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흘러가는 물건 같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다.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타성적이다. 트랙 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대학생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고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3개월 정도 되는 시험 준비 기간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고 혼자 공부를 했다. 공부를 시작 했을때 공기는 따뜻했고 창 밖의 나뭇잎은 초록색이었다. 두어달이 지나자 차가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고, 갈색으로 마른 잎새들이 마음을 아주 울적하게 만들었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했었다. 이건 네 미래를 위한거야. 내 꿈을 위한 거야. 하지만 그런게 무슨 의미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살면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감사의 꽃다발을 받지도 않는다. 신이란 존재는 보이지 않고 누군가가 확실하게 증명해 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품은 갈망은 정당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청춘을 넘어선 사람으로, 안정된 사회적 지위와 아내와 그리고 두 아이까지 있는 증권 중개인이다. 내 나이에 화가를 지망했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그가 화가를 지망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솔직해지고 싶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나는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대화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런 가능성은 만에 하나입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무 결실도 없이 결국 단념해야 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래도 나는 그리지 않을 수 없소” 그는 되풀이했다.
“그럼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삼류 화가로 그친다면, 그래도 모든 걸 버린 만큼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바보로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뻔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바보라면 뭐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애 쓸 것 아니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의 구절이다.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의 삶을 모태로 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중년의 나이에 안정된 증권거래소 중계인의 자리를 버리고, 아내와 자식들도 같이 내버려두고 가난한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아내는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나서 다른 나라로 떠난 걸로 생각하고는 한 젊은이(작품의 화자)를 보내 남편을 찾게 한다.
화자는 사회적 상식을 논거로 삼아 스트릭랜드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그는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림이 주는 미(美)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건 예쁜 여자에게 빠진 것처럼 확고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혹은 스트릭랜드가 말한대로 물에 빠져 살기 위해 허우적대는 사람과도 같았다. 안 그러면 죽기 때문에(그림을 안 그리면 너무 괴로우니) 노력하는 것이다.
아무튼 가을 바람이 차가웠던 외로운 날 나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 이념, 혹은 늘 절실한 감정이 쏠리는 방향은 정해졌기 때문에 그걸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밥 먹는 것을 아무리 미루어도 결국에는 먹을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그건 당연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