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항공기 테러 사건을 텔레비전 뉴스로 보았었다. 화면은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중 하나의 고층 부분이 비행기 추돌로 인해 부셔져, 연기를 내며 타고 있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윽고 방송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각도로부터 또 다른 비행기가 아주 빠르게 날아왔다. 그 물체는 거대한 빨간 섬광을 만들면서 다른 쪽 빌딩과 부딪혀 터졌다. 항공기 납치와 자살 비행을 감행했던 테러리스트들은 비행기 승객과 함께 모두 죽었다.
사건 당시 나는 대학생 후반기였고, 졸업 후 진로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국가고시도 준비해야 하고, 군 대체 복무도, 직장 생활을 위해 뭘 배우고 익힐지도 정해야 했다. 그런데 다른 쪽 세계에서는 비행기 납치를 위해 무슨 흉기를 준비해야 하고, 승무원들은 어떻게 제압하고, 비행기는 어떻게 몰고, 목표 건물과 부딪힐 때는 항공기 각도를 어떻게 해야 충격파가 큰지를 연구하는 일군이 있었다.
나중에 깨달은 바는, 개인이 혼자 한다면 시작하지도 않고, 진행되지도 않을 엄청나게 황당한 일들이 어떤 엄청난 집단(주로 이상한 쪽으로) 속에 들어가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는 점이었다.
대학생이 미래를 위해 자격증을 따고 열심히 공부하는 건 좋은 기업에 들어가 이름을 높이고(돈과 명성), 좋은 이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기(사랑) 위해서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테러리스트들은 돈, 명성, 사랑은 커녕 자기 몸이 산채로 불에 타 숯이 되었다가 폭발과 함께 가루가 되는 미래를 위해 면밀히 준비를 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지만, 이들은 끝나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1875년~1961년)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의 창시자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쓰이는 ‘콤플렉스’ 라는 개념을 도입한 걸로 유명하고, 인간 성격 유형을 체계화한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검사의 이론을 제공한 걸로도 유명하다.
융은 종교와 신화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 기독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결국 종교적인 순교자 혹은 테러리스트들이 왜 자발적으로 죽는 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집단 무의식’ 개념이 그것이다.
그는 인간의 ‘자아’가 생명을 가진 한 개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더 넓은 정신 세계와 소통한다고 보았다. 무당 접신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령 빙의 같은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 소통 부위 중에 이상한 세계도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 더는 정신이 아닌 곳에 도달하며 비정신적 영역, 즉 정신을 넘어 존재하는 ‘세계’로 확산된다고 보았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 비정신적 세계가 무의식 안에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미스터리의 경계선들인 정신 밖의 지각, 동시성, 몸의 기적적 치유 등에 접근하게 된다. – <융의 영혼의 지도> p42
융의 이론에 따르면 집단 무의식은 ‘원형’ 과 ‘본능’ 의 결합이다. 본능이야 개인이 매일 느끼고 소비하는 익숙한 힘이지만, 원형이라는 개념은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원형(archetype)은 개인이 아닌, 어떤 엄청난 집단(주로 나쁜 쪽으로)의 무의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자아는 원형적 이미지와 직면할 때, 그 이미지에 깊이 빠져들고 압도되어 저항하고 싶은 마음조차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경험은 매우 풍부하고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원형적 이미지와 에너지의 동일화를 통해 융은 자아 팽창, 심지어는 정신이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강력한 말로 사람들을 확신시키고 선동하여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갑자기 감화된 사람들이나 참 신자들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삶 자체는 깃발과 십자가 같은 이미지, 그리고 민족주의, 애국심, 종교나 나라에 대한 충절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사회 개혁 운동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합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들에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참여자들은 “이 일은 내 삶에 깊은 의미를 준다! 이것은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관념은 자아에 강력한 동기부여를 해주며 가치와 의미를 생성한다. 인식은 빈번히 본능을 압도하고 주도한다. – <융의 영혼의 지도> p149
신을 위해 죽는다는 원형은 무슬림 테러리스트에게 삶의 본능 보다 강한 만족감을 주는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분명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오늘 날에도 비슷한 집단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자살 테러 공격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런 강렬한 정신적 힘이 ‘돈’ ‘명성’ ‘사랑’ 같은 가치도 우습게 보일 정도로 한 인간의 정신을 주조했다. 그리고 자살과 살인의 미학으로의 통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