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이라는 영화의 이름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 ‘Eloisa to Abelard’ 에서 따왔다.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는 실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기계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는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기억을 지웠는데, 그걸 모르던 남자는 간만에 만난 여인이 자신을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잊혀지지 않는 장면).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여자와 똑같은 방법을 써서 자기 기억도 지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감이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는 탓인지 모르지만, 다시 만난다. 처음 우연히 마주쳤던 기차가 닿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우해서 다시 똑같이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의 상징과 결말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잘 통하는 면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태양은 신神, 절대자, 하나님을 상징하고, 영원한 햇살은 영원한 사랑, 즉 아가페가 된다.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구절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영원한 사랑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 은 영원회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 옮겨온 구절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사랑에 제대로 빠져있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 둥둥 떠다니는 것 같고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다. 그런 순간에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이 끝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티끌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본질 안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고, 자신의 공부와 일과 이상(理想)을 포함하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랑이 영원히 돌아온다면 영원회귀가 된다. 니체는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 라는 말을 했는데, 모든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아무런 주저(티끌) 없이 자기 삶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애를 이룬 사람이다. 이 운명애가 극진해지면 영원회귀로 들어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절들을 읽어보자.
그러나 내가 엮어져 있는 인과의 매듭은 영원히 회귀한다. – 그것이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 회귀의 그런 원인들의 일부인 것이다. 이 태양과 더불어, 이 대지와 더불어, 이 독수리와 더불어, 이 뱀과 더불어, 나는 다시 돌아오리라. 새로운 삶, 혹은 보다 나은 삶이나 유사한 삶으로가 아니라, 최대의 것에 있어서나 최소의 것에 있어서나 지금과 동일한 이 삶으로 나는 영원히 돌아오리라. – 다시 한 번 만물의 영원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 또다시 대지와 인간의 위대한 정오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금 인간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
나와 내 운명은 오늘을 향해 말하지 않으며, 결코 오지 않을 날을 향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미 말을 하기 위한 인내와 시간,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와야 하며 결코 지나쳐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와야 하며 그냥 지나쳐 가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위대한 하자르, 우리들의 거대하고 먼 인간제국, 차라투스트라의 천년왕국이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다시 살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고스란히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 성립하고 이것이 영원회귀의 근거가 된다. 극진한 시간에서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영원이 된다. 설령 기억이 지워진다해도 의지는 같은 운명을 다시 만들어 낸다. 마치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들 처럼. 그래서 영원한 회귀 안에서는 생성이 그 자체로 시간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극단적인 사람들이 대조를 이루며 많이 등장한다. 창녀로 일하지만 아주 순수하고 따뜻하면서 의지도 강한 사람(‘죄와 벌’의 소냐), 열등감과 폭력성이 뒤섞여 음산해 보이는 사람(‘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스메르쟈꼬프), 겉으로는 깔끔한 신사지만 성욕이 충만하고 태연히 살인을 하는 사람(‘죄와 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등. 도스예프스키는 사람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인격(기독교적으로 보면 천사와 악마)를 몇 개 극단적인 분신으로 분리해 작품 주인공으로 만든 것 같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니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안 어울려 보이지만 둘 다 뛰어난 심리 탐구자인 건 같았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심리학자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니체는 소용돌이치는 공포, 불안, 열등감, 애정 같은 마음의 물결을 물리학자가 역학을 분석하듯 분석해냈다. 프로이트와의 융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도 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세상에 나왔는데, 읽어 보면 니체가 이미 자아와 에고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자아는 항상 듣고 항상 살펴봐.
자아는 비교하고 억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하지.
자아는 지배해. 에고 역시 자아의 지배를 받지.
형제들! 자네의 생각과 느낌 뒤편에는
뛰어난 사령관, 숨겨진 현자가 버티고 있어.
이 사령관, 이 현자가 바로 자아라고 불려.
자아는 자네 몸 안에 살아.
자아가 바로 자네 몸이야.
자네 몸에는 자네 머리로 짜내는 어떤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존재하지.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서 이드-에고-슈퍼에고 로 이어지는 상하 구조를 고안해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 – 중재자 – 고차원적 도덕으로 높이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위행위를 죄로 보는 것 같은 보수적이고 계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반면 융은 좀더 낭만주의적이었는데, 정신을 같은 층위에 있는 다른 개성을 지닌 원형(元型, Archetype)들로 파악했다. 상기 인용구에 나오는 ‘자아’ 는 초월적 지혜를 가진 존재로 융의 늙은 현자 원형과 같은 말이다.
니체는 마음의 구조과 운동을 분석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정신의 내적 본질은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 이고 또한 어둡고 다이나믹한 욕망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지성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그것(번개, 폭풍우, 우박)들, 즉 순수한 의지는 얼마나 행복하고 힘찬 것인가!” 라고 썼다.
번개나 비바람 같은 사물은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단순에, 화살처럼 날아가는 정신을 표현한다. 이렇듯 욕망이나 사랑, 집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운명을 이루는 데 쓴 것이 차라투스트라이다. 이런 집중은 인간에게 자아가 전 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초월감을 준다. 초인(超人,Ubermensch)은 겉모양이 펑하고 바뀌어서 되는게 아니라, 정신이 탈피하는 것이고 의식 과정이 변해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대로 새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나는 것과 같다. 헤세나 융, 카잔차키스 같은 이들은 저서에서 니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했는데, 그의 사상이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는 재생과 부활을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무슨 설문조사 결과에서 읽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대학 입시 면접에서 교수가 “이제까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무언가?” 라고 물으면 면접 학생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가장 많이 얘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에 물어보면 이걸 읽고 좋았다는 사람보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지겨웠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현 입시제도 내에서 불쌍한 고교생들은 시키는 공부를 군말없이 할 것을 압박받는다. 지금 힘든 것도, 삶의 의미도 일단 잊고, 입시 공부에 무당 접신하듯 몰두하는 것이다. 반면 <데미안>의 주제는 인간 각자가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래 옮긴 데미안 책 구절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내 가슴 속에서 치솟는 어떤 것, 나는 오로지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
내 가슴 속에서 솟는 어떤 것은 존재의 본류로부터 흘러나오는 정신이다. 형언할 수 없고, 개척되지 않았지만, 나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운명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려운 이유는 존재 본류를 가로막는 인공적인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이란 세상에 길들여지며 정신에 들어와버린 티끌 같은 것들이다.
티끌 즉 가짜 자아는 집단 가치의 형태로 들어오며, 사회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본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자아와 계속 마찰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학벌의식, 외모 컴플렉스, 명예욕 같은 것들이다. 좋은 대학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데미안에 따르면 주체적 운명의 길이 아닌, 사회가 준 숙제를 푸는 것 정도이다.
그래서 만일 고교생이 진정 <데미안>에 감동받았다면, 명문대 입시 사람 공장이 되어있는 현 교육체제 부터 비판하고, 유명 래퍼 도끼처럼 자수성가하는 예술의 길을 갈 것 같다. 하지만 늘 사회는 돌출 행동을 하는 모난 돌에 정을 맞추려 하고, 보수적인 대학입시 면접관들도 도끼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주제를 돌려 프란츠 카프카로 돌아가 보자. 카프카도 데미안이 말하는 ‘가슴 속에서 치솟는 것’ 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글쓰기’ 라고 하는 창작 행위에 중심을 두고 있다.
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몰입은 아주 순수했던 것 같다. <카프카 평전>에 실린 편지나 생전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작품 <화부>로 폰타네 문학상을 받았지만 기뻐하지 않았고, 자기 작품이 왜 빨리 유명해지지 않나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는 폐결핵에 걸려 죽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남긴 원고를 모두 불태워 줄 것을 부탁까지 했다.
그는 글 쓰는 것에 자기 존재를 걸었고, 마치 화가 반 고흐가 그림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을 보는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내게 들었던 궁금증은 ‘글쓰기’ 가 어떤 느낌을 주었길래 그렇게 일생을 걸었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한국 고교생이 하는 입시 공부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는 이주동作 <카프카 평전>에서 옮긴 내용인데 한 번 읽어보자.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행복, 능력 그리고 가능성” 을 “문학적인 것” 으로 이용해왔는데, 그가 글을 쓸 때면 슈타이너가 말하는 “천리안적인 상태”, 즉 “망아 상태” 에 종종 빠지게 되며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이 이루어지고,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모든 한계를 느낀다” 고 밝혔다.
망아(忘我) 상태는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세계와 합쳐져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말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흠뻑 젖는다든지, 사랑하는 연인을 안고 있을 때의 기분이다. 자아의 감각이 없기 때문에 아집도 없고, 천리안적인 직감을 느낀다. 이런 예술가의 육감(六感)이라 부를 수 있는 감각이 카프카에게는 ‘가슴에 치솟는 어떤 것’이었으며, 거기에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매이지 않고 예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