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그대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그대의 형체를 알 수가 없어서,
I find you all around me.
내 주위 사방으로 찾아 헤맨다.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하지만 네 존재가 눈을 사랑으로 채우고,
It humbles my heart,
나의 마음은 숙연해진다.
For you are everywhere….
왜냐면 이 세상 가득 그대가 있으니…
신비로운 수중 생물과 농인 여자의 사랑을 그렸던 영화 Shape of Water(부제: 사랑의 모양)의 말미에 나왔던 시이다. 여자주인공(Elisa)은 목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다에 들어가며 상처는 아가미로 변해, 사랑하는 이와 자유로이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의 플롯과 맺음 시는 ‘사랑의 모양’ 부제와 잘 어울린다. 물은 정해진 모양 없이 공간을 채우고 이리저리 흐른다. 인간의 사랑 또한 그러한데, 어느 순간 찾아와 존재(공간)를 젖게 하고 마음을 숙연케 한다(사방을 채운 신비를 느꼈기 때문에 이전의 좁은 마음에서 벗어난다는 걸 의미).
이 책을 아무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연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아줌마의 독백이 왜 이렇게 길고 긴 걸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혹은 도덕적 관점에서 도무지 작품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둘 다 작품의 주안점이 되지 못한다. 이때 <셰이프 오브 워터>를 생각해보자.
아니 에르노 작가는 물에 빠져서 호흡이 가빠지는 것처럼, 사랑에 젖어가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책의 초입의 이인감(異人感)에 대한 부분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의지와 욕망, 지성으로 선택한 것은 오로지 이 남자의 존재에만 결부된다. 눈에 사랑이 드리워져(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나는 내가 아닌 것 같고, 생활은 마비될 지경이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감정을, 작가 스스로가 “평평한 글쓰기ecriture plate”라고 부르는 문체로 표현했다는게 이색적이다.
현재의 감각(혹은 이념)에 충실하지 않으면 잡념이 생기고 생활에 감동이 없어진다. 바쁜 수험생이나 직장인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그걸 읽을 수 있다. 반면 아니 에르노는 모든 존재를 기울여 사랑하는 자신의 감각(전혀 무미건조하지 않은 이데아)을 무미건조한 문체(형식)로 내보임으로써 역설적 효과를 낸다.
책의 말미에서 그녀는 연인과의 사랑을 매개로 생긴 결과물을 이야기 한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초입에 느꼈던 이인감이 재현되고 있다. 남자를 만나고 떠나보낸 일을 남이 한 경험처럼 느낀다. 스스로를 잊을 만큼 사랑해서 시간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스어 어원의 카이로스(kairos)는 개인의 체험에 따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시간을 뜻한다. 첫 사랑과 입맞춤 하는 때 같은 최고 최상의 순간(the supreme moment)에는 시간이 아득히 멈춘 것 같은데, 그런 카이로스를 내내 산것 같다.
‘그 사람의 존재로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다는, 공간을 채우는 물처럼 사랑이 마음을 채웠고, 그게 언어의 형태를 띈 작품이 되어 외부로 흘러갔다는 걸 의미한다.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순수히 드러낸 작가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고, 노벨상 수상도 기쁘다.
일하다 보면 아기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다. 아기도 빤히 이쪽을 보는데, 까맣고 하얀 눈동자 색의 대비도, 그걸 가만히 움직이는 모습도 신비하게 느껴진다. 아기는 두 팔을 벌려 양육자에게 안기려 하는데 그럼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고 배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추구가 계속 거부될 때는 괴로워지고, 표정도 순진무구함을 잃게 될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유아기의 체험이 평생토록 이어지는 인격에 영향을 준다고 하는데 아기를 보면 잘 수긍 된다.
책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색채를 뜻하는 글자가 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투명한 거고, 아기와 같이 비고 순수한 상태로 시작한다. 책 제목의 ‘순례’는 그가 정신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떠난 여행을 뜻하고, 그 과정에서 16년전 절교 당한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찾는다. 그 모든 단계가 정신의 치유를 향하는데, 정신분석학으로 풀어보면 재미가 있다.
에스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정립하며 사용한 용어이다. 본능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렬한 성적 충동(리비도; libido) 뿐 아니라 공격성(힘이 자신을 향하면 죽음의 충동; Thanatos이 되어 스스로를 죽이고, 타인을 향하면 살인이 됨)을 포함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연상의 여자친구 기모토 사라의 제안으로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내면 깊은 곳에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렸었다. 출혈의 원인이 된 사건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그걸 아물게 해야만, 사랑이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성장기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썼다. 대표적 성장소설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잘 나타난다. <데미안>은 아이가 성인이 되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이 있고, 논리적으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는 논리적 필연성이 없고 개연성도 없는 사건이 죽 이어져서 혼란스럽다.
그 이유는 소설의 플롯(plot)이 ‘논리’가 아닌 깊은 정신 에너지인 ‘에스’를 중심으로 꿈처럼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각기 적청백흑(赤靑白黑)의 색을 뜻하는 친구들 외에도 색채를 가진 인물이 두 명 더 있다. 회색(灰)의 하이다 후미아키와 녹색(綠)의 미도리카와이다. 회색은 흑색과 백색을 섞으면 나타나는 색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반복되는 꿈에서 구로노 에리(黑)와 시라네 유즈키(白)는 둘이 같이 나체로 주인공과 동침한다. 남자의 막장 판타지를 표현한건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스 즉 리비도가 발현된 모습으로 이해하면 된다. 꿈은 도덕의 억눌림 없는, 가장 큰 에너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자키 쓰쿠루는 여성의 이상형으로 외향적이고 밝은 구로(黑)와 내향적이고 신비로운 시로(白)의 상을 같이 품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에도 성격이 반대인 두 여자 ‘미도리’와 ‘나오코’가 등장하는데, 미도리는 구로에, 나오코는 시로에 대응한다.
현실의 사랑에서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같이 품을 수는 없으므로 두 상(像)을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역할로 연하의 동성(同性)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가 설정된 걸로 보인다. 그는 주인공의 꿈 마지막에서 구강성교로 사정을 받아주는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리비도가 합치와 성숙의 에너지로 쓰인 것이다. 흑과 백이 섞여 회색이 되고, 이제 새로운 여인 기모토 사라를 만날 바탕이 마련되었다.
미도리카와는 하이다 후미아키의 아버지가 과거에 만났던 사람이다. 전직 피아니스트인 그는 외딴 산장에 죽기 위해 찾아왔다. 그가 하이다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그거하곤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사실 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어. 대충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지.”
…
“그러면 미도리카와 씨는 앞으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네 생명은 앞으로 두 달로 정해졌다고. 그게 한달 전이었거든.”
“그런 소리를 도대체 누가 했습니까?”
“의사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냐. 아주 평범한 사람이야. 단, 그 시점에서 그는 죽어 가고 있었어.”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서 에스는 파괴적 에너지로 자신을 해치려 한다. 수치심과 자기혐오의 결과인 경우가 많은데, 미도리카와에게는 특이하게도 무감동증(Anhedonia)이 원인이 되었다. 그의 상징 색채인 녹색은 자연 그대로인 해탈 상태를 의미하는데, 깨달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의미 없어져버린 것이다. 불교에서 즉신불(卽身佛)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죽음의 필연적 이유를 알려주는 악마(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도인道人 같은 사람일 것이다.)를 만난 그는 그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자기는 살 수도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죽는 길을 택한다. 마지막 남아 있는 사랑으로 하이다의 아버지에게 아래와 같은 충고를 해준다. 이데아의 극한이 죽음을 부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 하는 작별인사이다.
문득 하이다는 좁은 방 안에서 미도리카와와 둘이 마주 앉은 것 자체가 갑작스럽게, 참 이상하게도,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기증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 속에 미세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이 천천히 썩어 가는 냄새. 그러나 단순한 착각일 것이다. 아직 여기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
“자네는 머지않아 도쿄의 대학 생활로 돌아갈 거야.” 미도리카와는 조용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으로 돌아갈 거야. 견실하게 그 삶을 살아야 해. 아무리 밋밋하고 평범하더라도 삶에는 살 만한 가치가 있지. 그건 내가 보장하지. 아이러니나 역설 같은 건 빼고 하는 말이야. 다만 나에게는 그 가치라는 게 좀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 놈을 제대로 짊어지고 나아갈 수가 없어. 아마 나면서부터 거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죽어 가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 그때가 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거야.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아. 그러나 자네는 달라. 자네는 그놈을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어. 논리의 실을 활용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
책에는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경탄이 자주 나온다. 도자기 같이 하얀 시라네 유즈키의 다리, 민트 그린 원피스를 입고 빛나는 기모토 사라, 끝이 살짝 올라가서 예쁜 구로노 에리의 코 등등.
작가가 외모지상주의자여서 그런 건 아니고, 리비도의 흐름을 잘 포착해서 문예로 바꾸는 능력이 출중해서 그렇다고 느낀다. 에스(리비도)는 주의(主義)와 상관없이 가장 강렬한 자극에 들러붙는다.
반대로 시들어진 외모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작가는 아름다움을 ‘외형’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나 ‘기운’으로 표현한다. 성폭행과 유산으로 완전히 바뀌었던 시로에 대한, 그리고 기모토 사라의 옛 사립여고 동창생에 대한 묘사가 다 그렇다.
“…중요한 건 시로는 그때 벌써 생명력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광채를 잃어버렸다는 거야. 그 애가 성격적으로는 내향적인 타입이었지만 중심에는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활발히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어. 그 빛과 열기가 여기저기 틈을 찾아서 마구 바깥으로 새어 나왔지.
…
그렇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런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마치 누군가가 뒤로 돌아 들어가서 플러그를 뽑아 버린 것처럼. 예전에 그 애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싱싱한 물기를 머금게 했던 특유의 겉모습이 그땐 오히려 애처롭게 보였던 거야. 나이 문제가 아니아.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시로가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정말로 안타까웠고 진심으로 불쌍했어. 어떤 사정이 있었든 그런 식으로 죽기를 바라지 않았어.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는 육체적으로 살해되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빼앗긴 상태였다고.”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그 이야기는 내 고등학교 반 친구 생각이 나게 해. 미인이고 날씬하고 집도 부자고 외국에 살다가 귀국했는데, 영어도 프랑스어도 잘하고 성적도 최상이었어. 뭘 해도 사람들 눈을 끌었어. 친구들에게 찬양받고 후배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어. 사립 여고라서 그런게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
쓰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신 여대에 들어가서 중간에 2년, 프랑스 유학을 갔어. 귀국해서 2년 정도 지나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 애 얼굴을 보고 난 할 말을 잃었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색채가 흐려졌다고 할까. 강렬한 햇살 아래 오랫동안 드러나 있다 보니 색이 전부 바래 버린 것처럼. 겉모습은 옛날이나 다름없었어. 여전히 미인이고 날씬하고…… 다만 예전보다 흐려 보였던 거야. 나도 모르게 텔레비전 리모컨이라도 들고 색깔의 농도를 몇 단계 올려 놓고 싶을 정도로. 정말 기묘한 경험이었어. 사람이 몇 년 만에 이 정도로 눈에 띄게 흐려질 수 있다니.”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 그 애랑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둘 모두와 친한 친구가 있어서 그 이후에도 가끔 어떤 자리에서 만나곤 했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애, 색깔이 점점 더 흐려진다는 걸 느꼈어.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는 누구의 눈에도 특별한 미인이 아니었고,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았어. 머리도 많이 나빠진 거 같았고 하는 이야기도 지루하고, 생각하는 것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거야. 스물일곱에 결혼했는데, 남편은 관청의 엘리트로 척 보기에도 얄팍하고 재미없는 남자였어. 그런데 본인은 더는 미인도 아니고 매력적이지도 않고 사람들 눈을 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고 옛날처럼 여왕으로 행동하는 거야.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정말 답답하고 괴로웠어.”
정신에너지(Es)의 상실이 얼굴의 광채까지 지워 버렸다. 이런 내면의 에너지에 대한 표현을 같은 성장소설 <데미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얼마나 신비한 힘을 두 작가는 표현했던가. 에스(Es)는 하이다 후미아키를 선의의 인도자가 되게 했고, 미도리카와와 시로에게는 죽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다자키 쓰쿠루와 기모토 사라에게는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한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다.
심리극(心理劇) 즉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는 연극의 틀을 이용한 심리 요법이다. 괴로운 정신을 안고 있는 의뢰인이 연기를 통해 감정을 표출하도록 하고, 극에 참여한 집단이 함께 이해와 해결을 꾀한다. 강렬한 감정에 몰입한 연기자도, 그걸 관찰하는 연출자나 관객도 새로운 영감으로 치유 받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작품은 마치 문학을 사이코드라마로 엮어 놓은 것 같다. 사람이 유년기부터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인간관계의 파열과 정신적 외상, 그리고 그걸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카를 융의 책에서 볼 법한 의미심장한 꿈과 상징이 나온다. 몰입해서 읽으면 사이코드라마의 참가자처럼 심리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알게된 5명 친구 그룹의 일원이었다. 남자 3명 여자 2명의 구성인데, 다자키를 제외한 4명은 모두 이름에 색을 상징하는 글자(적청백흑)가 있었다. 이들은 신성한 비밀결사체처럼 모임을 특별히 여겼고, 각자가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모여 어울렸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시절, 주인공은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다른 4명 전부로부터 절교 선언을 당한다. 충격 받은 다자키 쓰쿠루는 그후 반 년의 세월을 방에서 혼자 죽음만을 생각하며 보낸다.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어느 날 신비한 꿈을 꾸었고 그걸 통해 처음으로 ‘질투심’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꿈을 꾸기 전 그는 누군가를 시샘하거나 질투해본 적이 없었다.
다자키 쓰쿠루의 성격 즉 투명한 색채를 말해 주는 부분이다. 색깔 없이 비어 있기 때문에 소유욕 없이 살 수 있었다(피아 구분이 없는 아기처럼). 그가 가장 집착했던 친구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은 소속감과 애정이었다. 그게 가슴 아프게 깨지고 난 후 질투심이라는 걸 마침내 알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어른)으로 살기 시작한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30대 중반의 안정적 직장인(도쿄의 철도 기업 소속)이 되었고 새로운 애착(질투)의 대상이 될 여자를 만난다. 여행 컨설턴트로 일하는 2세 연상의 기모토 사라(木元 沙羅)이다. 그녀는 다자키 쓰쿠루에게 어떤 치유받지 못한 상처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 원인을 해결할 순례여행을 떠나게 한다. 15년도 전에 헤어져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4명 친구를 다시 찾도록 만든건데 덕분에 다자키 쓰쿠루는 멀고 먼 유럽 핀란드까지 가게 된다.
작품에서 색채를 가진 인물은 단 6명이 있다. 친구 그룹에 속했던 오우미 요시오(青海 悦夫), 아카마쓰 게이(赤松 慶), 구로노 에리(黒埜 恵里), 시라네 유즈키(白根 柚木)와 주인공이 대학생 시절 처음 만나 친해졌던 연하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灰田 文紹), 그리고 하이다의 회상 속에만 등장하는 신비의 인물 미도리카와(緑川) 이다.
개인적으로 시라네 유즈키(통칭 시로 혹은 유즈)와 미도리카와 두 명이 주인공의 색채를 채우는데 큰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미도리카와는 주인공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고,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灰田 文紹)의 아버지가 과거에 만났던 인물이다. 하이다가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를 다시 다자키 쓰쿠루에게 들려주면서 알려진 것이다.
하이다의 아버지는 대학생 시절 외딴 시골 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피아니스트라고 하는 미도리카와라는 사람이 산장의 손님으로 온다. 아래는 이 둘의 대화이다.
미도리카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마른기침을 한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 색깔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알아?”
“아니, 모릅니다.”
“그럼 가르쳐 주지. 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게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면서 떠올라. 후광처럼, 아니면 백라이트처럼. 내 눈에는 그 색깔이 뚜렷이 보여.”
미도리카와는 술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핥듯이 마셨다. “그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가요?” 하이다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미도리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천적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자격이야.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어져. 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이어지지. 그 자격은 지금 나에게 주어졌지.”
하이다는 잠시 침묵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말했다. “세상에는 기분 좋은 색깔이 있는가 하면 보기 괴로운 색깔도 있어. 즐거운 색깔이 있는가 하면 슬픈 색깔도 있지. 빛이 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엷은 사람도 있고, 이거 정말 피곤한 일이야. 그런게 보기 싫어도 보이니까 말이야.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 싫어져. 그러니까 이런 산골로 흘러들어 온 거지.”
하이다는 상대의 이야기를 따라잡기에 급급했다. “그렇다면 내 색깔도 미도리카와 씨에게는 보인다는 겁니까?”
“아, 물론 보이지 무슨 색인지 자네에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할 일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어떤 특징적인 방식으로 빛을 내는 사람을 찾는 거야, 죽음의 티켓도 사실 그런 상대에 한해서만 건네줄 수 있어. 아무에게나 무작정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인간에게는 각각 색깔이 있고, 그걸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미도리카와 자신이 그 능력이 있는데, 이걸 가진 사람은 죽음의 티켓이라는 것을 색채를 가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티켓을 받은 사람은 한 달내로 죽는다. 데스노트 만화같은 내용인데 이어지는 대화를 읽으면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지각이란 그 자체로 완결되는 거지 뭔가 구체적인 성과로 바깥에 드러나는 건 아니야. 어떤 이익 같은 것도 없어. 그게 어떤 건지 말로 설명 하는 것은 불가능해. 직접 경험 해 보는 수 밖에 없어. 다만 한 가지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일단 그런 진실의 정경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무서우리만치 밋밋해 보인다는 거야. 그 정경에는 논리도 비논리도 없어. 선도 악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 돼, 자네 자신도 융합의 일부가 되지. 자네는 육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이른바 형이상적 존재가 돼. 자네는 직관이 돼. 참으로 멋진 느낌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인 느낌이기도 하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하찮고 깊이가 없었는지, 거의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니까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인생을 참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율하고 말지.
미도리카와가 가진 녹색은 자연 그대로를 의미하는데 ‘육체의 틀을 벗어난’ 초월 상태이기도 하다. 선과 악, 논리와 비논리를 괘념치 않는 해탈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도리카와도 한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현실이 감동이 없고 밋밋하다는 것이었다.
이 미도리카와라는 인물을 정리하면, 작품의 중심 테마인 ‘색채’가 무엇인지 처음 설명을 해주었고, 이렇게 너무 깨달아서 허무해진 녹색의 미도리카와와 투명한, 아직 미지의 공간이 무한한 주인공이 대비가 된다.
무감동증 Anhedonia 사람 머리(생각)가 풀처럼 뻣뻣해짐
주인공의 고등학생 시설 가장 가까웠던 5명 친구 그룹의 일원이었던 시로는 백설공주 같이 예뻤다고 표현되어 있다. 하얀색은 순수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쉽게 오염될 수도 상처 받을 수도 있다. 시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나고야 지역의 음대에 진학하는데, 이때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
Edvard Munch (Norwegian: Pubertet)
순수와 반대되는 이미지이고 그걸 파괴할 가능성이 가장 큰게 성적 에너지, 리비도인데 시로는 세상의 일부인 이런 차원의 힘과 융합을 못하고 결국 자기를 망가뜨리게 된다.
…”동성애였다는 거야?” 에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와는 달라. 그애에게는 그런 욕구가 전혀 없었어. 분명해. 다만 유즈는 옛날부터 일관되게 성적인 것에 대해 아주 강한 혐오감을 가졌어. 아니, 공포심이라고 해도 좋을지 몰라. 어디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그건 나도 몰라. 우리는 무슨 일이든 대체로 솔직하게 이야기했지만, 성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나 같은 경우는 그런 쪽에 대해서는 열린 편인데, 유즈는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화제를 돌려 버렸거든.”
“그래서 유산한 다음 유즈는 어떻게 됐어?”
“우선 대학을 휴학했어. 도저히 사람 앞에 나설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하고 집에 틀어박혀 도무지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어. 그리고 곧 거식증에 걸렸어. 먹으면 거의 토해 버리고, 그래도 남은 것은 관장을 해서 빼내는 거야. 그대로 갔으면 분명 죽었을 거야. 그러다 전문 카운슬러의 도움으로 거식증에서 벗어났지. 반 년 정도 걸렸을 거야. 한때는 정말 심각할 정도여서 체중이 4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어. 그때는 정말 유령처럼 보였어.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회복했지. 나도 매일같이 만나러 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격려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어. 그래서 1년만 휴학하고 그럭저럭 학교에 복학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어.”
“왜 거식증에 걸린 거야?”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생리를 멈추고 싶어서, 체중이 극단적으로 줄어들면 생리가 멈춰 버리니까. 그 애는 그걸 원한 거야. 다시는 임신하고 싶지 않았고, 아마도 여성이기를 포기하고 싶어 했어. 가능하면 자궁을 들어내 버리려 했으니까.”
하얀색의 시라네 유즈키는 자신에게 심겨져 있는 여성성을 거부해서 생리를 하지 않는 거식증에 빠지고 자궁을 없애겠다는 생각도 한다.
살면서 겪는 상처에 너무 빠지면 색이 바래지는데, 그녀는 그렇게 신비한 후광처럼 비치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아래는 그걸 묘사한 대목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건 나도 정말 싫지만, 그 애, 옛날처럼 그렇게 예쁘지 않았어.”
“예쁘지 않았다.” 쓰쿠루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자신의 말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예쁘지 않은 것하고는 좀 다를 거야.” 아카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말하면 될까, 물론 얼굴은 기본적으로 같으니까 보통 기준으로 말하면 그때도 역시 미인임에는 분명했어. 10대 시절의 시로를 모른다면, 사람들은 그 애를 보고 딱히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난 옛날의 시로를 잘 알아. 그 애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마음 깊이 새겨져 있었거든. 그렇지만 그때 내가 본 시로는 그렇지 않았어.”
아카는 그때의 정경을 떠올리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시로를 앞에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게 솔직히 말해 나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어. 옛날에는 거기 있었던 뜨거운 뭔가를,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 비범한 것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 그것이 더는 내 마음을 떨리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
“…중요한 건 시로는 그때 벌써 생명력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광채를 잃어버렸다는 거야. 그 애가 성격적으로는 내향적인 타입이었지만 중심에는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활발히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어. 그 빛과 열기가 여기저기 틈을 찾아서 마구 바깥으로 새어 나왔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렇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런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마치 누군가가 뒤로 돌아 들어가서 플러그를 뽑아 버린 것처럼. 예전에 그 애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싱싱한 물기를 머금게 했던 특유의 겉모습이 그땐 오히려 애처롭게 보였던 거야. 나이 문제가 아니아.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시로가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정말로 안타까웠고 진심으로 불쌍했어. 어떤 사정이 있었든 그런 식으로 죽기를 바라지 않았어.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는 육체적으로 살해되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빼앗긴 상태였다고.”
시라네 유즈키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에게서 대비되는 것은, 색을 채움에 있어서 지나치게 순수하면 자아가 파괴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로는 자기를 잃고 환상에 빠져 주인공을 모함했고,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허무를 상징하는 초록색의 미도리카와와 소멸을 상징하는 하얀색의 시로를 순례 여행을 통해 경험한 다자키 쓰쿠루는 작품의 말미에서 자신이 앞으로 가야할 길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의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마음에 티끌 하나 없이 순수했던 시절, 누구도 가를 수 없는 친구로서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녔던 것처럼 인생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다짐이다. 그건 미도리카와와 시로가 가졌던 죽음의 충동(Thanatos)을 이겨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작품을 왜 읽느냐고 물어본다면 ‘재미 있으니까’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를 뺀 나머지 장편 소설은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과 상징이 온통 얽혀 있다. 그래서 줄거리가 논리적으로 머리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재미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작가가 문학계에서 명성을 날리기 위해 일부러 난해하게 쓴 건 아니다. 문체를 이해하려면 하루키가 직접 여러 매체를 통해 말했던 사실을 종합해보면 좋다.
…머리가 그런 융통무애融通無碍의 상태가 되면 그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말을 바꾸면, 상상력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입체적으로 자유자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 거기서 내가 유념 했던 점은 우선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다양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나 이미지나 광경이나 언어를 소설이라는 용기 안에 척척 집어넣고 그걸 입체적으로 조합해 나간다. 그리고 그 조합은 통념적인 논리나 문학적인 언어와는 무관한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기본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그런 작업을 추진하는 데는 무엇보다 음악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요령으로 문장을 만들어갔습니다. 주로 재즈가 도움이 됐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재즈는 다채로운 엇박(offbeat; syncopation)과 즉흥연주(improvization)가 돋보이는 장르이다. 그래서 전통적 구조의 소설(기승전결과 명확성의)과 하루키의 소설은 클래식과 재즈 음악 만큼 차이가 난다. 또한 ‘설명하지 않는’ ‘융통무애’ 함도 중요한 시사점이다. <양을 쫓는 모험> 작품의 말미에는 세상과 동떨어진 산장이 나오고, ‘양 사나이’라는 이계의 인물이 떡 등장한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전환이 된건데, 주인공 ‘나’는 양 역할의 연극 복장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남자를 보고 놀라지도 않는다. 이런 환상이 창작과정의 융통무애하고 의지에서 벗어난(설명하지 않는) 머리에서 나온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하루키 작가가 직접 그려서 책 삽화로 삼은 ‘양사나이’
20세기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명으로 평가 받는 프란츠 카프카는 새벽마다 혼자 글을 “마치 유령의 손에 의해 써내려 가듯 신비적인 망아 상태에 빠져” 썼다고 고백했었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라는 장편을 썼을 만큼, 글쓰기 방식에서도 둘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The Paris Review 라는 곳과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을 챈들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결합이라고 했다. 먼저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의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 작가이다.
(좌) 레이먼드 챈들러 (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하루키는 한 문학비평가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소설(양을 쫓는 모험)은 구조에 대해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습니다. 그 외로운 도시 생활자입니다. 그러면 그가 뭔가를 찾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마침내 발견했을 때, 그 무언가는 이미 손상되어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챈들러가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대화 R・챈들러, 혹은 도시 소설에 대해」『Eureka』1982년 7월호
하루키는 챈들러의 장편 <기나긴 이별>을 12번이나 읽었다고 밝혔다. <양을 쫓는 모험>과 <기나긴 이별>의 유사점은 중심 테마와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루키 작품의 공통점인 친구, 아내 혹은 연인의 상실과 <기나긴 이별>에서의 친구(테리 레녹스) 상실은 대칭된다. <양을 쫓는 모험>은 제목 그대로 전형적 추리소설의 구조 – 일본 정관계를 뒤에서 주무르는 거물의 부하를 만나고, 사라진 친구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며,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을 쫓음 – 를 따르기 때문에 챈들러 작품과 유사하다.
참고로 <기나긴 이별>의 주인공이자 챈들러 소설의 간판인 ‘필립 말로’는 셜록 홈즈 다음으로 유명한 사설 탐정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로 1942년부터 1975년까지 9개, 메이저 TV 시리즈로 1954년부터 2007년까지 6개 작품이 나옴). 말로의 성격은 하루키 장편 소설의 1인칭 주인공과 많이 닮았다. 술 담배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지만 선을 지키고, 가족과 깊은 연결 없이 혼자 쓸쓸히 지내지만, 헛된 감정의 소용돌이(허영, 질투, 증오)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대문호이다. 하루키는 특히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좋아했고, 이 길고 긴 책을 4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민음사판 기준, 3권 전집, 총 1700 페이지).
Reference : New York Times Magazine , Sam Anderson과의 대담
도스토예프스키는 대표작 <죄와 벌>에서 볼 수 있듯이 선악이 상당히 대비되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인간 심리를 탐구했다. 라스콜리니코프, 소피야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보면 작가의 분열하는 인격을 따로따로 떼어낸 분신을 보는 것 같다
(좌) 라스콜리니코프 : 투쟁하는 인격 (중) 소피야 : 선한 분신 (우) 스비드리가일로프 : 악한 분신
결국 종합하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 기법을 쓰면서,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줄곧 다루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다는 건데, 이 말이 <양을 쫓는 모험>을 이해하는데 키 포인트가 된다.
일본 독자의 서평을 읽어보면, 이계라는 단어가 나온다. 일단 별을 등에 진 양과 양박사라는 존재도 그렇고, 마지막에 나오는 산장이라는 공간과 양사나이라는 인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계와 이계 사이에 있다.
https://sonhakuhu23.hatenadiary.jp/entry/2013/06/29/064022
이것 때문에 소설이 갑자기 만화가 된 것 같고, 이야기 흐름과 주제를 놓쳐버리게 된다. 앞서 언급한 챈들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도 이런 특징은 없고, 프란츠 카프카와는 약간 비슷한 하루키 작가의 독특한 부분이다. 이런 비현실성, 달리 말하면 마술적 리얼리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를 알면 좋다.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정신의학의 선구자 프로이트는 의식 무의식을 나누고 그걸 이드-자아-초자아로 세분화 했다. 그런데 한때 프로이트의 후계자였던 융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무의식에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영역이다.
의식 저편 아주 깊은 곳에는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건데, 이걸 수긍하면 별 모양을 품은 양이 왜 양박사에게 심어졌다가 흑막의 보스에게 넘어갔는지, 그리고 그걸 잃은 사람이 왜 빈껍데기처럼 되고, 그걸 이어받을 사람이 왜 두려워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융은 인간이 가진 사랑 증오 분노 공포 같은 감정을 에너지의 전이로 파악한 것 같다.
물리학에서도 에너지와 그것의 여러 가지 표현, 즉 전기, 빛, 열 등에 관해 말한다.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심리학도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취급한다. 말하자면 강도의 측정, 양의 많고 적음을 다룬다. 그런데 나타나는 형태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리비도를 에너지로 본다면 일종의 통일된 관점을 갖게 된다. 그러면 리비도의 성질에 관한 논쟁적인 질문, 즉 그것이 성이냐 권력이냐 배고픔이냐, 그밖의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예를 들어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가장 과학적 설명이 빅뱅(Big Bang)인데, 태초에 폭발이 있었고, 그게 한 점에서 퍼져 나갔다. 이걸 공간적 확장이라 볼 수 있지만, 에너지의 뻗어나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주의 시작처럼 정신에너지도 그렇게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개체에게 영향을 준다고 한다면 집단무의식과 비슷해진다.
빅뱅 상상도
융은 세계 여러 곳의 다른 문명에 공통적인 상징과 신화 그리고 개인적인 꿈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집단무의식의 근거로 삼았다. 인터넷 같은 장거리 통신이 없던 시대에, 절대 소통될 수 없는 장소들에서 각각 거의 유사한 신화가 나타나고, 비슷한 개인적 꿈을 꾼 기록도 있다는 것이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발현되고, 꿈의 상징이나 신화를 낳는 근원으로서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문제가 되는 ‘양’은 전승되어 내려오는 근원적 악으로서의 원형 ‘그림자’와 유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칼 구스타프 융 사상적 해석은 일본의 융 심리학 일인자인 가와이 하야오 라는 학자와의 대담인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에서 논의된 바 있다.
다음 글에서는 별을 등에 품은 양, 양 박사, 양 사나이, 쥐(주인공의 친구), 신비로운 귀를 가진 여자(주인공의 애인)에 대한 개별 상징 분석을 해보려고 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어머니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른 감정체계를 가지고 있던 주인공 뫼르소는 아기 때부터 자기를 키워줬던, 그리고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에게 별 감흥이 없다. 이 사실은 그가 나중에 살인사건에서 사형을 언도 받는데 큰 공헌을 한다.
심리학적으로 Anomie(동정심 공감능력 없음)로 볼 수 있는 뫼르소의 성격이 왜 시대를 흔든 대작의 주인공 성격이 되어야 했을까? 그건 그를 단순한 사이코패스로 볼 수 없게 하는 사회적 성격 형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쓸쓸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존재양식이 뫼르소 같은 사람을 양산하고 있으니까.
죽기 전날 사형수 감방 안에서 뫼르소는 간만에 어머니를 떠올린다. 기력도 없이 양로원에 갇힌 처지면서 새 약혼자를 만들려고 했던 어머니. 뫼르소 자신이 가졌던 삶에 대한 반항과 자유, 그로인해 더 많이 느끼며 살 수 있었던 열정, 그것이 어머니의 열정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다가올 단두대 처형에도 열정과 사랑으로 동화되어 버리는 경지를 보여준다.
정말 이상하면서 슬프며 장엄한 결말이다.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1818년 영국의 북부 변방인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났고, 1848년 30세의 나이로 결핵에 걸려 죽었다. 그녀의 다른 3명의 자매와 1명의 남동생은 모두 어려서 죽거나, 30대 초반의 나이를 못 벗어나고 병으로 죽었다. 생전에 작가로 명성을 얻었던 언니 샬럿 브론테 만이 예외로 그나마 38세까지 생존했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들은 젊은 나이에 열병이 걸리고 금새 죽어나간다. 캐서린 언쇼, 히스클리프, 힌들리 언쇼, 에드거 린턴 모두 그렇게 죽었다. 죽음은 에밀리 브론테의 곁에 삶과 이질적이지 않은 영역으로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도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유령처럼 맴돌며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는 작품에서 유령이 된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에밀리 브론테는 평생 독신이었고, 시골 요크셔를 떠나 오래 산 적이 없었다. 세속적이고 시류에 휩쓸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겪어 볼 기회가 없었고, 찾지도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폭풍이 몰아치는 고향 벌판의 장엄한 풍경은 사랑의 감정에 어떤 불가사이한 신비함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즉 사랑은 그냥 인간 안에 갇힌 감정이 아니라, 비나 바람처럼 형태를 바꾸며 세차게 세계를 떠도는 것으로. 그래서인지 작품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절대적인 상호 공명과 처절함으로 일관되어 있다.
캐서린은 넬리에게 말한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을 거야.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가 올라갈 수 없는 고상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게 되자 히스클리프는 폭풍의 언덕을 떠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천한 신분을 벗고 신사가 되어 다시 찾아온다. 그는 당시 불치병이었던 열병(뇌수막염)을 앓아 죽어가는 옛 연인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너는 나를 사랑했잖아. 그런데 너는 무슨 자격으로 나를 떠났니? … 곤궁도, 영락도, 죽음도, 하느님이든 사탄이든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는데, 네가 네 손으로 우리를 갈라놓은 거야. 내가 네 가슴을 찢은 게 아니야, 네가 네 가슴을 찢은 거야, 네 가슴을 찢으면서 내 가슴까지 찢어놓은 거야. 내 목숨이 질긴 만큼 내 괴로움도 질기단 말야. 내가 살고 싶겠냐? 내가 어떻게 살겠냐? … 네 영혼이 무덤에 있는데 너라면 살 수 있겠어?
찬찬히 읽으면 히스클리프의 격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모든 어려움을 넘어 죽을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현세의 내게도 울림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많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그들 만큼 잊을 수 없는 생의 의미로 남길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