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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과 공空 – 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는 해석이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작가분의 감정선을 따라가야 이해가 된다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2번째 연작의 화자, 영혜의 형부가 중요하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 – 몽고반점 – 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단편에서 각기 다른 눈높이의 화자로 주인공 영혜를 묘사하고 있다. 몽상적 성격의 실패한 예술가인 형부는 영혜의 독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또 가장 감정적으로 찬탄하고 있다.
 
그는 영혜가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니고,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고,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라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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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몽고반점> 말미에서 영혜랑 형부는 둘 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데, 그때 형부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p177

죽어도 좋다는 건데, 실제로 뛰어 내리려다 응급요원의 제지를 받고 실패한다. 그를 이렇게 미치게 한 것은 강렬한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는 처제 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몽고반점이 뭐길래 이런 거친 감정이 생기고 처제와 관계를 가지는 예술 작품을 찍게 되는건지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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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다라 मण्डल

몽고반점을 성적인 페티시즘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작가분의 의도는 아닌 것 같다. 형부는 영혜의 몽고반점을 실제로 처음 보고 이렇게 생각을 한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20

어떤 쉬운 욕망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동물적이지 않은, 태고의 초록색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영감靈感이고, 그게 예술작품을 만들려는 집념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반점이 어떻게 그런 영감을 낳을 수 있는지 갸웃할 것이다.
 
형부가 몽고반점에 꽂혔다면 영혜는 꽃에 꽂혀 있다. 그래서 외설적이고 부적절해 보이는 비디오 촬영에도 응한 건데, 그녀 말에 따르면 꽃은 나쁜 꿈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독제 같은 것이었다.
 
첫 번째 행위 예술 촬영 후에 형부는 영혜에게 전화를 하고, 꽃을 지우지 않았느냐고 물어본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요. 나중에 지워지더라도 다시 그려주면 좋겠어요.”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도살과 피에 연관된 꿈을 꾸면서 부터인데, 몸에 그려진 꽃은 힘든 환상을 없애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술 주문처럼 몽고반점과 꽃은 형부와 영혜를 각각 움직였다. 이 같은 이미지가 투영된 실제 예술 작품이 있다.
 


 


 

일본의 작가 쿠사마 야요이くさま やよ 인데, 이 분은 물방울이나 호박을 소재로 여러 설치 예술품을 만들어 냈다.
 


 

그녀에게 호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아래는 그 마음을 토로한 글이다.

호박은 애교 있고 굉장히 야성적이고
밝게 웃는 기운이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
나, 호박 너무 좋아!
호박은 나에게 어린시절 마음의 고향으로
무한대의 심령을 가지고 … 시적인 평화를 준다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성한 자태이고
전 세계 인생의 환희의 근원이기도 하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간다.

하나의 형태가 마음 속에서 거의 신성한 힘을 주는 상징이 되어서, 그게 악몽 – 쿠사마 야요이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정신분열증 – 을 없애고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원천도 되었다. 영혜 형부의 예술 작품도 똑같이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상징은 특정 종교의 수행 과정에서 쓰이기도 한다. 아래는 ‘만다라मण्डल’라고 하는 문양이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힌두교와 불교의 명상 수행을 돕기 위해 고안되었다. 20세기 초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Jung)이 무의식 치료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서양에 소개되었고 대중성을 얻었다. 상징이 정신치유로 이어지는 다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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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십만 볼트의 전류

형부는 영혜의 남편 보다도, 언니인 인혜 보다도, 영혜의 특이한 지점을 잘 이해했다. 그건 두 사람이 보통 사람과는 ‘기쁨을 느끼는 통로’가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 예술로 교감할 수 있었다. 형부가 기쁨을 느끼는 부분을 먼저 보자.

붓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듯 미세히 떨리는 그녀의 육체를 느끼며 그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마침내 오른쪽 허벅지를 지나 가느다란 발목까지 이어지는 긴 줄기와 잎사귀를 완성했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p122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감동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큰 기쁨을 저런 행위로 느낄 수 있을까 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형부도 영혜도 그동안 보통 사람이 겪지 못한 바닥 깊은 고통을 느껴왔기 때문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특별한 통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큰 고통이 큰 기쁨으로 상쇄된 것이다.
 
아래는 형부가 영혜 마음의 바닥을 느끼고 묘사한 부분들이다.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p110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p125

상처와 악몽의 지배로 깨진 영혜의 정신은 백치가 되는 걸 넘어 더 깊은 곳으로 간 것 같다. 인간의 언어로 된 표상도 없는 이계異界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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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色과 공空 –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모든 것이 비워진

영혜는 자기에게 악몽을 주는 게 먹는 고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꽃에 감화 되고 나서는, 그것은 결국 자기 뱃 속에서 올라온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늘 달라요. 어떨 땐 아주 낯익은 얼굴이고, 어떨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에요.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 썩어서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해요.”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박명 속에서 술렁거리고 있었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p171

여기서 작품의 중심 주제가 드러난다. 배라는 건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다.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나는 것처럼.
 
영혜는 그간의 피웅덩이 꿈이 고기 같은 물질적인 것에서 온 것이 아니고, 어떤 정신적인 것, 그것도 생명이 나오는 장소(배)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꽃(생명의 시원) 그림이 자기 몸에 그려진 채 남녀의 교접(생명을 잉태하는 행위)을 통해서 그렇게. 형부도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가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p176

눈은 세상을 보는 창인데, 거기에 모든 것이 담겼으면서도 모든 것이 비워져있다. 조금 어려운데 불교적으로 풀이하면 이해가 된다. 한강 작가님의 어버지인 한승원님도 문학 작가였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열반에 대한 소설을 남긴 바 있다. 당연히 그 영향이 배었을 것 같다.
 
경전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색(色)은 물질적인 세계와 그 현상들을 나타내고, 공(空)은 그런 물질적인 존재들이 사실 실체가 없이 비어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불교에서 화두로 던져진 것이다.
 
결국 세상을 보는 눈이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고, 영혜도 형부도 어떤 면에서는 해탈의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거리낌 없어지는 에너지에 휩싸여진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II – 꿈 속의 꿈에서의 사랑

 
 
사람 그림자가 반이고, 시간과 공간의 연결이 끊어지고, 주인공의 아빠라는 사람이 조니워커 위스키 병 모델 같이 차려 입고 나오는 소설의 상황은 왜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자.
 

(좌) 실제 조니워커 병 모델 (우) 소설 속 조니워커 상상도


 
장난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건 작가의 영혼 탐구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치유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사람 정신의 작동방식은 이성적인 것만이 아니고, 깊은 곳의 혼돈스런 무의식과 연결 되어 있다. 프로이트나 융이 말했던 그런 의식이다. 그래서 어지럽고 뜬근없는 마음의 파편을 이해하면 상처를 낫게 하는 길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파편은 꿈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예시로서 프란츠 카프카의 <성>이라는 작품을 들 수 있다. 측량사 K라는 주인공이 추운 겨울에 한 낮선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 언덕 꼭대기로 보이는 성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마치 악몽 속을 헤메는 것처럼, 가려할 수록 더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성에 가는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줄거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가 죽 늘어난다.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은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작품 <성>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면 꿈 속에서 헤매는 아이러니가 실제 삶에서 헤매는 아이러니와 중첩되기 때문이다.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 The Castle by Franz Kafka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프란츠 카프카 평론>

 

토마스 만 평론 내용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온 이야기인데, 사람이 호랑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나비인게 너무 즐거웠다, 근데 깨보니 사람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지금 사람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장폴 사르트트,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 문학가들이 이 컨셉을 좋아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려는 사람은 아주 열심히 사는 것 같다. 온 시간과 피와 땀을 들여 노력을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셀럽이 되어서 부와 명예와 세상의 부러움을 다 얻어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것도 인간이 나비의 꿈을 꾸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주체와 관점에 따라 허무한 것이 된다.
 
그래서 카프카 작가도 하루키 작가도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생에서 가장 절박하고 영속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는 테마이다. 그게 바로 기억과 사랑이다.
 
 

★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메멘토(Memento)의 장면이다. 주인공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앞으로 진행되는 사건을 기억 못함. 기억상실증 이전 사건들은 잘 기억함)을 앓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자기 아내를 죽인 범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런데 스포일러이지만 실제 아내 살해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오시마 청년이 몇 번 했던 중요한 대사가 ‘만물은 메타포’ 이다. 독일의 괴테가 책 <파우스트>에서 한 말을 인용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건 상징으로 나타나는 데, 뇌에서 한 번 해석된 후 저장되는 것이어서 그렇다. 메멘토 주인공은 그 상징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의 순서를 끝에서 처음으로 거꾸로 돌려 보여주면서 기억와 거기에 메타포로 붙은 감정인 애정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사에키 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저는 이 도시로 돌아온 이래 줄곧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써왔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근처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살던 한 소년을 깊이 사랑했어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했지요. … 우리는 완전한 원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원 안에서 완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시대는 변하고 있었어요. 원은 여기저기 터져서 밖의 것이 낙원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쪽의 것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그런 침입이나 유출을 막으려고 입구의 돌을 열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저는 그 벌을 받았습니다.
 
<사에키 씨가 나카타 노인에게 한 말>

 
그녀는 오래 전 소녀였을 때의 연인을 잊지 못하는데, 그때 이룬 완전한 세계를 지키려고 다른 세계의 입구를 열어 버렸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건데, 실제 세상에서도 실연으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의 미스 하비샴. 결혼식 직전 약혼자에게 버림 받은 후 집안의 시계를 멈춰놓고 웨딩드레스를 그대로 입은채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런 분열된 정신이 회복하는데는 사랑과 합일이 필요한데, 다무라 카프카 소년과 나카타 노인이 그 역할을 해주고, 사에키 씨도 두 주인공에게 비슷한 도움을 준다. 고무라 기념 도서관으로 찾아온 나카타 노인에게 사에키 씨는 말한다.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정의 감정이 클수록 모순도 늘어나는데, 사랑이 기억과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상징이고 가변적이기도 해서 부조리가 될 수 있다. 사에키 씨는 자신이 쓰던 원고를 나카타 노인에게 넘겨 주고 태워달라고 한다. 이 원고는 추억의 집약체인데, 사에키 씨의 소녀 시절 연인이 죽으면서 완성되지 못했던 것이 다무라 카프카 소년이 도착함으로서 완성이 되었고, 기억은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사람 안에서 완결성을 띄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소멸시킨 것이다. 자기 작품을 모두 태워 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하고 죽은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최후와도 같다.
 
 

(좌) 막스 브로트 (우) 프란츠 카프카


 

사에키 씨는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본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거기에는 없지.”
“그럼, 사에키 씨는 내가 거기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거죠?”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가지뿐이야” 하고 사에키씨가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사에키 씨가 마지막 만남에서 다무라 카프카에게 한 말>

 
사에키 씨는 이 말처럼, 자신의 메타포를 소년에게 남기고 편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제 더 이룰 게 없었던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I – 상처 받아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책 서문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는 작가 자신이면서 독자 자신이기도 하다” 라고. 감정을 이입해서 소년이 자라나는 걸 지켜봐 달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성장을 위한 사이코드라마의 성격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에게서 결핍된 것은 무엇이고 성장을 위해서 어떤 경험이 필요한 걸까? 그건 작가의 유년시절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젊은 시절 스웨터를 입은 모습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일본 전후 세대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당시 보기드문 무녀독남 가정이었고 부모님 두분이 모두 국어교사였다. 베이비 붐 시대, 가족마다 아이들이 북적였지만 그는 조용한 외아들로 책 많이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의 주인공은 다른 작품들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인생이 애착 대상을 찾는 여행 비슷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고, 그게 녹여든 작품이 많은 외로운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사에키 씨는 잘 모르고 있어요. 내가 돌아갈 세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 기억이 없습니다. 나 자신 말고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좋을지도 모르고요. 사에키 씨가 말하는 ‘원래의 생활’ 같은 건,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해변의 카프카 2권 371페이지>

 
15세 소년 다무라 카프카는 위의 단락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 없이 살아왔다.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의 상실과 아버지로부터의 격리라고 할 수 있다. 다무라 카프카가 4살 아이 였던 시절 어머니는 카프카 군의 누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자식 둘 중에 아들은 놓고 딸 만 데리고 떠난 건데, 그게 어린아이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화가인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지만 대화가 없었고, 가족 외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이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것,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게 유일하게 의미있는 활동이었다. 다무라 소년은 집을 떠나야 했는데, 이유는 아버지의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였다.
 
소년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누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될거라는 저주인데, 그리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오마주(hommage) 한 것 같다.
 
다무라 카프카는 도쿄의 집에서 가출해서 시코쿠 지역으로 가는데, 거기서 운명이 이어진 인물인 사에키 씨, 즉 소년의 어머니에 대응되는 사람을 만난다. 사에키 씨는 가출소년 다무라의 임시직장이라 할 수 있는 <고무라 기념 도서관>의 관장이자 안내자로 일하고 있다.
 
 

★ 그림자가 반 밖에 없는 인간

그림자는 실물을 반사한 건데, 그게 반 밖에 없다는 건 실물도 반이라는 뜻이다. 작품에는 이렇게 그림자가 흐린 사람이 두 명 나오는데, 한 명은 사에키 씨고 다른 한 명은 나카타라는 고양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노인이다.
 
사에키씨는 다무라 카프카 소년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는 소년의 연인이기도 하다. 남자의 가장 강한 애착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둘, 어머니와 연인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 데, 다른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은하철도 999 메텔. 주인공 테츠로(星野鉄郎)의 연인이자 어머니 상(像)


 

나카타 노인은 다무라 소년의 다른 분신인데, 2번째 주인공이다. 사에키씨와 나카타씨 이 둘이 실체를 잃고 세상에 반 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이유는 유년 시절의 정신적 외상 때문이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랑(애착대상)을 찾는게 성장소설(Bildungsroman)이자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인 <해변의 카프카>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특이하게도 상처 받은 사람을 표현하는데 그냥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하는 게 아니라 그림자가 반 밖에 없고, 본체는 둘로 나뉘어서 한쪽은 이계(異界), 즉 다른 세상에 가있고 현실 세상에는 껍데기 같은 사람이 있는 걸로 해놓았다. 그게 사에키 씨와 나카타 씨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로는 ‘입구의 돌’을 열면 갈 수 있다. 왜 이런 초현실주의적 장치를 사용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얘기하도록 하겠다.
 
해변의 카프카 II – 꿈 속의 꿈에서의 사랑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 사랑의 모양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그대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그대의 형체를 알 수가 없어서,
 
I find you all around me.
내 주위 사방으로 찾아 헤맨다.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하지만 네 존재가 눈을 사랑으로 채우고,
 
It humbles my heart,
나의 마음은 숙연해진다.
 
For you are everywhere….
왜냐면 이 세상 가득 그대가 있으니…

 
 
신비로운 수중 생물과 농인 여자의 사랑을 그렸던 영화 Shape of Water(부제: 사랑의 모양)의 말미에 나왔던 시이다. 여자주인공(Elisa)은 목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다에 들어가며 상처는 아가미로 변해, 사랑하는 이와 자유로이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의 플롯과 맺음 시는 ‘사랑의 모양’ 부제와 잘 어울린다. 물은 정해진 모양 없이 공간을 채우고 이리저리 흐른다. 인간의 사랑 또한 그러한데, 어느 순간 찾아와 존재(공간)를 젖게 하고 마음을 숙연케 한다(사방을 채운 신비를 느꼈기 때문에 이전의 좁은 마음에서 벗어난다는 걸 의미).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의 <단순한 열정 Passion Si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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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아무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연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아줌마의 독백이 왜 이렇게 길고 긴 걸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혹은 도덕적 관점에서 도무지 작품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둘 다 작품의 주안점이 되지 못한다. 이때 <셰이프 오브 워터>를 생각해보자.
 
아니 에르노 작가는 물에 빠져서 호흡이 가빠지는 것처럼, 사랑에 젖어가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책의 초입의 이인감(異人感)에 대한 부분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의지와 욕망, 지성으로 선택한 것은 오로지 이 남자의 존재에만 결부된다. 눈에 사랑이 드리워져(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나는 내가 아닌 것 같고, 생활은 마비될 지경이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감정을, 작가 스스로가 “평평한 글쓰기ecriture plate”라고 부르는 문체로 표현했다는게 이색적이다.
 
현재의 감각(혹은 이념)에 충실하지 않으면 잡념이 생기고 생활에 감동이 없어진다. 바쁜 수험생이나 직장인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그걸 읽을 수 있다. 반면 아니 에르노는 모든 존재를 기울여 사랑하는 자신의 감각(전혀 무미건조하지 않은 이데아)을 무미건조한 문체(형식)로 내보임으로써 역설적 효과를 낸다.
 
책의 말미에서 그녀는 연인과의 사랑을 매개로 생긴 결과물을 이야기 한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초입에 느꼈던 이인감이 재현되고 있다. 남자를 만나고 떠나보낸 일을 남이 한 경험처럼 느낀다. 스스로를 잊을 만큼 사랑해서 시간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스어 어원의 카이로스(kairos)는 개인의 체험에 따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시간을 뜻한다. 첫 사랑과 입맞춤 하는 때 같은 최고 최상의 순간(the supreme moment)에는 시간이 아득히 멈춘 것 같은데, 그런 카이로스를 내내 산것 같다.
 
‘그 사람의 존재로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다는, 공간을 채우는 물처럼 사랑이 마음을 채웠고, 그게 언어의 형태를 띈 작품이 되어 외부로 흘러갔다는 걸 의미한다.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순수히 드러낸 작가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고, 노벨상 수상도 기쁘다.
 

투명한 다자키 쓰쿠루 – 에스(Es)의 흐름

 
 
일하다 보면 아기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다. 아기도 빤히 이쪽을 보는데, 까맣고 하얀 눈동자 색의 대비도, 그걸 가만히 움직이는 모습도 신비하게 느껴진다. 아기는 두 팔을 벌려 양육자에게 안기려 하는데 그럼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고 배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추구가 계속 거부될 때는 괴로워지고, 표정도 순진무구함을 잃게 될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유아기의 체험이 평생토록 이어지는 인격에 영향을 준다고 하는데 아기를 보면 잘 수긍 된다.
 
책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색채를 뜻하는 글자가 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투명한 거고, 아기와 같이 비고 순수한 상태로 시작한다. 책 제목의 ‘순례’는 그가 정신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떠난 여행을 뜻하고, 그 과정에서 16년전 절교 당한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찾는다. 그 모든 단계가 정신의 치유를 향하는데, 정신분석학으로 풀어보면 재미가 있다.
 
 

★ 에스(Es)를 따라가는 순례

에스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정립하며 사용한 용어이다. 본능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렬한 성적 충동(리비도; libido) 뿐 아니라 공격성(힘이 자신을 향하면 죽음의 충동; Thanatos이 되어 스스로를 죽이고, 타인을 향하면 살인이 됨)을 포함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연상의 여자친구 기모토 사라의 제안으로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내면 깊은 곳에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렸었다. 출혈의 원인이 된 사건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그걸 아물게 해야만, 사랑이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성장기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썼다. 대표적 성장소설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잘 나타난다. <데미안>은 아이가 성인이 되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이 있고, 논리적으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는 논리적 필연성이 없고 개연성도 없는 사건이 죽 이어져서 혼란스럽다.
 
그 이유는 소설의 플롯(plot)이 ‘논리’가 아닌 깊은 정신 에너지인 ‘에스’를 중심으로 꿈처럼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 회색 꿈, 하이다 후미아키

각기 적청백흑(赤靑白黑)의 색을 뜻하는 친구들 외에도 색채를 가진 인물이 두 명 더 있다. 회색(灰)의 하이다 후미아키와 녹색(綠)의 미도리카와이다. 회색은 흑색과 백색을 섞으면 나타나는 색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반복되는 꿈에서 구로노 에리(黑)와 시라네 유즈키(白)는 둘이 같이 나체로 주인공과 동침한다. 남자의 막장 판타지를 표현한건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스 즉 리비도가 발현된 모습으로 이해하면 된다. 꿈은 도덕의 억눌림 없는, 가장 큰 에너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자키 쓰쿠루는 여성의 이상형으로 외향적이고 밝은 구로(黑)와 내향적이고 신비로운 시로(白)의 상을 같이 품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에도 성격이 반대인 두 여자 ‘미도리’와 ‘나오코’가 등장하는데, 미도리는 구로에, 나오코는 시로에 대응한다.
 


 
현실의 사랑에서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같이 품을 수는 없으므로 두 상(像)을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역할로 연하의 동성(同性)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가 설정된 걸로 보인다. 그는 주인공의 꿈 마지막에서 구강성교로 사정을 받아주는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리비도가 합치와 성숙의 에너지로 쓰인 것이다. 흑과 백이 섞여 회색이 되고, 이제 새로운 여인 기모토 사라를 만날 바탕이 마련되었다.
 
 

★ 타나토스

미도리카와는 하이다 후미아키의 아버지가 과거에 만났던 사람이다. 전직 피아니스트인 그는 외딴 산장에 죽기 위해 찾아왔다. 그가 하이다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그거하곤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사실 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어. 대충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지.”

“그러면 미도리카와 씨는 앞으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네 생명은 앞으로 두 달로 정해졌다고. 그게 한달 전이었거든.”
“그런 소리를 도대체 누가 했습니까?”
“의사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냐. 아주 평범한 사람이야. 단, 그 시점에서 그는 죽어 가고 있었어.”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서 에스는 파괴적 에너지로 자신을 해치려 한다. 수치심과 자기혐오의 결과인 경우가 많은데, 미도리카와에게는 특이하게도 무감동증(Anhedonia)이 원인이 되었다. 그의 상징 색채인 녹색은 자연 그대로인 해탈 상태를 의미하는데, 깨달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의미 없어져버린 것이다. 불교에서 즉신불(卽身佛)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죽음의 필연적 이유를 알려주는 악마(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 도인道人 같은 사람일 것이다.)를 만난 그는 그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자기는 살 수도 있었지만, 그냥 조용히 죽는 길을 택한다. 마지막 남아 있는 사랑으로 하이다의 아버지에게 아래와 같은 충고를 해준다. 이데아의 극한이 죽음을 부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 하는 작별인사이다.
 

문득 하이다는 좁은 방 안에서 미도리카와와 둘이 마주 앉은 것 자체가 갑작스럽게, 참 이상하게도,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기증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 속에 미세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이 천천히 썩어 가는 냄새. 그러나 단순한 착각일 것이다. 아직 여기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
“자네는 머지않아 도쿄의 대학 생활로 돌아갈 거야.” 미도리카와는 조용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으로 돌아갈 거야. 견실하게 그 삶을 살아야 해. 아무리 밋밋하고 평범하더라도 삶에는 살 만한 가치가 있지. 그건 내가 보장하지. 아이러니나 역설 같은 건 빼고 하는 말이야. 다만 나에게는 그 가치라는 게 좀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 놈을 제대로 짊어지고 나아갈 수가 없어. 아마 나면서부터 거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죽어 가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 그때가 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거야.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아. 그러나 자네는 달라. 자네는 그놈을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어. 논리의 실을 활용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

 
 

★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어떤 것

책에는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경탄이 자주 나온다. 도자기 같이 하얀 시라네 유즈키의 다리, 민트 그린 원피스를 입고 빛나는 기모토 사라, 끝이 살짝 올라가서 예쁜 구로노 에리의 코 등등.
 
작가가 외모지상주의자여서 그런 건 아니고, 리비도의 흐름을 잘 포착해서 문예로 바꾸는 능력이 출중해서 그렇다고 느낀다. 에스(리비도)는 주의(主義)와 상관없이 가장 강렬한 자극에 들러붙는다.
 


 
반대로 시들어진 외모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작가는 아름다움을 ‘외형’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나 ‘기운’으로 표현한다. 성폭행과 유산으로 완전히 바뀌었던 시로에 대한, 그리고 기모토 사라의 옛 사립여고 동창생에 대한 묘사가 다 그렇다.
 

“…중요한 건 시로는 그때 벌써 생명력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광채를 잃어버렸다는 거야. 그 애가 성격적으로는 내향적인 타입이었지만 중심에는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활발히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어. 그 빛과 열기가 여기저기 틈을 찾아서 마구 바깥으로 새어 나왔지.

그렇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런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마치 누군가가 뒤로 돌아 들어가서 플러그를 뽑아 버린 것처럼. 예전에 그 애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싱싱한 물기를 머금게 했던 특유의 겉모습이 그땐 오히려 애처롭게 보였던 거야. 나이 문제가 아니아.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시로가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정말로 안타까웠고 진심으로 불쌍했어. 어떤 사정이 있었든 그런 식으로 죽기를 바라지 않았어.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는 육체적으로 살해되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빼앗긴 상태였다고.”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그 이야기는 내 고등학교 반 친구 생각이 나게 해. 미인이고 날씬하고 집도 부자고 외국에 살다가 귀국했는데, 영어도 프랑스어도 잘하고 성적도 최상이었어. 뭘 해도 사람들 눈을 끌었어. 친구들에게 찬양받고 후배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어. 사립 여고라서 그런게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
쓰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신 여대에 들어가서 중간에 2년, 프랑스 유학을 갔어. 귀국해서 2년 정도 지나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 애 얼굴을 보고 난 할 말을 잃었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색채가 흐려졌다고 할까. 강렬한 햇살 아래 오랫동안 드러나 있다 보니 색이 전부 바래 버린 것처럼. 겉모습은 옛날이나 다름없었어. 여전히 미인이고 날씬하고…… 다만 예전보다 흐려 보였던 거야. 나도 모르게 텔레비전 리모컨이라도 들고 색깔의 농도를 몇 단계 올려 놓고 싶을 정도로. 정말 기묘한 경험이었어. 사람이 몇 년 만에 이 정도로 눈에 띄게 흐려질 수 있다니.”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 그 애랑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둘 모두와 친한 친구가 있어서 그 이후에도 가끔 어떤 자리에서 만나곤 했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애, 색깔이 점점 더 흐려진다는 걸 느꼈어.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는 누구의 눈에도 특별한 미인이 아니었고,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았어. 머리도 많이 나빠진 거 같았고 하는 이야기도 지루하고, 생각하는 것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거야. 스물일곱에 결혼했는데, 남편은 관청의 엘리트로 척 보기에도 얄팍하고 재미없는 남자였어. 그런데 본인은 더는 미인도 아니고 매력적이지도 않고 사람들 눈을 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고 옛날처럼 여왕으로 행동하는 거야.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정말 답답하고 괴로웠어.”

 
정신에너지(Es)의 상실이 얼굴의 광채까지 지워 버렸다. 이런 내면의 에너지에 대한 표현을 같은 성장소설 <데미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얼마나 신비한 힘을 두 작가는 표현했던가. 에스(Es)는 하이다 후미아키를 선의의 인도자가 되게 했고, 미도리카와와 시로에게는 죽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다자키 쓰쿠루와 기모토 사라에게는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한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문학으로 사이코드라마를 구현

 
심리극(心理劇) 즉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는 연극의 틀을 이용한 심리 요법이다. 괴로운 정신을 안고 있는 의뢰인이 연기를 통해 감정을 표출하도록 하고, 극에 참여한 집단이 함께 이해와 해결을 꾀한다. 강렬한 감정에 몰입한 연기자도, 그걸 관찰하는 연출자나 관객도 새로운 영감으로 치유 받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작품은 마치 문학을 사이코드라마로 엮어 놓은 것 같다. 사람이 유년기부터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인간관계의 파열과 정신적 외상, 그리고 그걸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카를 융의 책에서 볼 법한 의미심장한 꿈과 상징이 나온다. 몰입해서 읽으면 사이코드라마의 참가자처럼 심리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알게된 5명 친구 그룹의 일원이었다. 남자 3명 여자 2명의 구성인데, 다자키를 제외한 4명은 모두 이름에 색을 상징하는 글자(적청백흑)가 있었다. 이들은 신성한 비밀결사체처럼 모임을 특별히 여겼고, 각자가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모여 어울렸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시절, 주인공은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다른 4명 전부로부터 절교 선언을 당한다. 충격 받은 다자키 쓰쿠루는 그후 반 년의 세월을 방에서 혼자 죽음만을 생각하며 보낸다.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어느 날 신비한 꿈을 꾸었고 그걸 통해 처음으로 ‘질투심’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꿈을 꾸기 전 그는 누군가를 시샘하거나 질투해본 적이 없었다.
 
다자키 쓰쿠루의 성격 즉 투명한 색채를 말해 주는 부분이다. 색깔 없이 비어 있기 때문에 소유욕 없이 살 수 있었다(피아 구분이 없는 아기처럼). 그가 가장 집착했던 친구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은 소속감과 애정이었다. 그게 가슴 아프게 깨지고 난 후 질투심이라는 걸 마침내 알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어른)으로 살기 시작한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30대 중반의 안정적 직장인(도쿄의 철도 기업 소속)이 되었고 새로운 애착(질투)의 대상이 될 여자를 만난다. 여행 컨설턴트로 일하는 2세 연상의 기모토 사라(木元 沙羅)이다. 그녀는 다자키 쓰쿠루에게 어떤 치유받지 못한 상처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 원인을 해결할 순례여행을 떠나게 한다. 15년도 전에 헤어져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4명 친구를 다시 찾도록 만든건데 덕분에 다자키 쓰쿠루는 멀고 먼 유럽 핀란드까지 가게 된다.
 
작품에서 색채를 가진 인물은 단 6명이 있다. 친구 그룹에 속했던 오우미 요시오(青海 悦夫), 아카마쓰 게이(赤松 慶), 구로노 에리(黒埜 恵里), 시라네 유즈키(白根 柚木)와 주인공이 대학생 시절 처음 만나 친해졌던 연하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灰田 文紹), 그리고 하이다의 회상 속에만 등장하는 신비의 인물 미도리카와(緑川) 이다.
 
개인적으로 시라네 유즈키(통칭 시로 혹은 유즈)와 미도리카와 두 명이 주인공의 색채를 채우는데 큰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 緑 초록색 – みどりかわ 미도리카와

미도리카와는 주인공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고, 친구 하이다 후미아키(灰田 文紹)의 아버지가 과거에 만났던 인물이다. 하이다가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를 다시 다자키 쓰쿠루에게 들려주면서 알려진 것이다.
 
하이다의 아버지는 대학생 시절 외딴 시골 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피아니스트라고 하는 미도리카와라는 사람이 산장의 손님으로 온다. 아래는 이 둘의 대화이다.

​미도리카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마른기침을 한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 색깔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알아?”
“아니, 모릅니다.”
“그럼 가르쳐 주지. 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게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면서 떠올라. 후광처럼, 아니면 백라이트처럼. 내 눈에는 그 색깔이 뚜렷이 보여.”
미도리카와는 술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핥듯이 마셨다. “그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가요?” 하이다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미도리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천적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자격이야.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어져. 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이어지지. 그 자격은 지금 나에게 주어졌지.”
하이다는 잠시 침묵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말했다. “세상에는 기분 좋은 색깔이 있는가 하면 보기 괴로운 색깔도 있어. 즐거운 색깔이 있는가 하면 슬픈 색깔도 있지. 빛이 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엷은 사람도 있고, 이거 정말 피곤한 일이야. 그런게 보기 싫어도 보이니까 말이야.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 싫어져. 그러니까 이런 산골로 흘러들어 온 거지.”
하이다는 상대의 이야기를 따라잡기에 급급했다. “그렇다면 내 색깔도 미도리카와 씨에게는 보인다는 겁니까?”
“아, 물론 보이지 무슨 색인지 자네에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할 일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어떤 특징적인 방식으로 빛을 내는 사람을 찾는 거야, 죽음의 티켓도 사실 그런 상대에 한해서만 건네줄 수 있어. 아무에게나 무작정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인간에게는 각각 색깔이 있고, 그걸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미도리카와 자신이 그 능력이 있는데, 이걸 가진 사람은 죽음의 티켓이라는 것을 색채를 가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티켓을 받은 사람은 한 달내로 죽는다. 데스노트 만화같은 내용인데 이어지는 대화를 읽으면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지각이란 그 자체로 완결되는 거지 뭔가 구체적인 성과로 바깥에 드러나는 건 아니야. 어떤 이익 같은 것도 없어. 그게 어떤 건지 말로 설명 하는 것은 불가능해. 직접 경험 해 보는 수 밖에 없어. 다만 한 가지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일단 그런 진실의 정경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무서우리만치 밋밋해 보인다는 거야. 그 정경에는 논리도 비논리도 없어. 선도 악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 돼, 자네 자신도 융합의 일부가 되지. 자네는 육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이른바 형이상적 존재가 돼. 자네는 직관이 돼. 참으로 멋진 느낌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인 느낌이기도 하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하찮고 깊이가 없었는지, 거의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니까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인생을 참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율하고 말지.​

미도리카와가 가진 녹색은 자연 그대로를 의미하는데 ‘육체의 틀을 벗어난’ 초월 상태이기도 하다. 선과 악, 논리와 비논리를 괘념치 않는 해탈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도리카와도 한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현실이 감동이 없고 밋밋하다는 것이었다.
 
이 미도리카와라는 인물을 정리하면, 작품의 중심 테마인 ‘색채’가 무엇인지 처음 설명을 해주었고, 이렇게 너무 깨달아서 허무해진 녹색의 미도리카와와 투명한, 아직 미지의 공간이 무한한 주인공이 대비가 된다.
 

무감동증 Anhedonia 사람 머리(생각)가 풀처럼 뻣뻣해짐

 

★ 白 하얀색 – しらね ゆずき 시라네 유즈키

주인공의 고등학생 시설 가장 가까웠던 5명 친구 그룹의 일원이었던 시로는 백설공주 같이 예뻤다고 표현되어 있다. 하얀색은 순수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쉽게 오염될 수도 상처 받을 수도 있다. 시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나고야 지역의 음대에 진학하는데, 이때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
 

Edvard Munch (Norwegian: Pubertet)

 
순수와 반대되는 이미지이고 그걸 파괴할 가능성이 가장 큰게 성적 에너지, 리비도인데 시로는 세상의 일부인 이런 차원의 힘과 융합을 못하고 결국 자기를 망가뜨리게 된다.

…”동성애였다는 거야?” 에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와는 달라. 그애에게는 그런 욕구가 전혀 없었어. 분명해. 다만 유즈는 옛날부터 일관되게 성적인 것에 대해 아주 강한 혐오감을 가졌어. 아니, 공포심이라고 해도 좋을지 몰라. 어디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그건 나도 몰라. 우리는 무슨 일이든 대체로 솔직하게 이야기했지만, 성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나 같은 경우는 그런 쪽에 대해서는 열린 편인데, 유즈는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화제를 돌려 버렸거든.”
“그래서 유산한 다음 유즈는 어떻게 됐어?”
“우선 대학을 휴학했어. 도저히 사람 앞에 나설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하고 집에 틀어박혀 도무지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어. 그리고 곧 거식증에 걸렸어. 먹으면 거의 토해 버리고, 그래도 남은 것은 관장을 해서 빼내는 거야. 그대로 갔으면 분명 죽었을 거야. 그러다 전문 카운슬러의 도움으로 거식증에서 벗어났지. 반 년 정도 걸렸을 거야. 한때는 정말 심각할 정도여서 체중이 4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어. 그때는 정말 유령처럼 보였어.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회복했지. 나도 매일같이 만나러 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격려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어. 그래서 1년만 휴학하고 그럭저럭 학교에 복학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어.”
“왜 거식증에 걸린 거야?”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생리를 멈추고 싶어서, 체중이 극단적으로 줄어들면 생리가 멈춰 버리니까. 그 애는 그걸 원한 거야. 다시는 임신하고 싶지 않았고, 아마도 여성이기를 포기하고 싶어 했어. 가능하면 자궁을 들어내 버리려 했으니까.”

하얀색의 시라네 유즈키는 자신에게 심겨져 있는 여성성을 거부해서 생리를 하지 않는 거식증에 빠지고 자궁을 없애겠다는 생각도 한다.
 
살면서 겪는 상처에 너무 빠지면 색이 바래지는데, 그녀는 그렇게 신비한 후광처럼 비치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아래는 그걸 묘사한 대목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건 나도 정말 싫지만, 그 애, 옛날처럼 그렇게 예쁘지 않았어.”
“예쁘지 않았다.” 쓰쿠루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자신의 말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예쁘지 않은 것하고는 좀 다를 거야.” 아카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말하면 될까, 물론 얼굴은 기본적으로 같으니까 보통 기준으로 말하면 그때도 역시 미인임에는 분명했어. 10대 시절의 시로를 모른다면, 사람들은 그 애를 보고 딱히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난 옛날의 시로를 잘 알아. 그 애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마음 깊이 새겨져 있었거든. 그렇지만 그때 내가 본 시로는 그렇지 않았어.”
아카는 그때의 정경을 떠올리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시로를 앞에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게 솔직히 말해 나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어. 옛날에는 거기 있었던 뜨거운 뭔가를,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 비범한 것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 그것이 더는 내 마음을 떨리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건 시로는 그때 벌써 생명력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광채를 잃어버렸다는 거야. 그 애가 성격적으로는 내향적인 타입이었지만 중심에는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활발히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어. 그 빛과 열기가 여기저기 틈을 찾아서 마구 바깥으로 새어 나왔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렇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런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마치 누군가가 뒤로 돌아 들어가서 플러그를 뽑아 버린 것처럼. 예전에 그 애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싱싱한 물기를 머금게 했던 특유의 겉모습이 그땐 오히려 애처롭게 보였던 거야. 나이 문제가 아니아.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시로가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정말로 안타까웠고 진심으로 불쌍했어. 어떤 사정이 있었든 그런 식으로 죽기를 바라지 않았어.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는 육체적으로 살해되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빼앗긴 상태였다고.”

시라네 유즈키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에게서 대비되는 것은, 색을 채움에 있어서 지나치게 순수하면 자아가 파괴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로는 자기를 잃고 환상에 빠져 주인공을 모함했고,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허무를 상징하는 초록색의 미도리카와와 소멸을 상징하는 하얀색의 시로를 순례 여행을 통해 경험한 다자키 쓰쿠루는 작품의 말미에서 자신이 앞으로 가야할 길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의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마음에 티끌 하나 없이 순수했던 시절, 누구도 가를 수 없는 친구로서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녔던 것처럼 인생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다짐이다. 그건 미도리카와와 시로가 가졌던 죽음의 충동(Thanatos)을 이겨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