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끝나고 혼자 집에 돌아가던 어느 햇빛 따스한 날이었다. 동네 골목을 걷는데 벽에 영화 포스터 한 장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영화 제목은 ‘개 같은 내 인생’ 이었다. 정인은 화들짝 놀랐다. 포스터 속 젊은 여자는 알몸으로 비스듬히 누워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제목에 ‘개 같은’ 이란 상스러운 말을 집어 넣은게 존경심이 들었다. 정인은 상스러운게 세상의 진실 중 하나란 걸 느끼고 있었다.
당시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은 한결같이 정제된 말과 정신상태를 보여주었다. 욕을 하는 일도 없고 벗고 다니는 일은 더욱 없었다. 정인이 기억하는 드라마 중 한 장면이 있다. 한 중년 부부가 밤에 같이 자러 누웠는데 방송용 조명이 켜져 있었기에 방은 저녁 때처럼 밝았다(이미 조명 부터가 드라마의 현실감을 방해하고 있다). 남편이 곁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그렇담 우리도…” 아내가 화답했다. “아이, 당신 왜 그러세요.” 나중에 알았지만 이건 늦둥이를 만들기 위해 성행위를 시도하는 남편과 거기에 부끄럽게 반응하는 아내를 묘사한 것이었다.
정인은 다른 하이틴 드라마도 기억한다. 한 고등학교에 부임해온 올곧은 남자 담임 선생님이 주인공이었다. 어느 날 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애가 반으로 전학 온다. 원래 반을 장악하고 있던 키 크고 뚱뚱한 다른 남자애는 이 전학생에게 시비를 걸었고 둘은 학교 운동장 한 켠에서 맞붙는다. 둘 다 생긴 건 험악했지만 욕도 한 마디 하지 않고 “너 그러면 안돼”, “왜 그런 말을 하지?” 식의 대사를 읊고 있었다. 물론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 차고 코피 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서 아이들 대사의 95 퍼센트는 욕이었다. 게다가 정인은 주먹으로 맞고 발로 걷어 차이고 코피가 났었다. 오락실의 사이버 세계에서 상대를 농락하며 눌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웃기지도 않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니 ‘개 같은 내 인생’ 의 벗은 여배우가 더욱 정직해 보였다. 세상의 상스러움을 받아들이려는 정인의 노력은 할리우드 영화 감상으로 이어졌다. 이건 일본 만화랑은 또 다른 폭력성을 안겨 주는 훌륭한 도구였다. 정인의 마음에 충격을 안겨준 영화는 ‘로보캅’ 과 ‘프레데터’ 였다. 로보캅에서는 디트로이트라는 도시의 범죄자들이 총에 맞아 파리새끼 죽듯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살육의 장면은 마치 폭죽이 마구 터지는 걸 보는 것처럼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프레데터에서는 사람의 가죽을 산채로 벗겨서 죽이는 괴물이 등장한다. 괴물은 근육질의 군인 아놀드와 대결했는데, 그를 뺀 인간 동료는 모두 괴물에게 맞아 죽었다. 하지만 아놀드는 부비트랩을 설치해서 괴물을 반 죽음 상태로 만든다. 이상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프레데터에게 다가가 특유의 무뚝뚝한 저음으로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 라고 말을 거는 장면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하얀 피부에 찰랑거리는 직모 머리가 순진해 보이는 정인이 폭력에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는 건 별로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는 항상 무관심하다가 기분 날 때마다 윽박지르는 아버지와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잔소리를 쏟는 어머니에게 매일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정인의 무의식은 부모님을 싫어하는 마음에 대한 죄책감 또한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는 발산이 필요했고, 그 강도는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그게 개 같은 인생을 살면서 멀쩡한 정신이 되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