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가 1922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옛날 책이지만 문체가 참 아름답고, 생의 의미를 찾아 헤메는 주인공의 노력이 비장해서 재미있습니다.
소설 <데미안>이 주인공 꼬마 싱클레어가 어른이 되어 군대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 과정을 다룬다면, <싯다르타>는 주인공 싯다르타가 부잣집 아들에서, 거지 중(사문)이 되었다가, 속세 생활에 빠졌다가, 마침내 강가에서 해탈을 이룰 때까지를 다룹니다. 두 소설의 배경은 동서양으로 매우 다르지만, 구도의 길을 보여준 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소설의 중요한 주제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와 “완성자는 미소짓는다” 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실제로 쓸 수 있는 건 영원한 현재 뿐입니다. 작품에서는 이걸 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흘렀고, 죽은 후에도 흐를 강물에 발을 담그면서 시간의 초월성을 깨닫는 걸로 묘사합니다.
불교 사상을 독실한 기독교 선교사 집안의 아들인 헤세가 얘기한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책이 나왔던 1920년대라면,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지도 않았고, 요가 명상 동양사상 붐이 있지도 않았을 텐데요.
아마도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 박사(1814년-1893년)의 영향을 받았을 듯 합니다.
아래에 책의 내용을 쉽게 설명한 유튜브 링크를 올립니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는 주인공 꼬마 에밀 싱클레어의 입을 빌어서 세상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선함과 밝음으로 대표되는 부모님, 학교 선생님, 수도원 목사님의 세계. 다른 하나는 미지의 영역이어서 두렵지만, 흥분과 쾌락을 동반한 악마의 세계였다.
먹고 싶은 거 먹고(술 포함), 남녀의 교접에 죄책감이 없고, 공부할 의무도 없는 세계였다.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무서운 동네 형, 하녀 하인들, 도시의 극빈층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두 세계’ 구분은 간명하고 재미있었다. 이는 헤세가 살면서 겪은 내면 투쟁의 두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마음 속 싸움이 없다면 괴로움도 없고, 생각도 더 단순해져서 좋을 테지만… 헤세는 반대로 그 투쟁 속에서 평생 살았고, 한 때는 망가져서 정신병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예지(叡智)를 가지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 모든 시작은 신비롭다> 책은 헤세의 전 생애를 그의 작품과 더불어 보여준다. 양극의 투쟁이 없던 순수한 아기 시절부터 책의 서술은 시작한다. 아래는 어머니 ‘마리 헤세’의 회고 장면이다.
…태어난 지 18일이 지난 뒤 마리 헤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1877년 7월 2일 월요일. 힘겨운 낮이 지나갔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저녁 6시 반에 간절히 바라던 아기, 우리 헤르만을 주셨다. 정말 크고 무겁고 예쁜 아기를 주셨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보챘고, 맑고 푸른 시선을 밝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빛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건강하고 힘센, 진짜 멋진 사내아이였다. – p29
푸른 눈의 크고 예쁜 아기를 낳은 여인의 기쁨이 잘 그려져 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에 충만해 있긴 했지만, 경건하고 기독교적인 집안의 전통에 따라 아이를 훈육하려 했다. 즉 따뜻한 사랑만 줄 수는 없었다. 여기서 헤세의 첫 번째 투쟁 대상이 정해져 버린다. 그는 기독교 사상이 뭔가 좋은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마음으로 살갑게 느낄 수는 없었다.
경건주의는 세속화 경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고 “살아 숨쉬는 신앙”을 지키려고 했다. 이러한 생명력을 결정하는 것은 교리나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감동이었다. 개인적으로 신앙을 체험하는 사람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체험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정해져 있는 경건주의적인 세계상에 주관적으로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현세적인 세계와 신적인 피안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이 이 세계상을 지배했다. 피안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적인 삶은 방황과 유혹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여자의 속성을 띠는 현세”의 유혹들에 맞서야 했다. 그러한 사람은 보다 나은 내세를 기대하는 종교적인 기쁨을 간직한 채, 불평 없이 일상의 수고와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 34p
헤세는 세상의 지배적인 이념인 ‘기독교 신앙’에 감동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반면 “여자의 속성을 띠는 현세”에는 많은 감동을 받고 만다. 이 감동은 그를 주류 사회의 안전한 입신 경로에서 그를 이탈 시킨다.
지금으로 치면 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외국어 고등학교라고 할 수 있는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Maulbronn Monastery School)에 입학했는데, 학생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건한 우등생 집단에 들어간 것이다. 헤세는 학교의 엄격한 사상 교육에 괴로워하다가 나중에는 무단 도주하고 만다. 이틀간 수도원 근처 마을의 들판을 떠돌고 나서 다시 잡혀 들어온다. 학교에서 조기 방학을 시켜주어서 집으로 돌아왔고, 본격적인 정신병 유사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4주의 방학 뒤에 헤르만은 다시 마울브론으로 보내졌다. 그의 화상은 완쾌되었다. 하지만 극심한 두통이 다시 그를 괴롭했다. 이제 그는 편지 속에서 부모님을 ‘당신들’ 이라고 불렀다. 예전 친구들과의 사귐은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 친구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며,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했다. 헤르만이 옆 침대를 쓰는 친구 오토 하르트만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자 그들은 헤르만이 정말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 일로 친구의 아버지 하르트만 교수가 헤세 가족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정신과 의사’ 에게 헤르만을 진찰시켜보라고 충고했다. – 74p
기숙사 옆 침대 학생에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부모님을 ‘당신들’ 이라고 부르고, 정신과 진찰을 권유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헤르만 헤세 타락과 방황의 시초에 불과했다. 몇 차례의 정신병원 감금 생활과, 첫사랑에게 차임, 권총 자살 시도가 쭉 이어진다. 다음 글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극단적인 사람들이 대조를 이루며 많이 등장한다. 창녀로 일하지만 아주 순수하고 따뜻하면서 의지도 강한 사람(‘죄와 벌’의 소냐), 열등감과 폭력성이 뒤섞여 음산해 보이는 사람(‘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스메르쟈꼬프), 겉으로는 깔끔한 신사지만 성욕이 충만하고 태연히 살인을 하는 사람(‘죄와 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등. 도스예프스키는 사람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인격(기독교적으로 보면 천사와 악마)를 몇 개 극단적인 분신으로 분리해 작품 주인공으로 만든 것 같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니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안 어울려 보이지만 둘 다 뛰어난 심리 탐구자인 건 같았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심리학자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니체는 소용돌이치는 공포, 불안, 열등감, 애정 같은 마음의 물결을 물리학자가 역학을 분석하듯 분석해냈다. 프로이트와의 융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도 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세상에 나왔는데, 읽어 보면 니체가 이미 자아와 에고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자아는 항상 듣고 항상 살펴봐.
자아는 비교하고 억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하지.
자아는 지배해. 에고 역시 자아의 지배를 받지.
형제들! 자네의 생각과 느낌 뒤편에는
뛰어난 사령관, 숨겨진 현자가 버티고 있어.
이 사령관, 이 현자가 바로 자아라고 불려.
자아는 자네 몸 안에 살아.
자아가 바로 자네 몸이야.
자네 몸에는 자네 머리로 짜내는 어떤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존재하지.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서 이드-에고-슈퍼에고 로 이어지는 상하 구조를 고안해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 – 중재자 – 고차원적 도덕으로 높이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위행위를 죄로 보는 것 같은 보수적이고 계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반면 융은 좀더 낭만주의적이었는데, 정신을 같은 층위에 있는 다른 개성을 지닌 원형(元型, Archetype)들로 파악했다. 상기 인용구에 나오는 ‘자아’ 는 초월적 지혜를 가진 존재로 융의 늙은 현자 원형과 같은 말이다.
니체는 마음의 구조과 운동을 분석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정신의 내적 본질은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 이고 또한 어둡고 다이나믹한 욕망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지성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그것(번개, 폭풍우, 우박)들, 즉 순수한 의지는 얼마나 행복하고 힘찬 것인가!” 라고 썼다.
번개나 비바람 같은 사물은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단순에, 화살처럼 날아가는 정신을 표현한다. 이렇듯 욕망이나 사랑, 집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운명을 이루는 데 쓴 것이 차라투스트라이다. 이런 집중은 인간에게 자아가 전 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초월감을 준다. 초인(超人,Ubermensch)은 겉모양이 펑하고 바뀌어서 되는게 아니라, 정신이 탈피하는 것이고 의식 과정이 변해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대로 새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나는 것과 같다. 헤세나 융, 카잔차키스 같은 이들은 저서에서 니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했는데, 그의 사상이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는 재생과 부활을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