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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I – Es muss sein

아파트 옥상에서 초등학생이 떨어뜨린 벽돌에 맞아 고양이 집을 만들던 여성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캣맘 사건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초등생은 재미 삼아 벽돌을 던졌고 우연히 아래 있던 한 사람은 그걸 맞고 죽었다. 아이 장난 때문에 막을 내린 55년의 일생은 어떤 결론을 전하는 걸까? 그녀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 노력했고 또한 좋은 딸이 되기 위해서,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도 적당한 고민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3차원 세계의 어느 한 점에 우연히 당도했고 그 지점 바로 위에는 질량과 속도를 띠고 낙하하는 물체가 있었다.

우연은 아무 필연성이나 도덕 관념 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이나 주변인은 그 의미를 물을 수 밖에 없다. 밀란 쿤데라는 우연과 타성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인간의 일생을 탐구하려 했다. 그가 먼저 화두로 던진 것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다.

영원한 재귀, 이 신화는 그것의 부정적 이면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다. 영원히 사라져 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삶이 아무리 잔인했든, 아름답거나 찬란했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잔인함, 아름다움, 찬란함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조금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작품에서는 가벼움을 한 번으로 사라질 삶으로 보고, 무거움을 영원히 반복될 삶(니체의 영원회귀가 구현되는)으로 보고 있다. 한 번으로 사라질 삶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띤다. 캣맘 사건같은 치가 떨리는 우연으로 소중한 인생이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변할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그걸 대변할 사건들도 차례로 펼쳐진다. 그냥 보면 가십으로 지나칠 사랑 이야기를 존재에 대한 의미로 풀어낸 작가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토마스란 남자와 테레사라는 여자가 보여주는 사랑은 절대적 필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걸어가다 위에서 날아오는 벽돌에 맞는 것 같은 우연일 수도 있다. 작품의 묘미는 그걸 곰곰이 생각해 보는 데 있다.

나이가 있지만 매력적인 의사인 토마스가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된 테레사를 만나기까지는 6번의 우연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작은 도시에서 뇌병 케이스 환자가 생긴 것, 두 번째는 그 도시로 파견 나갈 외과 과장이 좌골 신경통에 걸려서 토마스가 대신 나가야 했다는 사실. 세 번째 우연은 토마스가 묶을 가능성이 있던 5개의 호텔 중 테레사가 일하는 레스토랑이 있던 호텔이 선택되었다는 것, 네 번째는 토마스가 프라하로 돌아갈 기차를 타기 전에 조금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 다섯 번째는 그 시간이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는 시간이었다는 것. 마지막 여섯번째 우연은 테레사가 토마스의 식탁 시중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우연의 집합은 토마스와 테레사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 여섯 개 우연 중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두 남녀가 부부가 될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연에 의해 형성된 운명에 꼭 계속 따라야 하는 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먼저 이 질문이 나오게 만든 부부의 사정을 살펴보자.

1968년 소비에트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국의 군대는 체코 프라하를 침공한다. ‘인간 얼굴을 한 공산주의’ 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던 두브체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체코의 전국은 아주 쉽게 점령되고 두브체크가 추진하던 개혁 조치는 모두 무효화 된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대중의 생각을 하나의 모범 틀에 맞추려는 공산주의의 꼴통 정책을 시작한다. 많은 지식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저항으로 대규모 해외 이주의 물결이 생겼다. 토마스도 스위스 취리히의 병원에서 좋은 자리를 제안 받고 테레사와 함께 국외로 망명한다.

하지만 테레사는 낯선 국가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국외로 나와서도 에로틱한 우정(erotic friendship) 습관에 따라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남편 토마스에게도 지친다. 어느날 테레사는 작별의 편지를 남겨둔 채 국경을 넘어 체코로 돌아가 버린다. 당시 체코는 소비에트 군에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테레사가 입국했다는 사실은 북한 국경을 넘어 들어간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는 뜻이다.

혼자 취리히에 남은 토마스는 심각한 고민을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여섯 번의 우연한 사건의 결과인 테레사와의 결혼 관계를 이 기회에 끝낼 것인가? 이 경우엔 공산주의의 박해도 없는 취리히 병원에서 명망있는 의사로 에로틱 프렌드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 아니면 존재의 무거움에 가치를 두고 떠나간 아내를 쫓아 돌아갈 수 없는 국경을 도로 넘어갈 것인가?

이 선택의 고난을 작가는 세련된 음악 테마로 표현했다. 쿤데라의 아버지는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 였고 쿤데라 자신도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던 것 같다. 소재가 된 베토벤의 악장의 모티브는 독일어로 ‘Es muss sein’,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래는 토마스가 자기를 아끼는 취리히 병원의 원장과 독대하는 장면이다.

원장은 실로 당황했다.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암시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곡 마지막 악장은 다음의 두 모티브에 따라 작곡되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렇게 해야 하나? 그렇게 할 수밖에! 그렇게 할 수밖에!

이 말의 의미를 아주 명확히 하기 위해 베토벤은 이 마지막 악장의 제목을 <힘겹게 내린 결심> 이라 붙였다. 베토벤에 대한 이러한 암시로 토마스는 근본에 있어서 이미 테레사에게 되돌아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베토벤의 4중주와 소나타를 담은 전축판 구입을 관철시켰던 것은 테레사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암시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병원장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조용히 베토벤의 멜로디에 맞추어 말했다. ‘그렇게 해야 하나?’  토마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그렇게 할 수밖에요’

파르메니데스와는 다르게 베토벤에게는 무거움이 명백히 어떤 긍정적인 것이었다. <힘겹게 내린 결심>은 운명의 소리(그렇게 할 수밖에!)와 연관되어 있다.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 만이 가치가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의심해본다. 정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하고.

물리시간에 학생은 어느 누구나 실험을 통해 어떤 학문적 가설이 맞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평생을 살 뿐이다. 그에게는 가정의 정당함을 실험을 통해 증명할 가능성이 없다. 그 때문에 자기 감정을 따랐던 것이 옳았는가 아니면 잘못 되었는가를 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의지와 운명에 가치를 두고 테레사를 되찾으러 국경을 넘기로 했다. 영원회귀 사상은 운명애(運命愛; Amor Fati)로 인해 시작되는데, 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면서도 니체의 말을 믿어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사랑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아름답게 몰락하게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친구의 의미

Nikos Kazantzakis 2예전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갔다 왔었다. 전 직장은 극악한 근무강도에 총알 대신 히스테리가 난사되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다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했고 일과 후 숙소에 모이면 그날 겪은 기막힌 체험담(억울하게 욕먹은 사건들)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진리 였던가. 친하게 지냈던 옛 동료가 식장에서 일 년 만에 나를 보고 한 말은 “어 여기 왜 오셨어요?” 였다. 분명 직장이 갈리기 전에는 평생을 연락하고 지낼 것처럼 얘기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책의 서평에는 “비정한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모두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간다” 라고 적혀있었다. 맞다. 현대 사회는 비정하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이익이 없어지면 뭐든 폐기 처분되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

기계가 망가지면 버리고, 친구의 의미 도 필요 없어지면 버려진다. 인간 관계가 다 이렇게 되면 대화도 허무해진다. 도움되는 상대에게는 아첨(남자)이나 애교(여자)가 사용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상대에게는 뒷담화가 사용된다.

<그리스인 조르바> 책에 소개된 우정의 아름다움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인공과 조르바가 보여준 관계(작가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난 요르고스 조르바스와의 우정이 모델이었음)는 원시적이면서 순수했고, 그리움이 넘쳤다. 소설의 도입부는 주인공이 외국으로 떠난 한 친구를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를 대신할 다른 친구 – 조르바 – 를 만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

내 시선은 큰 배의 검은 뱃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선체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비도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진창 위로 내리는 빗줄기가 내다보였다.

나는 검은 배와 그림자와 비와 형상을 갖춘 내 슬픔의 실체를 보았다. 생각났다. 비와 우울증이, 습기 가득한 대기 위에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화했다. ……작년이던가? 전생이던가? 어제 일이던가? 바로 이 항구로 내려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은? 나는 그날 아침의 빗줄기와 한기, 그리고 새벽의 미명을 떠올렸다. 그때 역시 내 마음은 무거웠다.

감상에 빠져있던 주인공은 배 위에서 불쑥 자기에게 말을 거는 조르바라는 남자를 만난다. 두 남자는 같이 그리스 크레타 섬에 가서 갈탄 광산 채굴 사업을 벌이지만 돈은 하나도 벌지 못하고 망한다. 그 후로 둘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는데 서로를 잊지 못하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 주인공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된 조르바를 추억하는 연대기를 쓴다. 그리고 원고를 탈고하던 날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아래는 그 내용인데 죽기 직전까지 자유분방했던 조르바의 성격이 잘 드러나있다.

저는 이 마을 교장으로 이곳 동광 주인인 알렉시스 조르바가 지난 일요일 오후 6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고자 이 글월을 올립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리 좀 오시오. 내겐 그리스에 친구가 하나 있소. 내가 죽거든 편지를 좀 써주시어,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그 사람을 생각했더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 그 사람의 건투를 빌고 이제 좀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잠깐만 더 들어요.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 성사를 하려거든 빨리 꺼지는 건 물론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려 주고 꺼지라고 해요. 내 평생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

이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부인인 류바, 저,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이)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웃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미망인 류바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어 자기 대신 경의를 표해달라고 했습니다. 미망인 말씀에 따르면 고인은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자기의 사후에는 산투리를 선생님께 드리어 정표를 삼겠다는 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망인께서는 선생님께 이 마을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시면 손님으로 그날 밤을 쉬시고 아침에 떠나실 때는 산투리를 가지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조르바는 자신의 자유와 성스러움(역설적인 성스러움)의 상징이자, 스무 살때 집을 나오면서부터 평생을 애지중지했던 악기 ‘산투리’ 를 친구에게 정표로 남겼다. 죽으면서도 친구를 생각하는 조르바의 마음이 느껴져서 읽을 때마다 눈물 나는 결말부 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좋은 이유 I – 숨은 꽃

양귀자님의 작품 <숨은 꽃> 은 작가님의 분신으로 보이는 여주인공이 먼 고즈넉한 시골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작가였고 글을 써야 하지만 쓸 수 없는 영감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주인공은 ‘귀신사’ 라고 하는 시골의 사찰을 찾아가는 데 도중에 김종구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김종구는 배운 것도 없고 말도 험한 시골 남자로서 ‘황녀’ 라는 화류계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의 서방이다.

문자와 문학에 둘러싸여 심각한 고민만 하던 여 작가는 김종구로부터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건 김종구의 말과 행동이 원시적이지만 대단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이성을 만나면 거부 못할 매력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와 비슷한 현상이었던 것 같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정신 에너지 즉 리비도를 독자로 부터 끌어낸다. 권태에 빠져 글을 쓰지 못하던 여 작가는 작품이 내놓아야할 할 야성 에너지 – 숨은 꽃 – 을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그의 연인 황녀로부터 느꼈던 것이다. 그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찬란한 생기의 물결 같은 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에 나오는 알렉시스 조르바 역시 소설의 신경쇠약형 주인공에게 비슷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조르바는 나이 예순이 넘은 노인이지만 감각적인 힘이 충만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집시 같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아래는 그 출발에 대해 주인공과 얘기하는 모습이다. 작가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서 읽을 때마다 감탄스럽다.

“어떻게 해서 산투리를 다 배우게 되었지요?”
“스무 살 때였소. 내가 그때 올림포스 산기슭에 있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 산투리 소리를 들었지요. 혼을 쭉 빼놓는 것 같습디다. 사흘 동안 밥을 못 먹었을 정도였으니까. “어디가 아파서 그러느냐?”  우리 아버지가 묻습디다. 아버지 영혼이 화평하시기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으냐? 네가 집시냐, 거지 깡깽이가 되겠다는 것이냐?”  “저는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결혼하려고 꼬불쳐 둔 돈이 조금 있었지요. 유치한 생각이었소만 그 당시엔 대가리도 덜 여물었고 혈기만 왕성했지요. 병신같이 결혼 같은 걸 하려고 마음 먹었다니! 아무튼 있는 걸 몽땅 털고 몇 푼 더 보태 산투리를 하나 샀지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바로 이놈입니다. 나는 산투리를 들고 살로니카로 튀어 터키인 레트셉 에펜디에게 찾아갔지요. 그는 아무에게나 산투리를 가르쳐 주었지요. 그 앞에 일단 넙죽 엎드리고 봤어요. “왜 그러느냐, 꼬마 이교도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오냐, 그런데 왜 내 발밑에 엎드렸느냐?”  “월사금으로 낼 돈이 없습니다.”  “산투리에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네.”  “그럼 여기 있어도 좋다. 젊은 친구야. 나는 월사금을 받지 않는단다.”  나는 1년을 거기 있으면서 공부했지요. 하느님이 그 영감의 무덤을 돌보아주시기를…… 지금쯤 아마 죽었을 겁니다. 하느님이, 개도 천당에다 들여놓으신다면, 레트셉 에펜디에게도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이외다. 산투리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리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리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조르바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지 깡깽이’ 가 되지 말라고 말렸지만 이미 악기와 소리에 미쳐있던 조르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하는 ‘창피’ 는 사회의 통념이어서 족쇄가 되지만, 사람의 혼을 울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음악을 만들고 빠져서 무아(無我)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사상과 편견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느낀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사람은 찬란한 힘을 가지는데, 이 힘이 <숨은 꽃>의 여작가도,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도 감동시켰던 것이다.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 – 보이지 않는 악마

카프카는 자신의 단편소설 중 <시골의사>와 <판결>을 특히 맘에 들어 했다고 한다. 두 작품을 읽어보니 동감이 갔다. 카프카가 아니면 누구도 아닐 황량하고 아름다운 문학이었다. 아래는 단편 <시골의사>의 잊기 어려운 결미 부분이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집에 돌아가지는 않겠다. 나의 번창하는 의사생활은 망했다. 후임자가 내 자리를 넘본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 그가 나를 대신하지는 못할테니. 내 집 안에서는 구역질나는 마부가 날뛰고, 로자는 그의 제물이다.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벌거벗은 채, 이 불운을 극한 시대의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지상(地上)의 마차에다 지상의 것이 아닌 말들로, 늙은 나는 나를 이리저리 내몰고 있구나. 내 털외투가 마차 뒤에 걸려 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고 변덕스러운 환자 주위의 불한당들 중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속았구나! 속았어!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던 것 – 그것은 결코 보상할 수가 없구나.

두서없는 시골의사의 말은 시적이지만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가 살아온 인생에서 피어난 특이한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흔히 고독, 소외, 불안, 항거불능 같은 단어로 대표된다. 카프카의 여인 중 한 명이었던 밀레나 폴락이 남긴 추도사가 있는데, 남자를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 쓴 것이니 만큼 그 심리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보여준다. 한 번 읽어보자.

카프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하지만 세상에 낙담한 채 자신의 길만을 외롭게 걸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무방비 상태의 인간을 전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악마 로 가득 찬 세계를 보았다. 카프카는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예민했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가 그렇듯 투쟁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 카프카는 타인을 알 수 있는 위대한 감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별나고도 심오한 방법으로 세계를 파악했던 카프카는 그 자체로도 유별나고도 심오한 하나의 세계였다. … 이 책들은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인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때문에 카프카는 이 세계를 감당할 수 없으며,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면 카프카에겐 죽음만이 남는 것이다.

밀레나가 말한대로 카프카는 예민하고 고결한 존재였다. 그는 유별난 방법으로 세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보았는데, 그건 부조리로 가득차 있는 꿈과 같은 세계였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는 말은 카프카는 현실의 부조리(아이러니)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존주의는 보통 “정해진게 없고 모든게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문학과 실존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다.

만약 카프카가 가졌던 세계관와 거리가 먼, 소속감과 정동이 뚜렷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소설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본들 미친놈 일기장 읽는 것과 비슷할 뿐일 것 같다. 카프카의 책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그들 역시 고독하고 정신적 투쟁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척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모든 배경을 취합해 <시골의사>의 마지막 단락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골의사는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기 때문에 의사생활이 망해버린다. 이는 인생에서 생의 방향을 정확히 인도하는 경보는 없다는 걸 의미한다. 잘못된 신호로 그는 연인 로자를 구역질나는 마부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림). 벌거벗었다는 건 마음을 지켜주는 방어막(신앙이나 은총)이 없다는 걸 뜻하고, 말들은 원초적 본능을 상징한다(프로이트의 분석에도 나와있듯이). 하지만 지상의 것이 아닌 말이기 때문에(본능을 떠난 천상의 정신에도 매어 있으므로) 그는 혼란스럽다. 구원을 주는 털외투는 손에 닿지 않고 불한당 들은 의사(치유자)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보상받을 수 없다. 정해진 게 없는 인생에서 한 번 지나간 길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IV – 릴리푸트 읍

아버지 난장이가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후 자식들 영수, 영호, 영희는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은강방직에 취직한다. 은강 그룹 회사의 일은 고되었지만 임금은 적었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 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83,480원이었지만, 삼 남매의 수입 총액은 80,231원이었다. 즉 세 명이 죽어라 일해도 가족이 몸을 유지할 정도의 돈 밖에 못벌었다. 소설의 화자는 그래서 ‘생산 공헌도’ 라는 말을 한다. 공장이 있다면 그걸 돌리는 노동으로 인한 수익이 있을 텐데 그게 얼마인지는 상층 경영자들만 안다.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을 정도만 월급을 주고 나머지 이익은 회장과 자기들이 가져간다. 은강 그룹 말고 다른 회사의 경영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정당한 임금 책정 기준은 없다. 다른 회사보다 나은 임금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맞춰서 낮은 임금을 준다면? 노동자들은 어느 회사에 가도 덫에 걸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영수는 은강 그룹 회장이 사회 복지를 위해 20억원을 희사한 다는 신문기사를 본다. 아래는 이에 대한 지부장과 영수의 대화이다.

“이건 제가 신문 기사를 오려 두었던 것입니다.”
“나도 그 기사를 봤어.”
“회장님이 사회 복지를 위해 해마다 20억원을 내놓으시겠다는 기사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거액을 희사하시겠다는 거야. 이미 복지 재단의 이사진이 결정됐을걸. 그건 훌륭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노사협의 때 회사측에 상기시켜 주실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 돈은 조합원들의 것입니다.”
“어째서?”
“아무도 일한 만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너무 쌉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정당한 액수에서 깎여진 돈도 그 20억원에 포함됩니다.”
“좋은 걸 지적해 줬네.”
“정작 받을 권리가 있는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은 돈을 이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건지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장은 회사 노동자들에게는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인색하지만 사회복지기금 기부는 한다. 회사 돈으로 하면서 좋은 평판은 자신이 누린다. 차라리 회장이 자기 집안 만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솔직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조직 안에서 노동자들이 생산 공헌도를 위해 싸워봐도 얻을 게 별로 없었다. 원체 일이 바쁘기 때문에 투쟁할 틈이 없기도 했다. 게다가 공장 안에서는 경영자 뿐 아니라 선참 직원도 아래 사람을 괴롭힌다.

​나는 승용차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부품들을 날라다 주었다. 한 대의 승용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품으로 만들어졌다. 선참 공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조립 라인의 조립공들은 나를 또 하나의 보조 기계로 보았다. 공장장에게는 공원 전체가 기계였다.

공장에선 사람도 기계처럼 기능으로 평가되었다. 기능이 떨어지면 폐기 처분(해고)되는 것도 기계와 같았다. 행복과 의미를 위해 일을 하는 건데 일을 위해 의미를 포기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답답한 세상에 지친 난장이의 아들과 딸은 국제 난장이 마을 ‘릴리푸트읍’ 에 대해 생각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며 사는 소박한 삶을 꿈꾸고 있다.

영희의 이야기를 나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희는 독일 하스트로 호수 근처에 있다는 릴리푸트 읍 이야기를 했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슬픈 이야기였다. 돌아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려고 했다. 릴리푸트 읍은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 여러 나라의 난장이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다. 키가 칠십 팔 센티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사나이인 터키인 난장이도 최근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릴리푸트 읍의난장이 인구는 늘어만 간다. 릴리푸트 읍을 제외한 곳은 난장이들이 살기에 모든 것의 규모가 너무 커서 불편하고 또 위험하다.

지금 릴리푸트 읍의 난장이들은 자기들의 특수 의료 문제, 사회 심리적인 문제, 그리고 재정 문제 등을 토의하고 있다. 해결해야 될 몇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우리는 극히 행복하다>고 마리안느 사르 읍장은 말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III – 팬지꽃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위 문장을 처음 읽었다. 마음에 울림이 퍼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십 년이 넘게 지났고, 난쏘공 책을 두세 번 더 읽었지만 문장은 변함없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팬지의 꽃말은 “나를 생각해 주세요” 이다. 두 송이의 팬지는 한 쌍의 남여를 나타내고, 어린 소녀가 그걸 폐수에 버렸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행복을 포기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난장이의 딸 영희는 갈 곳 없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망치는 길로 들어선다.

그녀는 집을 나와 입주권을 사들인 부동산 업자를 찾아간다. 이 업자는 전부터 예쁘게 생긴 영희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남자는 영희에게 옷을 여러 벌 사주고는 영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데려 간다. 영화 <강남 1970>에 나올 만한 욕망에 충실한 남자인 것 같다. 영희는 날마다 그와 자면서 몸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 헐값에 팔려버린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떨어져 버린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에 심란한 꿈도 꾼다. 꿈 속에서 오빠들이 공장에 취직되어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난장이 아버지가 달을 왕복하는 모습도 본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린 딸을 걱정하는 모습도 본다.

“너의 증조할머니 동생 한 분이 알몸 시체로 수리조합 봇물에 막혀 있었단다. 왜 그랬는지 아니? 주인 서방과 잠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야. 주인 여자가 너의 증조할머니 동생을 사매질해 숨지게 했단다.”
“엄마, 전 달라요.”
“같아.”
“달라요.”
“같아.”
“달라요!”

영희의 윗 대 어른인 증조할머니 동생은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알몸 시체로 저수지에 버려진다. 떠내려가다 봇물에 걸린 모습으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었다. 노비가 있던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일이 충분히 가능했고, 주인 여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가난은 난장이 아버지 가문에 대를 이어 내려왔고, 이제 영희도 선조 할머니처럼 몸을 내주며 생활을 찾는 형편이다. 그녀는 부동산 투기업자의 금고 안에 있던 입주권과 돈을 훔쳐서 새벽에 몰래 빠져나온다. 하지만 이미 철거가 되어 폐허가 된 집에 돌아왔을 때 난장이 아버지가 높은 굴뚝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갔다. 아버지가 벽돌 공장 굴뚝 위에 서서 손을 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조각마루 끝에 밥상을 올려놓았다. 의사가 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나의 손을 잡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이 느리게 나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울지마, 영희야.”
큰오빠가 말했었다.
“제발 울지마. 누가 듣겠어.”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 오빠는 화도 안 나?”
“그치라니까.”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 버려.”
“그래. 죽여 버릴께.”
“꼭 죽여.”
“그래. 꼭.”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