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십 년 동안이나 세상을 떠나 산 위에서 생활했다. 아무리 애완동물(?)인 독수리와 뱀이 있다 해도 너무 쓸쓸한 생활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썩은 도사는 아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엄청난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불교 기준으로 보면 ‘열반’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갔다. 역자의 설명으로 보면 개인의 자유를 막는 무지와 편견을 넘어서 무한한 자유를 느꼈으며, ‘나다운 존재’ 즉 초인이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정신의 분신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뭘 깨달았는지 알아보려면 먼저 니체 인생의 궤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친할어버지 모두 목사였고, 어머니 또한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의 아버지는 니체가 4살이 되던 해에 뇌질환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20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자식들을 위해 재혼하지 않고 가정을 꾸려나가기로 결정한다. 니체의 가정에는 아들 니체를 빼면 모두 여자만 남게 되었는데, 할머니, 어머니, 미혼의 고모 두 명 그리고 여동생이었다. 이렇게 니체는 기억이 시작되는 나이 때 부터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한다. 어머니 프란치스카(Franziska)의 아들에 대한 기대와 염원은 대단했다. 게다가 여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도 니체에게 단순한 친 오라버니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모양이다. 이 두 여성은 모두 니체가 기독교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랬다. 니체는 이런 염원에 적응하는듯 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넌더리나는 혐오로 반응한다. 아래는 그의 작품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온 구절인데 한 번 읽어보자.
나와 가장 반대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즉 예측할 수 없는 본능적인 저속한 인간을 생각하면, 나의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기꾼들과 내가 친척이라는 것은 나의 신성에 부담이 된다.
작품 속에서 친 어머니와 동생을 이렇게 극딜한 작가는 아무도 못 본것 같다. 아무튼 니체는 솔직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의 어머니 혐오에는 고루한 기독교 교육에 대한 반발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깨달음도 신으로부터의 탈출, 독립으로 시작한다. 짜라두짜는 한 때 자신이 생각했던 신의 이미지에 대해서 회상한다. 아주 시적인 음율을 따라서…
그 당시엔 세상은
하나님이 꾸는 꿈, 하나님이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마음이 불편한 하나님이 스스로 위안 받기 위해
자기 눈앞에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선과 악>, 기쁨과 슬픔, 나와 너…
이런 것들은 창조주가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하나님은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지.
그래서 세상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지.
고통 받는 존재에게는 잠시 자기 고통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찔한 즐거움이지.
하나님이 아찔한 즐거움에 취해 자신을 잊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고 생각했어.
이 세상은 영원한 모순이라고,
아니, 그 모순조차 영원토록 불완전하게 보여 주는 이미지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 자신 불완전한 창조주에게는 아찔한 즐거움이라고
나는 한때 생각했지.
짜라두짜가 생각한 창조주는 ‘권태’의 면이 두드러지는 존재이다.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서 세상을 만들고, 고통에서 눈을 돌리며 아찔한 즐거움을 느낀다. 창조주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모순의 세상을 창조할 수 밖에 없었다. 짜라두짜는 신의 모습을 비판하고는 자신이 어떻게 신을 뛰어넘었는지를 말한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었냐고?
고통 받는 존재 짜라두짜는 자신을 넘어섰지.
마음이 타 버려 생긴 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지.
그리고 더 밝은 불꽃을 만든 거야. 무슨 일이 벌어졌겠어?
그 망령은 내게서 도망 가더군!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들은 감히 별과 같은 존재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거야.
여기서 ‘타 버려 생긴 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참회(懺悔)를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인간은 원죄를 지었으니 뉘우침이 있어야 하고, 그건 절대자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원죄라는 생각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생생하게 체험될 수 있을까? 적어도 짜라두짜에게는 아니었다.
짜라두짜는 참회의 방법을 쓰지 않고 자신의 불꽃을 만들어서 헛된 망령(망상)을 쫓아냈다. 불꽃이란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열정이나 갈망을 비유한 것이다. 니체는 작품 속에서 줄곧 ‘춤추는 신’ 이나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한다. 춤춘다는 건 무아(無我)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의 주신(酒神)으로 역시 도취, 무아, 광기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술에 만취했을 때나, 장중한 음악에 압도되었을 때 빠질 수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자아의 경계가 모두 없어지고 한 없이 자유로워지는 그런 차원에 니체는 관심을 가졌다.
니체는 사람들이 기독교 설교자가 정해놓은 신앙에서 벗어나 ‘춤추는 신’ 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차원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고민에 치여 목적도 운명도 잃어버린채 지내고 있다. 실존이 없기 때문에 생이 허무해지고, 쉽고 자극적인 것에만 빠진다.
이런 상황을 탈출하는 것으로 니체가 제시한 방법은 먼저 정신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의 역동을 이해해서, 그걸 운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의식과 전의식을 분석해냈었다. 니체가 말하는 정신의 여정이 어떤 것인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는지 저렇게 말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오랫동안 괴로웠다. 그렇다고 그냥 읽으면 느껴지듯 헛소리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앙드레 지드, 토마스 만, 카를 융 – 모두 한결 같이 니체를 좋아했고 그를 찬양했다.
니체는 24세의 나이에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바젤 대학교’ 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그 정도 천재성이 녹여져 있는데다 낯선 서양 인문고전 지식(그리스 신화, 헤겔과 쇼펜하우어 철학 등등)이 더해져 집필된 Also sprach Zarathustra를 이해하는건 힘들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상이기도 하다. 그가 하는 말에는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건 새장에 갇힌 새를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 같이 큰 힘이다.
오르지 못할 산 같던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는데 큰 짐을 덜어 주었던 책이 ‘박성현’ 님 번역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였다.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보다 경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짜라두짜’ 는 독일어 원문의 발음 음절과 운율에 맞춘 가장 자연스러운 이름이라고 한다. 계속 읽다보면 더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들린다. 먼저 이 책 서문에 나오는 니체의 철학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자.
니체의 철학은 단순 명쾌하다. 그의 화두는 다음 세가지 질문과 답으로 정리된다.
첫째, 개인 실존의 자유는 무엇을 위함인가?
“나다움에 이르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둘째, 진실은 어떤 쓰임새를 가진 것인가?
“진실인가 아닌가에 비추어 현재의 입장, 이해관계, 편견을 넘어설 때 ‘나다운 존재’ 가 될 수 있다. 진실은 ‘나’ 가 ‘나다운 존재’ 가 되기 위해 사용된다.”
셋째, 우리는 왜 ‘나다운 존재’ 가 되기 원하나?
“생명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 원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가 바로 ‘나다운 나’ 이다.”
그의 철학은 위 세가지 화두 때문에 어렵다. 위 세가지 화두를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니체는 야만인, 광인, 깡패로 느껴진다. 또한 니체는 어질어질한 정도의 속도로 건너뛰며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렵다. 빛의 속도로 생각을 전개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니체는 절벽, 심연, 불길로 느껴진다.
생명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를 원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존재가 ‘나다운 나’ 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않고 머물러 있는 사람은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짜라두짜 역시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른 살 때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적 삶을 시작한 의미심장한 나이이다. 짜라두짜는 산에서 십 년 동안이나 고요한 정신의 기쁨을 즐긴다. 이렇게 오래 사람 없이 지내도 미치거나 외로움에 빠져 하산하지 않았으니 무언가 굉장한 진리를 얻은 것 같다. 짜라두짜는 새벽잠에서 깨어나 떠오르는 태양 앞으로 나가 이렇게 말을 했다.
아! 위대한 태양이시여!
만약에 당신의 빛을 누리는 존재들이 없다면
당신의 기쁨도 사그라지겠지요.
지난 십 년 동안 저의 누추한 동굴에 오셨습니다.
만약 저나, 제가 돌보는 독수리나 뱀이 없었다면
당신께서는 이곳에 빛을 쪼여 주시는 것도 지겨우셨을 겁니다.
저와 독수리와 뱀은 매일 아침 당신을 기다렸지요.
당신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누렸고 당신을 찬양했지요.
제 모습을 보십시요!
저는 지금 저의 지혜가 지겹습니다.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지혜를 너무 많이 모았습니다.
저로부터 지혜를 가져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저의 지혜를 나누어 받으면
가끔 바보 같은 짓을 범하더라도 여전히 기쁠 것이며
가난한 사람이 저희 지혜를 나누어 받으면
지금의 가난 속에서도 새로운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지혜를 너무 많이 모은 짜라두짜는 그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위대한 태양이라 할지라도 빛을 쪼여 주는 존재가 없다면 권태에 빠진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태양(짜라두짜) 혼자 빛을 지니는 것(지혜를 가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중요한 관점이다. 빛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상대적인 개념이고 태양과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짜라두짜는 산을 내려가다 노인네 성자를 만나는데, 그는 하산을 만류한다. 하지만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광인에 가깝게 지혜로웠던 니체가 인식한 자신의 숙명이다. 스스로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몰락(하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