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갔다 왔었다. 전 직장은 극악한 근무강도에 총알 대신 히스테리가 난사되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다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했고 일과 후 숙소에 모이면 그날 겪은 기막힌 체험담(억울하게 욕먹은 사건들)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진리 였던가. 친하게 지냈던 옛 동료가 식장에서 일 년 만에 나를 보고 한 말은 “어 여기 왜 오셨어요?” 였다. 분명 직장이 갈리기 전에는 평생을 연락하고 지낼 것처럼 얘기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책의 서평에는 “비정한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모두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간다” 라고 적혀있었다. 맞다. 현대 사회는 비정하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이익이 없어지면 뭐든 폐기 처분되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
기계가 망가지면 버리고, 친구의 의미 도 필요 없어지면 버려진다. 인간 관계가 다 이렇게 되면 대화도 허무해진다. 도움되는 상대에게는 아첨(남자)이나 애교(여자)가 사용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상대에게는 뒷담화가 사용된다.
<그리스인 조르바> 책에 소개된 우정의 아름다움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인공과 조르바가 보여준 관계(작가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난 요르고스 조르바스와의 우정이 모델이었음)는 원시적이면서 순수했고, 그리움이 넘쳤다. 소설의 도입부는 주인공이 외국으로 떠난 한 친구를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를 대신할 다른 친구 – 조르바 – 를 만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
내 시선은 큰 배의 검은 뱃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선체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비도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진창 위로 내리는 빗줄기가 내다보였다.
나는 검은 배와 그림자와 비와 형상을 갖춘 내 슬픔의 실체를 보았다. 생각났다. 비와 우울증이, 습기 가득한 대기 위에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화했다. ……작년이던가? 전생이던가? 어제 일이던가? 바로 이 항구로 내려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은? 나는 그날 아침의 빗줄기와 한기, 그리고 새벽의 미명을 떠올렸다. 그때 역시 내 마음은 무거웠다.
감상에 빠져있던 주인공은 배 위에서 불쑥 자기에게 말을 거는 조르바라는 남자를 만난다. 두 남자는 같이 그리스 크레타 섬에 가서 갈탄 광산 채굴 사업을 벌이지만 돈은 하나도 벌지 못하고 망한다. 그 후로 둘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는데 서로를 잊지 못하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 주인공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된 조르바를 추억하는 연대기를 쓴다. 그리고 원고를 탈고하던 날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아래는 그 내용인데 죽기 직전까지 자유분방했던 조르바의 성격이 잘 드러나있다.
저는 이 마을 교장으로 이곳 동광 주인인 알렉시스 조르바가 지난 일요일 오후 6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고자 이 글월을 올립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리 좀 오시오. 내겐 그리스에 친구가 하나 있소. 내가 죽거든 편지를 좀 써주시어,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그 사람을 생각했더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 그 사람의 건투를 빌고 이제 좀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잠깐만 더 들어요.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 성사를 하려거든 빨리 꺼지는 건 물론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려 주고 꺼지라고 해요. 내 평생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
이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부인인 류바, 저,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이)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웃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미망인 류바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어 자기 대신 경의를 표해달라고 했습니다. 미망인 말씀에 따르면 고인은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자기의 사후에는 산투리를 선생님께 드리어 정표를 삼겠다는 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망인께서는 선생님께 이 마을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시면 손님으로 그날 밤을 쉬시고 아침에 떠나실 때는 산투리를 가지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조르바는 자신의 자유와 성스러움(역설적인 성스러움)의 상징이자, 스무 살때 집을 나오면서부터 평생을 애지중지했던 악기 ‘산투리’ 를 친구에게 정표로 남겼다. 죽으면서도 친구를 생각하는 조르바의 마음이 느껴져서 읽을 때마다 눈물 나는 결말부 였다.
양귀자님의 작품 <숨은 꽃> 은 작가님의 분신으로 보이는 여주인공이 먼 고즈넉한 시골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작가였고 글을 써야 하지만 쓸 수 없는 영감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주인공은 ‘귀신사’ 라고 하는 시골의 사찰을 찾아가는 데 도중에 김종구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김종구는 배운 것도 없고 말도 험한 시골 남자로서 ‘황녀’ 라는 화류계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의 서방이다.
문자와 문학에 둘러싸여 심각한 고민만 하던 여 작가는 김종구로부터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건 김종구의 말과 행동이 원시적이지만 대단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이성을 만나면 거부 못할 매력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와 비슷한 현상이었던 것 같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정신 에너지 즉 리비도를 독자로 부터 끌어낸다. 권태에 빠져 글을 쓰지 못하던 여 작가는 작품이 내놓아야할 할 야성 에너지 – 숨은 꽃 – 을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그의 연인 황녀로부터 느꼈던 것이다. 그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찬란한 생기의 물결 같은 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에 나오는 알렉시스 조르바 역시 소설의 신경쇠약형 주인공에게 비슷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조르바는 나이 예순이 넘은 노인이지만 감각적인 힘이 충만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집시 같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아래는 그 출발에 대해 주인공과 얘기하는 모습이다. 작가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서 읽을 때마다 감탄스럽다.
“어떻게 해서 산투리를 다 배우게 되었지요?”
“스무 살 때였소. 내가 그때 올림포스 산기슭에 있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 산투리 소리를 들었지요. 혼을 쭉 빼놓는 것 같습디다. 사흘 동안 밥을 못 먹었을 정도였으니까. “어디가 아파서 그러느냐?” 우리 아버지가 묻습디다. 아버지 영혼이 화평하시기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으냐? 네가 집시냐, 거지 깡깽이가 되겠다는 것이냐?” “저는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결혼하려고 꼬불쳐 둔 돈이 조금 있었지요. 유치한 생각이었소만 그 당시엔 대가리도 덜 여물었고 혈기만 왕성했지요. 병신같이 결혼 같은 걸 하려고 마음 먹었다니! 아무튼 있는 걸 몽땅 털고 몇 푼 더 보태 산투리를 하나 샀지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바로 이놈입니다. 나는 산투리를 들고 살로니카로 튀어 터키인 레트셉 에펜디에게 찾아갔지요. 그는 아무에게나 산투리를 가르쳐 주었지요. 그 앞에 일단 넙죽 엎드리고 봤어요. “왜 그러느냐, 꼬마 이교도야.” “산투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오냐, 그런데 왜 내 발밑에 엎드렸느냐?” “월사금으로 낼 돈이 없습니다.” “산투리에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네.” “그럼 여기 있어도 좋다. 젊은 친구야. 나는 월사금을 받지 않는단다.” 나는 1년을 거기 있으면서 공부했지요. 하느님이 그 영감의 무덤을 돌보아주시기를…… 지금쯤 아마 죽었을 겁니다. 하느님이, 개도 천당에다 들여놓으신다면, 레트셉 에펜디에게도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이외다. 산투리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리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리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조르바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지 깡깽이’ 가 되지 말라고 말렸지만 이미 악기와 소리에 미쳐있던 조르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하는 ‘창피’ 는 사회의 통념이어서 족쇄가 되지만, 사람의 혼을 울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음악을 만들고 빠져서 무아(無我)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사상과 편견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느낀다. 이렇게 자유로워진 사람은 찬란한 힘을 가지는데, 이 힘이 <숨은 꽃>의 여작가도,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도 감동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