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 – 보이지 않는 악마
카프카는 자신의 단편소설 중 <시골의사>와 <판결>을 특히 맘에 들어 했다고 한다. 두 작품을 읽어보니 동감이 갔다. 카프카가 아니면 누구도 아닐 황량하고 아름다운 문학이었다. 아래는 단편 <시골의사>의 잊기 어려운 결미 부분이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집에 돌아가지는 않겠다. 나의 번창하는 의사생활은 망했다. 후임자가 내 자리를 넘본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 그가 나를 대신하지는 못할테니. 내 집 안에서는 구역질나는 마부가 날뛰고, 로자는 그의 제물이다.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벌거벗은 채, 이 불운을 극한 시대의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지상(地上)의 마차에다 지상의 것이 아닌 말들로, 늙은 나는 나를 이리저리 내몰고 있구나. 내 털외투가 마차 뒤에 걸려 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고 변덕스러운 환자 주위의 불한당들 중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속았구나! 속았어!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던 것 – 그것은 결코 보상할 수가 없구나.
두서없는 시골의사의 말은 시적이지만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가 살아온 인생에서 피어난 특이한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흔히 고독, 소외, 불안, 항거불능 같은 단어로 대표된다. 카프카의 여인 중 한 명이었던 밀레나 폴락이 남긴 추도사가 있는데, 남자를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 쓴 것이니 만큼 그 심리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보여준다. 한 번 읽어보자.
카프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하지만 세상에 낙담한 채 자신의 길만을 외롭게 걸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무방비 상태의 인간을 전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악마 로 가득 찬 세계를 보았다. 카프카는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예민했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가 그렇듯 투쟁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 카프카는 타인을 알 수 있는 위대한 감식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별나고도 심오한 방법으로 세계를 파악했던 카프카는 그 자체로도 유별나고도 심오한 하나의 세계였다. … 이 책들은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인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때문에 카프카는 이 세계를 감당할 수 없으며,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면 카프카에겐 죽음만이 남는 것이다.
밀레나가 말한대로 카프카는 예민하고 고결한 존재였다. 그는 유별난 방법으로 세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보았는데, 그건 부조리로 가득차 있는 꿈과 같은 세계였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는 말은 카프카는 현실의 부조리(아이러니)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존주의는 보통 “정해진게 없고 모든게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카프카의 문학과 실존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다.
만약 카프카가 가졌던 세계관와 거리가 먼, 소속감과 정동이 뚜렷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소설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본들 미친놈 일기장 읽는 것과 비슷할 뿐일 것 같다. 카프카의 책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그들 역시 고독하고 정신적 투쟁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척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모든 배경을 취합해 <시골의사>의 마지막 단락을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골의사는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기 때문에 의사생활이 망해버린다. 이는 인생에서 생의 방향을 정확히 인도하는 경보는 없다는 걸 의미한다. 잘못된 신호로 그는 연인 로자를 구역질나는 마부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림). 벌거벗었다는 건 마음을 지켜주는 방어막(신앙이나 은총)이 없다는 걸 뜻하고, 말들은 원초적 본능을 상징한다(프로이트의 분석에도 나와있듯이). 하지만 지상의 것이 아닌 말이기 때문에(본능을 떠난 천상의 정신에도 매어 있으므로) 그는 혼란스럽다. 구원을 주는 털외투는 손에 닿지 않고 불한당 들은 의사(치유자)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보상받을 수 없다. 정해진 게 없는 인생에서 한 번 지나간 길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IV – 릴리푸트 읍
아버지 난장이가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후 자식들 영수, 영호, 영희는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은강방직에 취직한다. 은강 그룹 회사의 일은 고되었지만 임금은 적었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 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 이론 생계비는 83,480원이었지만, 삼 남매의 수입 총액은 80,231원이었다. 즉 세 명이 죽어라 일해도 가족이 몸을 유지할 정도의 돈 밖에 못벌었다. 소설의 화자는 그래서 ‘생산 공헌도’ 라는 말을 한다. 공장이 있다면 그걸 돌리는 노동으로 인한 수익이 있을 텐데 그게 얼마인지는 상층 경영자들만 안다.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을 정도만 월급을 주고 나머지 이익은 회장과 자기들이 가져간다. 은강 그룹 말고 다른 회사의 경영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정당한 임금 책정 기준은 없다. 다른 회사보다 나은 임금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맞춰서 낮은 임금을 준다면? 노동자들은 어느 회사에 가도 덫에 걸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영수는 은강 그룹 회장이 사회 복지를 위해 20억원을 희사한 다는 신문기사를 본다. 아래는 이에 대한 지부장과 영수의 대화이다.
“이건 제가 신문 기사를 오려 두었던 것입니다.”
“나도 그 기사를 봤어.”
“회장님이 사회 복지를 위해 해마다 20억원을 내놓으시겠다는 기사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거액을 희사하시겠다는 거야. 이미 복지 재단의 이사진이 결정됐을걸. 그건 훌륭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노사협의 때 회사측에 상기시켜 주실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 돈은 조합원들의 것입니다.”
“어째서?”
“아무도 일한 만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너무 쌉니다. 제가 받아야 할 정당한 액수에서 깎여진 돈도 그 20억원에 포함됩니다.”
“좋은 걸 지적해 줬네.”
“정작 받을 권리가 있는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은 돈을 이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건지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회장은 회사 노동자들에게는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인색하지만 사회복지기금 기부는 한다. 회사 돈으로 하면서 좋은 평판은 자신이 누린다. 차라리 회장이 자기 집안 만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솔직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조직 안에서 노동자들이 생산 공헌도를 위해 싸워봐도 얻을 게 별로 없었다. 원체 일이 바쁘기 때문에 투쟁할 틈이 없기도 했다. 게다가 공장 안에서는 경영자 뿐 아니라 선참 직원도 아래 사람을 괴롭힌다.
나는 승용차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부품들을 날라다 주었다. 한 대의 승용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품으로 만들어졌다. 선참 공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조립 라인의 조립공들은 나를 또 하나의 보조 기계로 보았다. 공장장에게는 공원 전체가 기계였다.
공장에선 사람도 기계처럼 기능으로 평가되었다. 기능이 떨어지면 폐기 처분(해고)되는 것도 기계와 같았다. 행복과 의미를 위해 일을 하는 건데 일을 위해 의미를 포기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답답한 세상에 지친 난장이의 아들과 딸은 국제 난장이 마을 ‘릴리푸트읍’ 에 대해 생각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며 사는 소박한 삶을 꿈꾸고 있다.
영희의 이야기를 나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희는 독일 하스트로 호수 근처에 있다는 릴리푸트 읍 이야기를 했다. 자세히 듣지 않아도 슬픈 이야기였다. 돌아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려고 했다. 릴리푸트 읍은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 여러 나라의 난장이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다. 키가 칠십 팔 센티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사나이인 터키인 난장이도 최근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릴리푸트 읍의난장이 인구는 늘어만 간다. 릴리푸트 읍을 제외한 곳은 난장이들이 살기에 모든 것의 규모가 너무 커서 불편하고 또 위험하다.
지금 릴리푸트 읍의 난장이들은 자기들의 특수 의료 문제, 사회 심리적인 문제, 그리고 재정 문제 등을 토의하고 있다. 해결해야 될 몇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우리는 극히 행복하다>고 마리안느 사르 읍장은 말했다.
태평천국의 난 I – 중국 역사상 가장 기이한 사건
어떻게 멀쩡히 눈 앞에 보이는 중년 남성을 신(神)으로 믿는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해본 결과 이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일원들은 서로 형제 자매처럼 살고 있었다. 급하고 칙칙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절대 경험 못하는 동지애를 누린다는 점이 아주 특별하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믿음 아래 엄청난 열정을 뿜고 있었다. 즉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얻음으로써(너무 비현실적인 것이긴 하지만) 행복해했고, 그래서 밤낮없이 새 그리스도를 위해 일했다.
믿을 만한 친구가 없어 외롭고, 인생의 의미를 못 찾아 허무한 사람은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단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이단 단체에서 이상한 경험을 한 이후로 종교성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었다. 그 중 19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 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대청제국(大淸帝國)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벌인 1850년부터 1864년까지의 15년 내전으로 2천 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1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내전(內戰)이다. 이것만으로도 특별하지만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기독교적 신정혁명을 표방한 반란이라는 점이 더욱 특이하다.
유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기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儒家)로 등장하였고,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정식으로 국가의 학문이 되었다. 이후로 마오쩌둥의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2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태평천국은 이 정도의 역사와 기반을 가진 사상을 단번에 뒤집어 엎으려고 했다. 그들은 기독교 여호와 신을 천부상제(天父上帝)로, 총수인 홍수전(洪秀全)을 천왕(天王)으로 내세웠고 놀랍게도 15년 동안 중국 양자강 남부를 석권했다. 이 기이한 천하대란(天下大亂)은 홍수전이라는 과거 낙방생이 열병에 걸려 꾸었던 환몽(幻夢)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래는 조너선 D. 스펜스 저작의 <신의 아들>에서 옮긴 단락이다. 중국사를 전공한 미국 예일(Yale) 대학 교수였던 저자는 홍수전의 꿈을 묵시록 성격을 띈 고대 종교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홍수전과 그의 신도들을 엄청난 파국으로 이끈 계시적인 환몽의 근원은 기원전 2천년 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에 계시적인 환몽이 나타나기 전에도 또 다른 형식의 신앙이 많은 문명에서 성행했다. 이런 현상은 대체로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이란어파 문명에서 매우 두드러졌다. 이런 신앙이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에 의하면, 만물은 한쪽에는 질서와 번영의 힘을 가지고 있고, 다른 쪽에는 암흑, 혼돈, 파괴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만물은 또 이 두 힘 사이에서 미묘하면서도 지속적인 균형을 보여 왔다.
기원전 1500년경에는 우리가 천년왕국이라고 부르는 신앙의 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신앙 유형은 조로아스터 또는 차라투스트라로 잘 알려진 페르시아의 예언자가 처음 만들어 낸 것으로, 그는 자신이 창시한 신앙에서 최후의 세계가 나타날 가능성을 약속했다. 최후의 세계란 ‘혼돈이 없는 질서의 세계’이자,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히 평화로운 무결점의 ‘경이로운’ 세계이며,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신이 통치하는 변치 않는 제국이었다.
이제 다가오게 될 파괴의 시대는 가까운 미래의 어떤 특정한 시기로 정해졌다. 이 조짐은 질병, 기근, 폭군의 학정으로 나타났고, 종종 거대하고 파괴적인 대홍수를 동반했다. 거룩한 구세주와 그의 명령을 받은 현세의 영도자의 안내에 따라 소수의 인류만이 이 혹독한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공동체 안에 함께 모여,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갈 것이었다.
Notes:
- 질병과 기근으로 인한 사망 포함. 출처 Taiping Rebellion, Britannica Concise, “Necrometrics.” Nineteenth Century Death Tolls. Wikipedia에서 인용. ↩
모사세 II – 인어공주
어린 정인이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만화영화는 원초적인 기억의 영상을 많긴 남긴 것들이었다. 안데르센 동화가 만화로 등장했는데 그 신비하고 슬픈 이야기는 꼬마의 심금을 울렸다. 바다에 살던 인어공주는 인간 왕자를 우연히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사랑이 깊어진 나머지 마녀와 거래를 한다. 자기의 예쁜 목소리를 희생하는 대신 인간과 같은 두 다리를 얻은 것이다. 그녀는 바다에서 걸어 나와 왕국으로 가서 왕자를 만난다. 그녀는 왕자에게 얼마간 귀여움을 받았고 행복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자는 곧 이웃 나라의 아름다운 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때 그녀에게 인어 시절의 언니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머리칼과 맞바꾼 칼을 건네며 이걸로 왕자를 찌르면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하자고 설득한다. 인어공주는 고뇌하지만, 사랑하는 왕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왕자의 결혼식 전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다. 마녀와의 거래에는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바다의 거품이 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국 인어공주의 영혼은 물가에 영원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품이 되어 버린다. 마치 끝 없이 그리워하며 갈구하는 인간 모두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어공주 이야기는 정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때 정인은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게 무언지 몰랐다. 하지만 인어공주가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랬기 때문에 죽고 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이런 이해가 정인을 더 냉정하고 조심스런 아이로 만든 건 아니었다. 다만 이상한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정인은 매일마다 인어공주의 꿈을 꾸었다. 아름답고 가녀린 그녀는 인간 세상으로 올려져 큰 어항 같은 것에 들어 있었다. 꿈이 반복되고 깊어지면서 정인은 자신이 인어공주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아이의 생각은 동화보다 더 동화적이어서 이불 안의 뜨거운 방바닥에서 땀이 뻘뻘 나는 것을 오래 참고 있으면 자기가 인어로 변할 거라고 믿었다. 훗날 어른 정인은 프로이트의 책을 읽고 나서 왜 그렇게 인어가 되고 싶어 했었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일곱 살 정인의 하루하루는 강물 흘러가듯 흘러가고 있었다. 금방 끝나는 학교 숙제를 마치면 나머지 시간엔 한가히 날아가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놀면 되었다. 그 날은 잡초와 민들레가 무성한 개천가를 걷는 하교 길이었다. 강둑으로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고 풀밭을 비추는 햇빛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와 했던 테니스 공 던지기를 생각했고 베란다에서 키우던 강남콩 화분도 생각했다. 화분은 슬기로운 생활 과목의 숙제였는데 싹이 돋고 자라는 게 신기해서 30분 마다 한 번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러 가보곤 했다. 어제는 싹이 땅에서 2센티 정도 나와 있었다. 그저께는 작은 떡잎 두 개가 보이는 정도였다. 점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한 달 전에는 아예 화분에 콩을 키우지 않았다. 그때 콩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줄기에 달려 자라고 있었겠지. 그렇담 1년 전 그리고 그보다 더 1년 전에는? 그때는 아예 콩 줄기도 없었을 텐데… 모양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콩은 그렇다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 일까? 정인은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왔는지 다 기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도 운동장에서 놀았던가? 어떤 다른 숙제가 있었던가? 더 강렬했던, 주로 어둡고 무서웠던 영상의 단편이 존재하지만 일상의 기억은 없었고, 그 기억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나날들이 있었다. 과거는 하나의 빈 공간으로 녹아 있었다. 다만 정인의 기억이 시작된 날 인생 기록의 첫 페이지가 쓰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인은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나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엄마 배 속에서 자라나 몸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처음부터 내가 나인지 알고 있지는 않았다. 배 속에서 나와 세상을 보았을 때 비로소 나를 나라고 불러주는 존재가 주위에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정인아 착하지 정인아 이렇게. 그래서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면서 만들어 졌다. 만약 주위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를 만져줘서 감촉의 차이를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세계와 구별이 없이 한데 녹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난 이렇게 세상에 풀처럼 피어나 버렸다. 그래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고 있다. 나를 나라고 부르는 그 개체, 자아, 생명, 그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 그건 천천한 맺힘이 있었고 끝에도 천천한 사라짐이 있을 것이다. 누가 나를 불러도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을 때, 그 때 내 몸의 응집도 무너지고 맥박도 사라져, 품고 있던 영혼도 다시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구름이 모여 비가 되어 내리듯, 그 비가 작은 개울이 되고 강이 되어 흐르듯, 그 강이 넓은 바다와 찬란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아가듯. 그리고 저 하늘이 늘 영원한 하늘 그대로 인 것처럼.”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
일본의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사를 움직이는(움직였던) 다섯 가지 힘으로서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 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힘은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부류로 엮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중 욕망의 흐름으로 인해 인류사에 펼쳐진 종교와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논했다는 게 자연스런 설명이다.
욕망을 부르는 대상으로 먼저 제시된 것이 커피와 홍차였다. 계속해서 금과 철 같은 물질도 얘기한다. 저자는 흔한 기호 식품에 대한 끌림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끌림을 주는 사상(제국주의나 공산주의나 종교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언뜻 보기에 아주 다른 현상인 커피에 대한 기호와 종교에 대한 기호를 같은 심리 상에서 설명한 게 재미있었다. 특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논한 부분과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교한 설명은 아주 명철했다.
미셸 푸코는 “언어의 독점이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라고 말했었다. 권력을 독점하는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정의나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도 독점한다. 공산주의로 치자면 ‘혁명’, ‘투쟁’, ‘인민’ 등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독점한 특정 언어의 틀 안에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정의도 정해진다. 당신의 이런 행위는 혁명이 아니다, 당신의 지금 태도는 인민을 위한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단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짜여진 집단 사고는 가끔씩 정말 비합리적이 된다.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는 북한과 우리나라가 서로에게 하는 선동 발언을 읽어보면 아래 설명된 사고가 흘러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며 폐쇄적이다. …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미움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이 그렇다는 일은 없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둘다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동인을 훌륭하게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사람을 움직이는 숨은 동인으로 ‘무의식’에 주목했다.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의 이면에는 무의식의 힘이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인간의 경제 정체성에 주목했다. 그는 “사람은 경제적인 위치와 수입에 의해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따라서 문화 또한 경제적인 기반에 의해 달라진다” 라는 명제를 남겼다. 저자도 극찬하는 분석이다.
필자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한 대형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으로 뭉쳐진 공동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사랑과 상관없는게 많이 뭉쳐있었다. 미혼남녀들이 많이 있는 만큼 서로 만나서 교제하는게 흔했다. 그런데 이 교제와 결혼의 절대 필요충분 조건은 신앙의 깊이가 아니었다. 경제 수준과 외모가 조건 일 순위를 다투었고 신앙심은 엑스트라였다. 결국 사람의 경제적 위치가 사고방식을 결정했고 그게 신앙심도 누른 것이다.
저자는 마르크스 사상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대해서도 명료한 설명을 해준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싸움은 시대의 발전과 시스템의 차이로 인한 다툼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과의 투쟁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공공을 위한 노동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면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데 까지 이른다. 소유욕을 없애는 것은 불교의 승려나 카톨릭의 신부 수행을 오래해도 없애기 어려운 욕망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집단을 전체로 만들어 한꺼번에 의식 개혁을 하려했다. 사회의 이념이 대중의 공통적인 욕망을 타고 가는게 아니라 인공적인 도덕을 강요함으로써 자멸했다는 말이 된다.
저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이어지는 종교의 성질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대중을 열광케 하는 종교 심리를 분석해내는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은 위대한 힘에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안정감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융이 말하는 집합적 무의식이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보통은 생각할 수도 없는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인간은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안과 밖에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가진 무엇인가를 품고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과학이 주지 못하는 정신적 안정을 주는 종교에 대한 욕구는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종교 열정은 종종 다른 종교와의 충돌로 나타난다. 문명의 충돌으로 표현된 서구 기독교 국가와 중동 이슬람 국가들간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있었던 분당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간 피랍 사건으로 한창 논쟁이 있었다. 저자는 서구 사회가 쉽게 간과하고, 일부러 무시하는 듯한 이슬람의 힘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다르다. 무슬림에게 있어 이슬람교는 정신을 구원하는 의미에서의 종교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그 자체’이다. 무슬림들에게는 종교활동, 경제활동, 사회활동, 정치활동 모든 것이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스러운 세계와 속세를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슬림에게 이슬람교는 생활과 신념에 수반된 모든 것이다. 이런 단단한 공동체가 먼 나라에서 잠시 찾아온 기독교 선교단의 활동으로 깨질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기독교가 무슬림을 교화하기 원한다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이슬람 사회 한 가운데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더 훌륭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사세 I – 영원 반사
세상에는 빛이 있다. 빛이 있기 전에는 어둠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성경의 창세기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빛은 움직이고 반사할 수 있어서 그만큼 어둠을 줄인다. 거울은 항상 빛을 온전히 투영해 나누어준다. 어두운 날이면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둡고, 밝은 햇빛이 있는 날 모습은 해와 함께 빛난다. 일곱 살 정인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집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하루는 이층으로 가는 나무 계단을 올라서 창가로 갔다. 벽 시계가 조용한 초침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는 아카시아 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정인은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넓었던 창문 턱 공간에는 액자와 책들이 놓여 있었다.
정인은 거기서 두 개의 네모난 거울이 경첩으로 한 면을 맞대고 붙어 있는걸 보았다. 마주보는 거울은 서로가 서로의 영상을 투영하며 계속 안 쪽으로 똑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거울 사이에 손가락을 넣으니 똑 같은 손가락 모양이 점점 작아지면서 이어진다.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면 길게 줄서 있는 작은 손가락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정인의 마음은 이상 야릇한 것을 느꼈다. 작은 공간에 갇혀 있지만 끝 없이 이어져 있다. 한 방울 물에 비친 태양처럼 세상 안에 다른 작은 세상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 시절의 기억은 모호한 바다를 떠다니는 배처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정인은 아기 조카를 보며 자신이 아기였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힌트를 얻는다. 하늘색 턱받이를 목에 두르고 점박이 옷을 입은 이 아기는 앉아서 정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어디론가 기어간다. 쇼파를 만나면 그 위로 기어오른다. 쇼파 등의 커다란 쿠션 위로도 올라가려 바둥거려 보지만 안 되서 헉헉 소리를 내고 있다. 어른들은 힘들지 않아도 헉헉 소리를 내지만 이 아기는 꼭 힘들때만 소리를 낸다. 아직도 바둥대고 있는 아기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마루에 내려주면 이제는 장난감 정글이 있는 곳으로 기어간다. 초록색 플라스틱 나무를 손으로 잡으며 겨우 일어나더니 나무에 달린 기린 인형의 귀를 입에 물고 빤다. 다가가 그 모습을 보면 입에 기린 귀를 문 채 정인을 빤히 쳐다본다. 하얗고 까만 눈의 대비가 선명하다.
정인은 이 아기를 처음 대하고 충격을 받았다. 가치판단이 없이 무구함 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정인 자신은 무서울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각이 많은 어른들 옆에서 이 아기는 언제나 평화롭게 놀고 있다. 상대를 속이지 않고, 미워하는 것도 없으며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표정에 전광판처럼 나타난다. 정인도 아기로서 엄마 앞에서 기어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도 이런 순진무구함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언제 다 잃어버렸는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정인이 기억이라는 관념을 이해하기 시작한 건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서울 서쪽의 작은 도시였던 광명시에는 ‘자수하여 광명 찾자’ 라는 현수막이 도시 어귀에 걸려 있었다. 정인은 광명을 찾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고 자수하면 도시를 어떻게 찾게 되는 건지 생각했다. 지저분한 회색 개천이 서울과 경계를 이루며 흘렀고 그 개천가의 20평 짜리 연립주택에 엄마, 아빠, 누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지금처럼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고 장래의 꿈도 없었다. 머리 아픈 생각보다 보다는 원초적인 기쁨과 공포가 희미한 기억의 영상을 남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