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비하는 괴로운 생각 같지만 실은 중독성이 있다. 막장에 몰리면 유머 같은게 생겨서 그렇다.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1909년~1948년)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인간실격>이라는 작품으로 그렸었다. 소설 제목이 어울리게 가출, 불륜, 알콜중독, 마약중독, 정신병원 폐쇄병동 감금, 중간중간 총 네 차례 자살시도로 이어진 생활을 하다가, 기생과의 동반자살 성공으로 죽었다. 하지만 자기비하의 끝이 우울만은 아니어서, 대표 장편소설 <사양斜陽>에서 주인공 여성의 입을 빌어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반면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삶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탐구한 끝에 아래와 같은 문장을 남겼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그는 자살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철학적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안 하기로 했다. 이런 긴 사색의 결과를 <시지프 신화>, <이방인> 등의 저작으로 표현했다. 카뮈는 젊은 나이(만44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영광된 삶을 살다가 교통사로로 사망했다. 이것도 참 부조리 했다. “자살은 아니다” 라는 결론을 위해 그렇게 노력한 사람이 사고로 죽다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작가 카뮈의 성격이 투영된 존재로, 내성적이면서 무감각한 태도를 지녔다. 작품 속 대사처럼 세상에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생각해서다. 뫼르소는 양로원에 나가 살던 어머니가 죽은 걸 알고도 슬퍼하지 않는다. 대신 장례식장에 가서 담배를 피고 사탕을 먹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는 이런 행동을 눈길 끌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감정이 그에겐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사회의 이방인으로 되었다.
실은 사람은 모두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기일 때 부터 엄마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명 자체를 잃기 때문이다. 바닷가 모래 사장의 아기 거북이는 알에서 나오자마자 바닷물 쪽으로 마구 기어간다. 다른 어른 거북이가 “바닷물에 빨리 안들어가면 너는 죽어” 라고 소리쳐 준적도 없지만 아기 거북이는 본능적으로 기어간다. 인간도 비슷하게 아기는 엄마를 찾고 칭얼대도록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러니 뫼르소가 사회성도, 가족과의 유대도 잊고 이방인이 된 것은 분명 길고 긴 세월 좌절과 배신과 분노와 허무를 견디며 조용히 그렇게 된 걸로 보인다. 비정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장기간의 스트레스가 흔한 일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공장에서 찍혀나오듯 사회에 나오고 있다. 그 중 이방인 기질이 특출난 사람은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신문과 언론에 싸이코패스 범죄자로 낙인찍혀 등장한다. 뫼르소도 살인을 저지르고 사회에서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범죄자와는 뛰어나게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건 그가 진지한 사색을 통해(작가 카뮈처럼) 삶의 방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확립한 사람이고, 그걸 지키느라 자기 목이 잘리는 길로 끌려 갔기 때문이다. 뫼르소에게 있어 생의 이념은 사랑이나 혁명, 잘 먹고 잘 살기 혹은 사회적 성공 같은게 아니었다. 순수한 에너지, 순수한 리비도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게 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아래 단락들을 읽어보자. 뫼르소를 사랑했던 동네 여자 마리와의 일화이다.
어제는 토요일이라 약속했던 대로 마리가 찾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몹시 정욕을 느꼈다. 마리가 붉고 흰 줄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력 있어 보이는 젖가슴이 완연히 드러나 보였고, 햇볕에 그을어 갈색이 된 얼굴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 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건 중대한 일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기와 같은 관계로 맺어진 다른 여자로부터 같은 청혼이 있었어도 승낙을 했을 것인가. 다만 그것만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 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길이 없었다. 잠시 또 묵묵히 있다가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이상스러운 사람이라고, 아마 그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내가 싫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노라니까, 마리는 웃으면서 내 팔을 붙들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든지 그녀가 원한다면 곧 결혼을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장의 제안을 이야기해 주니까, 마리는 파리를 알고 싶다고 했다.
예쁜 여자에게 성욕은 느끼지만 사랑은 느끼지 않는다. 여자가 그에 대해 질문하면 솔직하게는 대답한다. 이상한 것은 마리가 그런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된 것 같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연인을 대할 때 성욕을 추구하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순수하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강할수록, 길어질 수록 위선스러워진다. 뫼르소가 순수하다고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는 누구나 느끼는(어린이 제외) 가장 강렬한 열망에 편견이 없으며, 사회적 고정 관념에는 무감각하다. 작가 카뮈의 설명에 따르면 뫼르소는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이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사람이다.
뫼르소는 우연한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고, 재판부 검사 및 대중들로부터 한껏 비난 받게 된다. 살인 자체는 사소한 시비 끝에 난 우발로 해석될 수 있었지만, 모친상 때 슬퍼하지 않은 것, 모친상 다음 날 여자랑 잤다는 사실이 같이 어울리면서 완전히 싸이코패스로 찍힌다. 하지만 뫼르소는 항상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느끼고 내면 에너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은 것도, 그 다음 날 여자랑 동침한 것도 스스럼 없이 느꼈었다. 그는 사회를 통해 만들어진 이방인이었고, 정직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싸이코 취급한다.
다시금 종이 울리고 피고석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 밀려온 것은 장내의 침묵, 그리고 그 젊은 신문기자가 눈을 옆으로 돌린 채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야릇한 감각이었다. 나는 마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시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나에게 이상스러운 말로, 나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히는 감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배려의 표시 같은 것 이었다고 생각된다. 간수들은 나에게 아주 부드럽게 대했다. 변호사는 나의 손목 위에 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재판장이 나에게 무엇이든지 덧붙여 말할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끌려 나온 것은 그때 였다.
사람을 법으로 심판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공적 힘의 공통적인 목소리는 왜 그렇게 사느냐, 너는 옳지 않다 똑바로 살아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결국 같은 차원의 세계에 산다. 자기에게 옳고 진리인 것이 항상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는 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신을 믿던 시대에는 그런게 통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 사상이,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적 도리가 그 절대적 믿음이었고, 그걸 어기는 개인이나 집단을 모조리 죽이기도 했다. 뫼르소는 하지만 믿지도 않는 사회 이념에 맞게 자기를 꾸미지 않았고(어머니가 죽은 게 실은 너무 슬펐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님! 이라고 하지 않음), 순간의 자연과 현상에 충실했다(그래서 장례식 다음날 마리랑 자고, 살인 재판이 진행되는 중간에도 밖의 거리의 뜨거운 바람과 아이스크림 장수의 나팔소리에 시적 감상을 느낌). 하지만 그게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결국 사형수가 되고 만다.
그는 단두대가 설치된 광장에 주인공으로 끌려갈 날만 기다리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진지한 사색을 계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서 생과 죽음이 어색함도 공포도 없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현상을 체험한다. 세상이 자신과 닮아서 형제처럼 이어져 있는 느낌, 다르게 말하면 자기 마음의 소리와 외부 세계의 소리가 박자가 완전히 맞은 채 합주되는 것 같은 상황이다. 사형수를 위로하러 방문했던 카톨릭 사제와의 대화에서 시작해 그는 이런 생사生死의 초월을 극적으로 외쳤다. 읽으니 눈물이 났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한동안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그는 마침내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인터넷 뉴스를 보면 연예인 사진 수 만 개를 볼 수 있다. 기사 제목은 항상 자극적이다. “XX의 굴욕 없는 뒤태”, “초미니를 입고 계단 오르는 OOO”. 엘리트 지식인인 신문 기자들이 왜 매일 이런 제목을 만드는지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 광고 수익은 기사의 클릭 횟수에 비례해서 지불된다. 사이트 방문 횟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본능과 연결되는 기사를 만들어야 한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주목할만한 실험을 했다. 개한테 음식을 주면서 매번 종소리를 딸랑 냈더니 나중에는 음식을 안 주고 딸랑 소리만 내도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파블로프는 이 실험의 성과로 19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어렵지 않고 별로 비용도 안 들 것 같은 이 실험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유는 그 광범위한 적용 가능성 때문이다. 인간의 고차원적 행동이라는 것도 자극과 반응, 거기에 끼어든 조건 형성, 조건 반사가 복잡하게 쌓이고 쌓여서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프의 이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한 자극(예프고 야한 사진)과 동반된 조건 반사(네티즌의 클릭)를 통해 광고사는 수익을 창출한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 보면 연예인 사진이나 성형외과 광고가 없는 곳은 경복궁 같은 유적지 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온 도시를 광고판으로 만들었고 그중 미모는 가장 강한 마력을 지녔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아무 마력이 없는 예쁘지 않은 존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는 질문에 대한 괜찮은 해답을 준다.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사람들의 주목을 쉽게 끌 만큼 못 생긴 여자이다. 그녀는 추녀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치욕과 멸시를 당해왔다. 남자 작가의 글이지만 여자의 아픔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아마도 작가 역시 사회적인 스펙 싸움에서 져서 굴욕을 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동감을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래는 여주인공의 회고이다.
세상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단다, 라고 말하며 사람들은 저의 어둠을 장애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저를 장애인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분명 세상이 만들어낸 장애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했고, 남들과 비슷한 옷을 입어야 했고… 그리고 언제나 남들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역시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라는 여자의 운명입니다.
어린 시절은… 그랬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제게… 적어도 제게는 언제나 짐승과 같았습니다. 사람을 습격하는 짐승… 배가 고프지 않아도 무언가를 물어뜯는 짐승… 순수한 장난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이들이 두렵습니다. 순수한 만큼, 어떤 죄책감이나 거리낌도 없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이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아이들과 같은 정신연령을 지닌 어른들도 많습니다. 어떤 성자가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해도, 제 삶은 결국 이들과 함께.. 이들에 속해 있어야 했습니다.
작가는 또한 미모 지상주의의 성질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한다. 그것은 본능과 생리 반응에 수반된 결과만이 아니었다. 미모 숭배는 배금주의나 학벌지상주의와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기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경쟁시키는 사회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다(에리히 프롬의 책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움). 소설의 히로인과 히어로는 그런 이념과 싸우며 자신들만의 사랑을 만들어 간다. 아래는 그들이 부서지고 나서 깨달은 생각을 말해주는 남자 주인공의 말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바쁘기만 한 학교와 직장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모두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간다. 분명 친한 것처럼 느껴지는 동료가 있지만, 그건 같이 일할 동안만 느끼는 착각일 때가 많다. 직장을 옮기고 공유할 게 없어지면 인간관계는 기능을 다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람 얼굴이 꺼지듯 나는 그 사람이 필요한 존재에서 지워져 버린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냉소에 빠질 필요는 없다. 진심 어린 작가가 쓴 진심 어린 글을 읽으면 세상에는 잇속을 초월한 괜찮은 인간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를 읽으며 영화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 생각났다. 두 작품 모두에서 어린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명은 소년이고 다른 한 명은 소녀였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이샤의 추억의 주인공 치요(오고 스즈카 분)는 딸을 다 키우면 굶어 죽을 형편이던 집안에서 났다. 치요의 부모는 하는 수 없이 치요는 게이샤 집에 하인으로, 치요의 언니는 홍등가에 돈을 받고 판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버림받은 치요의 마음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게이샤 집에서도 학대 받으며 하녀 일을 하던 중 이와무라 회장(와타나베 켄 분)을 만난다.
그는 길거리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던 소녀 치요를 발견하고는 빙수를 사주며 위로의 말을 해준다. 지금은 울고 있지만 커서는 훌륭한 게이샤가 될 것이라고(게이샤는 일본에서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미모와 교양을 갖춘 예능인의 위치에 있었다). 그 순간 희망 없이 살아가던 소녀는 하나의 꿈을 품는다. 치요는 회장에게서 받은 돈을 손에 쥐고 천 개의 주(朱)색 기둥이 늘어선 길을 달려 신사로 간다. 한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동전을 전부 신전에 바치고는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꼭 게이샤로 성공해서 회장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주인공 제제는 뽀르뚜가(마누엘 발라다리스)를 만나면서 비슷한 감격에 젖는다. 빈민가 소년인 제제는 싸움만 일삼아 가족들로부터 검은 양 취급을 받았다. 제제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사소한 잘못에도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뽀르뚜가는 그의 거친 행동 이면에 애정을 갈구하는 순수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집 뒤 뜰에 있는 라임 오렌지 나무를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대화를 하는 것도 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해서 보인 행동이었다.
제제의 인생은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사랑해주었던 뽀르뚜가로 인해 완전히 변한다. 미운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었고, 처음 받은 사랑은 감격스러워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작품은 이제 48세의 어른이 된 제제가 죽은 뽀르뚜가를 그리움에 회상하며 말을 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눈물 없이 읽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인생이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흘러가는 물건 같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다.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타성적이다. 트랙 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대학생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고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3개월 정도 되는 시험 준비 기간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고 혼자 공부를 했다. 공부를 시작 했을때 공기는 따뜻했고 창 밖의 나뭇잎은 초록색이었다. 두어달이 지나자 차가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고, 갈색으로 마른 잎새들이 마음을 아주 울적하게 만들었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했었다. 이건 네 미래를 위한거야. 내 꿈을 위한 거야. 하지만 그런게 무슨 의미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살면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감사의 꽃다발을 받지도 않는다. 신이란 존재는 보이지 않고 누군가가 확실하게 증명해 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품은 갈망은 정당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청춘을 넘어선 사람으로, 안정된 사회적 지위와 아내와 그리고 두 아이까지 있는 증권 중개인이다. 내 나이에 화가를 지망했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그가 화가를 지망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솔직해지고 싶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나는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대화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런 가능성은 만에 하나입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무 결실도 없이 결국 단념해야 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래도 나는 그리지 않을 수 없소” 그는 되풀이했다.
“그럼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삼류 화가로 그친다면, 그래도 모든 걸 버린 만큼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바보로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뻔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바보라면 뭐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애 쓸 것 아니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의 구절이다.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의 삶을 모태로 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중년의 나이에 안정된 증권거래소 중계인의 자리를 버리고, 아내와 자식들도 같이 내버려두고 가난한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아내는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나서 다른 나라로 떠난 걸로 생각하고는 한 젊은이(작품의 화자)를 보내 남편을 찾게 한다.
화자는 사회적 상식을 논거로 삼아 스트릭랜드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그는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림이 주는 미(美)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건 예쁜 여자에게 빠진 것처럼 확고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혹은 스트릭랜드가 말한대로 물에 빠져 살기 위해 허우적대는 사람과도 같았다. 안 그러면 죽기 때문에(그림을 안 그리면 너무 괴로우니) 노력하는 것이다.
아무튼 가을 바람이 차가웠던 외로운 날 나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 이념, 혹은 늘 절실한 감정이 쏠리는 방향은 정해졌기 때문에 그걸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밥 먹는 것을 아무리 미루어도 결국에는 먹을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그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아파트 옥상에서 초등학생이 떨어뜨린 벽돌에 맞아 고양이 집을 만들던 여성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캣맘 사건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초등생은 재미 삼아 벽돌을 던졌고 우연히 아래 있던 한 사람은 그걸 맞고 죽었다. 아이 장난 때문에 막을 내린 55년의 일생은 어떤 결론을 전하는 걸까? 그녀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 노력했고 또한 좋은 딸이 되기 위해서,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도 적당한 고민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3차원 세계의 어느 한 점에 우연히 당도했고 그 지점 바로 위에는 질량과 속도를 띠고 낙하하는 물체가 있었다.
우연은 아무 필연성이나 도덕 관념 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이나 주변인은 그 의미를 물을 수 밖에 없다. 밀란 쿤데라는 우연과 타성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인간의 일생을 탐구하려 했다. 그가 먼저 화두로 던진 것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다.
영원한 재귀, 이 신화는 그것의 부정적 이면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다. 영원히 사라져 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삶이 아무리 잔인했든, 아름답거나 찬란했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잔인함, 아름다움, 찬란함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조금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작품에서는 가벼움을 한 번으로 사라질 삶으로 보고, 무거움을 영원히 반복될 삶(니체의 영원회귀가 구현되는)으로 보고 있다. 한 번으로 사라질 삶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띤다. 캣맘 사건같은 치가 떨리는 우연으로 소중한 인생이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변할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그걸 대변할 사건들도 차례로 펼쳐진다. 그냥 보면 가십으로 지나칠 사랑 이야기를 존재에 대한 의미로 풀어낸 작가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토마스란 남자와 테레사라는 여자가 보여주는 사랑은 절대적 필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걸어가다 위에서 날아오는 벽돌에 맞는 것 같은 우연일 수도 있다. 작품의 묘미는 그걸 곰곰이 생각해 보는 데 있다.
나이가 있지만 매력적인 의사인 토마스가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된 테레사를 만나기까지는 6번의 우연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작은 도시에서 뇌병 케이스 환자가 생긴 것, 두 번째는 그 도시로 파견 나갈 외과 과장이 좌골 신경통에 걸려서 토마스가 대신 나가야 했다는 사실. 세 번째 우연은 토마스가 묶을 가능성이 있던 5개의 호텔 중 테레사가 일하는 레스토랑이 있던 호텔이 선택되었다는 것, 네 번째는 토마스가 프라하로 돌아갈 기차를 타기 전에 조금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 다섯 번째는 그 시간이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는 시간이었다는 것. 마지막 여섯번째 우연은 테레사가 토마스의 식탁 시중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우연의 집합은 토마스와 테레사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 여섯 개 우연 중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두 남녀가 부부가 될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연에 의해 형성된 운명에 꼭 계속 따라야 하는 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먼저 이 질문이 나오게 만든 부부의 사정을 살펴보자.
1968년 소비에트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국의 군대는 체코 프라하를 침공한다. ‘인간 얼굴을 한 공산주의’ 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던 두브체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체코의 전국은 아주 쉽게 점령되고 두브체크가 추진하던 개혁 조치는 모두 무효화 된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대중의 생각을 하나의 모범 틀에 맞추려는 공산주의의 꼴통 정책을 시작한다. 많은 지식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저항으로 대규모 해외 이주의 물결이 생겼다. 토마스도 스위스 취리히의 병원에서 좋은 자리를 제안 받고 테레사와 함께 국외로 망명한다.
하지만 테레사는 낯선 국가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국외로 나와서도 에로틱한 우정(erotic friendship) 습관에 따라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남편 토마스에게도 지친다. 어느날 테레사는 작별의 편지를 남겨둔 채 국경을 넘어 체코로 돌아가 버린다. 당시 체코는 소비에트 군에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테레사가 입국했다는 사실은 북한 국경을 넘어 들어간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는 뜻이다.
혼자 취리히에 남은 토마스는 심각한 고민을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여섯 번의 우연한 사건의 결과인 테레사와의 결혼 관계를 이 기회에 끝낼 것인가? 이 경우엔 공산주의의 박해도 없는 취리히 병원에서 명망있는 의사로 에로틱 프렌드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 아니면 존재의 무거움에 가치를 두고 떠나간 아내를 쫓아 돌아갈 수 없는 국경을 도로 넘어갈 것인가?
이 선택의 고난을 작가는 세련된 음악 테마로 표현했다. 쿤데라의 아버지는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 였고 쿤데라 자신도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던 것 같다. 소재가 된 베토벤의 악장의 모티브는 독일어로 ‘Es muss sein’,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래는 토마스가 자기를 아끼는 취리히 병원의 원장과 독대하는 장면이다.
원장은 실로 당황했다.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암시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곡 마지막 악장은 다음의 두 모티브에 따라 작곡되었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렇게 해야 하나? 그렇게 할 수밖에! 그렇게 할 수밖에!
이 말의 의미를 아주 명확히 하기 위해 베토벤은 이 마지막 악장의 제목을 <힘겹게 내린 결심> 이라 붙였다. 베토벤에 대한 이러한 암시로 토마스는 근본에 있어서 이미 테레사에게 되돌아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베토벤의 4중주와 소나타를 담은 전축판 구입을 관철시켰던 것은 테레사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암시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병원장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조용히 베토벤의 멜로디에 맞추어 말했다. ‘그렇게 해야 하나?’ 토마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그렇게 할 수밖에요’
파르메니데스와는 다르게 베토벤에게는 무거움이 명백히 어떤 긍정적인 것이었다. <힘겹게 내린 결심>은 운명의 소리(그렇게 할 수밖에!)와 연관되어 있다.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 만이 가치가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의심해본다. 정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하고.
물리시간에 학생은 어느 누구나 실험을 통해 어떤 학문적 가설이 맞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평생을 살 뿐이다. 그에게는 가정의 정당함을 실험을 통해 증명할 가능성이 없다. 그 때문에 자기 감정을 따랐던 것이 옳았는가 아니면 잘못 되었는가를 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의지와 운명에 가치를 두고 테레사를 되찾으러 국경을 넘기로 했다. 영원회귀 사상은 운명애(運命愛; Amor Fati)로 인해 시작되는데, 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면서도 니체의 말을 믿어본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사랑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아름답게 몰락하게 된다.
내가 좋아했던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책의 서평에는 “비정한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모두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간다” 라고 적혀있었다. 맞다. 현대 사회는 비정하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이익이 없어지면 뭐든 폐기 처분되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
기계가 망가지면 버리고, 친구의 의미 도 필요 없어지면 버려진다. 인간 관계가 다 이렇게 되면 대화도 허무해진다. 도움되는 상대에게는 아첨(남자)이나 애교(여자)가 사용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상대에게는 뒷담화가 사용된다.
<그리스인 조르바> 책에 소개된 우정의 아름다움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인공과 조르바가 보여준 관계(작가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난 요르고스 조르바스와의 우정이 모델이었음)는 원시적이면서 순수했고, 그리움이 넘쳤다. 소설의 도입부는 주인공이 외국으로 떠난 한 친구를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를 대신할 다른 친구 – 조르바 – 를 만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
내 시선은 큰 배의 검은 뱃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선체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비도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진창 위로 내리는 빗줄기가 내다보였다.
나는 검은 배와 그림자와 비와 형상을 갖춘 내 슬픔의 실체를 보았다. 생각났다. 비와 우울증이, 습기 가득한 대기 위에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화했다. ……작년이던가? 전생이던가? 어제 일이던가? 바로 이 항구로 내려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은? 나는 그날 아침의 빗줄기와 한기, 그리고 새벽의 미명을 떠올렸다. 그때 역시 내 마음은 무거웠다.
감상에 빠져있던 주인공은 배 위에서 불쑥 자기에게 말을 거는 조르바라는 남자를 만난다. 두 남자는 같이 그리스 크레타 섬에 가서 갈탄 광산 채굴 사업을 벌이지만 돈은 하나도 벌지 못하고 망한다. 그 후로 둘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는데 서로를 잊지 못하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 주인공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된 조르바를 추억하는 연대기를 쓴다. 그리고 원고를 탈고하던 날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아래는 그 내용인데 죽기 직전까지 자유분방했던 조르바의 성격이 잘 드러나있다.
저는 이 마을 교장으로 이곳 동광 주인인 알렉시스 조르바가 지난 일요일 오후 6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고자 이 글월을 올립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리 좀 오시오. 내겐 그리스에 친구가 하나 있소. 내가 죽거든 편지를 좀 써주시어,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그 사람을 생각했더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 그 사람의 건투를 빌고 이제 좀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잠깐만 더 들어요.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 성사를 하려거든 빨리 꺼지는 건 물론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려 주고 꺼지라고 해요. 내 평생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
이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부인인 류바, 저,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이)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웃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미망인 류바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어 자기 대신 경의를 표해달라고 했습니다. 미망인 말씀에 따르면 고인은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자기의 사후에는 산투리를 선생님께 드리어 정표를 삼겠다는 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망인께서는 선생님께 이 마을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시면 손님으로 그날 밤을 쉬시고 아침에 떠나실 때는 산투리를 가지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조르바는 자신의 자유와 성스러움(역설적인 성스러움)의 상징이자, 스무 살때 집을 나오면서부터 평생을 애지중지했던 악기 ‘산투리’ 를 친구에게 정표로 남겼다. 죽으면서도 친구를 생각하는 조르바의 마음이 느껴져서 읽을 때마다 눈물 나는 결말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