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음과 은총 恩寵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반대를 보고 있지만 서로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몰이해와 경멸은 명확한 상처를 남기는데 이 상처는 따뜻함이라는 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만일 상처가 없다면 사랑도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짝이 맞지 않는 힘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반대되는 힘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정인이 요한이 가진 성숙함에 끌렸던 건 박탈당하고 있었던 부모의 정이 그리워서였다고 할 수 있다.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은총을 베풀 가능성을 지닌 다른 어른 집단이었다. 하지만 늘 딴 생각에 빠져 있고 성적도 별로 였던 정인은 선생님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아니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몸은 교실에 있고 눈은 먼 산에 마음은 환상의 나라로 여행 가있던 정인을 갑자기 선생님이 부른다. 산수가 전공인 남자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는 삼각함수에 관한 질문을 하나 던졌고 정인의 얼굴은 곧 새하얗게 질렸다.
중년의 삐쩍 마른 담임은 떠듬떠듬 말 안 되는 대답을 하고 있는 정인을 몇 초간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정인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고 흔들었다. 정인의 머리는 사물놀이 광대처럼 휘저어졌다. 50명 정도 되는 반 아이들 눈 앞에서 이런 꼴을 당하는 건 수치심을 더해주었다. 하지만 아이의 공포와 굴욕감은 머리칼을 쥐고 흔드는 중년 남자에게 어떤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지배욕이나 파괴본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욕망이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 또한 반대되는 힘의 균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거칠던 국민학교 시절의 담임 선생님 중에 정인을 아껴주었던 분이 한 명 있었다. 까만 뿔 테 안경이 단정했던, 똑똑하고 부드럽게 생긴 4학년 담임 여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처음 정인을 주목하게 된 건 그가 역사 지식이 뛰어난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일본 만화책을 모두 불태운 이후로 교양 역사책만 읽었던 정인에게 국민학교 국사는 아주 쉬운 것이었다. 선생님은 국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가끔 던졌는데 키가 작아서 분단 맨 앞에 앉아 있던 정인은 수줍지만 정확한 대답을 매번 내놓았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감탄하는 표정으로(이건 꼬마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정인을 칭찬해주었다.
어른 정인은 지금도 경애 敬愛의 마음을 가지고 국민학교 4학년 담임 여자 선생님을 떠올린다. 그분의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는 정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여기서 품어준다는 것의 의미는 사람 그대로를 사랑해준다는 뜻이다. 나이 열 살의 아이도 자기를 품어주는 사람과 자기를 들볶을 사람을 금새 구분할 줄 알았다. 민감한 판별 능력은 정인과 엄마의 비극에서 비롯된 사실이다. 엄마는 공부 못하고 빈둥대는 정인이라는 존재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조건을 내세워 정인에게 공부의 동기를 주려 했다. 정인은 ‘먼나라 이웃나라’ 라고 하는 외국 역사 만화책을 동네 도서관에서 읽고 흠뻑 빠졌었다. 어머니에게 사달라고 졸라 보았지만 대답은 한결 같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사준다는 것이다. 정인의 성적은 반에서 25등 정도였고 몇 년간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게 10등 안에 든다는 것의 의미는 신의 영역에 들어가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국민학교생 동안 정인이 부모의 은총을 바랬던 대상은 먼나라 이웃나라 책 외에도 레고 장난감, 현미경 겸 망원경, 금붕어 어항, 아디다스 운동화 등등이 있었다. 하지만 정인은 10등 근처도 못 갔기 때문에 모두 얻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인과 접촉 자체가 별로 없었지만 마음이 같음은 잘 알 수 있었다. 정인의 국민학교 졸업식 날 꼬마는 6년 개근상이라는 자랑스러운 상을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그걸 보고 아버지가 금방 뱉은 말은 정인의 인생 전체에 긴 울림, 은은히 맴도는 메아리를 주었다. “우등상은 없니?”
조건적 사랑과 비조건적 사랑을 대변하게 된 두 인물은 정인의 꿈에 같이 등장한다. 엄마는 한 손에는 레고 장난감을 다른 한 손에는 먼나라 이웃나라 책을 들고 있었다. “공부를 잘 하면 사줄 거야” 이러면서. 정인은 헤라클레스와 거북이의 관계처럼 선물에 다가가려 하면서 결코 당도할 수 없었다. 공부의 세계는 그토록 오묘했다. 신의 은총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을 정인은 양 손에 유혹의 선물을 든 엄마의 꿈을 꾸며 느끼고 있다. 반대로 담임 선생님은 정인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정인이는 어쩜 이렇게 얌전하고 선생님 말을 잘 들을까.” 정인은 꿈 속에서 확고하게 느꼈다. 만일 선생님이 곤란한 일이 생겨서 “정인아 네 생명이 꼭 필요하게 되었단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서슴없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