여자와의 동반 투신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실제로 했던 두 번째 자살 시도를 그린 것이다. 그가 21세의 나이 때, 긴자의 술집여자이자 유부녀(18세 어린나이의 유부녀였다)인 타나베 시메코란 여자와 같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신기하지만, 여자는 죽고 남자만 살아서 바다에서 나왔다.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이 허리띠는 가게 친구한테 빌린 거니까 하면서 허리띠를 풀어서는 개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고, 저도 망토를 벗어서 같은 곳에 놓아두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기도 했고 또 아버지 이름도 얼마간은 소위 가치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문에서도 꽤 크게 다루었나 봅니다.
저는 해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고향에서 친척 중 한 사람이 와서 이런저런 뒤처리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온 집안 식구가 격노하고 있으니 이젠 생가로부터 의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저한테 말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보다도 죽은 쓰네코가 그리워서 훌쩍훌쩍 울고만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때까지 만났던 숱한 사람들 중에 그 궁상맞은 쓰네코만을 좋아했던 것이니까요.
이런 막장스런 자살극도 주인공 요조의 인생 굴곡 전체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순수했던 한 인간이 망가져가는지가 작품을 통해 쭉 나오는데, 다음 글에서 이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도덕이나 규범도 힘의 균형 하에 작동한다. 힘 차이가 너무 나면 도덕은 무시되고, 힘센 쪽이 규범을 넘어 상대를 폭행한다. 재벌이 술에 취해 변호사를 때리고, 마카다미아 때문에 움직이는 비행기를 세우고 사무장을 내리게해도 처벌 받지 않는다. 만약 재벌 회사가 망해서 힘의 균형이 맞춰지면 그때는 제대로된 벌이 부과된다. 만약 힘의 차이가 더 현격한 사람과 동물의 관계라면 어떨까? 이 경우 도덕이라는 것은 완전히 한 쪽이 정한다. 철창 속에 사육하다가 필요할 때 꺼내 죽이고, 피와 살을 먹기 편하게 포장한다. 맛있는 제품이라고 방송국 광고도 한다. 고기를 먹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되지만, 분명 잔인하고 이기적이면서, 천연덕스럽게 처리되고 있다.
사회에서 인간 관계는 정도가 다를 뿐 명령과 복종, 폭력과 피폭력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쪽은 이용하고, 다른 한 쪽은 이용당한다. 즉 인간 동물 관계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이런 현상들에 민감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폭력이 수반된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가기로 한다. 단순히 건강을 위한 게 아니고 ‘꿈’에 의해 살아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육식하는 동물이 아니라 평화로운 식물이 되었고, 그래서 깨어있는 일상에서도 속옷을 안 입고, 고기도 안 먹고, 광합성 하도록 햇볕을 쬐며 살아간다. 하루는 영혜 부부가 남편 회사의 사장이 주최한 부부동반 모임에 가게 되는데 아래와 같은 이상한 반응을 얻고 만다(당연하게도).
아까부터 아내의 젖가슴을 흘끔거리고 있던 전무 부인이 말했다. 마침내 그녀의 화살은 아내에게 직접 날아왔다.
“채식을 하는 이유가 어떤 건가요? 건강 때문에…… 아니면 종교적인 거예요?”
“아니요.”
아내는 이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태연하고 조용하게 입을 떼었다. 불현듯 소름이 끼쳤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꿈을 꿨어요.”
나는 재빨리 아내의 말끝을 덮었다.
“집사람은 오랫동안 위장병을 앓았어요. 그래서 숙면을 취하지 못했죠. 한의사의 충고대로 육식을 끊은 뒤 많이 좋아졌습니다.”
…정작 아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내가 나와의 잠자리를 의도적으로 계속 피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 그녀는 숫제 청바지 차림으로 잤다 – 우리는 아직 겉보기에 정상적인 부부였다. 하루가 다르게 그녀가 여위어가고 있다는 것, 새벽에 내가 알람시계를 더듬어 끄고 몸을 일으켜보면 어둠 속에서 눈을 치켜뜬 그녀가 꼿꼿한 자세로 누워 있다는 것이 예전과 다를 뿐이었다. 회사에서 주선한 외식 후 사람들은 한동안 나를 미심쩍게 대했으나, 내가 성사시킨 프로젝트가 괄목할 만한 수입을 거둬내자 모든 것이 묻혀지는 듯했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한 이래로 햇빛이나 나무나 물과 비슷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꿈’을 통해 그런 존재로 접어드는 건데, 비정한 세상에서 상처받은 순수한 영혼이 꿈으로 도피했다고 볼 수 있다. 영혜는 자기 환상을 남편 회사 높은 사람들에게도 천연덕스럽게 얘기한다. 꿈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려서 그렇다. 그녀의 피를 흘리지 않고 사는 꿈 은 <채식주의자> 첫 번째 단편 말미에서 병원 분수대(물) 옆에서 상의를 모두 벗고(햇빛 쬐려고) 앉아 있는걸로 표현된다. 정신병 아니면 노출증 환자의 행동이라고 보였지만, 스스로에게는 광합성을 하고 사는 생명체 ‘나무’가 된 것이었다.
영혜와 다르게 현실적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남편 등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경악해서 그녀를 정상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군인이었고, 어머니도 가족을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아래 어머니의 대사를 읽어보자.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영혜는 ‘약육’을 거부하고 있으니 세계에 남아있을 수가 없다. 덕분에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망가진 가전제품이 버려지는 것처럼”(작품 속 표현) 이혼 당한다. 그리고 언니인 인혜(지우 엄마)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다. 인혜의 남편, 즉 형부는 채식주의자 영혜 주위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색다른 심미안을 가졌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통 변태성향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몽상적 예술 작가로서,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하는 아내 인혜 덕에 먹고 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그는 영혜의 남편과 정확히 대비되는 성격으로 나타난다. 아래는 이 남자가 이전 동서를 회상하며 한 생각이다.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상기 회상에서도 느껴지듯, 영혜 형부는 일상의 틀을 벗어난, 속되지 않은 예술 작품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나이들어 배 나온 아저씨가 되도록 아무에게도 작품을 인정받지 못해 우울해 했다. 어느날 그런 울적을 아득히 날려버릴 흥분을 찾게 되는데, 그 대상이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 이었다. 우연히 자기 아내에게 처제가 아직도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는 걸 들은 순간부터 그는 광폭한 열망을 뿜게 된다. 자해를 하고 정신병원 치료를 받고, 이혼 당하고 나서 집에 얹혀 살게된 처제를 주인공으로 어떤 표현 예술 비디오를 찍기로 했던 것이다. 채식주의자 영혜는 이 뜻밖의 제안에 쉽게 응한다.
“옷을 벗고, 몸에 물감칠을 할 거야.”
여전히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건너다보며 그녀는 입을 떼었다.
“……그리구요?”
“그러고 있으면 돼. 촬영이 끝날 때까지.”
“물감칠을…… 몸에 한다구요?”
“꽃을 그릴 거야.”
그녀의 눈이 일순 흔들린 것 같았다. 잘못 본 것인지도 몰랐다.
영혜 형부의 꿈은 리비도와 결합된 예술 창조 욕구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영혜 혼자의 나체 예술 비디오를 찍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도 꽃무늬 페인팅을 하고 처제와 함께 성행위를 하는 동영상을 촬영하게 된다. 당연히 아내에게는 사실을 숨기고 예술 작업하느라 외박한다고 둘러대었다. 퇴폐에 패륜이 결합된 행위 예술인 셈이다. 웃기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중요한 테마를 품고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리비도 즉 성욕은 모든 인간 에너지의 근본이다. 인간이 성욕만을 뿜고 행동한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고, 이 본능적 에너지를 고차원적 창조욕이나 이타행위로 전용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리비도도 에너지이므로 에너지보존법칙(열역학 제1법칙)을 따른다.
영혜의 형부는 탈모와 복부 비만을 멋쩍어하는 중년 아저씨이다. 아내 인혜와 벌써 두 달 넘게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고 있고, 따로 성매매를 하는 것도 아니니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야만 했다. 그가 그냥 처제와 불륜관계를 가졌다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인간 본연 에너지를 창조로 푸는) 그는 몽고반점이라는 미학적 상징에 창조 에너지를 쏟고 싶어졌다.
작품 속에서 몽고반점은 식물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몸에 있지만 태고적 광합성의 흔적을 연상시키는 옅은 초록색의 반점이었다. 그는 성인이고 정신병을 앓고 있는 처제 몸에 바디페인팅을 하면서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붓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듯 미세히 떨리는 그녀의 육체를 느끼며 그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 마침내 오른쪽 허벅지를 지나 가느다란 발목까지 이어지는 긴 줄기와 잎사귀를 완성했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형부는 원초적 성욕도 아닌, 그렇다고 세속적인 욕구도 아닌 근원적인 에너지에 다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나긴 세월 제대로 된 예술을 만들지 못한 좌절, 깊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내와의 매일의 생활 그리고 가정에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죄책감 등 깊은 우울을 녹여 버리는 행위였다. 그의 예술 작업 대상 영혜는 형부의 의도에 잘 따라온다. 그녀는 자꾸만 자기가 나무가 되는 ‘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꽃이 몸에 그려져 있으면 그 세계에서 벗어나 본연의 ‘동물’로 돌아온 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부와의 실제 남녀 교합을 동반한 예술 작업에 거리낌 없이 몰입한다. 이 둘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인혜에게 모든 작업 과정과 결말을 들키게 되는데 아래와 같은 상황이다. 교접을 마친 영혜는 다시 나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비워진 존재가 되었다.
“구급대를 불러놨어요.”
“뭐라구?”
아내는 희끗하게 질린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그녀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수초의 시간이 걸렸다.
“….나한테 정신병원에 들어가라는 거야?”
그때 매트리스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도, 아내도 숨을 멈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가 시트를 걷어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보았다.
“나쁜 새끼.”
아내는 낮은 소리로,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 저런 애를.”
아내의 젖은 입술이 파들거렸다.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가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