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길고 긴 세월을 지나 다시 아기가 되어 있었다. 윗옷은 내복만 입고 아랫도리에는 기저기를 차고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다. 요 옆에는 외숙모가 가져져다 놓은 아기 장난감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원색의 플라스틱 블록을 줄로 연결해 놓은 것도, 큰 곤봉같이 생긴 딸랑이도 있었다. 외숙모는 할머니 돌보는 것 외에 다른 가사일도 많이 해야 했는데, 할머니가 잠에서 깨서 칭얼거리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난감들을 아이가 있는 다른 집에서 얻어다 놓았는데, 다행히 곧잘 이것들을 가지고 노신다고 했다.
이불 속에 모로 누운 할머니는 어디가 불편한지 주름과 검버섯 가득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외숙모는 할머니가 보통은 찡그린 표정이지만 어쩔 때는 맑은 눈빛을 보일 때도 있다면서 얘기를 해 주었다. 거실에 비스듬한 저녁 햇빛이 들어오던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는 혼자 똑바로 앉아서 멀쩡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외숙모는 신기해서 이렇게 물어 보았다. “할망, 도 닦안?” 그러자 할머니는 예전의 싹싹한 목소리로 “아니구다. 고마 앉아 있는 거구다.” 라고 대답하셨다고(정인은 밝고 시원했던 할머니의 말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정인은 할머니에게 밥을 먹여 드리겠다고 말했다. 외숙모는 할머니 보러 온 사람 중에 그런 거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는데 기특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인은 어머니가 미리 꼭 그렇게 하라고 해서 자원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수저로 떠 주는 음식을 한참을 입안에 물고 있었고 국물과 밥 알을 입가로 줄줄 흘렸다. 한 그릇을 떠드렸지만 반 그릇 정도 밖에 목으로 넘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할머니는 다시 장난감이 널려 있는 이부자리로 돌아갔고 잠에 드셨다. 외숙모는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정인도 사랑방에 가서 잠을 좀 자라고 했다. 정인은 푹신한 침대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높고 넓은 천장을 보고 누웠는데 입술이 굳어지고, 따뜻한 눈물이 새어나와 관자놀이 방향으로 흘러내려가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