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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친구의 의미

Nikos Kazantzakis 2예전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갔다 왔었다. 전 직장은 극악한 근무강도에 총알 대신 히스테리가 난사되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다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했고 일과 후 숙소에 모이면 그날 겪은 기막힌 체험담(억울하게 욕먹은 사건들)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진리 였던가. 친하게 지냈던 옛 동료가 식장에서 일 년 만에 나를 보고 한 말은 “어 여기 왜 오셨어요?” 였다. 분명 직장이 갈리기 전에는 평생을 연락하고 지낼 것처럼 얘기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책의 서평에는 “비정한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모두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간다” 라고 적혀있었다. 맞다. 현대 사회는 비정하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이익이 없어지면 뭐든 폐기 처분되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

기계가 망가지면 버리고, 친구의 의미 도 필요 없어지면 버려진다. 인간 관계가 다 이렇게 되면 대화도 허무해진다. 도움되는 상대에게는 아첨(남자)이나 애교(여자)가 사용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상대에게는 뒷담화가 사용된다.

<그리스인 조르바> 책에 소개된 우정의 아름다움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인공과 조르바가 보여준 관계(작가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난 요르고스 조르바스와의 우정이 모델이었음)는 원시적이면서 순수했고, 그리움이 넘쳤다. 소설의 도입부는 주인공이 외국으로 떠난 한 친구를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를 대신할 다른 친구 – 조르바 – 를 만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

내 시선은 큰 배의 검은 뱃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선체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비도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진창 위로 내리는 빗줄기가 내다보였다.

나는 검은 배와 그림자와 비와 형상을 갖춘 내 슬픔의 실체를 보았다. 생각났다. 비와 우울증이, 습기 가득한 대기 위에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화했다. ……작년이던가? 전생이던가? 어제 일이던가? 바로 이 항구로 내려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은? 나는 그날 아침의 빗줄기와 한기, 그리고 새벽의 미명을 떠올렸다. 그때 역시 내 마음은 무거웠다.

감상에 빠져있던 주인공은 배 위에서 불쑥 자기에게 말을 거는 조르바라는 남자를 만난다. 두 남자는 같이 그리스 크레타 섬에 가서 갈탄 광산 채굴 사업을 벌이지만 돈은 하나도 벌지 못하고 망한다. 그 후로 둘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는데 서로를 잊지 못하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 주인공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된 조르바를 추억하는 연대기를 쓴다. 그리고 원고를 탈고하던 날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아래는 그 내용인데 죽기 직전까지 자유분방했던 조르바의 성격이 잘 드러나있다.

저는 이 마을 교장으로 이곳 동광 주인인 알렉시스 조르바가 지난 일요일 오후 6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고자 이 글월을 올립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리 좀 오시오. 내겐 그리스에 친구가 하나 있소. 내가 죽거든 편지를 좀 써주시어,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그 사람을 생각했더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 그 사람의 건투를 빌고 이제 좀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잠깐만 더 들어요.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 성사를 하려거든 빨리 꺼지는 건 물론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려 주고 꺼지라고 해요. 내 평생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

이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부인인 류바, 저,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이)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웃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미망인 류바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어 자기 대신 경의를 표해달라고 했습니다. 미망인 말씀에 따르면 고인은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자기의 사후에는 산투리를 선생님께 드리어 정표를 삼겠다는 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망인께서는 선생님께 이 마을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시면 손님으로 그날 밤을 쉬시고 아침에 떠나실 때는 산투리를 가지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조르바는 자신의 자유와 성스러움(역설적인 성스러움)의 상징이자, 스무 살때 집을 나오면서부터 평생을 애지중지했던 악기 ‘산투리’ 를 친구에게 정표로 남겼다. 죽으면서도 친구를 생각하는 조르바의 마음이 느껴져서 읽을 때마다 눈물 나는 결말부 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좋은 이유 I – 숨은 꽃

양귀자님의 작품 <숨은 꽃> 은 작가님의 분신으로 보이는 여주인공이 먼 고즈넉한 시골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작가였고 글을 써야 하지만 쓸 수 없는 영감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주인공은 ‘귀신사’ 라고 하는 시골의 사찰을 찾아가는 데 도중에 김종구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김종구는 배운 것도 없고 말도 험한 시골 남자로서 ‘황녀’ 라는 화류계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의 서방이다.

문자와 문학에 둘러싸여 심각한 고민만 하던 여 작가는 김종구로부터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건 김종구의 말과 행동이 원시적이지만 대단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이성을 만나면 거부 못할 매력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와 비슷한 현상이었던 것 같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정신 에너지 즉 리비도를 독자로 부터 끌어낸다. 권태에 빠져 글을 쓰지 못하던 여 작가는 작품이 내놓아야할 할 야성 에너지 – 숨은 꽃 – 을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그의 연인 황녀로부터 느꼈던 것이다. 그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찬란한 생기의 물결 같은 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에 나오는 알렉시스 조르바 역시 소설의 신경쇠약형 주인공에게 비슷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조르바는 나이 예순이 넘은 노인이지만 감각적인 힘이 충만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집시 같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아래는 그 출발에 대해 주인공과 얘기하는 모습이다. 작가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서 읽을 때마다 감탄스럽다.

“어떻게 해서 산투리를 다 배우게 되었지요?”
“스무 살 때였소. 내가 그때 올림포스 산기슭에 있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 산투리 소리를 들었지요. 혼을 쭉 빼놓는 것 같습디다. 사흘 동안 밥을 못 먹었을 정도였으니까. “어디가 아파서 그러느냐?”  우리 아버지가 묻습디다. 아버지 영혼이 화평하시기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으냐? 네가 집시냐, 거지 깡깽이가 되겠다는 것이냐?”  “저는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결혼하려고 꼬불쳐 둔 돈이 조금 있었지요. 유치한 생각이었소만 그 당시엔 대가리도 덜 여물었고 혈기만 왕성했지요. 병신같이 결혼 같은 걸 하려고 마음 먹었다니! 아무튼 있는 걸 몽땅 털고 몇 푼 더 보태 산투리를 하나 샀지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바로 이놈입니다. 나는 산투리를 들고 살로니카로 튀어 터키인 레트셉 에펜디에게 찾아갔지요. 그는 아무에게나 산투리를 가르쳐 주었지요. 그 앞에 일단 넙죽 엎드리고 봤어요. “왜 그러느냐, 꼬마 이교도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오냐, 그런데 왜 내 발밑에 엎드렸느냐?”  “월사금으로 낼 돈이 없습니다.”  “산투리에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네.”  “그럼 여기 있어도 좋다. 젊은 친구야. 나는 월사금을 받지 않는단다.”  나는 1년을 거기 있으면서 공부했지요. 하느님이 그 영감의 무덤을 돌보아주시기를…… 지금쯤 아마 죽었을 겁니다. 하느님이, 개도 천당에다 들여놓으신다면, 레트셉 에펜디에게도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이외다. 산투리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리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리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조르바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지 깡깽이’ 가 되지 말라고 말렸지만 이미 악기와 소리에 미쳐있던 조르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하는 ‘창피’ 는 사회의 통념이어서 족쇄가 되지만, 사람의 혼을 울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음악을 만들고 빠져서 무아(無我)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사상과 편견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느낀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사람은 찬란한 힘을 가지는데, 이 힘이 <숨은 꽃>의 여작가도,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도 감동시켰던 것이다.

모사세 III – 유혹과 강박

아이 정인의 기억은 원초적인 감정 덩어리가 비누방울 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기억 안에는 정확한 언어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펑 터지기 쉬웠다. 정인은 외모 만 보면 그냥 사탕 막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그의 정신까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어른 정인은 아이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부터 이미 굉장한 크기의 에너지가 유혹과 강박 공포의 형체를 띠고 머리를 휘젖고 있었구나 생각을 한다.

정인이 느꼈던 ‘유혹’ 을 말해주는 일화는 이렇다. 꼬마 정인은 가족들과 광나루 근처에 있는 넓은 야외 수영장에 갔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수영복을 입은 수 많은 사람들이 수영장을 어항처럼 메우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성이 정인의 시선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당시에 흔치 않은 노출이 심한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보통 수영복과 다르게 가슴과 가슴사이가 길게 도로가 난 것 처럼 파여 있었다. 도로 양측으로는 당연히 유방 언덕이 솟아 있었다. 정인은 일차 성징만 가진 꼬마였다. 하지만 여자의 도발적인 모습은 원래 유혹의 대상이 아닌 꼬마에게 충분한 전기 충격을 주었다. 이 미모의 여성은 선글라스 안에서 왜 이 얘가 자기 야한 모습을 넊나가서 보고 있는 걸까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정인이 느꼈던 건 알 수 없는 미로와 같은 정신을 헤매는 강렬한 전기의 흐름이었다.

다음으로 강박이라는 건 정인에게 자연스럽게 박혀버린 생각의 흐름이다. 여기에는 엄마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엄마는 정인을 늘 감시하고 통제하는 존재였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11년후에 벌어질 대학입시 전쟁의 조망은 정인의 가정 전체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정인은 학교 수업 진도와 숙제를 어머니에게 확인 받아야 했는데 이건 매일 벌어지는 고문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공부가 더럽게 재미 없다는 걸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셰퍼드에 비유했다. 주인이 감시를 안 하면 일 안하고 먹고 노는 동물. 정인은 훗날 셰퍼드가 머리 좋고 강인하며 충성심 강한 훌륭한 개라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위로 되는 사실은 아니었다. 모든 걸 통제했던 엄마가 준 강박의 에너지는 몹시도 강한 것이어서 다른 이미지의 그녀를 떠올리기 어렵게 했다. 한 번은 부모님이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엄마는 활짝 웃는 반가운 미소로 정인을 맞았다. 이 표정이 정인에겐 낯선 놀라움이었다. 그는 자신이 엄마에게 반가울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 – 보이지 않는 악마

카프카는 자신의 단편소설 중 <시골의사>와 <판결>을 특히 맘에 들어 했다고 한다. 두 작품을 읽어보니 동감이 갔다. 카프카가 아니면 누구도 아닐 황량하고 아름다운 문학이었다. 아래는 단편 <시골의사>의 잊기 어려운 결미 부분이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집에 돌아가지는 않겠다. 나의 번창하는 의사생활은 망했다. 후임자가 내 자리를 넘본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 그가 나를 대신하지는 못할테니. 내 집 안에서는 구역질나는 마부가 날뛰고, 로자는 그의 제물이다.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벌거벗은 채, 이 불운을 극한 시대의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지상(地上)의 마차에다 지상의 것이 아닌 말들로, 늙은 나는 나를 이리저리 내몰고 있구나. 내 털외투가 마차 뒤에 걸려 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고 변덕스러운 환자 주위의 불한당들 중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속았구나! 속았어!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던 것 – 그것은 결코 보상할 수가 없구나.

두서없는 시골의사의 말은 시적이지만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가 살아온 인생에서 피어난 특이한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흔히 고독, 소외, 불안, 항거불능 같은 단어로 대표된다. 카프카의 여인 중 한 명이었던 밀레나 폴락이 남긴 추도사가 있는데, 남자를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 쓴 것이니 만큼 그 심리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보여준다. 한 번 읽어보자.

카프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하지만 세상에 낙담한 채 자신의 길만을 외롭게 걸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무방비 상태의 인간을 전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악마 로 가득 찬 세계를 보았다. 카프카는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예민했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가 그렇듯 투쟁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 카프카는 타인을 알 수 있는 위대한 감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별나고도 심오한 방법으로 세계를 파악했던 카프카는 그 자체로도 유별나고도 심오한 하나의 세계였다. … 이 책들은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인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때문에 카프카는 이 세계를 감당할 수 없으며,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면 카프카에겐 죽음만이 남는 것이다.

밀레나가 말한대로 카프카는 예민하고 고결한 존재였다. 그는 유별난 방법으로 세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보았는데, 그건 부조리로 가득차 있는 꿈과 같은 세계였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는 말은 카프카는 현실의 부조리(아이러니)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존주의는 보통 “정해진게 없고 모든게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문학과 실존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다.

만약 카프카가 가졌던 세계관와 거리가 먼, 소속감과 정동이 뚜렷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소설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본들 미친놈 일기장 읽는 것과 비슷할 뿐일 것 같다. 카프카의 책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그들 역시 고독하고 정신적 투쟁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척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모든 배경을 취합해 <시골의사>의 마지막 단락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골의사는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기 때문에 의사생활이 망해버린다. 이는 인생에서 생의 방향을 정확히 인도하는 경보는 없다는 걸 의미한다. 잘못된 신호로 그는 연인 로자를 구역질나는 마부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림). 벌거벗었다는 건 마음을 지켜주는 방어막(신앙이나 은총)이 없다는 걸 뜻하고, 말들은 원초적 본능을 상징한다(프로이트의 분석에도 나와있듯이). 하지만 지상의 것이 아닌 말이기 때문에(본능을 떠난 천상의 정신에도 매어 있으므로) 그는 혼란스럽다. 구원을 주는 털외투는 손에 닿지 않고 불한당 들은 의사(치유자)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보상받을 수 없다. 정해진 게 없는 인생에서 한 번 지나간 길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IV – 릴리푸트 읍

아버지 난장이가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후 자식들 영수, 영호, 영희는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은강방직에 취직한다. 은강 그룹 회사의 일은 고되었지만 임금은 적었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 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83,480원이었지만, 삼 남매의 수입 총액은 80,231원이었다. 즉 세 명이 죽어라 일해도 가족이 몸을 유지할 정도의 돈 밖에 못벌었다. 소설의 화자는 그래서 ‘생산 공헌도’ 라는 말을 한다. 공장이 있다면 그걸 돌리는 노동으로 인한 수익이 있을 텐데 그게 얼마인지는 상층 경영자들만 안다.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을 정도만 월급을 주고 나머지 이익은 회장과 자기들이 가져간다. 은강 그룹 말고 다른 회사의 경영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정당한 임금 책정 기준은 없다. 다른 회사보다 나은 임금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맞춰서 낮은 임금을 준다면? 노동자들은 어느 회사에 가도 덫에 걸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영수는 은강 그룹 회장이 사회 복지를 위해 20억원을 희사한 다는 신문기사를 본다. 아래는 이에 대한 지부장과 영수의 대화이다.

“이건 제가 신문 기사를 오려 두었던 것입니다.”
“나도 그 기사를 봤어.”
“회장님이 사회 복지를 위해 해마다 20억원을 내놓으시겠다는 기사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거액을 희사하시겠다는 거야. 이미 복지 재단의 이사진이 결정됐을걸. 그건 훌륭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노사협의 때 회사측에 상기시켜 주실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 돈은 조합원들의 것입니다.”
“어째서?”
“아무도 일한 만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너무 쌉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정당한 액수에서 깎여진 돈도 그 20억원에 포함됩니다.”
“좋은 걸 지적해 줬네.”
“정작 받을 권리가 있는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은 돈을 이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건지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장은 회사 노동자들에게는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인색하지만 사회복지기금 기부는 한다. 회사 돈으로 하면서 좋은 평판은 자신이 누린다. 차라리 회장이 자기 집안 만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솔직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조직 안에서 노동자들이 생산 공헌도를 위해 싸워봐도 얻을 게 별로 없었다. 원체 일이 바쁘기 때문에 투쟁할 틈이 없기도 했다. 게다가 공장 안에서는 경영자 뿐 아니라 선참 직원도 아래 사람을 괴롭힌다.

​나는 승용차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부품들을 날라다 주었다. 한 대의 승용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품으로 만들어졌다. 선참 공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조립 라인의 조립공들은 나를 또 하나의 보조 기계로 보았다. 공장장에게는 공원 전체가 기계였다.

공장에선 사람도 기계처럼 기능으로 평가되었다. 기능이 떨어지면 폐기 처분(해고)되는 것도 기계와 같았다. 행복과 의미를 위해 일을 하는 건데 일을 위해 의미를 포기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답답한 세상에 지친 난장이의 아들과 딸은 국제 난장이 마을 ‘릴리푸트읍’ 에 대해 생각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며 사는 소박한 삶을 꿈꾸고 있다.

영희의 이야기를 나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희는 독일 하스트로 호수 근처에 있다는 릴리푸트 읍 이야기를 했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슬픈 이야기였다. 돌아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려고 했다. 릴리푸트 읍은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 여러 나라의 난장이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다. 키가 칠십 팔 센티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사나이인 터키인 난장이도 최근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릴리푸트 읍의난장이 인구는 늘어만 간다. 릴리푸트 읍을 제외한 곳은 난장이들이 살기에 모든 것의 규모가 너무 커서 불편하고 또 위험하다.

지금 릴리푸트 읍의 난장이들은 자기들의 특수 의료 문제, 사회 심리적인 문제, 그리고 재정 문제 등을 토의하고 있다. 해결해야 될 몇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우리는 극히 행복하다>고 마리안느 사르 읍장은 말했다.

모사세 II – 인어공주

어린 정인이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만화영화는 원초적인 기억의 영상을 많긴 남긴 것들이었다. 안데르센 동화가 만화로 등장했는데 그 신비하고 슬픈 이야기는 꼬마의 심금을 울렸다. 바다에 살던 인어공주는 인간 왕자를 우연히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사랑이 깊어진 나머지 마녀와 거래를 한다. 자기의 예쁜 목소리를 희생하는 대신 인간과 같은 두 다리를 얻은 것이다. 그녀는 바다에서 걸어 나와 왕국으로 가서 왕자를 만난다. 그녀는 왕자에게 얼마간 귀여움을 받았고 행복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자는 곧 이웃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때 그녀에게 인어 시절의 언니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머리칼과 맞바꾼 칼을 건네며 이걸로 왕자를 찌르면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하자고 설득한다. 인어공주는 고뇌하지만, 사랑하는 왕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왕자의 결혼식 전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다. 마녀와의 거래에는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바다의 거품이 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국 인어공주의 영혼은 물가에 영원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품이 되어 버린다. 마치 끝 없이 그리워하며 갈구하는 인간 모두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어공주 이야기는 정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때 정인은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게 무언지 몰랐다. 하지만 인어공주가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랬기 때문에 죽고 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이런 이해가 정인을 더 냉정하고 조심스런 아이로 만든 건 아니었다. 다만 이상한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정인은 매일마다 인어공주의 꿈을 꾸었다. 아름답고 가녀린 그녀는 인간 세상으로 올려져 큰 어항 같은 것에 들어 있었다. 꿈이 반복되고 깊어지면서 정인은 자신이 인어공주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아이의 생각은 동화보다 더 동화적이어서 이불 안의 뜨거운 방바닥에서 땀이 뻘뻘 나는 것을 오래 참고 있으면 자기가 인어로 변할 거라고 믿었다. 훗날 어른 정인은 프로이트의 책을 읽고 나서 왜 그렇게 인어가 되고 싶어 했었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일곱 살 정인의 하루하루는 강물 흘러가듯 흘러가고 있었다. 금방 끝나는 학교 숙제를 마치면 나머지 시간엔 한가히 날아가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놀면 되었다. 그 날은 잡초와 민들레가 무성한 개천가를 걷는 하교 길이었다. 강둑으로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고 풀밭을 비추는 햇빛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와 했던 테니스 공 던지기를 생각했고 베란다에서 키우던 강남콩 화분도 생각했다. 화분은 슬기로운 생활 과목의 숙제였는데 싹이 돋고 자라는 게 신기해서 30분 마다 한 번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러 가보곤 했다. 어제는 싹이 땅에서 2센티 정도 나와 있었다. 그저께는 작은 떡잎 두 개가 보이는 정도였다. 점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한 달 전에는 아예 화분에 콩을 키우지 않았다. 그때 콩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줄기에 달려 자라고 있었겠지. 그렇담 1년 전 그리고 그보다 더 1년 전에는? 그때는 아예 콩 줄기도 없었을 텐데… 모양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콩은 그렇다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 일까? 정인은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왔는지 다 기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도 운동장에서 놀았던가? 어떤 다른 숙제가 있었던가? 더 강렬했던, 주로 어둡고 무서웠던 영상의 단편이 존재하지만 일상의 기억은 없었고, 그 기억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나날들이 있었다. 과거는 하나의 빈 공간으로 녹아 있었다. 다만 정인의 기억이 시작된 날 인생 기록의 첫 페이지가 쓰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인은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나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엄마 배 속에서 자라나 몸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처음부터 내가 나인지 알고 있지는 않았다. 배 속에서 나와 세상을 보았을 때 비로소 나를 나라고 불러주는 존재가 주위에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정인아 착하지 정인아 이렇게. 그래서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면서 만들어 졌다. 만약 주위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를 만져줘서 감촉의 차이를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세계와 구별이 없이 한데 녹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난 이렇게 세상에 풀처럼 피어나 버렸다. 그래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고 있다. 나를 나라고 부르는 그 개체, 자아, 생명, 그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 그건 천천한 맺힘이 있었고 끝에도 천천한 사라짐이 있을 것이다. 누가 나를 불러도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을 때, 그 때 내 몸의 응집도 무너지고 맥박도 사라져, 품고 있던 영혼도 다시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구름이 모여 비가 되어 내리듯, 그 비가 작은 개울이 되고 강이 되어 흐르듯, 그 강이 넓은 바다와 찬란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아가듯. 그리고 저 하늘이 늘 영원한 하늘 그대로 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