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정인은 그때 몰랐다. 자꾸 꾸지람을 듣고 사랑 받지 못하는 게 싫으면 사랑을 더 요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스무 살이 넘어 여자친구를 사귀고 나서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의 운명은 완전한 운에 맡겨져 있었다. 세상에 던져진 후에 만나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 줄지 안 사랑해 줄지는 행운에 따른다. 엄마 아빠가 쌓아놓은 업(業)에 따라 아이는 광대가 되기도 하고 묘기 부리는 동물 아니면 서커스 단장으로 성공도 한다. 하얗고 티 없는 피부에 히스테리가 들어와 아이들은 일찍이도 작은 악마로 변해 간다.
정인의 유년에 결정적인 ‘공포’ 를 심어 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건 ‘이승복 어린이 사건’ 이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학교 강당에 학년 전체가 모여 이승복 어린이 영화를 보았었다. 정인은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고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비는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찢어서 죽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공포감이 강당을 뒤덮고 있었다. 영화는 강원도 산골의 어느 아름다운 마을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밝은 햇살도 초록색 나무로 덮인 산골짜기도 다른 아름다운 풍경도 마지막 살인사건을 위한 무대장치가 되었다. 영화 초반부는 공산당 공비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좋은 마을을 살육의 공포에 빠뜨렸는지를 웅변해주고 있었다. 운동회를 맞아 운동장에는 이승복 어린이네 학교 아이들이 하하호호 뛰어 놀고 있다. 이승복 어린이가 나무에 올라가는데 뒤따라 올라오던 어린이가 실수로 반바지를 잡아 당기는 바람에 그의 둥그런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보통 때면 깔깔 웃는 장면이었지만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정인은 어린 나이에 이미 공포 영화가 감정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줌으로써 극한의 공포를 끌어낸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매우 험상 굳게 생긴 공산당 공비들은 어두운 밤을 타서 산골짜기 마을로 침입한다. 그리고 드디어 이승복 어린이 가족의 집에 초대도 받지 않고 난입한다. 처음부터 죽이러 들어간 건 아니어서 가족들과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눈다. 이승복 어린이가 공비 살인마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공비가 승복 어린이의 연필을 보더니 “이거 미제 맞지?” 라고 말한 것을 어린이가 “아니에요. 이건 국산이에요” 라고 대답한 게 시초였다. 공비는 이렇게 좋은 연필을 남한이 만들었을리 없다고 말하며 흥분한다. 하지만 이승복 어린이는 물러서지 않았고 급기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치명적인 말을 하고 만다.
정인은 입 안에 새빨간 피가 가득 찬 채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던 이승복 어린이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다. 북한군은 말 한마디 잘못 뱉은 아이의 입술 양쪽에 엄지 손가락을 걸고 찢어 숨통을 끊었다. 북한군은 악마를 넘어선 존재였다. 악마도 색깔은 까맣고 꼬리가 갈라져 귀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새빨간 피가 새하얗게 될 수 없듯이 북한군은 결코 좋은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악마를 능가하는 악마, 악마를 연쇄 살인으로 죽이는 악마였다!
정인이 경악에 찬 채 어두운 강당을 나와서 주위의 아이들을 살펴보니 다들 눈이 벌개져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이들이 우는 게 방금 본 공포 영화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죽은 이승복 어린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