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I – 아기와 엄마를 피했던 악

2000년 3월 11일 운동을 마치고 부산 서구 서대신동의 고급 주택가 집으로 돌아온 김인숙(가명,39세)씨는 안방에서 무언가가 탕탕하고 부딪히고 있는 소리를 듣는다. 이상한 마음에 같이 사는 언니와 가정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탕탕 소리는 곧 멈추었다. 이윽고 안방에서 칼을 든 낯선 남자가 걸어 나오는 걸 본다.

세 번째 범행에서 자기보다 덩치가 큰 남자에게 제압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정두영은 5개월 동안 범행을 저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10억이라는 목표를 위해 다시 범행을 결심한다. 넘기 쉬워 보이는 집의 담장을 넘은 후 열려 있는 현관문을 열고 조용히 침입했다. 거실에는 두 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가 두영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서 혼자 놀고 있었다. 정두영은 현관 옆방에서 물건을 훔치고 나오는 중 50대 가정부와 마주친다. 그는 얼른 부엌으로 뛰어가서 칼부터 챙겨 들었다. 정두영은 가정부를 위협해 안방으로 끌고 간 다음 두 손을 묶고 방바닥에 엎드리게 한 후 그 위에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사이 거실에서 혼자 있던 아기가 울자 안아다가 작은방에 놓고 문을 닫았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2층에 있던 김인숙씨의 언니가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칼을 든 정두영과 마주친다. 그는 이 40대 여인 역시 칼로 위협해 안방으로 데려와서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엎드려 있던 이불 안으로 같이 밀어 넣었다.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죽여버린다는 위협과 함께.

그는 묵직한 아령을 들고서 집에 있는 금고를 부수기 시작했다. 한참 금고를 부수는데 이불 속에 엎드려 있던 40대 여성이 몰래 침대 머리맡에 있던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고 정두영을 뒤에서 내리쳤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방망이는 강도의 등을 스쳤을 뿐이었다. 정두영은 곧 방망이를 뺏어 들고 아주머니들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곧 목숨을 잃었고, 핏자국이 사방으로 튀어있는 방에서 그는 아령으로 금고 부수기를 계속했다. 2시간 동안이나 아령을 사용했는데 그때 집주인인 김인숙씨가 들어왔다.

정두영은 그녀를 칼로 위협해서 안방으로 들어가게 한 후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려 죽이려 했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채 맞으며 비명을 지르던 여인은 자신의 아기를 생각하고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녀는 “살려주세요. 아기가 있어요.” 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야구방망이는 멈췄다. 짧은 침묵 끝에 정두영은 “아기 잘 키워. 신고하면 죽인다” 라는 말을 뱉더니 그녀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두영이 두 살 아기 일 때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두 번이나 그를 고아원에 버렸었다. 훗날 체포된 후 밝힌 바에 따르면 여인을 죽이면 아기가 자기처럼 불행한 고아가 될 거라는 생각에 살려두었다고 한다.

여인은 언니와 가정부의 피투성이 시체 옆에서 이불에 덮힌채 통증을 참으며 있었다. 정두영은 그 후로도 한참을 아령을 휘둘러서 결국 금고를 부수고는 안에 있던 금품을 챙겨 들고 사라졌다. 김인숙씨는 간신히 기어 나와 아기가 무사하다는 것부터 확인했다. 그리고는 112에 신고전화를 걸었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 – 살인자가 되다

정두영은 방범대원을 칼로 살해한 죄로 12년간 복역한다. 1999년 교도소를 출소했을때 나이는 32세였다. 찾아 갈 곳도 없고 고용해줄 일자리는 더더욱 없었으므로 예전 절도 활동의 근거지였던 대전 충남 지역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그를 부산에 있던 친형이 부른다. 두영의 형은 고물상 간판을 걸고 가게를 하고 있었지만 실은 장물아비였다. 두영은 훔치고 형은 물건을 파는 동업 계약을 하고 수익은 7대 3 으로 나누기로 했다. 형은 서른 한 살이던 두영에게 스무 살 밖에 안된 여성 한 명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곧 동거 관계로 발전한다. 동거녀와의 사랑을 계기로 범죄 생활을 접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하지만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두영이 범죄자 사회에서 주워 듣기로는 ‘성인 오락실’ 이나 ‘실내 야구장’ 같은 가게를 마련하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창업 비용 10억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행각에 뛰어든다. 그는 경험상 빈집털이를 해봐야 얼마 돈을 못 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중품 보관 금고가 있을 법한 부자집에 일부러 사람이 있는 시간대에 침입하기로 했다. 흉기로 협박해서 금고 위치를 알아내 강탈하고 사람은 죽이는 방식이었다.

정두영의 연쇄 살인 중 첫 번째는 1999년 부산 서구 부민동의 고급 주택가에서 일어났다. 그는 청소년 시절 흉기를 가지고 다니다 불심검문에 걸려서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로는 절대 칼을 지참하지 않았다. 대신 범행 현장에 가서 식칼 같은 흉기를 먼저 챙겨 두곤 했다. 이 집에서도 먼저 부엌에서 칼을 챙겼고 안방과 거실을 뒤지던 중 50대 후반의 가정부와 마주친다. 그는 아주머니를 협박해서 화장실로 데려가 미리 준비한 끈으로 양 손을 뒤로 묶고, 머리를 바닥에 마구 내리 찧어 살해한다. 그리곤 현금 33만원을 털어서 달아난다. 경찰은 피해자의 머리와 얼굴 부위가 으스러질 정도로 가격당한 것을 발견하고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두영은 불안한 마음에 몸을 숨기고 언론 보도를 주시한다. 자신이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두 번째 범행을 시작했다. 동거녀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기 위해 10억을 모으는 게 목표인데 처음 강도 짓으로 33만원 밖에 못 벌었다. 자신과 연인의 행복을 타인의 죽음과 편리하게 가르는 이 무감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두 번째 범행은 첫 번째 살인 이후 세 달이 지난 9월 15일 오후, 부산 서대신동의 고급 빌라촌에서 일어났다. 옥상 지붕을 타고 꼭대기 층인 6층 베란다로 내려갔고 빈 집이었던 그곳에서 현금 수백만 원과 귀금속 등을 챙긴다. 한 탕 더 하기 위해 이웃집 베란다로 넘어 들어갔는데 애완견이 짖어대는 바람에 부엌에 있던 50대 가정부에게 들킨다. 정두영은 강아지를 발로 멀리 차버리고 아주머니를 마구 때려 살해한다. 이 집에서도 현금 수 백 만원과 귀금속을 챙기고 베란다로 나온 뒤 옥상으로 올라가 도주한다.

세 번째 범행에서 정두영은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주택에 침입해서 마주친 50대 아주머니를 때려 살해하던 중 2층에 있던 아들이 내려온 것이다. 건장한 체격의 피해자 아들은 왜소한 두영을 주먹으로 몇 대 쳐서 바닥에 뉘였다. 하지만 아들은 방심했고 그 사이 정두영은 집에 침입할 때 미리 봐두었던 현관 신발장 위의 망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두영은 망치를 들고 돌아와 남자의 얼굴을 내리쳤다. 겁에 질렸던 정두영은 쓰러진 남자에게 미친듯이 망치를 휘둘러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와 뇌수가 밖으로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글 –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I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 – 어머니에게 두 번 버림받음

정두영은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강도행각을 벌이면서 17명을 다치게 하고 그 중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 살인자이다. 체포 된 후 단순 강도 목적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피해자들을 잔혹하게 죽인 이유가 뭐냐는 경찰의 질문에 “제 안에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가 한 짓이에요” 라고 대답했다.

그의 강도 살인 행각을 전혀 모르고 있던 정두영의 동거녀의 부모는 “정씨는 술담배도 안하고 말 수가 적으며 점잖고 매너 있어 성실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고 진술했다. 정두영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어떤 악마적인 분노를 마음에 숨기고 있던 것 같다. 그 안의 악마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정두영은 1968년 부산시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하고 있었고, 두영이 2세가 되던 해 끝내 사망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생계가 곤란해진 정두영의 어머니는 아기에게 충분한 관심을 주거나 영양을 공급해주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이들을 삼촌 집에 맡기고 재혼한다. 그리고 정두영이 다섯 살 되던 해, 삼촌마저 요란스런 조카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버린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한 번은 어머니에게, 또 한 번은 삼촌에게 버림받은 정두영은 큰 정서적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려는 듯, 일곱 살 때 어머니가 고아원으로 찾아와 두영을 새아버지 집으로 데려간다. 그대로 양친과 성장했으면 좋았겠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경제적 부담과 부부간 갈등이 커져서 두영은 도로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계속 고아원에 두었더라면 상처를 덜 입었을 것이다.

두영은 어머니에게 두 번이나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운 가운데 공격적 행동을 일삼아서 문제아가 된다. 고아원 안 남자 아이들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 같아서, 세면 때리고 약하면 맞는 게 보통이었다. 선천적으로 작은 체구 때문에 놀림과 괴롭힘을 많이 당한 두영은 결국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폭력’ 뿐 이라는 것을 체득하고 만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두영은 고아원의 통제를 물리치고 거리로 나가 범죄를 생계수단으로 삼아 살기 시작했다. 직업을 얻을만한 기술도 없고, 자길 보살펴줄 사람도 없었으므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다 자란 정두영은 키가 168cm에 체중 54kg인 작은 체구였다. 그래서 보호 장비로 항상 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열 여덟 살이던 1986년 5월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 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마주친 교사를 흉기로 찌르고 달아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자기를 불심검문하는 방범대원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12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어지는 글 – 내 안에 악마가 있다 II

리플리 증후군과 살인자 철학자 – 루이 알튀세르

리플리 증후군(Ripley’s Syndrome)은 가상적인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맞추어 사는 인격 장애의 유형이다. 주로 자존심에 미달하는 학벌이나 경제∙사회적 위치에 대한 거짓말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을 인생 연기하듯 살게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 대표적 사례로 나온 적이 있는데 있는데 제목은 ‘신입생 엑스맨’ 이었다. 시작이 미스테리 영화처럼 섬뜩했다. 한 대학교 신입생 OT에서 왁자지껄 어울려 놀고 있는 남자 신입생이 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작년 다른 대학교 신입생 행사에도 참석해서 놀았었고, 사진에도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전년도 다른 학교에서도, 그 전전년도 어딘가에서도… 확인 결과 그는 6년 동안 48개의 다른 대학에 신입생으로 들어와 과 행사에 참석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며 살았던 걸로 드러났다.

취재진은 엑스맨을 찾아내 만났고 가짜 신입생 역할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듣는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존재 가치가 없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주입 받은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교수로 엘리트 의식이 강했고 누나 넷은 모두 일류대학에 진학해서 자랑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외동 아들인 자기만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진학하자 현실과 조합할 수 없었고 결국 진짜 자신이 아닌 가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특이 하지만 슬프기도 한 사연이었다. 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거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인격의 가면을 심리학적 용어로 ‘페르소나'(persona) 라고 한다. 페르소나는 본래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게 심리학적으로 보편적인 단어가 된 건 어느 사람이나 조금씩은 사회적인 필요로 가면을 쓰고 살고 있어서이다.

루이 알튀세르는 알제리 태생, 프랑스 국적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라는 자서전을 썼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학술 작업으로 이름을 떨친 것도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목 졸라 죽이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도 있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아내를 죽였다는 이유로 기소 면제 처분을 받았고 감옥 대신 정신 병원에 갇혀서 이 자서전을 집필하게 된다.

저자 루이 알튀세르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 없이 다른 사람으로 존재한다고 느꼈다. 그가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는지, 그런 운명을 강요한 가족의 영향과 성장 과정을 되돌아 보는 것이 책의 중심 내용이다. 신입생 엑스맨처럼 그도 진정한 자기로 살 수 없는 굴레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하는 존재이다. 만일 부모의 양육이 병적인 것이라면 아이는 그 운명은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다. 루이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어려서 한 남자와 약혼했는데 그는 1차 세계 대전에 징집되어 나가 전쟁터에 전사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향과 같던 옛 약혼자를 평생 잊지 못했다. 그래서 죽은 사람 약혼자의 대체물로 그의 형인 샤를르 알튀세르와 결혼 한다. 결혼 후 얻은 첫 아이에게는 옛 약혼자의 이름을 따서 ‘루이’ 라는 이름을 준다.

소년 루이 알튀세르는 어머니가 자기를 자신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공군 조종사로서 프랑스의 베르덩 하늘에서 죽었던 옛 약혼자의 그림자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아래는 이에 대한 알튀세르의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마가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일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삶은 “죽음의 영역 안이나 죽음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 곧 진정한 주체성 없이 이미 죽은 인물의 대체물로서 살아가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심리의 덫에 걸린 알튀세르는 아무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고 또 어떤 사람의 사랑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고, 남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면 결국 자신도 사랑받지 못한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면서도, 그와 반대되는 전능에 대한 열망도 키운다. 이는 우울증의 결과인데, 자기 혐오 콤플렉스는 더 파괴적인 에너지를 모아서 발산할 수 밖에 때문이다. 그 파괴의 결말은 자기 부정의 강박 때문에 온전히 사랑해주지 못했던 아내 엘렌느를 목 졸라 죽이는 걸로 나타나고 말았다.

모사세 X – 햇빛 아래서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정인의 국민학교 시절 기억은 환한 햇빛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방과 후 집으로 가는 길에는 콘크리트(아스팔트가 아닌)로 포장된 언덕 길이 있었다. 정인은 네모난 책 가방을 메고 고개 숙인 채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회색 시멘트 바닥에는 늘 작은 돌멩이들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 얼굴을 들면 하얀 햇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섬광은 언덕 위에 있는 집과 가게를 하얗게 지웠고, 이어서 그 너머 높이 있는 푸른 하늘과 구름을 보여주었다. 이 풍경은 정인에게 알 수 없는 애상을 준다. 아름다운 대상을 보면 이유 없이 슬퍼질 수 있다는 걸 꼬마는 배웠다. 그리고 어른이 된 정인은 같은 감정으로 아직도 망막에 남은 것 같은 당시의 하늘을 떠올리고 있다.

햇빛은 그가 뛰어 놀던 학교 운동장도 비추고 있다. 남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축구공을 차고 있었고, 여자 애들은 운동장 구석에서 고무줄 놀이를 했다. 정인은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걸 어색해 했기 때문에 벤치에 앉아서 구경을 하거나 학교 정원의 연못에 가서 헤엄치는 붕어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정인은 그 따뜻한 봄의 운동장에서 요한이라는 아이를 처음 보았다. 요한은 학교 국어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이 얘는 다른 평범한 남자 애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아마 그의 하얀 피부와 여리고 고운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아들이었고, 늘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요한은 이미 온 학교 아이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정인은 햇빛 아래서 걸어가는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치 운동장에 있는 다른 수백 명의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걸음걸이는 우아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모습이 끊겨 보였다. 첫 눈에 그에게 빠져버린 정인의 기억이 영화의 오픈 앵글 촬영처럼 움직임을 끊어지게 기록했던 것이다. 요한은 밝은 햇빛에도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맑은 눈 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건 관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같은 학년의 국민학생들 중에서 풍경을 관조할 수 있는 아이는 요한 밖에 없었다.

정인이 처음 요한을 바라보던 날의 기억은 어른이 된 정인의 마음에 아직도 특별하게 남아있다. 옛날의 향수가 밀려와 가벼운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든다. 아이답지 않은 요한의 모습을 어른 정인은 지금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보고 있다. 그때와 별로 변함없는 흠 없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을…

햇빛이 어두워진 저녁에도, 그 다음날에도 정인은 요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 삶의 기준이 정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한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고고하고 신비한 미(美)가 결정을 이룬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형질은 정인이 늘 그리워한 부성과 모성을 합쳐 놓은 모양이었다. 매일 늦게 집에 들어오고 와닿지 않는 훈계만 말하는 아버지, 매일 집에서 독수리처럼 아들의 공부를 감시하던 어머니. 이 두 명과 학교 선생님들이 설정해 놓은 세계에서는 어떤 꿈도 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한을 보면 어둡고 갇힌 세계를 뛰어넘어 밝은 섬광을 당당히 마주보는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때 정인은 물론 환상을, 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되지 않은 소년의 마음은 동성의 아이에게서 훗날 잊지 못할 연인을 떠올리는 것 같은 감정을 이끌어낸다. 정인은 때때로 요한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정인은 요한과 같이 먼 나라로 떠나고 있었다. 몰래 외항선에 숨어들기도 했고, 비행기 날개 위에 같이 매달려서 날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둘이 찾아간 나라에는 아무 사람도 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카밀레 꽃이 무수히 피어있었다.

어느 옛 여자 배우의 이야기 – 무경계, 켄 윌버

옛날 배우 문숙씨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1974년) 영화 ‘태양을 닮은 소녀’ 오디션을 보면서 당대 유명한 영화 감독이었던 이만희 씨와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이가 23살이 더 많고 이혼 경력도 있던 이 감독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훗날 이 감독과의 첫 만남을 “가슴이 두근두근 막 떨리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라고 회고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영화 감독이라는 직업은 지금처럼 휘황찬란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독은 하루 촬영이 끝나면 남자 배우와 스텝들과 모여앉아 막걸리 말술을 마셨다. 빈털터리였던 이만희 감독은 집도 없어, 서울 충무로의 삼류여관에서 문숙과 동거 생활을 했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이 사랑에 지장은 되지 않았는지, 교외의 백양나무 숲으로 가서 둘 만의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이만희 감독은 75년 봄 ‘삼포 가는 길’ 영화를 편집하던 중 병원으로 실려간다. 간경화 말기였다. 고통에 참을 수 없던 이 감독은 지인들에게 ‘피주사’ 라고 불리던 알부민 주사를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알부민 주사는 당시 미8군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주사 후 2시간 정도만 상태가 회복됐다. 주사가 반복될수록 효과는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그는 고통과 이어진 혼수 속에서 죽었다. 두 남녀가 처음 만난 지 1년 만이었다. 벅찬 사랑의 감정만 경험하고 연인을 보냈기에 그리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문숙씨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한 말이다.

당시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거는 사랑을 했다. 삶이 끝난 줄 알았다.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 삶의 흔적, 고통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문숙씨는 백상예술상(74년)과 대종상 신인상(75년)을 수상했고, 당시 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인 배우였다. 계속 우리나라에 남았더라면 지금은 존경받는 중견 배우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과 실연은 그 모든 것을 의미 없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으로 간 그녀는 이런저런 종교의 문을 두드려 보면서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다. 기독교 교회의 가르침도 들어보았고, 남방 불교의 위파사나 수행도 5년이나 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찾은 느낌은 얻지 못했다. 그녀는 “몸이 기도가 된다” 는 인도 요가를 접하고 처음 초월의 체험을 했다고 한다.

미국 산타페에서 요가 선생을 만났다. 그는 내 몸이 기도문이 된다. 내가 영적 에너지(Spiritual energy)에 대한 통로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걸 체험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나 다른 방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 방식이 나와 맞았다. … 힌두에는 여러 신이 있다. 요가의 신은 시바다. 시바는 버리는 신, 파괴의 신이다. 기독교의 회개, 불교의 참회처럼 요가는 철저하게 나를 버리는 과정이다. 육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나를 버리는 작업이다.

우리나라에서 요가는 주로 다이어트 수단으로 보급되어 있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요가의 기본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정신과 이어져 있는 몸을 움직임으로서 영적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런 요가 수행을 통해 머리에 끊임없이 맴도는 쓸모 없는 생각(거짓된 자아)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다 버리고 비워진 인간 정신에는 원래 있던 것만이 남는다. 이에 대한 설명이다.

몸을 움직이다 텐션이 오는 지점에서 멈추라. 그 자세에서 길게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는 걸 반복한다. 그럼 잠시 후에 텐션이 풀린다. 몸은 더 움직여진다. 그리고 그 다음 텐션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텐션, 수많은 에고를 만나고 열어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에는 수퍼에고를 만나게 된다. 슈퍼에고를 만나면 빅 마인드(Big mind)가 된다.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의식 확장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거기서 지혜도 나오고, 고요함도 나온다.

거대한 우주는 에너지 그 자체(Energy itself)이다. 인간이 생각을 다 버리면 그 우주와 만나게 된다. 그때는 인간 개체가 우주의 에너지와 하나가 된다. 그 에너지는 살아 있고, 의식이 있고, 지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자아가 온 우주와 한데 섞인 것과 같은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그로써 절대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던 슬픔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 켄 윌버는 자신의 저서 무경계 에서 이런 종류의 합일 정신을 잘 설명해놓았다. 그가 책에서 말한 구절이 문숙씨가 털어놓은 말과 너무나 흡사해서 놀랐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사라진 것 같은 합일 의식은 간절히 찾는 사람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란 뜻이다. 쉽게 생각해보면, 술만 많이 먹어도 자신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필름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켄 윌버가 말하는 건 하룻밤 있다 사라지는 해리가 아닌, 전 세계가 나 같고, 내가 전 세계 같이 느껴지는 합일 정신, 빅마인드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자기와 비자기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비롯한다. 일단 전반적인 경계선이 그어지고 나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대단히 복잡한 것 – 과학적, 신학적, 경제적 – 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단순하거나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답은 처음 그은 경계선에 달려 있다.

이 경계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흔히 변경될 수 있고 변경된다는 것이다. 경계선은 다시 그어질 수 있다. 어떤 점에선, 자신의 영혼soul의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고 결코 가능하다거나, 획득할 수 있다거나,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그 영역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경계선의 가장 혁명적인 제작 또는 변경은 지고의 정체성 체험에서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는 자기 정체성 경계가 전우주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경계선이 전부 없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와 동일시할 경우, 그곳에는 더 이상 어떠한 안도 밖도 없으며 따라서 경계선을 그을 곳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자아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다. 하지만 켄 윌버는 생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며, 실제로 ‘나’ 라는 존재의 경계는 원래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알쏭달쏭하지만 굉장한 통찰력을 담고 있고 있는 말이다.