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작품을 왜 읽느냐고 물어본다면 ‘재미 있으니까’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를 뺀 나머지 장편 소설은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과 상징이 온통 얽혀 있다. 그래서 줄거리가 논리적으로 머리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재미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작가가 문학계에서 명성을 날리기 위해 일부러 난해하게 쓴 건 아니다. 문체를 이해하려면 하루키가 직접 여러 매체를 통해 말했던 사실을 종합해보면 좋다.
…머리가 그런 융통무애融通無碍의 상태가 되면 그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말을 바꾸면, 상상력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입체적으로 자유자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 거기서 내가 유념 했던 점은 우선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다양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나 이미지나 광경이나 언어를 소설이라는 용기 안에 척척 집어넣고 그걸 입체적으로 조합해 나간다. 그리고 그 조합은 통념적인 논리나 문학적인 언어와는 무관한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기본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그런 작업을 추진하는 데는 무엇보다 음악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요령으로 문장을 만들어갔습니다. 주로 재즈가 도움이 됐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재즈는 다채로운 엇박(offbeat; syncopation)과 즉흥연주(improvization)가 돋보이는 장르이다. 그래서 전통적 구조의 소설(기승전결과 명확성의)과 하루키의 소설은 클래식과 재즈 음악 만큼 차이가 난다. 또한 ‘설명하지 않는’ ‘융통무애’ 함도 중요한 시사점이다. <양을 쫓는 모험> 작품의 말미에는 세상과 동떨어진 산장이 나오고, ‘양 사나이’라는 이계의 인물이 떡 등장한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전환이 된건데, 주인공 ‘나’는 양 역할의 연극 복장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남자를 보고 놀라지도 않는다. 이런 환상이 창작과정의 융통무애하고 의지에서 벗어난(설명하지 않는) 머리에서 나온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명으로 평가 받는 프란츠 카프카는 새벽마다 혼자 글을 “마치 유령의 손에 의해 써내려 가듯 신비적인 망아 상태에 빠져” 썼다고 고백했었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라는 장편을 썼을 만큼, 글쓰기 방식에서도 둘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The Paris Review 라는 곳과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을 챈들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결합이라고 했다. 먼저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 작가이다.
하루키는 한 문학비평가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소설(양을 쫓는 모험)은 구조에 대해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습니다. 그 외로운 도시 생활자입니다. 그러면 그가 뭔가를 찾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마침내 발견했을 때, 그 무언가는 이미 손상되어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챈들러가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대화 R・챈들러, 혹은 도시 소설에 대해」『Eureka』1982년 7월호
하루키는 챈들러의 장편 <기나긴 이별>을 12번이나 읽었다고 밝혔다. <양을 쫓는 모험>과 <기나긴 이별>의 유사점은 중심 테마와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루키 작품의 공통점인 친구, 아내 혹은 연인의 상실과 <기나긴 이별>에서의 친구(테리 레녹스) 상실은 대칭된다. <양을 쫓는 모험>은 제목 그대로 전형적 추리소설의 구조 – 일본 정관계를 뒤에서 주무르는 거물의 부하를 만나고, 사라진 친구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며,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을 쫓음 – 를 따르기 때문에 챈들러 작품과 유사하다.
참고로 <기나긴 이별>의 주인공이자 챈들러 소설의 간판인 ‘필립 말로’는 셜록 홈즈 다음으로 유명한 사설 탐정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로 1942년부터 1975년까지 9개, 메이저 TV 시리즈로 1954년부터 2007년까지 6개 작품이 나옴). 말로의 성격은 하루키 장편 소설의 1인칭 주인공과 많이 닮았다. 술 담배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지만 선을 지키고, 가족과 깊은 연결 없이 혼자 쓸쓸히 지내지만, 헛된 감정의 소용돌이(허영, 질투, 증오)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대문호이다. 하루키는 특히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좋아했고, 이 길고 긴 책을 4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민음사판 기준, 3권 전집, 총 1700 페이지).
Reference : New York Times Magazine , Sam Anderson과의 대담
도스토예프스키는 대표작 <죄와 벌>에서 볼 수 있듯이 선악이 상당히 대비되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인간 심리를 탐구했다. 라스콜리니코프, 소피야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보면 작가의 분열하는 인격을 따로따로 떼어낸 분신을 보는 것 같다
결국 종합하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 기법을 쓰면서,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줄곧 다루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다는 건데, 이 말이 <양을 쫓는 모험>을 이해하는데 키 포인트가 된다.
일본 독자의 서평을 읽어보면, 이계라는 단어가 나온다. 일단 별을 등에 진 양과 양박사라는 존재도 그렇고, 마지막에 나오는 산장이라는 공간과 양사나이라는 인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계와 이계 사이에 있다.
https://sonhakuhu23.hatenadiary.jp/entry/2013/06/29/064022
이것 때문에 소설이 갑자기 만화가 된 것 같고, 이야기 흐름과 주제를 놓쳐버리게 된다. 앞서 언급한 챈들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도 이런 특징은 없고, 프란츠 카프카와는 약간 비슷한 하루키 작가의 독특한 부분이다. 이런 비현실성, 달리 말하면 마술적 리얼리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를 알면 좋다.
정신의학의 선구자 프로이트는 의식 무의식을 나누고 그걸 이드-자아-초자아로 세분화 했다. 그런데 한때 프로이트의 후계자였던 융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무의식에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영역이다.
의식 저편 아주 깊은 곳에는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건데, 이걸 수긍하면 별 모양을 품은 양이 왜 양박사에게 심어졌다가 흑막의 보스에게 넘어갔는지, 그리고 그걸 잃은 사람이 왜 빈껍데기처럼 되고, 그걸 이어받을 사람이 왜 두려워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융은 인간이 가진 사랑 증오 분노 공포 같은 감정을 에너지의 전이로 파악한 것 같다.
물리학에서도 에너지와 그것의 여러 가지 표현, 즉 전기, 빛, 열 등에 관해 말한다.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심리학도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취급한다. 말하자면 강도의 측정, 양의 많고 적음을 다룬다. 그런데 나타나는 형태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리비도를 에너지로 본다면 일종의 통일된 관점을 갖게 된다. 그러면 리비도의 성질에 관한 논쟁적인 질문, 즉 그것이 성이냐 권력이냐 배고픔이냐, 그밖의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예를 들어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가장 과학적 설명이 빅뱅(Big Bang)인데, 태초에 폭발이 있었고, 그게 한 점에서 퍼져 나갔다. 이걸 공간적 확장이라 볼 수 있지만, 에너지의 뻗어나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주의 시작처럼 정신에너지도 그렇게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개체에게 영향을 준다고 한다면 집단무의식과 비슷해진다.
융은 세계 여러 곳의 다른 문명에 공통적인 상징과 신화 그리고 개인적인 꿈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집단무의식의 근거로 삼았다. 인터넷 같은 장거리 통신이 없던 시대에, 절대 소통될 수 없는 장소들에서 각각 거의 유사한 신화가 나타나고, 비슷한 개인적 꿈을 꾼 기록도 있다는 것이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발현되고, 꿈의 상징이나 신화를 낳는 근원으로서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문제가 되는 ‘양’은 전승되어 내려오는 근원적 악으로서의 원형 ‘그림자’와 유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칼 구스타프 융 사상적 해석은 일본의 융 심리학 일인자인 가와이 하야오 라는 학자와의 대담인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에서 논의된 바 있다.
다음 글에서는 별을 등에 품은 양, 양 박사, 양 사나이, 쥐(주인공의 친구), 신비로운 귀를 가진 여자(주인공의 애인)에 대한 개별 상징 분석을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