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님의 작품 <숨은 꽃> 은 작가님의 분신으로 보이는 여주인공이 먼 고즈넉한 시골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작가였고 글을 써야 하지만 쓸 수 없는 영감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주인공은 ‘귀신사’ 라고 하는 시골의 사찰을 찾아가는 데 도중에 김종구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김종구는 배운 것도 없고 말도 험한 시골 남자로서 ‘황녀’ 라는 화류계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의 서방이다.
문자와 문학에 둘러싸여 심각한 고민만 하던 여 작가는 김종구로부터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건 김종구의 말과 행동이 원시적이지만 대단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이성을 만나면 거부 못할 매력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와 비슷한 현상이었던 것 같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정신 에너지 즉 리비도를 독자로 부터 끌어낸다. 권태에 빠져 글을 쓰지 못하던 여 작가는 작품이 내놓아야할 할 야성 에너지 – 숨은 꽃 – 을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그의 연인 황녀로부터 느꼈던 것이다. 그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찬란한 생기의 물결 같은 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에 나오는 알렉시스 조르바 역시 소설의 신경쇠약형 주인공에게 비슷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조르바는 나이 예순이 넘은 노인이지만 감각적인 힘이 충만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집시 같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아래는 그 출발에 대해 주인공과 얘기하는 모습이다. 작가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서 읽을 때마다 감탄스럽다.
“어떻게 해서 산투리를 다 배우게 되었지요?”
“스무 살 때였소. 내가 그때 올림포스 산기슭에 있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 산투리 소리를 들었지요. 혼을 쭉 빼놓는 것 같습디다. 사흘 동안 밥을 못 먹었을 정도였으니까. “어디가 아파서 그러느냐?” 우리 아버지가 묻습디다. 아버지 영혼이 화평하시기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으냐? 네가 집시냐, 거지 깡깽이가 되겠다는 것이냐?” “저는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결혼하려고 꼬불쳐 둔 돈이 조금 있었지요. 유치한 생각이었소만 그 당시엔 대가리도 덜 여물었고 혈기만 왕성했지요. 병신같이 결혼 같은 걸 하려고 마음 먹었다니! 아무튼 있는 걸 몽땅 털고 몇 푼 더 보태 산투리를 하나 샀지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바로 이놈입니다. 나는 산투리를 들고 살로니카로 튀어 터키인 레트셉 에펜디에게 찾아갔지요. 그는 아무에게나 산투리를 가르쳐 주었지요. 그 앞에 일단 넙죽 엎드리고 봤어요. “왜 그러느냐, 꼬마 이교도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오냐, 그런데 왜 내 발밑에 엎드렸느냐?” “월사금으로 낼 돈이 없습니다.” “산투리에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네.” “그럼 여기 있어도 좋다. 젊은 친구야. 나는 월사금을 받지 않는단다.” 나는 1년을 거기 있으면서 공부했지요. 하느님이 그 영감의 무덤을 돌보아주시기를…… 지금쯤 아마 죽었을 겁니다. 하느님이, 개도 천당에다 들여놓으신다면, 레트셉 에펜디에게도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이외다. 산투리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리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리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조르바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지 깡깽이’ 가 되지 말라고 말렸지만 이미 악기와 소리에 미쳐있던 조르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하는 ‘창피’ 는 사회의 통념이어서 족쇄가 되지만, 사람의 혼을 울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음악을 만들고 빠져서 무아(無我)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사상과 편견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느낀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사람은 찬란한 힘을 가지는데, 이 힘이 <숨은 꽃>의 여작가도,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도 감동시켰던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단편소설 중 <시골의사>와 <판결>을 특히 맘에 들어 했다고 한다. 두 작품을 읽어보니 동감이 갔다. 카프카가 아니면 누구도 아닐 황량하고 아름다운 문학이었다. 아래는 단편 <시골의사>의 잊기 어려운 결미 부분이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집에 돌아가지는 않겠다. 나의 번창하는 의사생활은 망했다. 후임자가 내 자리를 넘본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 그가 나를 대신하지는 못할테니. 내 집 안에서는 구역질나는 마부가 날뛰고, 로자는 그의 제물이다.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벌거벗은 채, 이 불운을 극한 시대의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지상(地上)의 마차에다 지상의 것이 아닌 말들로, 늙은 나는 나를 이리저리 내몰고 있구나. 내 털외투가 마차 뒤에 걸려 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고 변덕스러운 환자 주위의 불한당들 중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속았구나! 속았어!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던 것 – 그것은 결코 보상할 수가 없구나.
두서없는 시골의사의 말은 시적이지만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가 살아온 인생에서 피어난 특이한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흔히 고독, 소외, 불안, 항거불능 같은 단어로 대표된다. 카프카의 여인 중 한 명이었던 밀레나 폴락이 남긴 추도사가 있는데, 남자를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 쓴 것이니 만큼 그 심리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보여준다. 한 번 읽어보자.
카프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하지만 세상에 낙담한 채 자신의 길만을 외롭게 걸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무방비 상태의 인간을 전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악마 로 가득 찬 세계를 보았다. 카프카는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예민했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가 그렇듯 투쟁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 카프카는 타인을 알 수 있는 위대한 감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별나고도 심오한 방법으로 세계를 파악했던 카프카는 그 자체로도 유별나고도 심오한 하나의 세계였다. … 이 책들은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인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때문에 카프카는 이 세계를 감당할 수 없으며,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면 카프카에겐 죽음만이 남는 것이다.
밀레나가 말한대로 카프카는 예민하고 고결한 존재였다. 그는 유별난 방법으로 세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보았는데, 그건 부조리로 가득차 있는 꿈과 같은 세계였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는 말은 카프카는 현실의 부조리(아이러니)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존주의는 보통 “정해진게 없고 모든게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문학과 실존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다.
만약 카프카가 가졌던 세계관와 거리가 먼, 소속감과 정동이 뚜렷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소설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본들 미친놈 일기장 읽는 것과 비슷할 뿐일 것 같다. 카프카의 책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그들 역시 고독하고 정신적 투쟁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척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모든 배경을 취합해 <시골의사>의 마지막 단락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골의사는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기 때문에 의사생활이 망해버린다. 이는 인생에서 생의 방향을 정확히 인도하는 경보는 없다는 걸 의미한다. 잘못된 신호로 그는 연인 로자를 구역질나는 마부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림). 벌거벗었다는 건 마음을 지켜주는 방어막(신앙이나 은총)이 없다는 걸 뜻하고, 말들은 원초적 본능을 상징한다(프로이트의 분석에도 나와있듯이). 하지만 지상의 것이 아닌 말이기 때문에(본능을 떠난 천상의 정신에도 매어 있으므로) 그는 혼란스럽다. 구원을 주는 털외투는 손에 닿지 않고 불한당 들은 의사(치유자)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보상받을 수 없다. 정해진 게 없는 인생에서 한 번 지나간 길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 난장이가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후 자식들 영수, 영호, 영희는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은강방직에 취직한다. 은강 그룹 회사의 일은 고되었지만 임금은 적었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 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83,480원이었지만, 삼 남매의 수입 총액은 80,231원이었다. 즉 세 명이 죽어라 일해도 가족이 몸을 유지할 정도의 돈 밖에 못벌었다. 소설의 화자는 그래서 ‘생산 공헌도’ 라는 말을 한다. 공장이 있다면 그걸 돌리는 노동으로 인한 수익이 있을 텐데 그게 얼마인지는 상층 경영자들만 안다.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을 정도만 월급을 주고 나머지 이익은 회장과 자기들이 가져간다. 은강 그룹 말고 다른 회사의 경영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정당한 임금 책정 기준은 없다. 다른 회사보다 나은 임금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맞춰서 낮은 임금을 준다면? 노동자들은 어느 회사에 가도 덫에 걸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영수는 은강 그룹 회장이 사회 복지를 위해 20억원을 희사한 다는 신문기사를 본다. 아래는 이에 대한 지부장과 영수의 대화이다.
“이건 제가 신문 기사를 오려 두었던 것입니다.”
“나도 그 기사를 봤어.”
“회장님이 사회 복지를 위해 해마다 20억원을 내놓으시겠다는 기사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거액을 희사하시겠다는 거야. 이미 복지 재단의 이사진이 결정됐을걸. 그건 훌륭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노사협의 때 회사측에 상기시켜 주실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 돈은 조합원들의 것입니다.”
“어째서?”
“아무도 일한 만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너무 쌉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정당한 액수에서 깎여진 돈도 그 20억원에 포함됩니다.”
“좋은 걸 지적해 줬네.”
“정작 받을 권리가 있는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은 돈을 이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건지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장은 회사 노동자들에게는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인색하지만 사회복지기금 기부는 한다. 회사 돈으로 하면서 좋은 평판은 자신이 누린다. 차라리 회장이 자기 집안 만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솔직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조직 안에서 노동자들이 생산 공헌도를 위해 싸워봐도 얻을 게 별로 없었다. 원체 일이 바쁘기 때문에 투쟁할 틈이 없기도 했다. 게다가 공장 안에서는 경영자 뿐 아니라 선참 직원도 아래 사람을 괴롭힌다.
나는 승용차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부품들을 날라다 주었다. 한 대의 승용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품으로 만들어졌다. 선참 공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조립 라인의 조립공들은 나를 또 하나의 보조 기계로 보았다. 공장장에게는 공원 전체가 기계였다.
공장에선 사람도 기계처럼 기능으로 평가되었다. 기능이 떨어지면 폐기 처분(해고)되는 것도 기계와 같았다. 행복과 의미를 위해 일을 하는 건데 일을 위해 의미를 포기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답답한 세상에 지친 난장이의 아들과 딸은 국제 난장이 마을 ‘릴리푸트읍’ 에 대해 생각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며 사는 소박한 삶을 꿈꾸고 있다.
영희의 이야기를 나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희는 독일 하스트로 호수 근처에 있다는 릴리푸트 읍 이야기를 했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슬픈 이야기였다. 돌아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려고 했다. 릴리푸트 읍은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 여러 나라의 난장이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다. 키가 칠십 팔 센티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사나이인 터키인 난장이도 최근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릴리푸트 읍의난장이 인구는 늘어만 간다. 릴리푸트 읍을 제외한 곳은 난장이들이 살기에 모든 것의 규모가 너무 커서 불편하고 또 위험하다.
지금 릴리푸트 읍의 난장이들은 자기들의 특수 의료 문제, 사회 심리적인 문제, 그리고 재정 문제 등을 토의하고 있다. 해결해야 될 몇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우리는 극히 행복하다>고 마리안느 사르 읍장은 말했다.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위 문장을 처음 읽었다. 마음에 울림이 퍼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십 년이 넘게 지났고, 난쏘공 책을 두세 번 더 읽었지만 문장은 변함없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팬지의 꽃말은 “나를 생각해 주세요” 이다. 두 송이의 팬지는 한 쌍의 남여를 나타내고, 어린 소녀가 그걸 폐수에 버렸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행복을 포기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난장이의 딸 영희는 갈 곳 없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망치는 길로 들어선다.
그녀는 집을 나와 입주권을 사들인 부동산 업자를 찾아간다. 이 업자는 전부터 예쁘게 생긴 영희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남자는 영희에게 옷을 여러 벌 사주고는 영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데려 간다. 영화 <강남 1970>에 나올 만한 욕망에 충실한 남자인 것 같다. 영희는 날마다 그와 자면서 몸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 헐값에 팔려버린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떨어져 버린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에 심란한 꿈도 꾼다. 꿈 속에서 오빠들이 공장에 취직되어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난장이 아버지가 달을 왕복하는 모습도 본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린 딸을 걱정하는 모습도 본다.
“너의 증조할머니 동생 한 분이 알몸 시체로 수리조합 봇물에 막혀 있었단다. 왜 그랬는지 아니? 주인 서방과 잠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야. 주인 여자가 너의 증조할머니 동생을 사매질해 숨지게 했단다.”
“엄마, 전 달라요.”
“같아.”
“달라요.”
“같아.”
“달라요!”
영희의 윗 대 어른인 증조할머니 동생은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알몸 시체로 저수지에 버려진다. 떠내려가다 봇물에 걸린 모습으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었다. 노비가 있던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일이 충분히 가능했고, 주인 여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가난은 난장이 아버지 가문에 대를 이어 내려왔고, 이제 영희도 선조 할머니처럼 몸을 내주며 생활을 찾는 형편이다. 그녀는 부동산 투기업자의 금고 안에 있던 입주권과 돈을 훔쳐서 새벽에 몰래 빠져나온다. 하지만 이미 철거가 되어 폐허가 된 집에 돌아왔을 때 난장이 아버지가 높은 굴뚝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갔다. 아버지가 벽돌 공장 굴뚝 위에 서서 손을 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조각마루 끝에 밥상을 올려놓았다. 의사가 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나의 손을 잡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이 느리게 나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울지마, 영희야.”
큰오빠가 말했었다.
“제발 울지마. 누가 듣겠어.”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 오빠는 화도 안 나?”
“그치라니까.”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 버려.”
“그래. 죽여 버릴께.”
“꼭 죽여.”
“그래. 꼭.”
“꼭.”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은 단편 마다 화자가 바뀐다. 난장이의 자식들이 화자가 되기도 하고 주부(신애)나 기업 후계자(경훈)가 화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자가 이렇게 다양한 시점을 취한 이유는, 같은 현상도 시점에 따라 완전히 달리 보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첫 단편 ‘뫼비우스의 띠’ 에서 나온 두 굴뚝 청소부 아이 이야기가 그걸 뒷받침해주고 있다.
계층에 따라 분류하면 한 쪽 끝에는 빈민층이 있다. 판자촌에서 쫓겨나는 난장이와 그 가족들, 곡예단에 속해서 매를 맞는 곱추와 앉은뱅이 등이다. 그보다 조금 나은 계층은 대학생 출신 노동운동가 지섭과 주부 신애가 있다. 반대로 재벌 가문에 속한 경훈과 부유한 집안에 속하지만 무언가 변화를 바라는 윤호와 은희도 있다. 작가는 하지만, 계층의 편을 가른 다음 한 쪽을 맹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더 탐욕스럽게 하는 병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래 ‘우주여행’ 단편의 부분을 읽어보자.
“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벌써 끝났을 거야. 이젠 책임을 져야 돼. 그렇지만 내가 아주 죽는 거로 믿지 마. 달나라에 가서 할 일이 많아. 여기서는 무엇하나 이룰 수가 없어. 지섭이 형이 책에서 읽었던 대로야.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여기서 잃은 것들을 그곳에 가서 찾아야 돼. 자 망설이지 말고 쏴.”
윤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은희가 겨냥한 총끝을 그는 보았다.
“그럼 나를 위해서 한 가지만 도와 줘.” 하고 은희가 말했다.
“우주인을 만나면 내 답안지를 훔쳐가지 말라고 해.” 은희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다. 윤호는 온몸의 힘을 잃었다.
“이제 쏴.” 다시 말했다.
은희는 권총을 든 채 외투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그 안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권총을 책상 위에 놓고 팔을 내리자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다가가 눈물로 범벅이 된 윤호의 얼굴을 가슴과 두 팔로 감싸안았다.
윤호는 어머니가 일찍 죽은 바람에 애정이 결핍된 상태였다. 윤호의 가정교사 지섭은 그에게 난장이네 가족 이야기를 해준다. 윤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알게 될 수록 같이 어울리는 부유층 아이들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깨끗한 마음씨를 가진 은희라는 여자애를 발견하고 좋아하게 된다. 대학 입시시험이 끝나고 자신의 집에서 은희를 만난 윤호는 자살을 하려던 마음을 버린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찾아낸 권총을 은희에게 건내주고 눈물을 흘린다. 은희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던 윤호를 어머니처럼 다가가 안아준다. 여기서 작가가 강조하는 건 ‘사랑’ 이고 그 반대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과 약속과 맹세를 지키지 않음(믿음이 없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섭은 가정교사일을 하지만 공장에도 취업하고 노동자를 교육시키는 일도 맡는다. 공장 노동자인 영수, 영호의 아버지인 난장이와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는데, 집이 헐리게 된 사정을 알고 난장이 집에 찾아온다. 열심히 일해도 더 절망에 빠지는 세상에서 난장이와 지섭은 결국 정신에 분열을 일으킨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처럼 대사가 이그러진다. 번번히 시점이 변하고, 아련한 분위기 가운데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지섭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하긴!”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
“얘들아!” 어머니의 불안한 음성이 높아졌다.
아버지와 지섭은 우리에게 대기권 밖을 날아다니는 사람들로 보였다. 두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달을 왕복했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은 망원 렌즈를 지키는 일야. 달에는 먼지가 없기 때문에 렌즈 소제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지. 그래도 렌즈를 지켜야 할 사람은 필요하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넌 이때까지 뭘 배웠니?”
아버지가 말했다.
“뉴턴이 그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고 삼 세기가 지났어. 너도 그걸 배웠지? 국민학교 때부터 배웠어. 그런데 우주에 관한 기본 법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그런데 누가 아버지를 달에 모시고 가겠대요?”
“지섭이가 미국 휴스턴에 잇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난장이가 애써 지은 판잣집은 철거반이 부수러 오고 이제 달리 갈 곳도 없다. 불쌍한 그의 마음은 결국 꿈의 세계로 도피해 버렸다. 휴스턴 우주센터의 로스씨를 통해 달로 가서 천문대 일을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이다. 달나라는 고통이 없는 이상세계를 뜻하고, 천문 관측일은 별을 쫓는, 다시 말해 꿈을 찾는 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야학으로 공부를 한다. 그는 환상에 빠진 아버지와 달리 좀더 현실적인 사회분석을 하고 공책에 아래와 같은 말들을 써놓는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햄릿을 읽고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양반이 노비의 생산물을 가져가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에게 당연한 일이라 서로에게 불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지금은 없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지 현재 시대에도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일 안하고 먹고 노는 사람 따로 있다는 건 같다. 과거의 착취가 정직했다는 말은 현대의 착취가 형태를 바꾼 덕분에 더 비밀스럽고 위선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영수는 이 같은 부조리를 자각했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결함 덕분에 더 비참한 운명으로 몰락한다. 훗날 그는 교도소에 갇히고, 교수형을 당한다.
대학생 시절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책을 처음 읽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 충격은 짜릿한 게 아니고 음울하고 야릇한 느낌의 충격이었다. 보통의 소설과 다르게 이야기 흐름과 시점이 뒤죽박죽 되어 있고 무대는 70년대 수도권 빈민촌이지만 동화책에 나올 만한 상황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게다가 서술이 건조하고 간결하지만 서정적인 느낌이 난다.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문단이다.
“나는 도도새다.”
지섭이 말했었는데, 윤호는 이렇게 근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형, 도도새는 어떤 새지?”
“십칠 세기말까지 인도양 모리티우스 섬에 살았던 새다. 그 새는 날개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개가 퇴화했다. 나중엔 날을 수가 없게 되어 모조리 잡혀 멸종당했다.”
12편의 단편 소설이 묶어진 이 작품은 각각의 단편이 독립적인 이야기를 진행하면서도 등장인물과 사건이 계속 중첩되면서 나아간다. 첫 번째 단편인 ‘뫼비우스의 띠’ 와 마지막 단편인 ‘에필로그’ 는 수미상관적이며 동시에 액자식 구조이다. 먼저 한 고등학교 교실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있고 그들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한 교사가 나와서 꼽추와 앉은뱅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필로그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꼽추와 앉은뱅이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별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이런 구조는 난장이와 도도새, 머리카락좌 같은 표현과 함께 소설의 환상적이고 슬픈 분위기를 잘 구현한다.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상기는 첫 단편에서 학생들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교사가 한 말이다.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 즉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게 하는데 쓰이곤 한다. 그 같은 상황이 소설 안 판자촌 철거 소동에서 보여진다. 1971년 실제 있었던 경기도의 ‘광주 대단지 사건’ 이 배경이다. 당시 서울은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판자촌이 과포화된 상태였다. 정부는 이걸 정리하기 위해 판자촌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 동조해 가난한 사람들은 집단 대이동을 해서 황무지에 판자집을 새로 만들고 삶을 꾸려나간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토지 개발 붐을 타고 재개발이 추친되고 구청에서는 철거 계고장이 나온다. 계고장의 내용은 지었던 집을 자진 철거하고 떠나야 하며 만약 자진해서 않으면 ‘주택 개량 촉진 임시 조치법’ 에 따라 강제 철거 하고 그 비용도 판자집 주민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개(疏開)되는 사람들에게 아파트 입주권이 배분되긴 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그들은 아파트 살 돈이 없어서 판자촌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판자촌을 불도저로 밀고 정리된 땅에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들어와 돈을 번다. 그들과 공생하는 부패 관료들은 법을 강조한다. 이럴 때 ‘법’ 은 기득권자를 위한 차가운 도구로 쓰인다. 아래는 난장이가 철거에 대해 자식들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시에서 아파트를 지어 놨다니까 얘긴 그걸로 끝난 거다.”
“그건 우릴 위해서 지은 게 아녜요.”
영호가 말했다.
“돈도 많이 있어야 되잖아요?”
영희는 마당가 팬지 꽃 앞에 서 있었다.
“우린 못 떠나. 갈 곳이 없어. 그렇지 큰 오빠?”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영호가 말했다.
“그만둬.”
내가 말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