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바그너를 좋아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니체는 피아노 연주를 할 줄 알았고 작곡을 하기도 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도 음악을 좋아했는데, 니체도 그랬다. 집단의 가치관인 사상을 창조하는데 있어 예술적 감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니체에게 예술은 사상과 따로 분리된 게 아니었고, 예술이 사상이고 사상이 예술인 경지를 추구했다. 사상이 머리 속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표현되면 무용이 되고, 리듬과 멜로디로 조화되면 음악이 된다.
현대 무용의 선구자인 이사도라 던컨은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데, 무용에서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작으로서의 최초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 을 추구했다. 또한 ‘귀에 들리지는 않으나 어떤 분명한 리듬에 의해 생겨나는 듯한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 을 말하기도 했다. 던컨의 말은 니체가 얘기한 근원 정신과 연결되는 무아無我의 예술 을 잘 표현한다.
근사한 음악을 들으면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달콤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이런 무아의 상태에서 니체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을 읽는 사람도 만약 교감이 잘된다면 이런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 아래는 뤼디거 자프란스키作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에서 옮긴 구절인데 한 번 읽어보자.
니체는, 하나의 사상이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서 아름답고 인상적인 외관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언어의 외적인 스타일에 대한 감각을 니체는 우리가 육체를 통해서 얻게 되는 느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언어에 반응하는 것과 우리 몸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도 경쾌하고, 활동하고자 하는 활기찬 욕망이 생기는 경우에서부터 늘어지고 심지어는 욕지기가 나오는 경우까지 겪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감동시키는 문장을 추구했으며, 이러한 문장을 걸으면서 구상했는데 그것은 리듬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종종 그는 자신의 사고를 만들어내고 언어를 만들어낼 장소를 탐색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어보면 작품 전체가 산문(散文)이 아닌 운문(韻文)으로 된 시처럼 느껴진다. 니체가 좋아한 그리스의 술 주정뱅이 신 디오니소스의 정신이 미친 시인을 통해 암송되는 것 같다.
이터널 선샤인 이라는 영화의 이름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 ‘Eloisa to Abelard’ 에서 따왔다.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는 실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기계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는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기억을 지웠는데, 그걸 모르던 남자는 간만에 만난 여인이 자신을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잊혀지지 않는 장면).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여자와 똑같은 방법을 써서 자기 기억도 지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감이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는 탓인지 모르지만, 다시 만난다. 처음 우연히 마주쳤던 기차가 닿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우해서 다시 똑같이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의 상징과 결말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잘 통하는 면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태양은 신神, 절대자, 하나님을 상징하고, 영원한 햇살은 영원한 사랑, 즉 아가페가 된다.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구절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영원한 사랑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 은 영원회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 옮겨온 구절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사랑에 제대로 빠져있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 둥둥 떠다니는 것 같고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다. 그런 순간에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이 끝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티끌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본질 안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고, 자신의 공부와 일과 이상(理想)을 포함하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랑이 영원히 돌아온다면 영원회귀가 된다. 니체는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 라는 말을 했는데, 모든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아무런 주저(티끌) 없이 자기 삶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애를 이룬 사람이다. 이 운명애가 극진해지면 영원회귀로 들어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절들을 읽어보자.
그러나 내가 엮어져 있는 인과의 매듭은 영원히 회귀한다. – 그것이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 회귀의 그런 원인들의 일부인 것이다. 이 태양과 더불어, 이 대지와 더불어, 이 독수리와 더불어, 이 뱀과 더불어, 나는 다시 돌아오리라. 새로운 삶, 혹은 보다 나은 삶이나 유사한 삶으로가 아니라, 최대의 것에 있어서나 최소의 것에 있어서나 지금과 동일한 이 삶으로 나는 영원히 돌아오리라. – 다시 한 번 만물의 영원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 또다시 대지와 인간의 위대한 정오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금 인간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
나와 내 운명은 오늘을 향해 말하지 않으며, 결코 오지 않을 날을 향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미 말을 하기 위한 인내와 시간,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와야 하며 결코 지나쳐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와야 하며 그냥 지나쳐 가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위대한 하자르, 우리들의 거대하고 먼 인간제국, 차라투스트라의 천년왕국이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다시 살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고스란히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 성립하고 이것이 영원회귀의 근거가 된다. 극진한 시간에서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영원이 된다. 설령 기억이 지워진다해도 의지는 같은 운명을 다시 만들어 낸다. 마치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들 처럼. 그래서 영원한 회귀 안에서는 생성이 그 자체로 시간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난과 시련이란 이름의 마차를 타고
폭풍 이는 벌판 위에 영원히 피어나라
Wake up, my queen 첫 눈물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운명의 주인이여
너 홀로 의지의 배를 타고 내게로 오라
이 영겁의 고독에서 몸부림치는
날 구해다오
넥스트(N.EX.T)의 ‘사탄의 신부(新婦)’ 라는 곡의 가사이다. 이제 고인이 된 신해철님은 철학과 출신 답게 실존주의 분위기의 가사를 자주 썼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운명의 주인이여’ 라는 부분에서 항상 감동을 받았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된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니체 해설서를 많이 쓴 고병권 작가님의 책 구절을 읽어보자.
우리가 니체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의미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게 아닐까. 그러나 니체는 적어도 자기 삶의 많은 순간들에서 주인이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했다. 스스로를 돌이켜 봤을 때, 인생의 처음 20년 정도는 외부에서 정해놓은 가치와 규범에 복종했던 삶이었다. 너무 당연한거라 느끼고 의식도 못하고 있었지만 삶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중산층으로 태어나 학벌을 만들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하지만 그렇게 정해진 생을 사는 건 결국 허무의 문제를 불러온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필요가 있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에는 우선 자기 운명은 멋진 것이라는 함의가 있고, 또 그것의 주인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자신감도 담겨있다. 내 운명은 거지같이 살다가 거지같이 죽는거야 라고 믿는 운명의 주인은 없다. 그렇다면 니체 자신이 생각한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읽으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나의 이름에는 엄청난 사실이 추억으로 연상이 될 것이다. 즉 세상에서 전대미문의 대 위기와 가장 심원한 양심의 갈등, 그리고 이제까지 신뢰되고 요구되었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거역하여 만들어졌던 결정에 대한 추억 말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스스로를 새 시대의 사상적 구원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거나 그마저 넘어서는. 그래서 앞으로도 기독교계로부터는 영원히 욕을 먹을 것 같다. 니체는 이렇게 거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는 지구와 별처럼 떨어진 사색을 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로 들리는 니체의 저작들은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니체는 정신을 해방시키는 종교의 교주였다.
너는 너 자신의 주인, 또한 네 덕성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덕성이 너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도구일 뿐이다. 너는 자신의 의사 결정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네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모든 가치 판단을 할 때 미래를 지향하고 고려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깨달음을 주는 니체의 말이다. 덕성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정해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상황을 예로 들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 등이다. 당연하게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옳은지 생각도 안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절실히 깨닫은 목표의식이 없다면 그건 노예의 덕성이다. 왜 공부하는지, 왜 일하는지, 왜 이념을 수호해야 하는지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결국 허무의 문제가 찾아온다. 높은 목표를 찾으면 노예의 덕성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예전에는 강박이고 피로를 주던 덕성이 이제는 필요할 때 쓰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 목표의식은 자신의 운명을 찾았을 때만 충족된다.
앞서 글에서 살펴본 대로, 니체는 프로이트와 융에 앞서 뛰어난 정신분석적 사유를 내놓았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힘의 원천을 ‘리비도’라고 하는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에너지라고 파악했다. 그는 이성적이지 않은 어두운 정신의 힘을 느끼고 그걸 통제하려 했다. 니체도 그 힘의 원천을 알아차렸지만 프로이트처럼 체계화하고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커다란 힘 전체를 사람의 운명을 펼치는 데 사용하려 했다. 아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책 구절을 읽어보자.
형제들! 전쟁과 전투는 악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미덕과 미덕 사이의 시기, 불신, 비방은 필요하지!
자네의 미덕 하나하나는 제각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원하거든.
미덕은 제각기 자네의 정신 전체를 원하지.
자네의 정신이 그 미덕을 알리는 전령이 되기를 원하지.
자네의 분노, 증오, 사랑이 들어 있는 에너지 전체를 원하는 거야.
짜라두짜는 미덕이 서로 다투는 전쟁을 얘기하고 있다. 사람 머리 속의 정신적인 싸움이다. 각각의 미덕은 전체 정신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데 이는 ‘분노, 증오, 사랑이 들어 있는 에너지 전체’ 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합쳐진 정신의 힘으로 최고의 운명을 쫓으려 했다. 운명은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로부터 시작하는데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운명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말은 쉽게 들리지만 실행이 쉬운 건 아닌 것 같다. 시시각각 맞이하는 상황과 그게 합쳐진 운명이 꼭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짜라두짜는 다시 도움되는 말을 해준다.
그래. 우리는 삶을 사랑하지.
하지만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거지.
나도 삶을 사랑해.
내 경우엔 나비나 비누거품 같은 것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사람들 중에 나비나 비누 거품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삶이 저주스러워 질 때도 있고 사랑스러워 질 때도 있다. 이건 얼굴 표정과 분위기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밝혀 주는 존재로 느껴진다.
이제 햇빛 아래서 날아다니는 나비와 거품을 생각해보자. 햇살은 세상을 고루 비추는 사랑과 같고 나비는 그걸 날개에 쪼이며 날아다닌다. 나비는 궤도를 따르지 않고 바람과 꽃망울을 따라 팔랑팔랑 움직인다. 비누거품 역시 자유롭게 떠다니는 존재이다. 투명한 무지개 빛을 띠며 잠시 예쁘게 빛나다 사라진다. 나비와 비누거품 둘 다 이곳 저곳에서 티없이 피고지는 사랑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삶에서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떤 모습을 나타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 에는 사랑 없이 허무에 빠진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숙사 선배인 도쿄대 법학부의 나가사와와 함께 카페나 술집을 돌아다니며 하룻밤 동침할 여자를 찾는다. 나가사와는 명문 집안 출신에 일본 최고 학부를 다니는 엘리트이다. 하지만 삶에 고차원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삶의 모든 것은 게임처럼 느껴졌다.
공부에 집중해서 어려운 고시에 합격하는 것도 안면도 없던 여자를 유혹해서 하룻밤 같이 자는 것도 자기 능력을 시험하는 게임이고, 좋은 결과에 한 번 웃으며 만족하면 되었다. 나가사와 보다는 인간미가 있던 와타나베는 그의 여자 헌팅에 동참하면서도 무언가 심각하고 의미 있는 것을 찾는다. 아래는 이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니체가 나가사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난다.
아, 숭고한 희망을 잃어버린 고귀한 사람들을 알지 …
한 번 그렇게 되고 나니까 숭고한 희망 전체에 대해 비웃고 다니더군.
찰나의 쾌락을 쫓아 뻔뻔하게 살더군.
그날 하루를 넘어서는 목표라곤 전혀 없이.
“정신 역시 감각적 쾌락일 뿐이다.”라고 말하더군.
정신의 날개가 부러진 거지.
부러진 날개가 정신에 들러붙어
날개에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정신을 온통 지저분하게 만든 거야.
한때 그들은 영웅이 되는 것을 추구했었지.
지금 그들은 쾌락에 빠져 사는 방탕아들에 불과해.
지금 그들에게 영웅이란 고통이고 공포일 뿐이지.
하지만 나의 사랑과 희망으로 자네에게 간절하게 부탁할게.
제발 자네 영혼 속의 영웅을 내치지 마!!
자네의 숭고한 희망을 간직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극단적인 사람들이 대조를 이루며 많이 등장한다. 창녀로 일하지만 아주 순수하고 따뜻하면서 의지도 강한 사람(‘죄와 벌’의 소냐), 열등감과 폭력성이 뒤섞여 음산해 보이는 사람(‘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스메르쟈꼬프), 겉으로는 깔끔한 신사지만 성욕이 충만하고 태연히 살인을 하는 사람(‘죄와 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등. 도스예프스키는 사람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인격(기독교적으로 보면 천사와 악마)를 몇 개 극단적인 분신으로 분리해 작품 주인공으로 만든 것 같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니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안 어울려 보이지만 둘 다 뛰어난 심리 탐구자인 건 같았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심리학자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니체는 소용돌이치는 공포, 불안, 열등감, 애정 같은 마음의 물결을 물리학자가 역학을 분석하듯 분석해냈다. 프로이트와의 융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도 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세상에 나왔는데, 읽어 보면 니체가 이미 자아와 에고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자아는 항상 듣고 항상 살펴봐.
자아는 비교하고 억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하지.
자아는 지배해. 에고 역시 자아의 지배를 받지.
형제들! 자네의 생각과 느낌 뒤편에는
뛰어난 사령관, 숨겨진 현자가 버티고 있어.
이 사령관, 이 현자가 바로 자아라고 불려.
자아는 자네 몸 안에 살아.
자아가 바로 자네 몸이야.
자네 몸에는 자네 머리로 짜내는 어떤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존재하지.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서 이드-에고-슈퍼에고 로 이어지는 상하 구조를 고안해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 – 중재자 – 고차원적 도덕으로 높이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위행위를 죄로 보는 것 같은 보수적이고 계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반면 융은 좀더 낭만주의적이었는데, 정신을 같은 층위에 있는 다른 개성을 지닌 원형(元型, Archetype)들로 파악했다. 상기 인용구에 나오는 ‘자아’ 는 초월적 지혜를 가진 존재로 융의 늙은 현자 원형과 같은 말이다.
니체는 마음의 구조과 운동을 분석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정신의 내적 본질은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 이고 또한 어둡고 다이나믹한 욕망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지성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그것(번개, 폭풍우, 우박)들, 즉 순수한 의지는 얼마나 행복하고 힘찬 것인가!” 라고 썼다.
번개나 비바람 같은 사물은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단순에, 화살처럼 날아가는 정신을 표현한다. 이렇듯 욕망이나 사랑, 집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운명을 이루는 데 쓴 것이 차라투스트라이다. 이런 집중은 인간에게 자아가 전 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초월감을 준다. 초인(超人,Ubermensch)은 겉모양이 펑하고 바뀌어서 되는게 아니라, 정신이 탈피하는 것이고 의식 과정이 변해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대로 새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나는 것과 같다. 헤세나 융, 카잔차키스 같은 이들은 저서에서 니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했는데, 그의 사상이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는 재생과 부활을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차라투스트라는 십 년 동안이나 세상을 떠나 산 위에서 생활했다. 아무리 애완동물(?)인 독수리와 뱀이 있다 해도 너무 쓸쓸한 생활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썩은 도사는 아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엄청난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불교 기준으로 보면 ‘열반’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갔다. 역자의 설명으로 보면 개인의 자유를 막는 무지와 편견을 넘어서 무한한 자유를 느꼈으며, ‘나다운 존재’ 즉 초인이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정신의 분신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뭘 깨달았는지 알아보려면 먼저 니체 인생의 궤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친할어버지 모두 목사였고, 어머니 또한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의 아버지는 니체가 4살이 되던 해에 뇌질환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20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자식들을 위해 재혼하지 않고 가정을 꾸려나가기로 결정한다. 니체의 가정에는 아들 니체를 빼면 모두 여자만 남게 되었는데, 할머니, 어머니, 미혼의 고모 두 명 그리고 여동생이었다. 이렇게 니체는 기억이 시작되는 나이 때 부터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한다. 어머니 프란치스카(Franziska)의 아들에 대한 기대와 염원은 대단했다. 게다가 여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도 니체에게 단순한 친 오라버니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모양이다. 이 두 여성은 모두 니체가 기독교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랬다. 니체는 이런 염원에 적응하는듯 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넌더리나는 혐오로 반응한다. 아래는 그의 작품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온 구절인데 한 번 읽어보자.
나와 가장 반대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즉 예측할 수 없는 본능적인 저속한 인간을 생각하면, 나의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기꾼들과 내가 친척이라는 것은 나의 신성에 부담이 된다.
작품 속에서 친 어머니와 동생을 이렇게 극딜한 작가는 아무도 못 본것 같다. 아무튼 니체는 솔직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의 어머니 혐오에는 고루한 기독교 교육에 대한 반발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깨달음도 신으로부터의 탈출, 독립으로 시작한다. 짜라두짜는 한 때 자신이 생각했던 신의 이미지에 대해서 회상한다. 아주 시적인 음율을 따라서…
그 당시엔 세상은
하나님이 꾸는 꿈, 하나님이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마음이 불편한 하나님이 스스로 위안 받기 위해
자기 눈앞에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선과 악>, 기쁨과 슬픔, 나와 너…
이런 것들은 창조주가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하나님은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지.
그래서 세상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지.
고통 받는 존재에게는 잠시 자기 고통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찔한 즐거움이지.
하나님이 아찔한 즐거움에 취해 자신을 잊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고 생각했어.
이 세상은 영원한 모순이라고,
아니, 그 모순조차 영원토록 불완전하게 보여 주는 이미지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 자신 불완전한 창조주에게는 아찔한 즐거움이라고
나는 한때 생각했지.
짜라두짜가 생각한 창조주는 ‘권태’의 면이 두드러지는 존재이다.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서 세상을 만들고, 고통에서 눈을 돌리며 아찔한 즐거움을 느낀다. 창조주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모순의 세상을 창조할 수 밖에 없었다. 짜라두짜는 신의 모습을 비판하고는 자신이 어떻게 신을 뛰어넘었는지를 말한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었냐고?
고통 받는 존재 짜라두짜는 자신을 넘어섰지.
마음이 타 버려 생긴 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지.
그리고 더 밝은 불꽃을 만든 거야. 무슨 일이 벌어졌겠어?
그 망령은 내게서 도망 가더군!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들은 감히 별과 같은 존재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거야.
여기서 ‘타 버려 생긴 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참회(懺悔)를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인간은 원죄를 지었으니 뉘우침이 있어야 하고, 그건 절대자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원죄라는 생각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생생하게 체험될 수 있을까? 적어도 짜라두짜에게는 아니었다.
짜라두짜는 참회의 방법을 쓰지 않고 자신의 불꽃을 만들어서 헛된 망령(망상)을 쫓아냈다. 불꽃이란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열정이나 갈망을 비유한 것이다. 니체는 작품 속에서 줄곧 ‘춤추는 신’ 이나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한다. 춤춘다는 건 무아(無我)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의 주신(酒神)으로 역시 도취, 무아, 광기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술에 만취했을 때나, 장중한 음악에 압도되었을 때 빠질 수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자아의 경계가 모두 없어지고 한 없이 자유로워지는 그런 차원에 니체는 관심을 가졌다.
니체는 사람들이 기독교 설교자가 정해놓은 신앙에서 벗어나 ‘춤추는 신’ 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차원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고민에 치여 목적도 운명도 잃어버린채 지내고 있다. 실존이 없기 때문에 생이 허무해지고, 쉽고 자극적인 것에만 빠진다.
이런 상황을 탈출하는 것으로 니체가 제시한 방법은 먼저 정신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의 역동을 이해해서, 그걸 운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의식과 전의식을 분석해냈었다. 니체가 말하는 정신의 여정이 어떤 것인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설명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