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세 XV – 기억
할머니가 험한 서울 거리에서 3일을 노숙하고도 별 일 없었다는 건 다행이었다. 이제 혼자 두면 어느 도시까지 가버릴지 모르는 할머니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정인의 외삼촌, 즉 외할머니의 아들이 당시에 한라산 기슭 마을에 살았는데 그쪽으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정인은 할머니가 제주도로 떠나는 걸 배웅도 못했다. 학교가야 했기 때문에.
그 후 몇 년간 정인은 할머니를 잊고 살았다. 할머니가 하던 일은 어머니가 이어서 했고 생활의 변화는 미미했다. 정인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을 맞았을 때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하기로 했다. 정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제주도 출신이었고 양가 친척들이 제주도에 많이 살았다.
정인의 일행이 외삼촌 댁에 도착하니 외삼촌 내외가 나와 반겼다. 그리곤 산보를 나간 외할머니를 모시고 오겠다며 곧 밖으로 나갔다. 시골 마을은 안전해서 할머니를 밖으로 산책 보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외할머니는 외삼촌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3년 만에 만난 손자와 사위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사랑방에서 정인과 동생과 아버지는 외숙모가 차려준 차와 과자 쟁반을 가운데 두고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장모님 잘 있었수까?” 할머니는 간단하게, “잘 있었저.” 라고 대답했다.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손자인 정인과 동생을 보며 말했다. “너그 두 아는 형제 다냐?” 정인은 이때 할머니가 자신의 기억 을 완전히 잊었음을 알았다.
외할머니의 삶 십 수년의 기간 동안 정인은 그녀의 희로애락의 가운데 있었다. 남편은 돈 벌러 외국에 가서 죽은 지 살았는지도 몰랐고 딸은 사나워져 있었다. 하지만 강보 속의 손자 아기는 귀여웠다. 아기는 유치원생이 되고, 말 안 듣는 국민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지나 얼굴에 여드름과 수염이 난 무뚝뚝한 중학생이 되었다. 할머니는 매일 얘에게 어떤 맛있는 걸 먹일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앞에 앉아 있는 아이가 누군지 잊어버렸다.
이 사건으로부터 2년 후, 정인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이번에는 정인 혼자 제주도로 가서 친척들 집을 돌아다녔다. 외할머니는 저번의 고즈넉한 시골집이 아닌, 제주시의 작은 연립주택으로 옮겨져 외숙모의 돌봄 아래 있었다. 2년 전의 할머니는 사람을 못 알아보긴 했지만 혼자 걸어 다니고 밥을 차려먹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것도 못 했다.
모사세 XIV – 할머니
고등학생 정인은 제주도 시골 길을 달리는 승용차 안에 있다. 어버지는 운전을 했고 동생도 뒷자리에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안개가 서린 한라산이 보였다. 흐린 푸른빛의 산은 혼자서 지평선을 다 채운 것처럼 커 보였다. 차는 포장이 안 되어 있는 시골 흙 길로 들어섰고, 마을 어귀 표지석이 있는 곳을 지나쳤다. 그 때 정인은 바위 위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외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지나가는 차나 사람을 투명한 듯 바라보며 한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몇 년 만에 스치며 본 것이지만 정인의 마음 속엔 어두운 예감이 솟아올랐다. 왠지 껍질은 같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할머니 같았다.
외할머니는 정인이 아기에서 중학생이 될 동안 쭉 서울에 살았다. 할머니가 이상해진 건 정인이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먼 동네로 이사를 가면서부터였다. 동네도 낯선데다 아파트에 처음 살게 되어 적응을 못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자꾸 돌보던 아기 이야기를 했다. 이사오기 전 단독 주택 1층에는 정인의 가족이, 2층엔 친가 사촌 형 부부와 두 살 아기가 살았었다. 할머니는 아기를 때때로 봐주었다. 이제 집도 멀리 떨어져 다시 볼 일 없을 아기(할머니는 정인의 외할머니이고, 아기는 정인의 친가 쪽이었으니)가 유령처럼 때때로 나타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가족들이 “이제 그런 아기 없어요” 라고 말하면, “아녀, 고 쪼그만 아기 하나 이서” 라고 대답했다.
다른 증상도 생겼다. 하루는 아침에 집을 나가더니 종일 밖을 돌아다니다 저녁에 돌아왔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물으면,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희죽 웃었다. 정인은 방과 후에 헤매고 다니는 할머니를 찾으러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여행 반경은 날이 갈수록 넓어졌다. 밤새도록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다음 날 온 가족이 차를 타고 먼 동네와 노숙인 강제 수용 센터 같은 곳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나흘이 지나 성남의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는 떠날 때 입었던 옷 그대로 검은 비닐봉지 하나만 손에 들고 파출소에 앉아있었다. 봉지 안에는 생수병과 건어포 남은 것이 있었다. 며칠 동안 어디서 잤는지, 어떻게 한강다리를 건너고 서울도 벗어나 성남까지 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배고프거나 지친 기색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멍한 표정은 먼 과거만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아기부터 찾았다.
생각 버리기 연습 – 시간은 빨리 흐르고 사랑은 사라진다
어린 시절엔 매일마다 어떤 대상을 두근거리며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일들이 계속 벌어졌고 감각 자체가 예민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쓸데없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보니 사랑을 느끼는 예민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이가 덕선이를 버스에서 보호해주는 장면을 보니, 중학교나 고등학생 시절 한 여자애를 사랑했던 감각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가 상기되었다. 기쁨으로 몸이 떠다니는 것 같은 그런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순수한 사랑을 찾는 일은 연애 전문 친구보다는 스님의 조언을 듣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자는 욕망을 가르치고, 후자는 지속되는 사랑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토종 승려인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이 쓴 생각 버리기 연습 책은 마음을 예민하게 분석해서 어릴 적 순수했던 감각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오로지 ‘보다 강한 자극을 위해 내달리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기 어려운 이유도 담담하고 은은한 행복감보다 부정적인 사고가 더 강한 전기 자극을 뇌에 주기 때문이다.
마음은 강한 자극을 좋아한다. 그게 설령 화가 치미는 불쾌한 기억이라 할지라도 강한 자극은 자석처럼 머리에 달라붙는다. 어린 시절 머리에는 이런 강한 자극이 적었지만 크면서 기억의 찌꺼기라고 할 수 있는 덩어리들이 쌓여간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어도 집중이 흐트러지고 생각이 딴 데 가있는 느낌을 받는다.
1초 동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0.1초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 0.9초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나 과거의 잡음이 남긴 메아리에 휘둘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오감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둔해지고, 멍청한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10초 중 9초는 현실감이 사라지고, 한 시간에 54분은 멍청히 있게 된다. 결국 나이를 먹어 과거를 돌아보면, ‘몇 년이 한 순간에 지난 것 같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현실 그 자체에 직결되지 않는 망상에 탐닉한 결과, 현실감이 사라지고 행복감도 사라진다.
행복은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데서 온다(seize the day). 오감을 다해 대상에 집중할 수 없으면 행복도 같이 사라진다. 만약 어떤 남자가 자기 여자친구 A를 꼭 안아주는데 실은 다른 여자 B를 그리는 잡념을 가진다면 포옹의 기쁨이 그만큼 사라진다. 여자 A도 나무나 돌이 아닌 이상 남자친구가 이상한 것을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을 하거나 책을 읽는 데도 자신의 유일한 시공(時空)으로서의 대상에 집중하지 않으면 즐거움이 탈색된다. 스님이 다시 요약해서 말해주는 부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원인은,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현실의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생각의 잡음이 현실감각에 완전히 승리할 때, 사람들은 둔해진다.
따라서 어릴 적 사랑을 되돌리는 방법은 먼저 몰두할 수 있는 일과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 자신의 오감을 놓고 다른 강하고 필요 없는 자극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이건 아령을 가지고 근육 운동을 하듯이 생각을 가지고 하는 수련이 필요한 부분이다. 불교의 참선이나 요가처럼, 또는 기독교의 기도처럼 마음에 티끌을 없애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존재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못 생김
인터넷 뉴스를 보면 연예인 사진 수 만 개를 볼 수 있다. 기사 제목은 항상 자극적이다. “XX의 굴욕 없는 뒤태”, “초미니를 입고 계단 오르는 OOO”. 엘리트 지식인인 신문 기자들이 왜 매일 이런 제목을 만드는지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 광고 수익은 기사의 클릭 횟수에 비례해서 지불된다. 사이트 방문 횟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본능과 연결되는 기사를 만들어야 한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주목할만한 실험을 했다. 개한테 음식을 주면서 매번 종소리를 딸랑 냈더니 나중에는 음식을 안 주고 딸랑 소리만 내도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파블로프는 이 실험의 성과로 19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어렵지 않고 별로 비용도 안 들 것 같은 이 실험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유는 그 광범위한 적용 가능성 때문이다. 인간의 고차원적 행동이라는 것도 자극과 반응, 거기에 끼어든 조건 형성, 조건 반사가 복잡하게 쌓이고 쌓여서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프의 이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한 자극(예프고 야한 사진)과 동반된 조건 반사(네티즌의 클릭)를 통해 광고사는 수익을 창출한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 보면 연예인 사진이나 성형외과 광고가 없는 곳은 경복궁 같은 유적지 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온 도시를 광고판으로 만들었고 그중 미모는 가장 강한 마력을 지녔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아무 마력이 없는 예쁘지 않은 존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는 질문에 대한 괜찮은 해답을 준다.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사람들의 주목을 쉽게 끌 만큼 못 생긴 여자이다. 그녀는 추녀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치욕과 멸시를 당해왔다. 남자 작가의 글이지만 여자의 아픔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아마도 작가 역시 사회적인 스펙 싸움에서 져서 굴욕을 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동감을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래는 여주인공의 회고이다.
세상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단다, 라고 말하며 사람들은 저의 어둠을 장애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저를 장애인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분명 세상이 만들어낸 장애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했고, 남들과 비슷한 옷을 입어야 했고… 그리고 언제나 남들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역시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라는 여자의 운명입니다.
어린 시절은… 그랬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제게… 적어도 제게는 언제나 짐승과 같았습니다. 사람을 습격하는 짐승… 배가 고프지 않아도 무언가를 물어뜯는 짐승… 순수한 장난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이들이 두렵습니다. 순수한 만큼, 어떤 죄책감이나 거리낌도 없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이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아이들과 같은 정신연령을 지닌 어른들도 많습니다. 어떤 성자가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해도, 제 삶은 결국 이들과 함께.. 이들에 속해 있어야 했습니다.
작가는 또한 미모 지상주의의 성질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한다. 그것은 본능과 생리 반응에 수반된 결과만이 아니었다. 미모 숭배는 배금주의나 학벌지상주의와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기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경쟁시키는 사회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다(에리히 프롬의 책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움). 소설의 히로인과 히어로는 그런 이념과 싸우며 자신들만의 사랑을 만들어 간다. 아래는 그들이 부서지고 나서 깨달은 생각을 말해주는 남자 주인공의 말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 미운 오리 새끼와 백조
바쁘기만 한 학교와 직장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모두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간다. 분명 친한 것처럼 느껴지는 동료가 있지만, 그건 같이 일할 동안만 느끼는 착각일 때가 많다. 직장을 옮기고 공유할 게 없어지면 인간관계는 기능을 다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람 얼굴이 꺼지듯 나는 그 사람이 필요한 존재에서 지워져 버린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냉소에 빠질 필요는 없다. 진심 어린 작가가 쓴 진심 어린 글을 읽으면 세상에는 잇속을 초월한 괜찮은 인간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를 읽으며 영화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 생각났다. 두 작품 모두에서 어린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명은 소년이고 다른 한 명은 소녀였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이샤의 추억의 주인공 치요(오고 스즈카 분)는 딸을 다 키우면 굶어 죽을 형편이던 집안에서 났다. 치요의 부모는 하는 수 없이 치요는 게이샤 집에 하인으로, 치요의 언니는 홍등가에 돈을 받고 판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버림받은 치요의 마음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게이샤 집에서도 학대 받으며 하녀 일을 하던 중 이와무라 회장(와타나베 켄 분)을 만난다.
그는 길거리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던 소녀 치요를 발견하고는 빙수를 사주며 위로의 말을 해준다. 지금은 울고 있지만 커서는 훌륭한 게이샤가 될 것이라고(게이샤는 일본에서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미모와 교양을 갖춘 예능인의 위치에 있었다). 그 순간 희망 없이 살아가던 소녀는 하나의 꿈을 품는다. 치요는 회장에게서 받은 돈을 손에 쥐고 천 개의 주(朱)색 기둥이 늘어선 길을 달려 신사로 간다. 한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동전을 전부 신전에 바치고는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꼭 게이샤로 성공해서 회장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주인공 제제는 뽀르뚜가(마누엘 발라다리스)를 만나면서 비슷한 감격에 젖는다. 빈민가 소년인 제제는 싸움만 일삼아 가족들로부터 검은 양 취급을 받았다. 제제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사소한 잘못에도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뽀르뚜가는 그의 거친 행동 이면에 애정을 갈구하는 순수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집 뒤 뜰에 있는 라임 오렌지 나무를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대화를 하는 것도 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해서 보인 행동이었다.
제제의 인생은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사랑해주었던 뽀르뚜가로 인해 완전히 변한다. 미운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었고, 처음 받은 사랑은 감격스러워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작품은 이제 48세의 어른이 된 제제가 죽은 뽀르뚜가를 그리움에 회상하며 말을 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눈물 없이 읽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모사세 XIII – 노니는 바다
바다는 파랑도에서 해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녀가 엄마 없이 살아갈 아기를 얼마나 걱정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물은 파도치며 거품을 만들고 짠 내음을 흩뿌린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슬픔과는 관계가 없다. 여인이 죽은 다음날 파도는 전일과 다름없이 오고 갔으며 여인을 나른하게 했던 햇빛도 똑같이 내리쬐었다. 죽은 몸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만 다른 점이었다. 인간이 사고하는 것과 자연이 노니는 모습의 차이이다.
어른이 된 정인은 외할머니의 집 안에서 역할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건 마치 가구와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꼭 필요한 기능을 해주고 있지만 아무도 그녀의 기분을 걱정하지 않았다. 어린 손자 손녀들은 어린이 특유의 무신경함과 잔인함으로 할머니를 대했다. 항상 일에 바쁜 사위와 안팎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딸은 마음에 위로가 안 되었다. 하지만 수 십 년에 걸친 가사와 육아를 외할머니는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불평의 말을 한 적도 없다. 이렇게 의무에 충실했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욕망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어린 정인은 욕망에 민감한 개체였다. 엄마 눈길을 피해 노는 데 특히 그랬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탐심(貪心)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게 아니란 걸 정인은 느낀 적이 있다.
그때 정인은 외할머니와 둘이서 마루에 앉아 옛날 사진 앨범을 펼쳐 보고 있었다. 거기엔 주로 정인의 아기 사진들이 있었지만 간혹 어머니의 처녀 때 모습이라든지, 할머니의 아줌마 시절 사진도 있었다. 역시나 외할아버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40대 시절 독사진을 무언가 애틋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면서 “이땬 나가 아적 갼찮았는디…” 라고 했다.
정인은 서울 말씨를 쓰지만 제주도 사투리는 다 알아들었다. 할머니는 “이때는 내가 아직 괜찮았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손자가 보기에 40대 할머니는 할머니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아줌마 같았고 여자로서 매력이 풍기지는 않았다. 일년 365일 입고 다니던 몸뻬 바지와 꽃무늬 블라우스를 착용하지 않고 시골풍 정장을 입은 게 큰 차이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분명 예뻐 보이고 싶고 치장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지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마음에 손자 정인을 포함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슬픈 사실이었다. 이렇게 욕망과는 상관없이 집안의 식모처럼 살았던 가여운 외할머니는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녀를 그렇게 바꾸어 놓은 건 이번에도 자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