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영화배우 이은주씨가 자살했을 때 인터넷 뉴스 댓글에는 왜 저렇게 젊고 예쁘고 명성도 있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하는 글이 많았다. 하지만 유서 내용에도 있듯이 자신이 겪는 힘듦은 자신에게만 실제적이고, 가늠이 가능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이 겪는 행복도 스스로에게만 지극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 않고, 행복을 자가 생산할 수 있으면 불행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을 누렸던 역사 인물을 생각해보면, 니체가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살아 생전 그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스스로가 자기를 인정했다. 니체의 책 <이 사람을 보라>의 목차엔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가?’ 등의 제목이 있다… 니체의 똑똑한 친구들도 니체의 글을 반 쯤 밖에 이해 못했던 것 같다. 대표적 친구인 에르빈 로데(Erwin Rohde) – 당대의 유명한 그리스 고전문헌 학자였음 – 에게 니체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짜라투스트라>로서 독일어를 완성에 이르게 했다고 자부하네. 그것은 루터와 괴테를 이은 제3의 발전이었네.
하지만 로데는 짜라투스트라 책을 힘겹게 읽었고, 그 다음으로 출간된 책 <선악의 저편>을 읽은 후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니체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직업을 갖는거야!” 라고. (니체, 그의 삶과 철학 by 레지날드 J. 홀링데일 p65)
당시 니체는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결혼할 배우자 찾는 것도 안하고, 혼자 휴양하면서 친구에게도 대중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책만 쓰고 있었다. 안정된 직업과 가정, 사회적 지위까지 있던 로데는 니체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삶이 반영된 글에도 당연히 공감하지 못했다. 자기 능력의 백 분의 일도 인정받지 못했던 니체가 어떻게 자기확신과 행복을 가졌을까는 연구해 볼만한 주제이다. 나는 <비극의 탄생> 책에 나온 아래의 구절이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현존과 세계는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미적인 현상은 사람에게 행복감을 준다. 예쁜 연예인을 보며 정줄 놓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예쁜 여자 말고 다른 수많은 사물에서 그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지금 사는 것(현존)과 주위 세상(세계)는 더 없이 만족스러워(정당화)진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하다. 최고가치의 상실에 대한 선언으로 해석되며, 꼭 기독교적 신에 대한 반대는 아니다. 이 말의 중요성은 신은 죽었는데 이제 뭘 할거냐는 것이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하나님처럼 섬기는 무언가가 있다. 출세나 재산, 외모, 사람들로부터 인정 같은 것이다. 이은주씨는 이걸 모두 가졌지만 행복을 얻지 못했었다. 누구나 나름의 가치 추구를 하고 있고, 충족받지 못하면 허무해지고 고독해진다. 니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서 영속적인 행복의 길을 찾았다.
자신의 상태를 예술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자신에게 닥친 슬픔과 고통,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모든 것을 순식간에 돌로 만들어버리는 고르고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능력이다. 그것은 고통이 전혀 없는 세계에서 유래한 시선이다. (J3, 334)
니체는 자신 생의 요소와 그 누림을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게 느꼈던 것 같다. 슬프고 우울해도, 어떤 대단한 역사나 문학 안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느끼면, 고난도 미학적 현상으로 치환된다. 주위 사람들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일자리에서 별 볼일 없는 성과를 낼 때도 즐겁게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니체는 자신의 시대에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인기가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면 가치를 창조하는데 매우 뛰어 났고, 거기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아파트 옥상에서 초등학생이 떨어뜨린 벽돌에 맞아 고양이 집을 만들던 여성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캣맘 사건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초등생은 재미 삼아 벽돌을 던졌고 우연히 아래 있던 한 사람은 그걸 맞고 죽었다. 아이 장난 때문에 막을 내린 55년의 일생은 어떤 결론을 전하는 걸까? 그녀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 노력했고 또한 좋은 딸이 되기 위해서,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도 적당한 고민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3차원 세계의 어느 한 점에 우연히 당도했고 그 지점 바로 위에는 질량과 속도를 띠고 낙하하는 물체가 있었다.
우연은 아무 필연성이나 도덕 관념 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이나 주변인은 그 의미를 물을 수 밖에 없다. 밀란 쿤데라는 우연과 타성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인간의 일생을 탐구하려 했다. 그가 먼저 화두로 던진 것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다.
영원한 재귀, 이 신화는 그것의 부정적 이면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다. 영원히 사라져 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삶이 아무리 잔인했든, 아름답거나 찬란했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잔인함, 아름다움, 찬란함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조금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작품에서는 가벼움을 한 번으로 사라질 삶으로 보고, 무거움을 영원히 반복될 삶(니체의 영원회귀가 구현되는)으로 보고 있다. 한 번으로 사라질 삶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띤다. 캣맘 사건같은 치가 떨리는 우연으로 소중한 인생이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변할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그걸 대변할 사건들도 차례로 펼쳐진다. 그냥 보면 가십으로 지나칠 사랑 이야기를 존재에 대한 의미로 풀어낸 작가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토마스란 남자와 테레사라는 여자가 보여주는 사랑은 절대적 필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걸어가다 위에서 날아오는 벽돌에 맞는 것 같은 우연일 수도 있다. 작품의 묘미는 그걸 곰곰이 생각해 보는 데 있다.
나이가 있지만 매력적인 의사인 토마스가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된 테레사를 만나기까지는 6번의 우연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작은 도시에서 뇌병 케이스 환자가 생긴 것, 두 번째는 그 도시로 파견 나갈 외과 과장이 좌골 신경통에 걸려서 토마스가 대신 나가야 했다는 사실. 세 번째 우연은 토마스가 묶을 가능성이 있던 5개의 호텔 중 테레사가 일하는 레스토랑이 있던 호텔이 선택되었다는 것, 네 번째는 토마스가 프라하로 돌아갈 기차를 타기 전에 조금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 다섯 번째는 그 시간이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는 시간이었다는 것. 마지막 여섯번째 우연은 테레사가 토마스의 식탁 시중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우연의 집합은 토마스와 테레사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 여섯 개 우연 중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두 남녀가 부부가 될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연에 의해 형성된 운명에 꼭 계속 따라야 하는 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먼저 이 질문이 나오게 만든 부부의 사정을 살펴보자.
1968년 소비에트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국의 군대는 체코 프라하를 침공한다. ‘인간 얼굴을 한 공산주의’ 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던 두브체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체코의 전국은 아주 쉽게 점령되고 두브체크가 추진하던 개혁 조치는 모두 무효화 된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대중의 생각을 하나의 모범 틀에 맞추려는 공산주의의 꼴통 정책을 시작한다. 많은 지식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저항으로 대규모 해외 이주의 물결이 생겼다. 토마스도 스위스 취리히의 병원에서 좋은 자리를 제안 받고 테레사와 함께 국외로 망명한다.
하지만 테레사는 낯선 국가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국외로 나와서도 에로틱한 우정(erotic friendship) 습관에 따라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남편 토마스에게도 지친다. 어느날 테레사는 작별의 편지를 남겨둔 채 국경을 넘어 체코로 돌아가 버린다. 당시 체코는 소비에트 군에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테레사가 입국했다는 사실은 북한 국경을 넘어 들어간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는 뜻이다.
혼자 취리히에 남은 토마스는 심각한 고민을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여섯 번의 우연한 사건의 결과인 테레사와의 결혼 관계를 이 기회에 끝낼 것인가? 이 경우엔 공산주의의 박해도 없는 취리히 병원에서 명망있는 의사로 에로틱 프렌드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 아니면 존재의 무거움에 가치를 두고 떠나간 아내를 쫓아 돌아갈 수 없는 국경을 도로 넘어갈 것인가?
이 선택의 고난을 작가는 세련된 음악 테마로 표현했다. 쿤데라의 아버지는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 였고 쿤데라 자신도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던 것 같다. 소재가 된 베토벤의 악장의 모티브는 독일어로 ‘Es muss sein’,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래는 토마스가 자기를 아끼는 취리히 병원의 원장과 독대하는 장면이다.
원장은 실로 당황했다.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암시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곡 마지막 악장은 다음의 두 모티브에 따라 작곡되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렇게 해야 하나? 그렇게 할 수밖에! 그렇게 할 수밖에!
이 말의 의미를 아주 명확히 하기 위해 베토벤은 이 마지막 악장의 제목을 <힘겹게 내린 결심> 이라 붙였다. 베토벤에 대한 이러한 암시로 토마스는 근본에 있어서 이미 테레사에게 되돌아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베토벤의 4중주와 소나타를 담은 전축판 구입을 관철시켰던 것은 테레사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암시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병원장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조용히 베토벤의 멜로디에 맞추어 말했다. ‘그렇게 해야 하나?’ 토마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그렇게 할 수밖에요’
파르메니데스와는 다르게 베토벤에게는 무거움이 명백히 어떤 긍정적인 것이었다. <힘겹게 내린 결심>은 운명의 소리(그렇게 할 수밖에!)와 연관되어 있다.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 만이 가치가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의심해본다. 정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하고.
물리시간에 학생은 어느 누구나 실험을 통해 어떤 학문적 가설이 맞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평생을 살 뿐이다. 그에게는 가정의 정당함을 실험을 통해 증명할 가능성이 없다. 그 때문에 자기 감정을 따랐던 것이 옳았는가 아니면 잘못 되었는가를 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의지와 운명에 가치를 두고 테레사를 되찾으러 국경을 넘기로 했다. 영원회귀 사상은 운명애(運命愛; Amor Fati)로 인해 시작되는데, 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면서도 니체의 말을 믿어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사랑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아름답게 몰락하게 된다.
니체가 바그너를 좋아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니체는 피아노 연주를 할 줄 알았고 작곡을 하기도 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도 음악을 좋아했는데, 니체도 그랬다. 집단의 가치관인 사상을 창조하는데 있어 예술적 감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니체에게 예술은 사상과 따로 분리된 게 아니었고, 예술이 사상이고 사상이 예술인 경지를 추구했다. 사상이 머리 속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표현되면 무용이 되고, 리듬과 멜로디로 조화되면 음악이 된다.
현대 무용의 선구자인 이사도라 던컨은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데, 무용에서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작으로서의 최초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 을 추구했다. 또한 ‘귀에 들리지는 않으나 어떤 분명한 리듬에 의해 생겨나는 듯한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 을 말하기도 했다. 던컨의 말은 니체가 얘기한 근원 정신과 연결되는 무아無我의 예술 을 잘 표현한다.
근사한 음악을 들으면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달콤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이런 무아의 상태에서 니체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을 읽는 사람도 만약 교감이 잘된다면 이런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 아래는 뤼디거 자프란스키作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에서 옮긴 구절인데 한 번 읽어보자.
니체는, 하나의 사상이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서 아름답고 인상적인 외관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언어의 외적인 스타일에 대한 감각을 니체는 우리가 육체를 통해서 얻게 되는 느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언어에 반응하는 것과 우리 몸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도 경쾌하고, 활동하고자 하는 활기찬 욕망이 생기는 경우에서부터 늘어지고 심지어는 욕지기가 나오는 경우까지 겪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감동시키는 문장을 추구했으며, 이러한 문장을 걸으면서 구상했는데 그것은 리듬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종종 그는 자신의 사고를 만들어내고 언어를 만들어낼 장소를 탐색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어보면 작품 전체가 산문(散文)이 아닌 운문(韻文)으로 된 시처럼 느껴진다. 니체가 좋아한 그리스의 술 주정뱅이 신 디오니소스의 정신이 미친 시인을 통해 암송되는 것 같다.
이터널 선샤인 이라는 영화의 이름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 ‘Eloisa to Abelard’ 에서 따왔다.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는 실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기계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는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기억을 지웠는데, 그걸 모르던 남자는 간만에 만난 여인이 자신을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잊혀지지 않는 장면).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여자와 똑같은 방법을 써서 자기 기억도 지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감이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는 탓인지 모르지만, 다시 만난다. 처음 우연히 마주쳤던 기차가 닿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우해서 다시 똑같이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의 상징과 결말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잘 통하는 면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태양은 신神, 절대자, 하나님을 상징하고, 영원한 햇살은 영원한 사랑, 즉 아가페가 된다.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구절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영원한 사랑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 은 영원회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 옮겨온 구절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사랑에 제대로 빠져있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 둥둥 떠다니는 것 같고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다. 그런 순간에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이 끝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티끌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본질 안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고, 자신의 공부와 일과 이상(理想)을 포함하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랑이 영원히 돌아온다면 영원회귀가 된다. 니체는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 라는 말을 했는데, 모든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아무런 주저(티끌) 없이 자기 삶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애를 이룬 사람이다. 이 운명애가 극진해지면 영원회귀로 들어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절들을 읽어보자.
그러나 내가 엮어져 있는 인과의 매듭은 영원히 회귀한다. – 그것이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 회귀의 그런 원인들의 일부인 것이다. 이 태양과 더불어, 이 대지와 더불어, 이 독수리와 더불어, 이 뱀과 더불어, 나는 다시 돌아오리라. 새로운 삶, 혹은 보다 나은 삶이나 유사한 삶으로가 아니라, 최대의 것에 있어서나 최소의 것에 있어서나 지금과 동일한 이 삶으로 나는 영원히 돌아오리라. – 다시 한 번 만물의 영원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 또다시 대지와 인간의 위대한 정오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금 인간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
나와 내 운명은 오늘을 향해 말하지 않으며, 결코 오지 않을 날을 향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미 말을 하기 위한 인내와 시간,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와야 하며 결코 지나쳐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와야 하며 그냥 지나쳐 가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위대한 하자르, 우리들의 거대하고 먼 인간제국, 차라투스트라의 천년왕국이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다시 살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고스란히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 성립하고 이것이 영원회귀의 근거가 된다. 극진한 시간에서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영원이 된다. 설령 기억이 지워진다해도 의지는 같은 운명을 다시 만들어 낸다. 마치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들 처럼. 그래서 영원한 회귀 안에서는 생성이 그 자체로 시간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난과 시련이란 이름의 마차를 타고
폭풍 이는 벌판 위에 영원히 피어나라
Wake up, my queen 첫 눈물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운명의 주인이여
너 홀로 의지의 배를 타고 내게로 오라
이 영겁의 고독에서 몸부림치는
날 구해다오
넥스트(N.EX.T)의 ‘사탄의 신부(新婦)’ 라는 곡의 가사이다. 이제 고인이 된 신해철님은 철학과 출신 답게 실존주의 분위기의 가사를 자주 썼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운명의 주인이여’ 라는 부분에서 항상 감동을 받았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된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니체 해설서를 많이 쓴 고병권 작가님의 책 구절을 읽어보자.
우리가 니체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의미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게 아닐까. 그러나 니체는 적어도 자기 삶의 많은 순간들에서 주인이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했다. 스스로를 돌이켜 봤을 때, 인생의 처음 20년 정도는 외부에서 정해놓은 가치와 규범에 복종했던 삶이었다. 너무 당연한거라 느끼고 의식도 못하고 있었지만 삶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중산층으로 태어나 학벌을 만들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하지만 그렇게 정해진 생을 사는 건 결국 허무의 문제를 불러온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필요가 있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에는 우선 자기 운명은 멋진 것이라는 함의가 있고, 또 그것의 주인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자신감도 담겨있다. 내 운명은 거지같이 살다가 거지같이 죽는거야 라고 믿는 운명의 주인은 없다. 그렇다면 니체 자신이 생각한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읽으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나의 이름에는 엄청난 사실이 추억으로 연상이 될 것이다. 즉 세상에서 전대미문의 대 위기와 가장 심원한 양심의 갈등, 그리고 이제까지 신뢰되고 요구되었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거역하여 만들어졌던 결정에 대한 추억 말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스스로를 새 시대의 사상적 구원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거나 그마저 넘어서는. 그래서 앞으로도 기독교계로부터는 영원히 욕을 먹을 것 같다. 니체는 이렇게 거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는 지구와 별처럼 떨어진 사색을 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로 들리는 니체의 저작들은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니체는 정신을 해방시키는 종교의 교주였다.
너는 너 자신의 주인, 또한 네 덕성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덕성이 너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도구일 뿐이다. 너는 자신의 의사 결정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네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모든 가치 판단을 할 때 미래를 지향하고 고려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깨달음을 주는 니체의 말이다. 덕성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정해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상황을 예로 들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 등이다. 당연하게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옳은지 생각도 안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절실히 깨닫은 목표의식이 없다면 그건 노예의 덕성이다. 왜 공부하는지, 왜 일하는지, 왜 이념을 수호해야 하는지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결국 허무의 문제가 찾아온다. 높은 목표를 찾으면 노예의 덕성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예전에는 강박이고 피로를 주던 덕성이 이제는 필요할 때 쓰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 목표의식은 자신의 운명을 찾았을 때만 충족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극단적인 사람들이 대조를 이루며 많이 등장한다. 창녀로 일하지만 아주 순수하고 따뜻하면서 의지도 강한 사람(‘죄와 벌’의 소냐), 열등감과 폭력성이 뒤섞여 음산해 보이는 사람(‘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스메르쟈꼬프), 겉으로는 깔끔한 신사지만 성욕이 충만하고 태연히 살인을 하는 사람(‘죄와 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등. 도스예프스키는 사람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인격(기독교적으로 보면 천사와 악마)를 몇 개 극단적인 분신으로 분리해 작품 주인공으로 만든 것 같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니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안 어울려 보이지만 둘 다 뛰어난 심리 탐구자인 건 같았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심리학자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니체는 소용돌이치는 공포, 불안, 열등감, 애정 같은 마음의 물결을 물리학자가 역학을 분석하듯 분석해냈다. 프로이트와의 융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도 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세상에 나왔는데, 읽어 보면 니체가 이미 자아와 에고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자아는 항상 듣고 항상 살펴봐.
자아는 비교하고 억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하지.
자아는 지배해. 에고 역시 자아의 지배를 받지.
형제들! 자네의 생각과 느낌 뒤편에는
뛰어난 사령관, 숨겨진 현자가 버티고 있어.
이 사령관, 이 현자가 바로 자아라고 불려.
자아는 자네 몸 안에 살아.
자아가 바로 자네 몸이야.
자네 몸에는 자네 머리로 짜내는 어떤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존재하지.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서 이드-에고-슈퍼에고 로 이어지는 상하 구조를 고안해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 – 중재자 – 고차원적 도덕으로 높이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위행위를 죄로 보는 것 같은 보수적이고 계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반면 융은 좀더 낭만주의적이었는데, 정신을 같은 층위에 있는 다른 개성을 지닌 원형(元型, Archetype)들로 파악했다. 상기 인용구에 나오는 ‘자아’ 는 초월적 지혜를 가진 존재로 융의 늙은 현자 원형과 같은 말이다.
니체는 마음의 구조과 운동을 분석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정신의 내적 본질은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 이고 또한 어둡고 다이나믹한 욕망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지성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그것(번개, 폭풍우, 우박)들, 즉 순수한 의지는 얼마나 행복하고 힘찬 것인가!” 라고 썼다.
번개나 비바람 같은 사물은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단순에, 화살처럼 날아가는 정신을 표현한다. 이렇듯 욕망이나 사랑, 집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운명을 이루는 데 쓴 것이 차라투스트라이다. 이런 집중은 인간에게 자아가 전 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초월감을 준다. 초인(超人,Ubermensch)은 겉모양이 펑하고 바뀌어서 되는게 아니라, 정신이 탈피하는 것이고 의식 과정이 변해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대로 새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나는 것과 같다. 헤세나 융, 카잔차키스 같은 이들은 저서에서 니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했는데, 그의 사상이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는 재생과 부활을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